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곧은정 교우촌 (순례지/성지)
간략설명: 김희성 프란치스코가 살던 교우촌
지번주소: 경상북도 봉화군 소천면 남회룡리 417(& 남회룡4교 부근)
건사골에서 일월산(1219m)의 깊은 계곡을 따라 다시 동북쪽으로 1.5㎞가량 내려가면 현재의 남회룡5교 부근 왼쪽으로 경상북도 봉화군 곧은정 교우촌 터가 있고, 조금 더 가서 남회룡4교 부근 오른쪽으로 영양군 곧은정 교우촌 터로 추정되는 곳이 있다.
이곳은 봉화군 소천면 남회룡리와 영양군 수비면 신암리의 경계지역으로 계곡 좌우로 봉화군 남회룡리와 영양군 신암리에 고가(古家)들이 있었던 흔적이 남아있다.
군(郡) 경계 지역인 계곡 길 바로 옆, 즉 영양군 수비면 신암리 지역의 우거진 낙엽송 밭에는 여기저기 돌무더기들이 쌓여 있으며 야생 약초들과 칡덩굴이 한데 어우러져 있다. 옛날 집들이 있었던 흔적의 표시로 흙으로 덮여진 구들장과 굴뚝도 있다. 구들장이 있는 집터 바로 옆에는 물을 긷던 샘이 이끼가 낀 채 나뭇잎으로 덮여 있다. 샘터는 아직도 물이 질척하고 깊이는 약 50㎝ 정도이며 이미 허물어져 있다. 이런 것으로 미루어 보아서 이곳이 곧은정 교우촌이 아닌가 싶다.
그 당시 곧은정 교우촌에는 충청도 여사울(현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신종리) 사람으로 중인 계급의 부유한 가정 출신인 김희성 프란치스코(金稀成, 1765-1816년)가 피난 와서 살았다. 그는 1801년 신유박해 때 부친 김광옥 안드레아(金廣玉, 1741?-1801년)가 순교한 후 아버지의 뜻을 따르겠다는 거룩한 신앙심으로 세상일을 우습게 생각하여 모든 재산을 예산에 버려두고 어머니와 부인 그리고 아들과 함께 소백산맥 준령을 넘어 이곳 일월산 깊은 산골에 있는 경상도 영양 고을 곧은정으로 이주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김광복(金光福)을 비롯한 몇몇 다른 신자 가족들과 함께 신앙 공동체를 이루어 생활하였다. 김희성 프란치스코는 나무뿌리와 도토리로 연명하는 가난한 생활 속에서도 사순시기에는 엄격하게 금식을 지켰고, 교회 서적을 읽으며 기도로써 굳건한 신앙을 키워갔다.
1815년 3월 을해박해가 일어나고 얼마 되지 않아 배교자 전지수의 밀고로 안동 진영의 포졸들이 그를 체포하러 오자 그는 아들에게 남아서 가족을 잘 보살피라는 부탁을 하고, 집에 들러서는 아내에게 신앙을 지켜 자녀들을 잘 가르친 뒤 장차 자기 뒤를 따르도록 권고한 후 순순히 포졸들을 따라 나섰다. 그는 안동 관아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고 김종한 안드레아(金宗漢, ?-1816년)와 함께 대구로 이송되어 재차 혹독한 형벌을 받았지만 항구한 신앙심을 보여주었고, 김종한 안드레아 등과 함께 옥에 갇혔다가 1816년 12월 19일(음력 11월 1일)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그의 나이 51세였다. 김광옥 안드레아와 김희성 프란치스코 부자, 그리고 김종한 안드레아는 모두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