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름판과 황소
황보영락
고향마을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흘러가는 역계천은 우리의 놀이터였다. 깜깜한 여름밤, 은모래 밭 위에 드러누워 하늘을 본다. 맑은 하늘에는 희뿌연 구름이 낀 것처럼 은하수가 남북을 가로질러 흐른다. 그 은하수를 개똥벌레가 반짝거리며 건너다니기를 반복하는 시간이다.
달에 부딪힌 햇빛을 다시 지구로 전해주는 은은한 달빛은 아이들에게 그냥 집에 가서 잠을 자지 말고 모래밭에서 놀아라고 유혹하고 있었다. 특히 보름달이 뜨는 날이면 아이들은 약속하지 않아도 이 하천의 모래밭에 모여들었다. 밝은 달빛아래 가장 많이 하는 놀이는 8자를 그려놓고 선을 따라 뛰어다니는 놀이를 많이 했는데 우리는 '황소불알놀이'라 불렀다.
1976년 팔월 중순 여름방학이 끝나갈 즈음이었다. 안동댐이 생기면서 차오르던 물은 수십 리를 거슬러 올라가며 마을을 삼키더니 마침내 널따란 구 예안면 소재지까지 흙탕물이 섞인 호수로 만들고 버렸다. 수몰 지역에 살던 분들이 이주한 곳이 신예안 서부리 이주단지이고, 그날은 시장이 처음으로 개설되는 날이었다. 이날 행사는 씨름판을 벌이는 것부터 시작했다.
나는 친구들과 자전거를 타고 신예안 우(牛)시장 부지에 만들어진 씨름판을 찾았다. 설레는 마음으로 씨름경기가 열리는 우시장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커다란 황소가 ‘우승’이라고 쓰인 어깨띠를 두른 체 꼬리를 흔들며 달려드는 파리를 쫓고 있었다. 그 주변에는 행운을 가져다준다는 이 소는 내가 먼저 찜했다며 몇 명의 소 장수들이 작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당시의 황소는 살림 밑천이었고, 농사일하는데 필수적인 현재의 경운기나 트랙터 역할을 하고 있었다. 산비탈에서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소를 이용해서 밭갈이할 수밖에 없었다. 프로씨름이 생기기 전이었지만 황소 한 마리는 대단한 가치를 가진 살림 밑천이었다. 지금 가치로 치면 천만 원도 넘을 것 같다. 그러니 전국의 내로라하는 씨름장사들이 모두 다 왔었다. 황소는 힘의 상징이 되는 동물이다. 당시 시골 씨름판은 구경하는 장꾼들에게는 최고의 볼거리였을 것이다. 요즘의 프로씨름대회처럼 농악대가 모래판을 돌고, 징과 꽹과리 소리가 요란했다. 그 왁자지껄한 사이를 옮겨 다니며 엿을 팔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드디어 씨름 선수들이 입장했다. 장내 아나운서가 00팀의 000 장사 같은 소개를 했다. 시골에서는 절대로 볼 수 없는 백 kg이 넘는 몸무게를 가진 선수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출전한 선수들은 현실에 존재하는 사람이 아니라 다른 세상에서 온 사람 같았다.
요즘이야 씨름 중계를 보면서 들배지기, 안다리 걸기, 덧걸이 등의 기술을 이해할 수 있지만, 그때는 그냥 힘과 힘이 부딪치는 경기로만 보였다. 관중들은 저마다 경기를 분석하고 한 마디씩 거들던 시절이었다. 그 경기에는 젊은 홍현욱 장사가 우승했다. 입구에서 주인을 기다리던 그 황소는 그의 손을 거쳐서 어느 소 장수에게로 넘어갔고 그 대회는 추억 속의 한 점으로만 남았다.
단원 김홍도의 그림 중에도 ‘씨름도’ 그림이 있다. 그것을 보면 신예안 시장 개설 기념 씨름대회가 생각난다. 그 그림에는 신분을 뛰어넘어 서로 어울려 씨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양반과 상민, 어른과 서당 아이들이 같이 앉아서 경기에 보고 있다. 서당에서 공부하다가 훈장님께 “선생님 우리 공부 그만하고 씨름 구경하러 가요” 하면서 나온듯한 아이들의 모습이다. 그림 오른쪽 위 네 명의 떠꺼머리총각들의 모습이 씨름판에 구경 갔던 우리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그렇게 우리 선조들이 함께 어울리면서 즐기던 씨름은 2018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목록에 남북이 함께 제안하여 등재되었다. 이제 씨름은 대한민국이나 북한의 문화유산이 아니라 세계의 문화유산이 되었다.
요즘 설날이나 추석날에 행해지는 프로씨름을 즐겨 본다. 그러다가 나도 모르게 약자를 응원하는 경우가 많다. 작은 선수가 더 큰 선수를 이길 때는 더 많은 환호를 보내고, 대리만족을 느낀다.
세계금융의 중심지 뉴욕 월스트리트 입구에 황소 동상이 설치되어 있다. 그 황소는 주가가 내려가는 시기에 주가가 오르기를 바라면서 세운 것이라고 한다. 요즘 주식 이야기를 할 때마다 그 황소동상 사진이 배경그림으로 자주 나온다. 50년 전 씨름판 입구에 서 있던 그 황소와 월스트리트의 황소 동상 이미지가 겹쳐진다. 그 황소들의 가져다주는 행운을 믿는 사람에게 많은 행운이 있었을 것이다. 행운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좋은 운을 불러온다."는 말을 믿어본다.
2026. 5. 15
첫댓글 씨름판은 옛날에는 시골의 정겨운 풍경이었습니다. 지난날을 회상하면 즐겁고 그리움이 옵니다. 코스닥 줏가 이야기는 빼는 것이 더 좋을 듯 합니다.
은하수 개똥벌레가 반짝 거리며 건너 다니기를 반복하는 시간에 동네 아이들이 모여 씨름하는 풍경은 너무 신났을거 같네요 .
시골 씨름판 모습이 그대로 생생하게 떠 오릅니다. 그 황소가 행운을 상징하는 심벌이 되었군요. 잘 읽었습니다.
달밤에 모래밭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의 즐거운 모습과 씨름판의 광경이 정겹게 느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