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교회 [Ephesos church]
1세기경 소아시아의 에페소스 지역에 있었던 아시아 7개 교회 가운데 하나. 에베소(에페소스)는 지금의 터키 이즈미르의 남서쪽 약 50㎞ 지점에 있던 이오니아의 고대도시로, 양항을 끼고 있어 상업의 중심지로 번영했던 곳이다. 이 곳에 교회가 세워진 것은 1세기 중엽으로, 사도 바울로(Paulus)가 3회에 걸친 대전도여행(大傳道旅行) 중에 이 곳을 방문해 선교를 목적으로 교회를 세우면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37~42년에 그리스도교 교인들이 박해를 받아 예루살렘에서 추방되자 바울로는 3회에 걸쳐 소아시아 지역으로 전도 여행을 하였는데, 54~59년의 3차 전도 여행 때 교회를 세웠다고 전해진다. 당시 에페소스에는 유대인과 그리스인들이 살고 있었다. 바울로는 이 에베소 교회 외에 소아시아 지역에 스미르나·베르가모·티아디라·사르디스·필라델피아·라우디게이아 등 6개의 교회를 세웠는데, 이들 일곱 교회를 아시아 7교회라고 한다.
그러나 에베소 교회는 어느 한 교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당시 에페소스 지역에 있던 모든 교회를 아우르는 개념으로 이해된다. 《요한의 묵시록 The Revelation to John》에는 이들 7교회가 여러 번 등장하는데, 이 가운데 에베소교회가 가장 먼저 세워졌다.
64년 바울로가 죽은 뒤에는 사도 요한(John)이 뒤를 이어 이 지역에서 선교를 하면서 복음 전파에 힘썼으나, 갈수록 초대교회의 모습을 잃어 버리면서 극단적으로 흘렀다는 기록이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편지 Letter to the Ephesians:에베소서》 《요한의 묵시록》등에 보인다. 이 지역에는 당시의 에베소 교회의 유적이 많이 남아 있는데, 지금도 계속 발굴되고 있다.
소아시아 [Asia Minor] 아시아 대륙의 서쪽 끝, 흑해 ·마르마라해 ·에게해 ·지중해 등에 둘러싸인 반도. 면적 약 78만 5760 km2. 동서길이 약 1,000 km, 남북길이 400∼600 km. 아나톨리아(Anatolia)라고도 한다. 터키어로는 아나돌루라고 하는데, 어원은 그리스어 ‘아나톨레(anatole)’이며 ‘태양이 떠오르는 곳’ 또는 ‘동방의 땅’을 의미한다.
터키 영토의 97 %를 차지하며, 동쪽 및 남쪽으로 아르메니아 ·그루지야 ·이란 ·이라크 ·시리아 등과 접한다. 북쪽 흑해 연안에는 폰투스산맥, 남쪽 지중해 연안에는 토루스산맥이 동서로 뻗으며, 그 사이에 평균 해발고도 800 m인 아나톨리아고원이 내륙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동부에는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등 두 강의 수원과 아라라트산(5,185 m)이 있다. 중앙부의 고원지대는 스텝 또는 사막성 기후이며, 여름이 짧고 겨울은 몹시 춥다. 흑해 연안지방은 기온 변화가 적으며, 연간 비가 잦다.
지중해와 에게해 연안은 지중해성 기후이며, 생활하기에 가장 알맞다. 이 지방은 동방과 서방을 연결하는 민족이동의 통로이자 식민활동의 무대였으며 예로부터 갖가지 문명이 꽃피었다. BC 1680년대에는 이 반도의 고원지대를 중심으로 히타이트 왕국이 일어났으나, BC 1200년대에 쇠퇴하자 그 대신 프리지아 왕국이 일어났으며 BC 700년대에는 리디아 ·카리아 등이 등장하였다. 그러나 BC 546년 아케메네스 왕조의 페르시아제국이 침입한 후로는, 연안의 그리스 식민지를 제외하고는 거의 반도 전체가 그 지배에 들어갔다. 그후 BC 334년 알렉산더가 침입하자 헬레니즘 세계에 편입되었으며, 그가 죽은 뒤에는 후계자인 셀레우코스 왕국에 소속되었다가, 폰투스 ·페르가몬 등의 작은 독립국이 각지에 자립하였다.
BC 133년 로마의 동방주(東方州)가 되었고, 이어 동(東)로마 ·비잔틴 제국의 영토가 되어 고전(古典) 그리스도교 지역을 구성하였다. 한때 사산 왕조 이란이 침입하였으며, 이슬람 세력이 커짐에 따라 큰 압력을 받았다. 그러다가 1071년 셀주크투르크 제국이 침공하자, 이것이 그리스 로마 세계로부터 터키 이슬람 세계로 바뀌는 전기가 되었다.
1300년대 말 오스만투르크가 성립하자 이 제국의 세력에 들어갔으며, 제1차 세계대전 후 터키를 구성하는 주요지역이 되었다. 주요산물은 밀 ·보리 ·포도 ·과일 ·잎담배 등이며, 석탄 ·크롬 ·철광석 ·구리 ·망간 등 광물자원도 풍부하다. 주요도시는 앙카라 ·이즈미르 ·아다나 ·부르사 등이다.
비잔틴제국 [Byzantine Empire] 테오도시우스 1세가 죽은 뒤 동·서로 분열한 중세 로마제국 중 동방제국(330~1453). 동(東)로마제국이라고도 한다. 고대 로마제국은 게르만민족의 대이동 결과 서방의 판도를 잃었으나, 콘스탄티누스 1세는 보스포루스해협에 있는 그리스 식민지인 비잔티온에 제2의 로마 수도를 건설하였다.
이것은 330년 5월 11일 개도식(開都式)에서 콘스탄티노플(콘스탄티누스의 거리)이라 불리게 되었고, 이곳을 중심으로 하여 존속한 제국은 1453년 5월 29일 오스만투르크제국의 술탄 메메드 2세의 점령에 의하여 멸망하였다. 동방으로의 지배를 제한당한 로마제국의 1000여 년에 걸친 시기에 후대(後代)가 붙인 이름이 비잔티온의 이름에서 유래한 비잔틴제국이다.
정치적으로 로마의 이념·제도를 이어받고, 종교적으로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삼았으며, 문화적으로는 헬레니즘을 기조로 한 중세의 로마제국은 북쪽으로부터 잇따라 침입한 스텝의 유목민족, 동방의 위협적 존재인 사산왕조 페르시아인 및 이슬람교를 믿는 아랍인(人), 투르크인에 대해 그리스도교 세계의 동쪽 관문을 지켜, 동(東)유럽 제국(諸國)의 역사적 초기에 그리스도교 포교를 통하여 그 문화적 기초를 준비하여, 재건이 막 시작된 동시대의 서(西)유럽에 정치적 ·문화적 교섭을 통하여 계속 영향을 끼쳤다.
이리하여 그리스 정교권(正敎圈)이 형성되어 비잔틴제국의 정치적 이데올로기는 이반 3세의 ‘제3의 로마 ·모스크바’의 이념에 계승되었다. 또, 이 제국에서 보존된 그리스어의 지식은 문예부흥기의 서유럽인에 의해 많은 도움이 되었다.
비잔틴제국을 시종일관하는 이데올로기로서 종말론(終末論)에 기초를 둔 그리스도교 로마 세계황제의 이념은 초대 그리스도교 황제인 콘스탄티누스(재위 306~337) 시대에 성립하였다. 또, 이 제국을 특징짓는 관료국가 체제도 디오클레티아누스(재위 284~305) ·콘스탄티누스 두 황제에서 출발하였다. 사회적으로 서로마 제국을 멸망하게 한 대토지 소유자에 의한 원심분리적(遠心分離的) 경향은 여기서도 볼 수 있는데, 그 밑에서 경작하는 콜로누스는 전자에 대한 예속도(隸屬度)를 깊게 하였으나, 강력한 국가권력에 의해 일정한 형태를 이루었다. 일반적인 농촌화 경향에도 불구하고,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등에서는 도시생활이 번영하였다.
교회관계에서는 로마 ·알렉산드리아 ·예루살렘 ·안티오키아 ·콘스탄티노플의 5총주교구(五總主敎區) 사이에서 격식을 둘러싼 격렬한 싸움이 계속되어, 새 수도 콘스탄티노플이 현저하게 대두되었다. 교의상(敎義上) 5세기는 신학(神學)의 세기라는 이름에 어울리듯, 동부 속주(屬州)에서 일어난 네스토리우스파 ·단성론파(單性論派)가 수도의 정통파에 도전하여 종교회의 석상에서 격한 논쟁을 되풀이하였다.
잃어버린 서방의 구 영토에는 게르만 부족의 여러 국가가 병립하였으나, 그 왕들은 콘스탄티노플의 로마 황제를 가부장(家父長)으로 하는 이념적 질서 속에 편입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재위 527∼565)는 그들을 자기의 지배하에 끌어들이려고 서방 재정복 전쟁을 일으켰으나, 이탈리아, 시칠리아, 카르타고 주변, 이베리아반도 남부 등 서부 지중해 연안의 대상지대(帶狀地帶)만을 획득했을 뿐이었다. 경시되었던 발칸에서는 이미 대제통치(大帝統治)하의 슬라브족이 도나우강을 건너 남하하기 시작하였고, 대제 후계자 밑에서 페르시아군은 근동을 석권하여 소아시아 깊숙이 진출하였다. 탈환한 지 얼마 안되는 이탈리아도 랑고바르드족의 침입을 받았다.
비잔틴제국의 황제 헤라클리우스(재위 610∼641)는 7년간에 걸친 페르시아 원정을 진두지휘하여 빛나는 승리를 거두고, 629년 수도에서 개선식을 거행하였으나 그것도 한 순간에 지나지 않아, 이슬람교도인 아랍인에 의해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아르메니아를 계속해서 잃고 말았다. 674∼678년 마침내 콘스탄티노플이 아랍 함대에 포위되었다. 이것을 격퇴할 수 있었던 것은 신병기인 ‘그리스의 불’ 덕택이었다. 발칸에서는 수많은 슬라브인 이주민들이 펠로폰네소스까지 달하는 한편, 북쪽에서는 도나우강 일대에 불가리아족이 강력한 왕국을 건설하였다.
그러나 이 암흑의 7세기에는 그리스어가 라틴어를 대신하여 공용어가 되어, 군단장이 주둔지역의 속주행정(屬州行政)을 겸무하는 군관구제도(軍官區制度)가 창설되는 등 제국 내에서 큰 변화가 일어났다. 도시는 외적에 대비하여 요새화되고, 농촌지방에는 이제까지의 대토지 소유를 대신해서 소토지 소유 농민으로 조직된 농민공동체가 우세하였다. 이사우리아왕조의 레오 3세(재위 717∼741), 콘스탄티누스 5세(재위 741∼775)는 동부전선에서 이슬람과 사투를 되풀이하는 한편, 국내적으로는 ‘우상(성화상)파괴주의’의 종교정책을 개시함으로써 그에 따르는 혼란은 726~842년의 1세기 이상 계속되었다.
로마 교회는 이탈하고 이탈리아는 남부를 제외한 모든 것을 잃게 되어, 로마의 보호자로서 비잔틴 황제를 대신하는 프랑크 국왕 카를은 800년의 성탄절에 성도(聖都)에서 로마 황제로 추대되었다. 유일해야 할 로마제국이 그리스도교 세계에서 동 ·서로 나뉘어 병존하게 되었다. 842년의 성화상숭배(聖畵像崇拜)의 최종적 부활에 이르기까지의 200년 가까이는 비잔틴제국의 황금시대였다.
10세기의 마케도니아왕조의 여러 황제는 동지중해 ·근동에서 빛나는 무훈시(武勳詩) 시대를 구가하였다. 1014년 발칸의 적대자 불가리아 제국(帝國)은 멸망하고, 남이탈리아의 비잔틴 지배는 재건되었다. 이 영광 뒤에는 속주(屬州)의 호족들이 점차 대두하여 소토지 소유 농민을 예속시키려는 경향이 강해졌다. 1054년 동방정교회(正敎會)가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최종적으로 분리되었다.
11세기 후반 비잔틴 제국은 동쪽 끝에서는 셀주크투르크인, 서쪽 끝에서는 노르만인이라는 새로운 강적과 대치하였다. 그러나 콤네노스왕조의 창시자 알렉시우스 1세(재위 1081∼1118)는 노르만인의 침입을 막고, 또 때마침 개시된 제1회 십자군을 이용하여 셀주크투르크로부터 소아시아의 실지를 회복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어 요한네스 2세(재위 1118∼1143), 마누엘 1세(재위 1143∼1180) 밑에서 비잔틴제국은 재차 강국으로 되살아났다.
그러나 그 동안에 국내의 봉건화가 진행되고 대외적으로도 노르만인 ·셀주크투르크인 외에 발칸에서는 재건 불가리아왕국, 독립 세르비아왕국과 직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마침내 1204년 베네치아와 손을 잡은 제4회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였다. 라틴 황제는 그리스를 십자군 종군자에게 나누어주고, 베네치아는 동(東)지중해에 식민제국(植民帝國)을 수립하였다. 그리스인 귀족은 트레비존트 ·니케아 ·아르타 등에 각각 분립국가를 만들었다.
그러나 비잔틴제국은 기적적으로 되살아났다. 비잔틴의 잔존 세력은 니케아를 중심으로 결집하여, 1261년 미카일 8세(재위 1261∼1282)는 콘스탄티노플을 탈환하여 최후의 비잔틴왕조인 팔라이올로구스왕조를 개국하였다. 그러나 소아시아를 정복한 오스만투르크인은 1365년 유럽으로 건너와 수도를 부르사에서 아드리아노플로 옮김과 동시에 발칸 침입을 개시하였다. 그리고 서유럽의 그리스도교 정치 제세력에 대한 구원의 호소도 헛되이, 12대인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함께 지상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비잔틴 문화는 그리스도교를 기조로 하면서도, 동시에 그리스 ·로마 문화의 계승자였다. 그리스도교에 그리스 철학을 어떻게 접목하느냐가 바실리우스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모스 등 그리스도교 사상가의 최대의 과제였다. 그러나 동방세계에서는 이단논쟁, 아이코노클래즘 등 시행착오를 반복한 뒤 파라마스(14세기) 정적주의(靜寂主義)에서 신비적인 정교신학(正敎神學)이 완성되었다. 이 점에서 아토스산(山)을 대표하는 수도원제도의 소임은 컸다.
종교문학의 영역에서는 교회사 ·성자전 ·호교론(護敎論) ·설교집 등 방대한 산문저작 외에, 로마노스(6세기) ·시메온(11세기) 등 성가(聖歌)를 손꼽을 수 있다. 언어면에서는 7세기경부터 완전히 그리스어 세계가 되었으나, 시대에 어울리는 어문 창설에 대한 노력은 없고 고전기(古典期)의 아티카 방언을 모방한 의고문(擬古文)이 씌어져, 구어(口語)와의 거리가 극단적으로 벌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