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용 <향수> 소감문 김선희
鄕愁
정지용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이 희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조름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립어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러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傳說바다에 춤수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의와
아무러치도 않고 여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안해가
따가운 해ㅅ살을 등에지고 이삭 줏던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석근 별
알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 앉어 도란 도란거리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朝鮮之光≫ 65호, 1927. 3
천재 시인 정지용이 태어난 곳은 옥천읍에서도 초간한 거리에 위치한 한적한 농가 마을이다. 그렇게 넓을 것도 없는 들판과 그 한가운데 가로질러 흐르는 실개천이 지즐대고, 펑퍼짐한 산으로 둘러싸인 그런 마을로, 이제는 문명의 때를 타기 시작하여 그 원초적인 자연조차도 산업화의 과도적인 열병으로 진통하고 있다. 이 시인이 태어날 당시만 해도 소박하고 인정미 넘치는 촌민들의 삶의 터전으로 온통 전설의 바다를 이루어 출렁이고 있었다.
대륙과 해양의 사이에 끼여 항시 그들의 침략을 받았으면서도 삶을 이어와야만 했던 가녀리고 끈질긴 것이 우리 본연의 모습이었다면, 그 끈적이는 삶 속에 서린 한(恨)의 정서를 우리의 목소리로 발성한 최초 현대 시인이 바로 정지용일 것이다. 우리 언어의 깊은 광맥을 찾아 그 섬세하고 감각적인 시어 구사로 대상의 선연한 이미지를 형상화하여 한국 현대시의 새로운 국면을 열어 보인 공적은 누구도 부인 못 할 것이다. 지명(知命)을 눈앞에 둔 한참 일할 나이에 불의의 ’납북‘이라는 그런 비극적인 삶의 행정을 걸어야만 했던 이 시인의 심경은 어떠 했을까? 대를 이어 독실하게 신앙했던 천주(천주)의 구원을 받아 승천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이승에서는 그의 행적은 찾을 길 없고 생사조차도 묘연한 채로 그가 남긴 유작을 챙기는 감회 자못 착잡하기만 하다. 278쪽 -김학동(서강대 국문과 명예교수) 정지용 전집1 시
개정판 3쇄 펴냄 2005년 ㈜민음사
여고 시절 국어 시간에 배운 기억이 남아있는 시로 중저음의 가수 이동원과 칼칼한 목소리의 성악가가 잘 어우러진 <향수>는 남편과 내가 좋아하는 노래이다. 남편이 미국에 있을 때 이 노래 CD를 사서 부쳐주기도 했었다. 머릿속에 1연이 영상으로 그려지고 자연 속에서 아무 근심 없이 뛰어놀던 행복한 유년 시절이 떠오른다. 식구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질화로에 밤, 가래떡을 구워 먹으며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며 그렇게 겨울밤이 깊어 갔다.
시골의 자연 속에서 뛰놀며 자란 나는 동네 아이들과 찔래순도 따먹고 까마중도 먹고 새벽에 일어나 밤을 주우러 가기도 했었다. 작년에는 어떤 모임에서 회원 몇 명이 한밤에 밤하늘의 별을 찾아 어둠 속으로 달리고 달려 소양댐 배터 주변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 밤하늘의 쏟아질 듯한 별을 바라보았다. 바람도 산들산들 시원하게 불고 그 바람에 물결이 흔들리며 선착장에 묶인 배가 물결 따라 출렁이는 소리도 들리고 멀리 차 지나가는 소리도 들렸다.
정지용의 <향수>는 유년 시절 자연 속에서 뛰놀면서 자란 행복했던 기억을 소환해준다. 이 시를 떠올리며 하루 종일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