이미지는 어떻게 실현되는가
기존의 이미지 시론에서 언급되었던 감각 이미지, 비유 이미지, 물질이미지, 기억 이미지, 그리고 최근 시의 일반적 특징인 서사 혹은 영상화된 이미지들이 한 편의 시에서 어떻게 실현되고 있는지를 기형도의 시「가는 비 온다」를 중심으로 살펴보자.
간판들이 조금씩 젖는다.
나는 어디론가 가기 위해 걷고 있는 것이 아니다
둥글고 넓은 가로수 잎들은 떨어지고
이런 동네에선 한 소년이 죽기도 한다.
저 식물들에게 내가 그러나 해줄 수 있는 일은 없다.
언젠가 이곳에 인질극이 있었다
범인은 「휴일」이라는 노래를 틀고 큰 소리로 따라 부르며
자신의 목을 긴 유리조각으로 그었다
지금은 한 여자가 그 집에 산다
그 여자는 대단히 고집 센 거위를 기른다
가는 비・・・・・는 사람들의 바지를 조금씩 적실 뿐이다
그렇다면 죽은 사람의 음성은 이제 누구의 것일까
이 상점은 어쩌다 간판을 바꾸었을까
도무지 쓸데없는 것에 관심이 많다고
우산을 쓴 친구들은 나에게 지적한다
이 거리 끝에는 커다란 전당포가 있다. 주인의 얼굴은
아무도 모른다, 사람들은 시간을 빌리러 뒤뚱뒤뚱 그곳에 간다
이를테면 빗방울과 장난을 치는 저 거위는
식탁에 오를 나날 따위엔 관심이 없다
나는 안다. 가는 비.... 는 사람을 선택하지 않으며
누구도 죽음에 쉽사리 자수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쩌랴. 하나뿐인 입들을 막아버리는
가는 비... 오는 날, 사람들은 모두 젖은 길을 걸어야 한다
- 기형도 가는 비온다 전문
인용 시는 가는 비가 내리는 동네를 걸으면서 눈에 띄는 대상(풍경)과 떠오르는 기억(상념)을 이미지화하고 있다. 먼저 감각 이미지를 보자. 제목 '가는비'를 비롯해 젖는다' '적시다' '빗방울' '젖은 길' 등의 시어에 의해 축축한 촉각 이미지가 두드러진다. 시각을 동반한 이 촉각 이미지는 7행 "범인은 「휴일」이라는 노래를 틀고 큰 소리로 따라 부르며”에서 청각 이미지로 전이되고, 8행 "자신의 목을 긴 유리조각으로 그었다"에서 또다른 촉각 이미지를 더함으로써 감각 이미지가 극대화된다. 가는 비'가 유발하는 촉각 이미지를 배경으로 삼으면서, 노래와 비명과 베임과 피가 뒤섞인 7 8 행의 인질극 부분을 삽입해 공감각적으로 혼융된 감각 이미지를 구현한다. 이와 같은 청각, 시각, 촉각에 의한 감각 이미지의 대조는 시에서 극적인 효과를 배가시킨다.
비유 이미지를 보자. '가는 비'는 상실이나 우울, 죽음의 은유로 읽히는데, 사회 · 시대의 부조리와 연동되어 있다. 오는 것도 아니고 오지 않는 것도 아닌 형태의 '가는' 비 자체가 대처하기 힘든 애매한 상황을 내포한다. 또한 적실 대상을 선택하지 않는다는 구절에 주목할 때 그 비는 피할 수 없는 시대적 조건임을 추론할 수 있다. 어쨌든 암울한 시대 상황을 비유하는 '가는 비' 속에 존재하는 거리의 모든 것들은 자본주의에 순응하거나 저항하는 자들을 은유한다. 이를테면 '간판' '상점' '전당포' 등이 자본을 대표하는 비유적 상관물이라면, '인질범 「휴일」이라는 노래' '그 여자' '거위' 등은 자본의 논리에 저항하는 비유적 상관물이다. "전당포에 시간을 빌리러 가는 사람들이나 "우산을 쓴" 친구들도 자본과 문명에 길들고 익숙해져 무감각해진 존재들이고, 비에 젖어 떨어지는 '잎과 비에 막힌 '입' 역시 죽어나가는 '한 소년'처럼 시대와 억압에 희생된 존재들이다.
그 반대편에 '고집 센 거위'와 깨진 '유리조각' (인질극을 벌이다 자살을 하는 '범인')이 자리한다. 자본과 시대에 희생된 존재들이면서 자본과 시대에 대한 내적 저항의 의미를 담고 있다. 특히 '유리조각'은 자본과 문명의 파괴된 파편이면서 자본과 문명에 저항하는 무기가 된다는 점에서 저항성이 크다. 빗방울을 가지고 장난치는 '저 거위'도, 인위적으로 비를
피하려 "우산을 쓴 친구들과 전당포에 시간을 빌리러 "뒤뚱뒤뚱 가는 사람들과 대비된다. 이렇게 대립적으로 구축된 비유적 상관물들 사이를 가는 비에 젖은 채 '나'는 걷고 있다. 사회의 부조리와 모순을 인식하고는 있으나 실천에서는 무기력한 시적화자의 일상을 다채로운 비유적 이미지로 구현한다.
인용 시에서 물질 이미지는 물의 상상력을 근간으로 한다. 물이 공기의 상상력과 결합한 '가는 비는 "사람을 선택하지 않은 채 젖고 적시면서 식물, 거리, 간판, 상점, 우산, 바지 등에 스며든다. 물의 침윤성이
물질적 상상력의 원동력이 되고 있다. 이러한 침윤성은 때로는 거위의 장난 때문에 경쾌한 물이 되기도 하지만, 젖고 적시며 죽은 사람의 음성에까지 스며들어 "누구도 죽음에 쉽사리 자수하지 않듯" 사람의 입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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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이 '인질극'은 1988년 교도소 이감중에 도망쳐 서울 남가좌동에서 여자를 인질로 삼아 인질극을 벌이다 자살했던 지강헌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자살 직전 Bee Gees의 <휴일>(Holiday)>이라는 노래를 틀어달라 한 뒤 따라 불렀으며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외쳤다.
막는 무거운 물이 된다. 물의 침윤성은 이렇게 차단하고 고립시키는 물의 단절성으로 변화한다. 이러한 물의 이미지에 또다른 역동성을 부여하는 것은 불과 흙의 물질성이다.
7. 8행의 인질극 묘사 부분에서 범인이 자신의 목을 그은 '유리조각은 모래나 석영에 불이 가해져 물처럼 액체화되었다가 다시 흙의 물성으로 고체화된 것이다. 그 '유리조각'으로 인해 내뿜어졌을 '피' 또한 물의 물질성이 불과 결합하여 분출하는 물성으로 변성된다. 이처럼 무거운 물이 흙과 결합하여 딱딱해질 때 자신을 스스로 해치는 유리(조각)가 되고, 그
(유리)조각 때문에 불의 상상력이 가미되어 피로 변용된다. 떨어지는 낙하성에서 내뿜는 분출성으로 스며드는 침윤성에서 차단하는 단절성으로 물의 이미지는 변성작용을 한 것이다. 상실이나 죽음의 물성을 지닌 이 음울한 물의 상상력은 다른 시들에 나타난 '안개'나 '진눈깨비' 등과 함께, 기형도 시인의 시적 지향성을 드러내는 개인 상징으로 작용한다.
기억 이미지의 관점에서 보자. '가는 비'는 '한 소년'의 죽음과, '인질극'과 '죽은 사람의 음성'을 환기시킴으로써 순수 기억으로서의 과거를 현재화하며 아우라를 발산한다. 이때 순수 기억을 불러내는 주의깊은 식별의 대상은 둥글고 넓은 가로수 잎'이다. 그 잎은 순수 기억을 선택하는 필터 역할을 한다. 즉, 비에 젖어 떨어지는 그 잎에 의해, "이런 동네에선 한 소년이 죽기도 한다"에서처럼 '한 소년'의 죽음이 과거/현재/미래 가능성으로 떠오르고, 이어서 과거의 인질극과 휴일」'이라는 노래가 소환되면서 현재화된다. 과거의 인질극과 연관되어 연쇄적으로 소환
되는 '그 집' '한 여자' '죽은 사람의 음성' '막혀버린 입' '젖은 길' 등은 모두 과거가 현재까지 지속하는 현재화된 과거다. 무엇보다 '그 집'에서 여전히 '고집 센 거위'를 기르며 사는 '한 여자'가 과거에 인질이었던 '그 여자라면, 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지는 지속성은 강화된다. '뒤뚱뒤뚱'이라는 의태어로 전당포 가는 사람들과 거위가 오버랩된다는 점, 과거의 인질범이 들으며 따라 불렀던 노래나 죽은 사람의 음성이 거위의 울음소리를 연상시킨다는 점에서 과거의 지속성은 더욱 강화된다.
또한 비에 젖어 떨어지는 '잎'과 비에 막혀버리는 '입'도 발음상의 유사성을 지닌 채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과거의) 휴일」이라는 노래를 따라 부르면서 세상을 향해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외쳤던 인질범의 입과, (현재의 '나'를 비롯해 동네 사람들이 말하지 못하는 입이, 거위의 입과 겹쳐지기 때문이다. 말하지 못하도록 '(가는 비가) 막아버리는 입들'을 보여주기 위해, 입이 튀어나온 그러나 꽥꽥거릴 뿐인 '거위'의 이미지가 동원되었을 것이다. 이들 모두가 현재와 과거와 미래를 영속시키는 순수 기억의 대상들이다. 이 '가는 비'에 의해 나/소년, 인질범/여자, 여자/거위, 우산 쓴 친구들/전당포 주인, 간판/우산이, 잎/입이, 산 사람들/죽은 사람 등의 경계가 침범되며 과거, 현재, 미래가
지속성을 획득한다. 기억 이미지들에 의해 가는 비에 젖는 서울 변두리' 이런 동네'의 풍경과 정서와 의미가 구축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감각. 비유 · 물질 · 기억 이미지 외에도 인용 시 전체를 관류하는 특징적인 이미지가 느껴지는데, 사건화된 이미지와 영상이미지가 바로 그것이다. 인용 시는 설명되지 않는 한 편의 짧은 소설 혹
은 단편영화를 보는 듯하다. 기형도의 시는 21세기 시 이미지의 특징인 서사 이미지, 영화 이미지, 정동 이미지 등을 앞서 보여주고 있다. 영화에서 숏들이 몽타주되어 신을 이루고, 신들이 모여 시퀀스를 이루듯, 시에서도 행동들이 결합해 장면을 이루고, 장면들이 결합해 상황을 이루면서 영상 이미지를 구현한다. 인용 시는 동사화된 행동 이미지를 중심으
로 열한 개의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①간판들이 조금씩 젖는다
② 나는 걷고 있다
③ 둥글고 넓은 가로수 잎들이 떨어지다
④ 범인이 「휴일」이라는 노래를 틀고 따라 부르며/자신의 목을 긴 유리조각으로 긋다
⑤ 한 여자가 그 집에 산다/고집 센 거위를 기른다
⑥ 가는 비가 사람들의 바지를 조금씩 적신다'
⑦ (쓸데없는 것에 관심이 많다고) 친구들이 나에게 지적하다
⑧ 사람들이 시간을 빌리러 뒤뚱뒤뚱 전당포에 가다'
⑨ 거위가 빗방울과 장난을 치다
⑩ 가는 비가 하나뿐인 입들을 막아버리다'
11. 사람들이 젖은 길을 걸어가다"
이처럼 행동화된 장면들 사이에 생략된 서술들은 지각이나 감정, 충동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행동 이미지의 내적동기나 의미를 보충하면서 중층적 서사를 구축한다. 이렇게 분절된 열한 개의 행동 혹은 장면들은 다시 ①~③까지 거리의 서정적 상황, ④~⑤까지 과거 인질극 상황, ⑥~⑨까지 거리의 일상적 상황 ⑩~⑩까지 거리의 시적 상황으로 구분된다. 영화 이미지는 이러한 행동/장면 이미지들의 연쇄가 어떻게 구축되느냐가 관건이다. 예컨대 ①~⑩에 걸쳐 몽타주된 행동/장면 이미지들은 현재-과거-미래는 물론 현실-상상-기억을 오가며, 비연대기적 혹
은 비유기적으로 구축된다. 특히 롱숏으로 잡은 영화의 한 장면처럼 ②의 (젖은 간판들이 있는 거리를 걷는 '나'의 장면에서 시작해서 ⑩의 (젖은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의 장면으로 끝이 나고 있다. ③의 '잎들이 떨어지다'와 ⑩의 '입들을 막아버리다'로 구성된 장면 이미지들은 실존적 조락의 의미는 물론 시대적 억압과 부조리의 의미를 구축한다. 또한 클
로즈업으로 구성된 ①의 간판들이 조금씩 '젖는다' ⑥의 사람들의 바지를 조금씩 '적신다'라는 장면 이미지들도, 사물 주어의 자동사와 사물 목적어의 타동사로 인해 자동과 타동의 의미를 제거하는 것은 물론 피동화된 음울한 시적 분위기를 형성한다.
인용 시의 이미지는 1980년대 후반의 시대적 정서와 연동되어 있다.
후기 자본주의의 징후 속에서 상실되어가는 이념적 비전을 이미지화하면서, 이러한 상실에 저항하지 못한 채 순응해가는 삶을 음울한 정동으로 형상화한다. 시에 인용된 인질극이 함의하는 사회사적 의미를 포함해, 자본에 잠식당한 삶에서 빚어지는 휴식과 안식에 대한 욕망을 읽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 정치성을 함의한다. 자본에 무기력한 일상과 비전
상실의 정치적 무의식을 이미지화하고 있다.
정끝별 <시론> p98-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