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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 성지
도로주소 충청남도 홍성군 홍성읍 아문길 37-1
충청남도 서북부의 중심지에 위치해 내포 지역 정치, 행정, 문화, 교통, 체신의 중추이자 군사적으로도 서해안 방위의 핵심 역할을 담당해 온 홍주성은 그 관할 범위가 넓었던 만큼 순교자들도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홍주는 결성과 합해 홍성이 되어 행정구역상 홍주라는 지명은 없다.
조선 시대에 홍주부를 두어 관찰사가 주재했던 홍성은 관할 구역만 해도 북으로는 평택 이남, 동으로는 경부선 서부 지역, 남으로는 금강 이북의 22개 군에 이르렀다. 홍성읍의 한복판에 있는 홍주성은 전체가 순교 현장이다.
읍성 안 관아시설은 특히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형벌이 집행되었던 곳으로 구체적인 순교터로는 목사가 머물던 동헌, 홍주옥, 진영장이 머물던 조양문 앞, 옛 저잣거리, 북문교 건너 월계천변 참수터, 생매장터로 사용되었을 곳으로 추정되는 홍성천과 월계천이 만나는 합수머리 부근이 있다. 이렇듯 구석구석이 처형지로 사용됐던 홍주성은 아직도 무심하게 남아 있는 고목들과 함께 당시 교우들이 받았던 엄청난 핍박을 그대로 전해 준다.
홍성은 예로부터 최영 장군, 만해 한용운 선사, 백야 김좌진 장군, 사육신의 하나인 성삼문 등을 배출했을 뿐만 아니라 1905년 을사늑약에 의분을 참지 못한 의병들이 순국한 충절의 고장이기도 하다. 홍성의 역사를 찾는 순례자들은 죽음을 무릅쓴 신앙 선조들의 굳건한 신앙과 함께 조국과 민족을 위해 몸 바친 우국 열사들의 향기를 함께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어느 여행길이나 마찬가지이겠지만 홍성을 찾는 순례객들은 미리 지역에 대한 사전 지식을 갖추고 떠나는 것이 유익하다. 특히 단순한 경치 구경을 넘어서 선조들의 향기를 맡으려는 여행자는 목적지의 역사와 유래 등을 진지하게 살펴보는 자세가 필요하다.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홍성에 도착해서 홍주성 내 군청에 들러 간단한 여행안내 책자를 받으면 개략적으로나마 지역에 대해 알 수 있을 것이다. 홍성은 서울에서 출발할 경우 2시간이 조금 넘게 소요된다. 홍성역에서 순교 현장인 홍주성까지는 걸어서 20분 남짓이면 갈 수 있어 열차순례도 가능하다.
홍주성은 홍성읍 한복판, 남산 공원에 쌓은 최장 1772미터에 달하는 성곽이 있었으나 현재 남아 있는 것은 810미터 규모로 최초의 축성 연도에 대한 명확한 자료는 없으나 고려 시대로 추정된다. 그 후 여러 차례의 보수와 확장 공사를 거쳤다. 성내 35개 동에 이르렀던 관아 건물 중에서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조양문(朝陽門)과 22칸의 목조 기와집으로 건축된 홍주목 관아의 동헌인 안회당(安懷堂), 홍주아문(洪州衙門), 여하정(余何亭)뿐이다. 1870년 흥선대원군이 조양문과 홍주아문, 안회당 등의 현판을 사액하였다. 홍주성 유적지는 1972년 사적 제231호로 지정되었다.
홍성읍 시가지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조양문인데 홍주성을 드나들던 동서남북 4개 문 가운데 유일하게 남은 동문이 바로 조양문이다. 당시 홍주군이 관할하던 넓은 지역에서 붙잡혀 온 교우들은 이 문을 통해 홍주성 안으로 들어갔고, 멀쩡하게 걸어 들어갔던 그들은 시체가 되어 성벽 밖으로 던져졌다. 조양문의 왼편으로 골목을 조금 돌아가면 군청이 나오는데 그 입구에 서 있는 것이 홍주아문이다.
홍주 목사가 머물던 동헌 안회당. 이곳에서 잡혀온 신자들은 고문과 배교를 강요당했다.
홍주 아문을 돌아 청사 안으로 들어서면 그 안이 바로 순교의 생생한 숨결이 배어 있는 동헌 안회당이 복원되어 있다. 청사 안뜰에 무심하게 서 있는 고목들은 당시 순교자들이 처분만을 기다리며 오랏줄로 꽁꽁 묶여 있던 기둥들이었고 바닥에 깔린 흙 위에는 선조들의 피와 고통이 서려 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이 지역에서 모진 고통을 당하고 숨을 거둔 선조들이 누구누구이며 얼마나 많은지 명확히 알려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관할 지역의 규모와 지리적 위치로 볼 때 많은 순교자가 배출됐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홍성군 내의 문서에는 천주교 박해와 관련된 부분들이 거의 나타나 있지 않아 이에 대한 조사와 정리가 시급하다.
교회 순교록에 따르면 홍성의 초기 박해(1791-1801년) 순교자는 8명으로 이 중 원시장 베드로, 방 프란치스코, 박취득 라우렌시오, 황일광 시몬 등 4명의 시복시성이 추진되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 중기 박해(1812-1839년) 때는 이여삼 바오로 등 4명이 순교했으며, 이후 1866년부터 1870년대 초까지 계속된 병인박해 때 가장 많은 200명이 순교해 교회 순교록과 관변기록 등 기록상 확인된 홍성 순교자는 모두 212명에 달한다. 그러나 순교 사실을 확인할 수 없는 무명 순교자들까지 고려하면 실제 순교자는 1000여 명이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홍주읍성 내에 복원된 감옥. 복자 원시장 베드로는 이곳에서 우물물로 얼려 죽이는 형벌을 받았다.
순교록에 의하면 홍성 순교자는 참수형보다는 교수형이 많았고 생매장된 순교자도 있었다. 많은 순교자가 성 안에서 처형된 후 그 시체는 성 밖으로 내던져졌다. 군청을 나와 왼편으로 약간의 언덕을 거슬러 올라가면 그리 높지 않은 성벽이 나온다. 바로 이 성벽 위에서 우리의 신앙 선조들은 오직 천주를 배반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차디찬 시체가 되어 바닥에 떨어졌다.
천주교인들에 대한 혹독한 탄압을 일삼았던 흥선 대원군이 1866년 병인양요와 1871년 신미양요에서 승리하고 그해 서울 종로와 전국 각지에 세운 척화비(斥和碑)는 홍성에서도 발견된다. 척화비는 홍성읍에서 차를 타고 서산 방면으로 15분가량 달리면 구항 면사무소 건너편 산자락에 철책이 둘러쳐진 채로 서 있다. 산허리를 돌아 나오는 세찬 세월의 바람에 척화비의 글자들은 점점 희미해지고 있지만, 당시의 서슬 퍼런 박해의 기억과 굳은 신앙을 아직도 우리에게 되새기게 해준다.
2004년 홍성 본당과 홍성군에 의해 지역 천주교 순교사가 공론화되고 순교성지 발굴이 본격화된 지 4년만인 2008년 3월, 홍성 본당은 홍성군과 함께 홍주의사총 옆 홍주 순교성지 공원 터에 순교비를 세우고 성역화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순교비가 세워진 곳은 홍주읍성 북문 밖을 흐르는 월계천과 조양문 밖을 흐르는 홍성천이 만나는 합수머리 지점으로 1868년 생매장으로 순교한 최법상 베드로, 김조이 루치아, 김조이 마리아, 원 아나타시아 등을 비롯해 박해시대 홍주읍성 안에서 옥사나 교수형으로 순교한 순교자들의 시신이 매장된 곳으로 추정되는 장소이다.
순교비 앞면에는 ‘천주교 홍주순교성지’, 뒷면에는 ‘이곳 홍주골은 믿음을 지킨 성지로 충청 최초 순교자가 승천한 곳 이 숭고한 넋은 평화의 빛이 되리라’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아울러 순교비 옆 표지석에는 ‘이곳은 순교의 정신으로 내 나라 내 고장 홍주의 얼을 견고히 하는 거멀못이 될 것임에 삼가 순교자를 현양하는 마음으로 이 비를 세운다’라고 적혀있다.
홍성 본당은 순교비 제막과 하천부지 임대에 관심을 두고 지원을 아끼지 않은 홍성군과 협력해 순교비가 세워진 하천부지 일대를 홍주 순교성지 공원으로 조성하고, 공원에는 십자가의 길을 비롯해 순례객들이 언제든 찾아와 순교자의 삶을 묵상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할 계획을 세웠다. 또한 2011년 6월 18일 40년 넘게 사용한 옛 성당을 헐고 그 자리에 새 성당을 지어 봉헌하며, 새 성당을 원시장 베드로와 박취득 라우렌시오 등 순교자 212위와 무명 순교자까지 1000여 명이 넘게 순교한 홍주(홍성의 옛 지명)의 교회사적 의미를 살려 홍주 순교자기념성당으로 명명했다.
홍성군은 장기적인 홍주성 복원사업을 진행하면서 대표적인 순교터였던 홍주 감옥을 2012년 복원했다. 홍주 감옥은 기록으로 확인된 홍주의 순교자 212명 중 가장 많은 113명이 순교한 곳이다. 이곳에서 주로 교수형이 시행됐고, 굶주림과 목마름, 심한 매질로 인한 장독과 전염병, 포졸들의 괴롭힘으로 비참한 옥중생활을 하다가 옥사한 이들도 많았다. 이곳에서 순교한 충청도 최초의 순교자인 복자 원시장 베드로는 3개월에 걸친 매질에도 죽지 않자 우물물을 이용해 얼려 죽이는 형벌을 받았다. 이 우물 또한 복원되었다. 이곳은 또한 프랑스의 첫 번째 선교사였던 성 모방 신부와 두 번째 선교사였던 성 샤스탕 신부가 1839년 기해박해 때 홍주관아에 자수하여 머물던 곳이고, 성 다블뤼 주교와 그 일행인 성 위앵 신부, 성 오메트르 신부, 성 황석두 루카까지 모두 6명의 성인이 머물렀던 역사적 장소이다.
대전교구는 2014년 1월 15일자로 홍주 순교성지를 전담할 신부를 발령했다. 홍주 순교성지는 우선 감옥 앞의 상가 건물을 일부 임대해 아담한 성당과 사무실을 마련해 매일 11시에 미사를 봉헌하고, 성지 신부와 함께 읍내 전역에 흩어져 있는 6곳의 순교터와 증거터를 순례하고 있다. 2016년 10월 22일에는 홍주 성지의 순교터 중 한 곳인 생매장터에 십자가의 길 14처를 설치하고 축복식을 거행했다. 십자가의 길은 조각가 고영환 토마스 형제가 3년에 걸쳐 순교자의 손을 소재로 제작한 작품이다. 현재 홍주 순교성지는 20평 남짓한 임대성당이 들어선 건물마저 철거를 앞두고 있어 순례자를 위한 성당 건립이 시급해 관심과 후원을 호소하고 있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8년 6월 30일)]
홍주 성지 순교자
1) 박취득 라우렌시오: 살을 찢고 뼈를 깎는 고통에도 '하느님 나라' 선포 새끼줄에 목 졸려 당당하게 순교 제4대 조선대목구장 다블뤼(Marie Nicolas Antoine Daveluy, 한국명 안돈이) 주교는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에서 이렇게 전한다."1799년 음력 2월 29일 홍주(현 홍성). 박 라우렌시오가 홍주에서 매질로 죽음을 당했다. 그의 생애(에 관한 자료)는 이미 내가 보낸 바 있으며, 더는 첨가할 것이 없다. 그는 우리의 훌륭한 신앙 증거자들 중 첫 대열에 들어 있다."이렇게 다블뤼 주교에게 '훌륭한 신앙 증거자들 중 첫 대열에 들어 있다'는 찬사를 받은 박취득(라우렌시오, ?~1799)은 홍주 면천 출신이다. 오늘날 충남 당진군 지역으로, 1791년 당시 면천 고을 관아엔 엄청난 수의 교우들이 투옥돼 있었다. 많은 교우들이 옥에 갇혀 여러 달째 고초를 겪어야 했다.
이를 지켜보며 가슴 아파하던 박취득은 헌신적으로 옥바라지를 했다.그러던 어느 날, 수감 교우들에게 막 식사를 제공한 그는 관장에게 찾아가 "무고한 백성들을 가혹하게 매질하고 여러 달 옥에 가두니 이런 법이 어디 있느냐"고 항의했다. 이에 화가 난 관장은 그를 붙잡았다. 이어 그가 천주교인 박일득의 형제라는 사실을 확인한 관장은 그에게 칼을 씌운 채 혹독하게 매질을 했다. 그럼에도 박취득은 동요하지도 않고 겁을 내지 않은 채 "이 나무칼은 너무 가볍다"면서 "쇠칼을 씌워달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이 말에 난처해진 관장은 박취득을 해미 관아를 거쳐 홍주로 보냈다.
홍주 관아에서도 혹독하게 곤장을 맞았지만 그는 그 뜨거운 첫 신앙을 버리지 않고 굳게 지켰다. 그러기를 한 달여. 조정의 전갈을 거쳐 박취득은 석방됐다. 이같은 신앙에의 항구함과 재판관들 앞에서 흔들리지 않는 반석 같은 마음은 교우들에게 큰 위로를 안겼다.그러나 체포와 장기간 구금, 혹독한 문초와 고문은 1791년의 일로만 끝난 게 아니었다. 6년 뒤 홍주에 다시 박해가 일어나면서 박취득에게 다시 체포령이 떨어졌다.
그는 몸을 숨겼지만 자신의 아들이 잡혀가자 스스로 면천 관아에 몸을 드러내 자수를 선택한다. 1798년 8월 19일이다. 관장이 도망간 것을 꾸짖자 박취득은 이렇게 답변한다. "저는 관장의 명령을 받기 전에 떠났는데 제 아들이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어머니의 명을 받아 이렇게 왔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이 말에 관장이 "너는 어찌하여 국왕과 관장들이 금하는 나쁜 도를 따르느냐"고 묻자, 그는 "저는 나쁜 도를 따르지 않고, 다만 만물을 창조하신 천주를 숭배하라고 가르치는 참 종교의 몇몇 계명을 지킬 뿐입니다. 저는 천주님을 공경하고 다음에는 임금님과 관장들과 제 부모와 다른 어른들을 공경하며, 제 친구와 형제들, 다른 모든 사람을 사랑합니다"하고 대답했다.그 뒤로도 7개월간 네 차례에 걸쳐 심문과 문초가 계속됐다. 우스꽝스러운 질문에 똑같은 답변이 이어졌고, 살을 찢고 뼈를 깎는 듯한 문초에도 인내하는 마음을 결코 굽히지 않았다."네가 말하는 그 천주가 무엇이며, 어디에 있으며, 무엇을 하느냐?""천주는 하늘에 계시며 거기에서 당신의 명령을 알려 주십니다. 그것을 지키면 당신 곁에 불러올리실 것이고, 대항하면 지옥에 떨어트릴 것입니다. 어떤 사람도 천주님의 은혜에서 제외되지 않습니다. 그
러나 저같이 불쌍한 인간이 제 모든 웃어른보다 더 많이 은혜를 받았으니 죽을지라도 그분을 배반하지 않겠습니다."이어 해미관아로 이감돼 1년간 열여섯 차례에 걸쳐 1400대 매를 맞는 등 갖가지 가혹한 형벌을 받았다. 투옥 중 박취득이 자신의 어머니에게 남긴 편지가 감동의 여운을 남긴다. "불효 자식 라우렌시오는 옥중에서 어머니께 제 심정을 알려드립니다. 저는 항상 천주를 지성으로 섬기고 부모께 효성을 다하며 형제와 화목하고 제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에 천주의 명을 지키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저는 천주께 죄를 범하고 부모와 형제에 제 모든 본분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육신과 세속, 마귀의 삼구(三仇)를 이기지 못해 수없이 많은 죄를 지었습니다. 어머니 제 불효를 용서하십시오. 제 죄를 사해 주시고 제 영혼을 구해주시도록 천주께 기구하여 주십시오.…"옥에서 끌려나가 매질을 당하는 아픔이 계속됐다.
때론 형리들이 옷을 벗긴 뒤 상처 입은 몸을 진흙 속에 버려두고 일부러 고통을 겪도록 하기도 했다. 당시 모친에게 보내는 옥중 서한에서 십자가 발현을 언급하던 그는 새끼줄에 목이 졸려 숨을 거둔다. 1799년 기미년 2월 29일, 양력으로 4월 3일의 일이다. 그의 나이 30살이었다.다리 부러지는 고통에도 신앙 증거
2) 황일광 시몬: 홍주 순교자로는 황일광(시몬, 1757~1802)도 빼놓을 수 없다. 홍주 천민 출신으로 '백정'이던 그는 1792년 홍산으로 이주한 뒤 '내포 사도'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이후 좀 더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고자 경상도로 이주했다가 1800년 2월 경기도 광주로 이주, 정약종(아우구스티노)과 이웃해 살면서 황사영(알렉시오), 김한빈(베드로) 등과 교류했다. 정약종이 서울로 이주하자 서울 정동으로 옮겨와 열심히 교회 일을 도왔고, 드디어 주문모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면서 체포된 그는 포도청과 형조에서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으면서 한 쪽 다리가 부러지는 고통을 겪어야 했지만, "천주교는 성스러운 종교다"라고 말하며 조금도 신앙을 굽히지 않았다. 마침내 사형 판결을 받고 고향인 홍주로 이송돼 1802년 1월 30일(음력 1801년 12월 27일)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그의 나이 45살이었다.그에 얽힌 일화는 아주 유명하다.
그가 경상도에 이주해 열심으로 교리를 실천하며 살 때 천주교인들이 그를 집안에 맞아들였는데, 당시 천민을 집안에 맞아들이는 건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당시 황일광은 "나에게는 천국이 두 개 있는데, 그 하나는 사람들이 나을 위해 주는 지상천국이고, 또 하나는 후세에 있는 천국"이라고 말하곤 했다.그의 순교는 오늘날까지 교회에 아주 특별한 관심을 불러 일으킨다. 하느님 앞에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천주교회의 가르침이 황일광에게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크거나 작거나, 양반이거나 상놈이거나, 부자이거나 가난한 사람이거나 모두 주님 섭리와 은총에 참여한다. 주님 섭리는 때론 세상에서 무시당하고 경멸을 받는 사람들에게 특별한 소명을 맡긴다. 백정 황일광이 그러했다. 모든 이에게 무시를 당하고 천하게 살았지만, 선한 삶을 살다간 그는 신앙을 받아들여 교회 가르침대로 살며 신앙을 증거하고 목숨을 바쳐 순교의 화관을 썼다.
3) 복자 원시장 베드로(1732-1793년) : 원(元)시장 베드로는 1732년 충청도 홍주 응정리(현, 충남 당진군 합덕읍 성동리)의 양인(良人)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지 몇 해가 지난 1788-1789년 무렵, 곧 56-57세가 되었을 때, 사촌 형인 원시보 야고보와 함께 천주교 교리에 대해 듣고 입교하였다. ‘시장’은 그의 관명(冠名)이다.
어느 날 원 베드로는 집을 떠나 1년 이상 다른 지방에 가서 생활하면서 교리를 공부하였다. 그동안 그는 ‘천주교 신앙이 수천 년 동안 목숨을 보전해 주는 약’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으며, 이후에는 집으로 돌아와 친척과 친구들에게 천주교의 주요 교리를 설명해 주었다. 그러자 하느님의 은총이 그의 설명에 힘을 보태 주었고, 친척과 친구들은 마음이 움직여 하느님을 믿겠다고 약속하였다. 이때까지도 그는 세례를 받지 못하였었다.
본디 원 베드로의 성격은 사납고 야성적이어서 '호랑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였다. 그러나 신앙을 실천해 나가는 동안 성격이 변하여 어떠한 일에서나 온화함을 보여 주었다. 그는 가난한 이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거나 이웃에게 교리를 가르쳐 입교시키는 데 열중하였다. 이 때문에 그의 이름은 관장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1791년 신해박해가 일어나자, 관장은 포졸들을 보내 원 베드로와 원 야고보를 체포해 오도록 하였다. 이때 사촌인 원 야고보는 친구들의 권고에 따라 다른 곳으로 피신하였으나, 원 베드로는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홍주 관아로 끌려가게 되었다.
이내 원 베드로는 홍주 관장 앞으로 끌려 나가 문초를 받아야만 하였다. 그러나 그는 관장의 어떠한 강요에도 굴복하지 않았고, “천주를 배반하거나 동료들을 밀고할 수 없으며, 교회 서적이 있는 곳도 말할 수 없다.”고 답변하였다. 관장은 화가 나서 형리들에게 주리를 틀고, 치도곤 70대를 치게 하였다. 그럼에도 그는 하느님과 부모님께 대한 본분과 천주교의 참된 도리를 설명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여러 달을 옥에 갇혀 있으면서 원 베드로는 자주 끌려 나가 배교를 강요당하고 형벌을 받았는데, 이러한 가운데에서도 포졸과 형리들에게 전교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한 교우가 그를 만나러 옥으로 찾아왔고, 이때 원 베드로는 그에게 세례를 받을 수 있었다.
그동안 홍주 관장은 감사에게 모든 사실을 보고하였으며, 감사에게서 ‘원시장을 때려죽이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에 관장은 다시 원 베드로를 옥에서 끌어내 갖은 형벌을 가하였지만, 한결같은 그의 마음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관장은 마지막으로 혈육의 정에 호소해 보기로 하였다. 원 베드로를 기다리고 찾는 자식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자식들 이야기를 듣고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자식들에 대한 이야기는 제 마음을 크게 움직입니다. 그러나 천주께서 친히 저를 부르시니, 어찌 그 목소리에 답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홍주 관장은 이 사건을 빨리 마무리 짓고자 하였다. 그래서 관례에 따라 사형수에게 마지막으로 주는 음식을 가져다주도록 하고는, 죽을 때까지 매질을 하도록 하였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관장은 다른 방법을 생각한 끝에, 그의 몸에 물을 붓고 밖에 내다 놓아 얼어 죽게 하라고 명하였다.
원시장 베드로가 덮어쓴 물은 이내 얼음으로 변하였다. 그런데도 그는 오로지 주님의 수난만을 생각하였다. 그러다가 마지막으로 감사의 기도를 드리며 자신의 목숨을 하느님에게 바쳤으니, 그때가 1793년 1월 28일(음력 1792년 12월 17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61세였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원시장 베드로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4) 복자 방 프란치스코(?-1799년) : 방(方) 프란치스코는 충청도 면천의 ‘여’ 고을 태생으로 감사의 비장(裨將)을 지낸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교우들 사이에는 ‘방 비장’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프란치스코는 우연히 고향 인근에 전해진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듣고는 누구보다도 빨리 이를 받아들였다. 그런 다음 정산필 베드로 회장과 박취득 라우렌시오, 원시보 야고보 등과 자주 만나 교리를 연구하고 실천하였다.
교리를 실천하는 데 비상한 열심을 가졌던 방 프란치스코는 교우들 중에서도 단연 뛰어나게 되었다. 그는 순교자들의 행적을 들으면서 자주 눈물을 흘렸으며, 그들과 같이 순교하기를 간절히 열망하였다.
그러던 중에 1797년의 정사박해로 수많은 신자들이 체포되었다. 방 프란치스코도 다음 해에, 홍주에서 체포되어 6개월 동안 많은 형벌을 당하고 사형 선고를 받기에 이르렀다. 이때 그와 함께 사형 선고를 받은 교우 두 명은 관례에 따라 사형수에게 주는 마지막 음식을 받고는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방 프란치스코는 오히려 기쁨에 가득 찬 얼굴로 천주와 동정 마리아께 감사드리고 나서 동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창조하시고 보존하시는 것도 천주의 은혜이지만, 관장이 이렇게 후한 대우를 해 주는 것도 섭리의 은혜인데, 어째서 당신들은 슬퍼하고 풀이 죽어 있소. 그것은 마귀의 유혹이오. 만일 우리가 천당을 얻을 이렇게도 좋은 기회를 놓친다면, 나중에 또 어떤 기회를 기대할 수 있겠소.”
이때 천주께서 방 프란치스코의 권고와 격려에 효력을 부여해 주셨다. 그 결과 그의 두 동료들은 자신들의 나약함을 스스로 뉘우쳤고, 오래지 않아 거룩한 기쁨을 같이하였다. 그들 셋은 함께 홍주 읍내에서 순교하였는데, 순교일은 1799년 1월 21일(음력 1798년 12월 16일)이었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방 프란치스코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5) 이여삼(李~) 바오로(?-1812년) : 순교자. 세례명 바오로. 1839년 순교한 이태권(李太權)의 숙부. 충청도 홍주(洪州)의 양반 가정에서 4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1791년 박해를 피해 가족과 함께 전라도로 이사해 살았고 1801년 신유(辛酉)박해가 일어나자 공주(公州)로 피신해 있다가 1802년 2월(음) 셋째 형과 둘째 형 이무명의 아들인 태권과 함께 체포되어 조카 태권은 풀려나고 형과 함께 유배되었다. 1812년 유배형에서 풀려나 고향에 돌아왔으나 다시 체포되어 홍주 관아에서 장하치명(杖下致命)하였다. 이 때 그의 나이는 약 43세였다. [출처 : 한국가톨릭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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