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이란 둘로 온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씨’로 오고 하나는 ‘땅’으로 옵니다. 그런데 이 씨는 그냥 ‘씨’가 아니고 ‘거룩한 씨’라고 했지요. 그런데 ‘거룩한 씨’라는 것이 복수가 아니고 뭐라고 했습니까? 오직 한 사람, 한분으로 오심으로 말미암아 모든 거룩은 독점적이죠. 하나란 말은, 곧 둘이 아니란 말은 하나가 모든 거룩을 독점적으로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한분에게 모든 거룩이 다 포함됨으로 말미암아 자동적으로 한분외에 모든 것은 다 거룩이 아니고 의롭지도 않다는 결론이 되는 겁니다. ‘갈라디아서’에 보면 아브라함 자손은 여럿이 아니고 ‘하나’다 이말이죠. 따라서 ‘하나’이지 둘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명령하셨습니까? “내어쫒으라”고 하십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 ‘땅’에 대해서 어떤 땅이라고 했습니까? 그냥 땅이 아니고 땅은 ‘거룩한 땅’이에요. 거룩한 땅은 어떤 땅인가? 시편에 보면 무엇을 극복하는 , 무엇을 이기는 땅입니다. 즉 ‘죽음’을 이길수 있는 사람들이 모인 세계죠.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들은 무엇을 거쳐야 한다고 했습니까? 그냥 약속의 땅에 눌러 앉는 것이 아니고 애굽에 갔다가 애굽의 권세조차 이기지 못하는 형식으로 그들은 약속에 땅에 비로서 들어가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약속의 땅은 비어있는 것이 아니고 애굽 같은 세력이 있다 할지라도 조금도 두려워 하고 겁낼 필요가 없고 정복하게 되죠. 결국은 거룩의 승리에요. 거룩의 최후승리를 보여주는 겁니다. 이렇게 ‘거룩한 씨’, ‘거룩한 땅’이 되는 과정을 통해서 무엇을 보여주느냐 하면 새로움이 옛것을 이긴다는 겁니다.
‘유’가 ‘무’를 이기고 이 ‘무’는 결국 나중에 ‘죽음’의 세력이 되며 이 ‘유’는 ‘생명’이라고 했습니다. ‘생명’! 죽음이란 저주로 통하고 생명은 축복이고 은혜가 됩니다. 저주란, 결국 ‘왜 저주를 받는가’ 그것은 처음부터 요한계시록에 나오듯이 저주를 유발하는 ‘악마’가 있었고 축복쪽에는 ‘어린양’이 있었다 이말이죠.
그래서 이 ‘어린양’이 결국 승리하게 되는데 그러면 ‘우리는 어디에 위치해 있는가?’ 아까 어떤분이 질문을 했는데 이것이 중요한 질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가운데서 어디에 위치해 있느냐 하면, 이것이 컴퓨터 마우스 커서라고 치고, 이 전체를 커서로 해서 위로 몽땅 싹 옮겨봅시다. 이렇게. 그러면 모니터 화면이 이렇게 생겼죠. 이렇게.
그러면 우리는 여기 있는 거예요. 여기. 이것은 몽땅 위로 가고 우리는 여기 밑에 있다 말이죠. 이것은 운명적이고, 숙명적이고, 확정적인거지요. 이미 다 끝난 일인데 우리는 뭐냐 하면, 이 전체를 하나의 만화책으로 본다면 우리는 만화책의 내용을 이미 다 읽고 그 만화책 속의 내용대로 지금 끌려가면서 살아가고 있는 거죠.
만화책으로 비유한 이것은 바로 성경책이 되겠죠. ‘성경책’. ‘성경책’ 내용이 이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이 만화책 내용대로 이미 다 알고 이미 “다 이루었느니라” 하고 성경책대로 우리는 지금 그대로 적용받고 있는 것입니다. 적용받고 있지요. 상당히 중요한 질문이 되어서 그런 예로 설명하는 겁니다.
이 만화책(성경책)의 내용이 뭐냐 하면, 레슬러 하고 연약한 소녀하고 시합을 하는데 나중에 소녀가 지는 듯 하지만 결국 소녀에게 승리가 오더라 말이죠. “야. 이 만화책 재미있다” 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게 단지 만화책 내용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를 하나의 소녀로 만들어서 이 레슬러 같은 악마로 하여금 시달리게 하는데 이 소녀가 가면서 하는 말이 뭐냐하면 “나는 비록 지금 원, 투, 쓰리, 초죽음 직전이지만 나는 믿습니다!!!” 뭘? “만화책 내용대로 믿습니다.”
이게 믿음이죠. 결국은.
“나는 믿습니다.”
뭘?
“앞으로 이렇게 이렇게 될것을 믿습니다. 나는 땅에서 이런 시련을 당합니다만 결국 최후승리는 이것이라는 것을 믿습니다.”(♬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그러면 여기 레슬러가 하는 소리가 있죠.
“너 지금 무슨 소리 하고 있는냐? 아직도 이 만화책을 믿고 사나? 이등신 쪼다야! 이것은 옛날 신화에 불과한 이야기야. 그리스로마 신화나 매한가지 같은 거야. 그런것 하고 같이 보면 되는거야. 이것은 하나의 만화책이야. 아직도 이런것을 믿는 인간이 있나 그래. 근대과학시대에 말야.”
“나는 믿습니다. 이 만화책을!”
성경이란 그리되면 결국은 실존문제, 가다머의 실존주의 해석문제로 다시 돌아오는 겁니다. 이 과학시대에 과연 창세기 21장이 아직도 의미가 있고, 창세기 22장이 아직도 의미가 있는지. 이 과학이 진리인데. “아니야. 과학은 진리가 아니야. 크로스빌리지를 봐. ≪과학의 정체≫가 드러났잖아.
그게 무슨 소리를 써 놓은 것인지 너무 어려워서 하나도 모르겠습니다만. 무려 190쪽이 넘는 방대한 것인데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거기 결론에 보면 뭐라고 했습니까? 과학이란 하나의 게임이라는 거죠. ‘스타크래프트’ 같은 게임이죠. 과학이란 세상을 보는 일종의 게임이었다는 말이죠.
<비트켄슈타인>에 의하면 그런 식으로 말하죠. 결국 우리는 과학이라는 것에 현혹되지 말고 아직도 우리는 창세기 21장대로 그대로 우리에게 적용될 것이고, 창세기 22장대로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될 것이고, 창세기 21장, 22장의 그 원리, 그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몰고 간다는 이 허무맹랑한 그 만화책을 아직도 믿을 때 그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현대의 세상 사람들은 성경을 믿지를 않죠. 그냥 성경을 그냥 인간이 만든 유구한 지혜의 책이라 해서 그냥 참고로 할뿐이죠. 참고로. 이런 사실을 참고로 할뿐이지 - 참고한다는 말은 내가 그것을 약간 활용해서 내식대로 살아가는 하나의 도움이 될 뿐이지 - 이 모든 것이 이 책 내용대로 확정되었다고 믿는 것은 아니죠. 이것이 현대인의 사고방식이죠.
그런데 방금 이야기한 그런 이야기까지 오늘 강의 내용 중에, 창 22장에 나온다는 거죠. 여기까지 질문할 것 없죠? 가만히 아까 강의한 것을 정리를 해보면 어른인데도 아직 소년티를 못 벗은, 뭔가 이 세상에 우연인데 신께서 필연적으로 어떤 법칙을 가지고 세상을 인도하신다는 막연한 믿을만한 내용들을 고대하고 있다는 것이 어찌 보면 상당히 기특하고 순수해 보이는 그런 심정들이 아닙니까?
그런데 기특하고 순수하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게 과연 실제로 그런가 하는 의t심이 생기는 겁니다. 그것이 창 22장에 보면, 그런 고민을 아브라함이 하게 되죠. 창세기 22장 1절에 보게 되면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기서 “시험한다”는 말이 나오는데 시험이라는 말이 ‘야고보서’에 보면 “하나님께서 누구도 시험하지 아니하시고 다만 시험받는 것은 본인의 욕심에 이끌려서 유혹을 당할뿐이지 하나님은 친히 누구를 시험하는 것이 아니다”고 합니다.
(야고보서 1:12-15)
12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13 사람이 시험을 받을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찌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14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그런데 여기 창세기 2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시험하시려고” 이렇게 했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이 두 구절 가운데 어느 구절을 선택하고 어느 구절을 포기할 것인가를 선택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두 가지 다를 취하기에는 너무나 자체적인 모순이 강렬하기 때문에 둘 다 수용할 수 없지 않느냐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님이 시험하신다는 것은 원래 아브라함을 택할때부터 마땅히 시험을 해야 하는 쪽으로 나옵니다. 왜냐하면 ‘야고보’같은 경우는 그 출발이 ‘인간이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는냐?’ 즉 인간의 구원문제가 출발점이지만, 여기 ‘창세기’ 같은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어떻게 가지고 노느냐?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기 뜻을 펼치느냐’ 하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관점이 달라요.
‘야고보서’의 경우에는 ‘내가 구원받으려고 하는데 하나님께서 날 구원하는데 방해하는 쪽으로 나서버리면 난 구원 받을 수 없지 않느냐’라는 것에 대해서 ‘그런 걱정하지 말아라. 그런 식으로 하나님께서 방해한다든지, 유혹한다든지 하는 그런 하나님은 없다. 다만 네가 구원에서 탈락해 놓고는 하나님 탓으로 돌리지 말라. 모든 것은 너의 욕심에 이끌려서 스스로 잘못된 판단으로 하나님을 포기한 네 잘못이지 하나님 탓으로 돌리지 말라’ 는 그런 뜻입니다.
‘야고보서’가 구원의 문제에 대해서 자기잘못을 하나님 탓으로 돌리지 말라는 차원이라면 , ‘창세기’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뜻을 전달하는데,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어떤 다른 측면을 보여주느냐.’ 거기에 초점이 있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전혀 그게 아니죠.
시험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자기 뜻을 전달하는데, 22장 2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를 드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삭’이 품고 있는 그 하나님의 뜻을, 그러니까 ‘이삭’이라는 그 안에 하나님의 뜻이 들어 있는데, 그 ‘이삭’을 깨뜨림으로 말미암아 ‘이삭’안에 들어 있는 본래 하나님의 뜻이 쏟아져 나오는 겁니다.
지금 ‘아브라함’이 현재까지는 복의 근원인데 - 복의 근원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이 이대목이에요. - 어떻게 이 복의 근원이 ‘이삭’으로 이전이 되느냐 하는 그 문제죠. 어떻게 이전이 되느냐?
1) 아브라함이 실수했다.
2) 처음부터 아브라함에게서 뺏으려고 했다. 애초에 다른 분이다
3) 이삭이 더 훌륭했고 아브라함은 이삭만 못했다
창세기 22장을 가지고 어떤 분은 이런 설교를 하는 사람이 있어요. “이삭을 봐라. 얼마나 훌륭한가? 아버지 시키는 대로 아무소리도 안하고.” 그냥
“아버지예! 여기 불쏘시개는 있는데 제물은 어디 있습니꺼?”
“마! 니는 입 다물고 있어.”
“예! 입 다물고 있겠심더.”
이렇게 순종하는 그것이 마치 하나님 앞에서 자기 죽음을 알면서도 순종하는 예수의 진실한 모습이 아닌가 하면서 세 번째 경우를 강조하는 사람이 있어요. 왜 세 번째 경우의 이삭을 강조하느냐 하면, 아브라함에서 이삭으로 복의 근원이 이전한 것은 아브라함의 미흡한 점이 드러나서 “아이고 이제 아브라함 가지고는 안 되겠다. 아브라함보다는 완전한 사람이 있어야 하겠다” 해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서 어떤 실망감을 느껴서 다시 이동하는 것같은 그런 느낌을 주는데 그것은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다” 는 그 말 자체 안에 가지고 있는 그 내용을 아브라함이 깨져야, 즉 아브라함 자신이 분해되어야 아브라함 자신 안에 있는 어떤 분이 거기서 새롭게 사람들에게 계시로서 전달될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훌륭하다.’ 아무리 예수님 본인보고 그렇게 아무리 ‘훌륭하다’고 해도 해도 그것은 본인이 깨어지지 않으면 안돼요. 십자가에서 자기 몸이 깨어졌을 때 비로소 뭔가 예수님의 훌륭한 점, 위대한 점, 다른 이들과 다른 점이 그 안에서 튀어 나오는 거죠.
또 하나 주의할 것은 “봐라 아브라함이 시험을 이겼잖아.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본받아서 시험을 이겨야지.”라고 하는 겁니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이삭이 복의 근원이라는 것이 또 부합되지 않아요. 잘못된 해석이죠. 아브라함을 쪼갬으로 아브라함 속에 뭐가 들어 있는지는 본인도 모르는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쪼갬으로서 그 안에 이삭이라는 새로운 복의 요소가 들어 있어서 그 동안도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 노릇을 톡톡히 했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기도하니까 롯이 소돔성에서 탈출했고, 아브라함이 기도하니까 ‘아비멜렉’ 추장의 가문에 닫혔던 태가 열리면서 임신이 회복되는 그 모든 것이 사실은 이삭이라는 요소 때문에 그렇다는 거니다.
이것을 알려주시기 위해서 그렇게 한겁니다! 아브라함도 모르죠. 이삭이 아브라함에게 어떤 존재인지를. 자기는 복의 근원이니까요. 그래서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번제로 바칩니다. 그러니까 이삭을 번제로 바침으로 말미암아 아직도 아브라함은 자신이 모든 복의 주체자가 되죠.
친히 번제물을 바칠때 여기에 창 22장 14절을 보면,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죠. 여호와이레. 자 여기서 이제 구약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어려워 하는 것이 있어요. 구약을 공부할 때 주로 주제를 찾아서 이런 식으로 하죠. 예를 들어서, “하나님의 이름에 대해서 공부합시다.”
‘하나님의 이름’ 그러면 결국 나오는 것이 뭐냐 하면, ‘엘사다이’(전능하신 하나님)은 어떤 때 활용되고, ‘여호와’는 어떤 때 등장한다는 식으로 공부하거든요. 그러면 그것을 알아서 뭐하는데요. 그것을 아는 것이 아무 소용이 없어요. ‘여호와 이름’이란 것은 ‘이사야’에도 나오듯이 하나님은 숨어 계시는 분인데 - 이사야 49장에 나오죠 - ‘여호와 이레’라는 이 지명이 장차 오실 하나님의 메시아 안에 이 내용이 포함이 되는 겁니다.
‘여호와이레’, ‘여호와삼마’, ‘임마누엘’, 전부다 어떤 지명 이름을 가져다 붙일때 이것이 나중에 ‘여호와의 이름’에 이런 내용들이 다 포함이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구약에서 이름이라 하는 것은 기능을 말하는 거예요. 기능. 마치 야곱이 해야 될 일이 ‘이스라엘’ - 잡신을 이긴다는 이름 속에 - 이라는 이름에 포함되는 것과 같습니다. ‘야곱’이 가야될 인생길이 포함되는 것처럼 이게 이름 속에 포함되는 거예요.
구체적인 것이 마태복음 1장 21절에 보면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고 되어 있어요. ‘예수’라 하는 것이 언어학적으로 막연하게 ‘구원자’라는 뜻인데, 그 ‘예수’라는 이름을 붙임으로 말미암아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건질 자로 된다 이 말이죠.
이것은 예수라는 이름은 그냥 평범한 이름이지만 하지만 그 이름에 담긴 기능대로 예수님은 그 길을 가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보면 성도는 모두 그 앞에 뭐가 붙습니까? ‘새이름’이 있지요. 요한계시록 2장에 보면 “내가 흰 돌 위에 ‘새 이름’을 준다”고 하는데 - 대구 시내에 보면 ‘흰돌교회’가 한두개가 아닙니다 - ‘새 이름’은 천주교 처럼 ‘철수’에서 ‘베드로’로 바뀌는 식으로 바뀌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새로운 팔자, 새로운 기능적인 일로서 새로운 인생길을 가야한다는 운명적인 것이 함유된 거예요.
(요한계시록 2:1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여호와이레로’서 누가 가야 한다는 겁니다. ‘여호와이레’로서 ‘이삭’이 가야 하고, ‘여호이레’ 가 없었던 자가 아브라함이었어요. 아브라함은 ‘여호와이레’가 아닙니다. 아브라함을 깨드림으로써 그 안에 ‘여호와이레’같은 기능을 할수 있는 ‘이삭’이 이제 아브라함을 대신해서 새로운 복의 근원으로 출발하는 겁니다.
‘여호와이레’라는 말은 하나님이 앞으로 하실 기능을 말하는 것이고, 그 기능에 의해서 아브라함이 미처 몰랐던 새로운 추가된 정보로서 이삭은 아브라함과는 다른길을 가야되는 겁니다. 어떤길? ‘여호와이레’의 길을 가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준비하시는 길을 가야한다는 말이죠.
‘여호와닛시’ 이게 무슨 뜻입니까? ‘여호와깃발’이죠. 그 길을 이스라엘이 또 가야 돼요. 이렇게 보면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철저하게 하나님에 의해서 농락당하는 - 하여튼 자기인생이란 없고 그저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을 펼쳐보여야 될 - 입장에 놓여 있는 것이 아브라함이고 이삭입니다.
그러면 ‘여호와이레’가 무슨뜻이냐? 창세기 22장 17절에 봅시다. 지금 말한것이 어렵기 때문에 다시 이야기해 봅시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바치라고 했는가? 그렇게 물으신다면 답변은 아브라함 때까지 미처 공개되지 않았던 하나님의 구원의 정보가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침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은 조기 은퇴를 하고 아브라함이 부각시키는, 즉 아브라함이 제물로 바치는 그 이삭과 ‘수양’으로 드러난 ‘여호와이레’라는 둘의 만남을 통해서 아브라함때 미처 알지 못했던 ‘여호와이레’라는 새로운 기능으로 복의 기능을 수행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 증거로서 창세기 22장 16절, 17절에 보면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17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합니다.
아브라함이 순종했기 때문에 새로운 복의 내용이 추가 되었다는 이야기죠? ‘거룩한 씨’가 번성하는 거죠. 그런데 그 ‘씨’가 뭐죠? “그 대적의 문을 열고” 이삭을 통해서 그 대적 그 원수, 그 적군의 성문을 연다. 적군을 이긴다. 그러면 어떤 식으로 이기냐 하면, 이삭은 죽음에서 살아났어요. 죽을뻔 했는데 생명이 살아났습니다.
따라서 그 적군은 어떤 능력이 없느냐 하면 죽음에서 살아날 수 있는 그런 힘이 적군에게는 없는 거예요. 죽음에서 생명으로 나가는 이러한 힘이 뭘 이긴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나갈수 없는 그 적군을 이기는 것을 그 중심에서 이삭이 시작하는 거예요. 그런데 아브라함은 안됩니까? 아브라함은 아니에요. 아브라함은 그것을 못 보여준다 말이죠.
이삭이 죽음에서 살아났기 때문에 이삭만이 이걸 이길 수가 있는 거예요. 그러면 아브라함은 지옥가느냐? 천만의 말씀입니다. 아브라함 속에 이미 이삭이 이미 들어 있었어요. 아브라함속에 이미 이삭이 들어 있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오히려 이런 이삭의 득을 보죠. 죽음에서 생명으로 이긴 그것이 적을 이기는 거예요. 그 증거가 ‘여호와 이레’인데 그 ‘여호와 이레’는 그 준비하신 것이 뭐냐? 바로 ‘수양’입니다.
‘수양’을, 그러니까 ‘여호와이레’란 ‘준비하심’이죠. ‘준비하심’, 그 수양을 준비하심으로 말미암아 죽어야 될 이삭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났는데, 그러나 이런 ‘여호와의 준비하심’ 이 축복이 없는 적군들은 새로운 피조물에 의해서 정복당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앞으로 실시하실 일관된 뜻이다는 것을 이삭을 통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지금 구약학자들은 창 22장 17절을 설명 못합니다. 왜 갑자기 이삭이 등장하면서 적군이 있는가? 그것을 설명 못합니다. 창세기 24장 60절을 봅시다. “리브가에게 축복하여 가로되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인의 어미가 될찌어다 네 씨로 그 원수의 성문을 얻게 할찌어다.” 여기서 “네 씨”라고 하는 것은 누구입니까?
‘이삭’이죠. “‘이삭의 씨’로 원수의 성문을 얻게 할찌어다”입니다. 현재 구약학자들은 이것을 손도 못대로 있고, 누구 하나 이야기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껏 <폰라드>나 유명한 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은 뭐냐? “그 때 그 당시에 많은 족장들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이 남의 땅에 와서 그런 족장들, 타민족 족장들을 이기고 생존하기가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삭과 그 후손들에게 복을 주셔서 다른 민족과의 전쟁에서 밑지지 않고 오히려 승리해서 그들보다 더 많은 양, 더 많은 소, 더 많은 가축을 번성케 해서, 결국 그들로 하여금 ‘아이고 할배요. 당신은 정말 축복 받은 사람입니다.’ 이렇게 굴복하게 해서 비로서 그들은 그 약속의 땅에서 육체적으로 생존케 하는 그런 축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라고 이야기하는 거죠. 그러면 ‘폰라드’씨 그 근거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 근거야 많지요. 고고학을 통해서 옛날의 상황을 공부해 보세요. 모든 민족들은 자기 나름대로의 종족들의 신화같은 것이 다 있는데, 그 신화의 주제가 이것이었다. 우리 민족이 참 외로웠는데 우리를 지켜주는 수호신께서 다른 민족의 틈속에서도 우리를 생존케 해 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민족적인 신화를 여호와 식으로 편집을 약간 가미해서 후대에 여호와의 살아계심을 증거하기 위해서 여기에 이렇게 적어 놓은 것뿐입니다”라고 이야기해요.
“예를 들어서 ‘할례’란 것은 모든 민족이 다 있는 것인데, 하나님께서는 다 있는 그 풍습을 가지고 여호와께서 거룩한 민족이 되게 하기 위한 그 입문절차, 통과의례로서 그것을 재해석해서 성경에 집어 넣은 겁니다. 따라서 그 당시 아브라함이 특별안 선택된 민족임을 과시하기 위해서 기존의 풍습중의 하나를 따와서, ‘우리만이 여호와신을 믿는 증거로 삼아서 그것이 전통이 되어서 오늘날 유대인들은 할례를 받음으로 거룩한 민족’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렇게 이야기하거든요. “그러면 ‘할례’라는 것은 과거에 있었던 하나의 풍습이고, 문화였습니까?” “그렇습니다. 문화였습니다. 그러니까 옛날 문화가 중요한 것이 아니기에 우리는 그 알맹이만 따오면 됩니다”라고 모든 신학교의 학생들이 다 그렇게 배우고 있어요. 구약학회 출신 강도사님! 맞지요? 그렇게 배우지요? 다 그렇게 배우는 거예요.
“그것이 바로 옛날부터 있었던 토착화였습니다.” 다 그렇게 이야기 하거든요. “그러니까 오늘날 우리들이 목회할때도 그냥 토착화만 이용하면 됩니다. 예를 들어 제사를 없애라고 하지 말고 제사를 그냥 지내면서 제사의 의미만 부과해서 지내면 됩니다. 제사하면서도 여호와만 섬기면 되는 겁니다.” 꼭 천주교에서 하는 소리처럼 그런 식으로 융통성을 발휘할수 있는 여지를 다 남겨둬요.
<김세윤> 교수 같은 경우도 그렇게 주장하잖아요. “여자들이 머리에 수건 쓰는 것도 그당시의 사회적 문화였습니다. 따라서 머리에 수건을 쓰느냐 마느냐 하는 것은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고 한다든지 또 “술먹지 말라 술취하지 말라” 그런 이야기라든지 모든 것을 ‘폰라드’가 그런 식으로 길들여 놓으니까 거기에 그것을 핑계삼고 교훈삼아 “아아! 현재 내가 목회하는 것에 대해서는 성경의 어느 귀절을 가지고도 내 합리화만 시키면 그만이다”라는 그런 의식들이 목사들에게 있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해석입니다.
여기서 ‘원수’라는 것이, 단순히 그 아브라함자손이 이방민족 가운데서 생존하는 것이 아닙니다. ‘적이 무엇이냐?’ 이것은 어떤 점에서 이쪽이 적들과 다르고, 어떤점에서 독특하냐를 먼저 밝히고 난 뒤에, 적에게는 뭐가 없다? 이 하나님에 의해서만 주어진 그 독특함이, 특수성이 없는 것은 무조건 적이 되는 겁니다.
이쪽이 저쪽을 이긴다는 말은, 현재 이삭을 이삭 되게 한것은 바로 여호와께서 친히 준비하신 수양에 의해서, 즉 하나님께서 친해 개입해서 주신 생명, 수양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을수 없는 적군을 이기는 거죠. ‘그렇다면 적군에게는 왜 이런 생명이 없느냐?’ 하는 그점에 대해서는 앞으로 이삭이 살아가면서 아브라함처럼 그 추가된 정보를 앞으로 주욱 보여줄것입니다.
자 그 다음에 창세기 23장을 봅시다. 22장을 끝내면서 다시 한번 정리한다면 22장은 조기 은퇴식이 되는 겁니다. 아브라함은 이제 자기 역할을 그만하고, 아들에게 복의 권한 임무를 물려주는 조기 은퇴식이었습니다. 물려 주는데 그냥 물려주는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도 미처 몰랐던 복의 내용을 추가적으로 보여주면서 자기는 뒷전으로 물러가고, 드디어 이삭이 복의 근원 노릇을 하는 겁니다. 복의근원 노릇이란 원수를 이기는 그 역할을 한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22장이었습니다.
그 다음에 23장에는 사라가 죽었다는 이야기지요. 벌써 은퇴 기분이 들지요? 서서히 아브라함의 흔적은 쇠퇴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24장에 보면, 아브라함의 마지막 은퇴식의 장면이 뭐냐 하면 - 24장이 재미있어요 - 며느리감을 얻는거예요. 이제 자기는 끝났으니까. 며느리감을 얻는데 아브라함이 자기종의 환도뼈 속에다가 손을 넣고 맹세를 합니다.
12절에 보면 “그가 가로되 우리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컨대 오늘날 나로 순적히만나게 하사 나의 주인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라고 되어 있는데, 아브라함은 자기 종에게 맹세했고, 종은 맹세한대로 반드시 순적하게 합당한 며느리감을 얻을것이라고 했습니다.
아까 말했듯이 이삭은 생명을 함유하고 있습니다. ‘생명.’ 따라서 이삭이 부인이 될 사람은 이삭의 생명과 동등하게 격상된 위치에 있는 그런 여인이 앞으로 이삭의 부인이 될겁니다. 앞으로 누가 될지 모르지요? 어떤 사람이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 아마 이런 우비같은 것을 뒤집어 쓴 것같은 이런 여인의 모습일지??? 요새 제가 세 살 네 살 애들 주일학교 아이들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그 애들한테는 만화를 가지고 설교해야 하는데 이제 나이가 오십이 넘어 가지고 이것을 하려니 ---. 그래서 00간사님에게 좀 하라고 하니까 못한다고 하고.
이 여인은 생명을 함유하는 격에 맞는 여인이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이 여인은 뭐냐? 제 2의 사라입니다. 제 2의 사라. 이삭은 어디서 나왔습니까? 아브라함에서 나왔거든요. 아브라함에서 나왔다면 그러면 이 제 2의 여인은 누구인지는 아직 모르지만 아브라함의 부인인 사라에서 나와야죠. 사라에서.
그것을 아브라함이 아는 거예요. 아브라함은 이제 은퇴하지만 이삭과 제이의 사라에서 약속의 씨앗이 나온다는 겁니다. 자, 제 2의 사라가 된다는 이 말은 결국 이 여인은 아이를 낳지 못하는 불임여성이에요. 불임여성. 애기를 낳을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전에 아브라함의 사라 곧 제 1의 사라는 무엇을 실패했습니까?
처음에 인간적인 방식으로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이라는 사례를 시도했기에, 이제는 그런 실수는 하지 않아야 되죠. 아예 처음부터 불임여성으로서 그저 하나님의 약속에 담기는 그러한 여성으로서 등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리브가는 결국 불임여성으로서 출발할 수밖에 없지요.
그 다음에 24장 60절입니다. “리브가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인의 어미가 될찌어다 네 씨로 원수의 성문을 얻게 할찌어다” 천만인의 어미! 자식도 욕심이 많다. 한둘이 아니고 1000만명입니다. 1000만명이면 서울시 인구인데 와 엄청납니다. 욕심을 내도 보통 욕심을 내는 것이 아니죠?
남편은요. 그 남편은 그 자식이 “하늘의 별같이 바다의 모래같이.” 자식이 없어가지고 환장을 했는지, 둘 다 자식에 대해서 굉장히 욕심을 내내요. 전에 KBS에서 나왔는데 어떤 목사님이 자식이 10명이나 되는 그것이 축복이라고 자식은 태의 열매라고 하면서 나온 것을 봤는데요. 그것을 가지고 인터넷에서 얼마나 많은 욕이 들어 왔는지요.
남들은 지금 살기 바빠서 힘들어 하는데, 할 짓이 없어서 맨 날 연구하고 생각한다는게 애만 낳는 거. 그냥 애만 자꾸 낳고 별 할일이 없는 거예요. 둘이 같이 앉아서 가사를 돌보는 겁니까? 뭐하는 겁니까? 그러니 애 낳는 것 밖에 할게 더 있어요? 그래서 정말 주의 일을 위해서 생각하는 그것과, -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주님을 위해서 사는 것과 -, 아니면 너무 부부정이 유별나서 애를 낳고 키우고 하는 그것도 하나님의 사명이라는 그러한 경계선의 숫자가 글쎄요? 네명부터 해야할지, 다섯명부터 해야 할지? 지금 세명부터 하게 되면 그 경계선에 걸릴 사람이 몇몇돼요. 지금!
세명까지는. 네명부터는 이제 노골적으로 나무랠수 있는 사항인지 모르겠습니다. 열명이라 한다는 것은 결국 이거예요. 현대사회에서 자식이 많아지면 많아지는 만큼 그 양육은 다른 시민들이 세금을 내서 그들을 키워야 할 그런 책임이 있는데요. 마치 자기가 먹은 것은 자기가 타고 난다는 옛날 식으로 하면 결국 나머지 그 가정이 감당 못하는 애들은 국가에서 키워야 돼요. 남의 세금가지고 키운다는 거죠. 그래서 욕을 많이 얻어 먹었는데.
여기는 열명도 아니고 천만인을 키우니까 너무 이기적이고 심한것 같지요? 어쨌든간에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포함된다는 말이죠. 자! 불임여성이기 때문에 이제 기대하는 것은 뭐냐 하면, 이삭의 생명이 어떻게 불임여성에게 임신케 함으로써 어떤 새로운 양상을 보이는가? 이것이 이제 중요한 문제이겠지요?
그래야 없는데서, 무에서 유가 나옵니다. 그런데 아까 무에서 유가 나온다고 하지만 사실은 뭐라고 했습니까? 유가 무를 덮쳐 버리죠. 즉 무에서 유가 되지만 사실은 하늘에 있는 유가 우리를 무로 만들면서 새로운 생명을 잉태시킨다고 이렇게 보죠. 그 증거가 바로 창세기 25장 23절에 나오죠.
(창세기 25:21-23)
21 이삭이 그 아내가 잉태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그 아내 리브가가 잉태하였더니 22 아이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가로되 이같으면 내가 어찌할꼬 하고가서 여호와께서 묻자온대 25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지금 이삭도 많은 씨가 나온다고 했고, 사라도 천만인의 어미가 된다면, 그래서 이삭이 아내가 잉태하기를 기도했고 그 기도의 응답대로라면, 여기 어떤 현상이 없어야 하느냐면 서로 싸우는 현상은 없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래. 네가 자식이 없어서 기도를 하는구나. 그렇지 약속대로 내가 자식을 많이 낳게 해줄게. 네 뱃속에 애기가 배는데 그 애기는 쌍둥이다. 이제 하도 기도를 많이 하니까 급하다 급해. 세쌍둥이 네쌍둥이 많이 낳게 할거야. 그리고 그 쌍둥이들은 너무 너무 사이좋게 잘 지낸다.”
이렇게 되어야 할 것인데, 분명히 여기서 응답을 해 놓고, 나오는 것은 뭐냐? 싸움입니다. 싸움. “아이들이 그의 태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래서 그가 가로되 “내가 어찌할꼬” 어찌하긴 어찌해요? 둘이 싸우는데 그냥 낳으면 되지요. “두 민족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민족이 저 민족보다 강하겠고 큰자는 어린자를 섬기리라”
자, 이것을 보니까 자식이 없어서 자식을 낳겠다는 것은 인간적인 생각이지만, 하나님은 그 인간적인 생각을 전혀 고려해 주지도 않고 마구잡이로 하나님의 자신의 뜻만 인간들을 통해서 펼치면 하나님의 일을 끝나는 거예요. 우리들의 소원이 따로 존재하고, 하나님의 계획이 따로 존재하고 그런 겁니다.
그래서 ‘박영선’ 목사님이 그런 이야기를 했죠. 우리는 우리 맘대로 기도하고 맘대로 응답은 하나님의 자기 맘대로 응답하고. 그것뿐이라는 거죠. 그러니까 기도하지 말라는 말이 성립이 안되는 것이 왜냐하면, 우리가 평소에 하고 싶고, 기도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 그것을 꾹 참는다고 해서 될일이 아니잖아요. 언젠가 터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항상 우리 맘대로 우리 욕심대로 기도해요. “네 맘대로 하세요”라는 말처럼 우리는 항상 내 맘대로 기도해요. 하나님께서 어디 가게 되면 내가 가야할 노선의 버스가 착착 와서 빨리 타고 가게 해달라는 그런 마음의 소원을 기도하잖아요. 만일에 버스를 기다리는데 오래도록 기다려도 안 오면 어떻게 됩니까? ‘내가 오늘 교회 안가고 하나님께 나쁜 짓을 했구나. 그러니까 집에 가려고 버스를 기다리는데 벌써 두 대나 놓쳤지. 버스가 왜 안 오지? 아, 내가 오기 전에 연달아 두 대가 한꺼번에 지나갔구나. 앞으로 내가 교회 가서 착하게 살아야지. 나쁘게 사니까 이런 벌을 받는 구나”
혼자 쓸데없고 부질없는 일을 하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은 뭐라고 하시느냐 하면, “그래 상상은 자유다. 네 맘대로 한번 상상해 봐라. 그것이 기껏 네 속에 들어 있는 상상이라면 그것으로 즐겁다면 마음대로 해. 그러나 응답은 내 맘대로야.” 어느 때는요. 버스를 타려고 가보면 425번이 한꺼번에 세대가 지나가서 20분을 기다리다가 지각하는 수가 있어요.
심지어 헐레벌떡 부산에 공부하러 가기 위해서 동대구역에서 기차를 타는데 점심도 안 먹고 달려와서 보면 30분 연착을 하는 경우도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갖고 있는 소원은 아무 소용도 없고 우리의 기도는 아무소용도 없어요. 언제 싸우는 자식을 낳아 달라고 철야한 적이 있습니까?
그저 이 배는 네 배도 아니고, 하나님의 배니까 어떤 자식을 낳든지 그것은 하나님 맘대로인데, - 제가 방금 하나님 마음대로라고 했지요. - 그게 마음대로가 아니고 이미 이삭에게 약속한 바가 그 안에 내용물로 차곡차곡 쌓이는 겁니다. 자, 내용물이 뭐냐? 생명이죠. 어떻게 하면 죽음에서 사느냐? 사느냐 죽느냐 이것이 문제로다. 햄릿에서 나온 것 아닙니까?
“목사님! 예수 믿는 사람은 영생합니까?”
영생합니다.
“왜 영생 합니까?”
몰라도 돼요. 그냥 믿기만 하세요.
이래가지고는 안되거든요.
“왜 예수를 믿는데 영생을 얻기는 우리가 영생을 얻습니까? 2000년 전에 죽은 예수라는 그 인물을 믿는 것 하고 지금 내가 곧 죽으면 천당 가는 것하고 그게 어떤 고리, 어떤 연관이 있기에 그런 축복이 주어집니까? 그 논리가 저에게 설명해 주세요. 있습니까? 설명 좀 해 주세요”
제가 신학교때 안 배웠는데요?!?!
그러면 안 된다는 겁니다. 이렇습니다. 이삭은 영생을 얻고 천국 가는 것은, 이 이삭 속에 있는 알맹이들이 싸워서 승리해서 얻는 전과물이예요. 전과물. 전과물 알죠? 획득물. 이걸 뭐라고 하죠? 전리품이라고 하죠. 전리품으로 생명이 나온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이삭이라고 본다면 이삭 속에 여러분들이 싸우는 것이 아니고 여러분들을 대신해서 악마와 싸워주는 그분 덕분에, 그분의 은혜로 그분의 전리품으로서 우리가 생명을 얻는 겁니다.
따라서 정말 생명을 얻고 구원을 받은 사람이라면, 이 부족한 나 대신 싸워주신 분이 누구며, 그 적은 과연 누구였던가 하는 것을 파악하게 될 것입니다. 이 내용을 한 인생을 두고 설명한 테마가 ‘욥기’입니다. 그래서 ‘욥기’가 어려워요. ‘욥기’에서 욥은 그냥 방관자입니다. 자기 인생에서 아무 힘도 쓸 수 없고 빽도 쓸 수 없는 거죠.
자기 인생에 대해서 그냥 방치할 수밖에 없고, 자기 인생에 대해서 스스로 책임질 수 있는 그런 힘은 전혀 없어요. 없는데 이 욥을 가지고 놀았던 것이 두 분이죠. 한분은 하나님이었고, 또 한분은 - 한분이라고 하면 안 되죠 -, 하나는 사탄이죠. 하나님이 먼저 사탄에게 시비를 걸었어요.
하나님 : 네가 욥처럼 훌륭한 사람을 봤나?
사탄 : 욥이 재산 꽤나 가졌고 자식이 열 명이나 되니까 그러니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요. 쟤가 아무것도 안 가져 보세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습니까? 어느 인간이 아무것도 없고 어렵게 사는데 하나님께 감사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하나님 : 그래? 사탄이 네가 지금 나에게 그런 식으로 대드나 지금? 이러면 이거 막가자는 이야기지. 좋아. 그러면 욥을 맘대로 해봐라!
사탄 : 해 봅시다. 욥이 그렇게 대단한지 해봅시다. 그러면 제가 한번 욥을 건드려도 되겠습니까?
하나님: 건드려봐! 건드려봐!! 건드려봐!!!
자기들끼리 어떤 게임을 하고 있는데, 욥은 내막도 모르고 그냥 방관자죠. 그런데 사탄이 먼저 욥에게 가서 자식 열 명 다 죽이고, 있는 재산 다 날립니다. 완전히 하루아침에 다 날렸죠. 그래 놓고는 사탄이 “하나님! 제가 욥을 손 좀 봤습니다. 욥이 원망할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안그럴건데.” 그래서 보니까 욥이 “주신자도 하나님이요, 거둔 자도 하나님이니 하나님을 찬송할찌어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거봐!” 그런데 욥이 우리 자신이라면? 참 이거 기가 막힐 일이죠. 자신을 욥기 2장에 넣어 가지고 “지금쯤 사탄이 시험할 때 되었는데 아이구. 이것이 시험이구나. 자식이 어? 죽었어? 가만있어봐라. 이 대목이 ‘마태복음’, 아니야. ‘욥기’일거야. 욥기. 자 영광을 돌려야지.”
그래서 제가 옛날 00교회 있을 적에, 제일 얄미운 사람들이 있어요. 몸이 아픈 대도 불구하고 “하나님! 이렇게 몸을 아프게 해주셔서 감사 합니다”하고 감사헌금 하는 사람들. 이건 시위하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 앞에 오기도 아니고, 이것은 한번 대들겠다는 것밖에는 안되고요. 좀 심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팠다가 건강하게 될 때는 감사헌금을 내는 것을 이해하겠어요. 그것은 이해가 되는데, 아직 낫지도 않고 아픈데 아프게 해줘서 감사하다면서 감사헌금 내는 것은 목사한테 “목사 당신은 이런 믿음 없지?” 그런 것 밖에 안되는거죠. 그거 참 주의 해야 됩니다. 여러분! 절대로 그런 것을 본받지 마세요. 제발 욥을 본받을 생각하지 마세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릴 때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할 때 어떤 신학자는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이왕 죽는것, 이왕 버린 몸인데 아직까지 자기 자존심 있으니까, 자신이 메시야임을 드러내면서 죽자고 생각했다는 거죠. 과연 어느 대목이 적당할지를 찾다 보니까 시 22편 1절이 적당하다고 여겨서 그 대목을 외치고 죽었다는 거죠. 그것을 보고 제자들이 “봐라 예수님께서 죽을때까지 말씀을 완성했잖아. 그러니까 예수님이 메시아 맞잖아.” 그렇게 되었다는 거죠. 그것은 내가 보기에는 둘다 연기자에요.
어쨌든 욥이 그렇게 된 것으로 게임을 그치면 되는데 문제는 또 여기서 사탄이 시비를 걸어요. 지금 아직도 욥에게 “주신자도 여호와시고 가져가신 자도 여호와시다” 하는 것을 입을 벌려서 말을 할수 있는 힘이 있다는 거죠. 건강하니까 아직도 그런 입에 발린 소리를 하지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고 했을 때 하나님께서 사탄으로 하여금 “죽이지는 말고 건강을 해쳐봐라”고 한거예요.
또 여기서 주의할 것은, 하나님께서 욥을 죽이지는 말고 건강만 뺏으라고 했다는 점을 가지고, “지금 내가 당뇨병이지만 하나님께서 욥처럼 날 시험하기 위함이다. 내가 지금 병원에 가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사탄하고 날 두고 내기를 하고 있기 때문에 당뇨병까지만 지금 허락하지만 설마 내 목숨을 빼앗아 가겠나? 그래서 나는 병원에 가지 않는다” 그래서 죽은 사람이 한두명이 아닙니다. 그래서 많이 죽었어요.
이것은 결국 무엇이냐 하면, 생명이라는 것이 목숨이 아니고, 생명은 목숨보다 더 큰 더룬 어떤 질, 다른 속성을 두고 이야기한다는 것을 ‘욥기’를 통해서 가르치고자 하는 겁니다. 내 목숨을 잃어 버리는 것이 곧 내 생명을 빼앗기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죠. 내가 죽는 것이 곧 죽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죠. 생명을 얻은 채 얼마든지 죽을 수가 있는데 그것은 하나의 안식이고 쉼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욥기’는 하나님과 사탄의 내기 때문에 발생된 하나의 고난이죠. ‘욥기’에서 이야기 하는 것은 인간은 껍데기라는 겁니다. 주제는 뭐냐? ‘인생은 껍데기다. 알맹이는 하나님이 채운다.’ 그래서 마지막에 축복을 누가 채웁니까? 하나님이 채우잖아요. 그러니까 욥의 말이 맞지요. “주신자도 하나님이요 거두시는자도 하나님.” 그러니까 껍데기잖아요. 나는 껍데기에 불과하고 내 안에 뭐가 담기든지 , 내안에 뭘 채우시는지는 내가 관여할 바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는 그냥 껍데기에 불과하니까요. 어떤 껍데기? 하나님을 증거 하는 껍데기. 하나님의 축복을,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답게 증거하고 표출하는 그냥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욥기’입니다. “주신자도 하나님이요 거둔 자도 하나님이다.”는 것은 목회자들이 처음 목회할때는 이것을 자기 신조처럼 잘 지킵니다.
그러다가 교회가 안정이 되면서 당회장 생활을 한 십수년 하게 되고, 교인들에게 인정도 받고, 목사가 무슨 말을 해도 교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처럼 들을 때는, 그 다음부터는 “주신자는 하나님이요, 내 것을 더 이상 빼앗아 갈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현재 한국교회의 문제가 뭐냐 하면, 한국교회가 예수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고, 예수보고 한국교회를 따라오라는 거예요.
지금 한국교회 문제가 그점이에요. “예수여! 날 따라오라.” 교회를 뒤에서 밀어 달라는 거죠. 교회가 교회를 버리고 예수를 따라갈 때 그때만이 교회입니다. 왜? 껍데기이기 때문에. 계속해서 생명을 채워야 할텐데, 기존의 교회 있음을 가지고 교회 있음으로 채워서는 안된다는 말이죠.
“껍데기를 생명으로 채우는데 생명은 싸움의 결과물로 우리에게 주어진다” 이것을 이삭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삭과 리브가를 통해서 생명이라 하는 것은 두 세력과의 싸움의 결과로서 주어진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삭을 사용한 겁니다. 그러면 이 두 생명이 어떤식으로 싸우는가?
창세기 25장 23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창세기 25:23)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거꾸로 되어 있어요. 거꾸로. 처음에 A와 B가 태어나게 했다가, 처음의 A는 밑으로 곤두박칠치고, B는 위로 올라가는 이런 식으로 되는 겁니다. 먼저 된 자가 나중이 되고 나중된 자가 먼저 되며, 높은 자가 낮아지고 낮은자 높이 되는 이런 방식으로 무엇을 설명하느냐 하면, 생명이라는 것을 설명해요. ‘생명이란 바로 이것이다’ 하는 점을 설명하는 겁니다.
창세기 48장에 보면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에게 축복할 때, 두 팔을 나란히 해서 축복하지 않고(∥모양) 두 팔을 어긋맞게 해서 축복하죠(× 모양). 나란히 해서 축복하도록 하는 것은 요셉이 배치했죠. “아버지! 얘가 큰아들이거든요.” 하면서 야곱의 오른손쪽에 놓고, “아버지! 얘는 둘째 아들입니다.” 하면서 야곱의 왼쪽에 놓으면서 그렇게 하시면 된다는 식으로 배치했죠.
그런데 야곱이 엇갈리게 축복하는 겁니다. 요셉이가 “어~어~! 바뀌었습니다!” 야곱이는 “나도 안다. 다 안다” 해놓고 어긋나게 축복했습니다. 생명이 무엇인가? 생명이란 이렇게 될줄 - ∥모양의 방식으로 알았는데 결국 × 모양의 방식으로 엇갈린다는 그런 인식의 변화, 그것이 바로 생명을 아는 사람의 인식의 변화죠.
낮은 자가 높아진다는 것.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죠. “내가 들려야 한다.” 사람들 보기에는 무시하게 되었고 사람들 보기에는 비참하게 되었지만, 세상에서 가장 비참하고 낮아진 그분이 가장 높으신 분으로 오셨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로서 가장 낮게 오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기피하고, 사람들이 찾지 않는 그 낮은 곳이 오히려 생명을 떨어뜨리고 간 흔적이에요.
따라서 생명을 얻기 위해서 자기가 스스로 서기 위해서 사용하는 자신의 완력의 자리가 ‘와장창’ 무너져야 되죠. 그래서 야곱의 경우에 축복받기 전에는 자기 힘으로 하려고 하다가 축복 받고 난 뒤에는 자기 힘을 다 빼앗긴 상태가 됩니다. 그러면 뭐가 축복인가? 나는 내가가진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된 그것이 바로 축복입니다. 그것이 축복이에요.
그럼 당신은 당신의 힘으로 살아가지 않는다면 누구의 힘으로 살아가는가? 바로 그것이 생명의 힘이라는 거죠. 나는 내 힘으로 살면 죽을 수밖에 없고, 내 힘은 왕창 부서지고, 생명의 힘이 나를 살릴 때 그때 비로서 나는 산다는 것. 이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먼저된 자가 나중 되고 큰 자가 도리어 어린 자를 섬기는 이런 역전적인 상황이 벌어지는 겁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해보면,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높은 자를 먼저 태어나게 하시고, 즉 처음부터 A(야곱)를 처음 되게 하시고, B(에서)를 나중 되도록 태어나게 하면 되는데, 일부러 나중 될자를 먼저 태어나게 하시고, 먼저 된 자를 나중 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현재 인간이 알고 있던 생명은 생명이 아니고 죽음임을 알게 하려고 이렇게 하는 겁니다.
그럼 적들의 사고방식은 무엇이겠어요? A(먼저 된 자)가 계속해서 A(계속 먼저 된자 고수)되고 B(나중된 자)는 계속 B(계속 나중 된자로 고수)되게 하는 그런 방식이 바로 적들의 사고방식이죠. 자, 여기에 자식 두명이 이렇게 태어나게 되니까, 나중에 여기서 생명이 나오게 되는데, A를 에서라 봅시다. B를 야곱이라고 봅시다. 이때 A(에서)에 누가 붙느냐 하면 이삭이 붙게 되죠. 이삭이 에서를 좋아해요. B(야곱)에는 리브가가 붙습니다.
자식을 달라고 기도해 놓고는 가정파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사람이라 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주게 되면 그 주는 것을 통해서 자기의 모든 신앙도 다 깨져 버리고, 그 주는 것을 통해서 그동안의 은혜도 다 깨어지는 현상이 비일비재하게 생겨나는 겁니다. 차라리 없었더라면 싸우지 않을 것을.
형제간에 떡이 두 개 있을 때 사이좋게 먹다가 마지막 한 개만 남을경우에는 싸움이 벌어지죠. 하나님께서 완전히 가정이 다 깨어지게 만들어요. 완전히 가정이 분해되는 과정 속에서 복의 근원되는 이삭이 큰 실수, 아무것도 아닌 자에게 축복을 하는 그런 큰 실수를 하게 만들어요. 결국 이삭이 무엇을 모릅니까? 이삭은 생명을 잉태해야 될 사람이, 생명이 뭔지조차 전혀 모르고 있는 겁니다.
이삭은 생명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고, 리브가도 야곱을 택했습니다만 리브가도 야곱의 성격이 좋아서 한것 뿐이니 그도 역시 생명이 뭔지를 모르고, 특히 에서도 물론 장자 됨의 의미를 모르고, 야곱도 자기가 장자가 되려고 환장한 사람이지 하나님의 생명이 뭔지를 모르는 사람이에요.
네 식구 다 한결같이, 생명과는 상관없는 죽음과 연관 된 사람인 것을 전부 다 있는 대로 들통 내는 거예요. 있는대로 다. 그럼 생명은 뭐냐? 없지요. 그러면 생명은 뭐냐? 결국 하나님만 생명이고 인간들 집단에서는 어떤 경우에라도 생명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간에게는 생명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창세기 26장부터 이야기가 그런 식으로 흘러가는 거죠.
그렇게 흘러가는데, 창세기 26장에 보면 이삭과 리브가가 제2의 아브라함과 사라인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옛날 아브라함과 사라가 어떤 도시에 가서 자신들이 생존하기 위해서 사실은 부부지만, 남매간으로 위장해서 가만히 살려고 하다가 나중에 들통이 나서, 오히려 하나님을 모르는 자에게서 꾸중을 듣는 그런 현상이 일어납니다. 여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삭과 리브가가 부부가 아니고 남매인 것처럼 위장을 해서 들어갔다가 도리어 꾸중을 듣게 되죠.
(창세기 26:9,10)
9 이에 아비멜렉이 이삭을 불러 이르되 그가 정녕 네 아내여늘 어찌 네 누이라 하였느냐 이삭이 그에게 대답하되 내 생각에 그를 인하여 내가 죽게 될까 두려워하였음이라 10 아비멜렉이 가로되 네가 어찌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백성중 하나가 네 아내와 동침하기 쉬웠을 뻔하였은즉 네가 죄를 우리에게 입혔으리라
이것은 이삭과 리브가가 아무리 생명이 어떻고, 아무리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다 하지만 역시 인간에게 가장 기본적인 것은 살고보자는 겁니다. 살고보자. 오늘날 교인들의 마음가짐은, 그 마음속에서 외치는 것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살고보자. IMF전에는 ‘잘살아보자’였어요. 지금은 그냥 ‘살고보자’입니다. 이 정신으로 교회 옵니다.
그것을 목사가 탓할 수가 없어요. 왜? 목사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죠. 목사가 목회 하면서, 예수가 어떻고, 서로 사랑이 어떻고, 이웃 사랑이 어떻고 하면서도, 그런 내용의 설교를 하면서도 ‘나도 살고보자’는 것이니까. 너희만 사나? 나도 살자. 우리 같이 살고 보자. 모두 다 ‘살고보자’이다.
그런데 이삭도 그러하고 아브라함도 그러하고 사라도 그러합니다. 모든 인간이 살고보자는 그것이 사람의 가장 밑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위로를 받는 거예요. 아하! 위대한 이삭도 그랬었구나. 나만 믿음 없는 인간인줄 알았더니, 여기 믿음 없는 인간 또 있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지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다는 이유 때문에 이삭과 리브가, 아브라함과 사라에게는 막대하고, 예상치도 못한 놀라운 축복이 주어집니다. 양과 소의 증식이죠. 여러분들이 마태복음 13장에서 100배, 60배, 30배의 열매가 맺힌다는 이 말은 이미 농사꾼의 계산법에 이런것이 없어요. 그저 2배, 작년보다 약간 많은 1.5배. 이정도거든요. 이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직접 관여한다는 뜻이에요.
내가 예상한것을 거둔다는 뜻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적접 관여하기 때문에, 예상치도 못한 놀라운 일을 우리에게 추가적으로 부여해주시는 겁니다. 인간의 심리란 이렇습니다. 자기가 예상한대로 되면 기쁘지요. 하지만 아무리 좋은 것도 자신의 예상과 달리 새로운 것이 등장할 때는 이것이 기쁜것이 아니고 무서워요. 정말 굉장히 무섭습니다. 만약 시험볼때 시범적으로 “하나님 5번 문제를 모르겠습니다. 나중에 찍을테니까 그것이 시험 다 끝나고 난뒤에 정답이 되게 하옵소서 3번.”
그렇게 찍었는데 정작 그게 맞았다고 할때, “하나님!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이런 소리가 나오잖아요. 그런데 반대로 “하나님! 제가 시험지의 문제를 다 모르겠습니다. 다 모르니 다 찍습니다. ‘1.2.3.4’ ‘1.2.3.4’ 다 찍었습니다. 그 중에 한 10퍼센트만 맞게 해주세요.” 했는데 나중에 100점을 맞고 자기 반에서 일등을 해 버린 거예요. 이것은 하나님이 좋은 것이 아니고 무서워요.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그런 기도 안하겠습니다. 제가 하나님을 시험했습니다. 이럴줄 알았으면 내가 기도를 안했을겁니다. 차리라 빵점이 낫지. 이토록 무서울줄 몰랐습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볼 때는 사람은 공포를 느끼는 겁니다. 그게 누구냐 하면 삼손의 아버지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이 나타날때는 두려워서 오히려 하나님을 기피하는, 차라리 안만난 것으로 여기고 싶은 그런 두려움이 있거든요. 인간은 이 ‘살고보자’하는 이것을 기본으로 해서, 어떻게 이 ‘살고보자’ 하는 이 생명은 생명이 아니고, 어떻게 진짜 생명은 이 ‘살고보자’는 사람들에게 은혜로 주어지는가?
그 맛보기로 양과 소등의 가축들이 증식되는 거예요. 그 땅 사람들이 이삭을 볼때 놀래는 겁니다. “와! 이 땅에서 이렇게 축복받는 사람은 당신이 처음입니다. 당신같은 사람은 처음봤습니다 -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요즘 이런 노래 텔레비전 광고에 많이 나오대요.
이삭은 자기는 그냥 살려고 했을 뿐인데, 하나님께서는 예상치도 못할 축복을 주었다는 것은, 그것은 분명히 앞으로 전개될 사항이 단지 ‘살고보자’가 아니라 진짜 생명을 주실 것임을 암시하고 있는 겁니다. 자, 그러면 생명은 어떻게 주는가? (지금 갑자기 전기가 나가는 이유가 뭐죠? 하나님의 불길한 징조인가요? 강의를 멈추라는 징조인가요? “그만하라는 것 같습니다.” 아니에요. 좀 더 해야 됩니다.)
생명을 주기 위해서, 이쪽 동네는 전혀 생명이 아닌, 즉 생명이 전혀 없는 세계상을 다 보여줍니다. 추잡하고 더럽고 아주 속된 목숨들의 갈등. 이것을 다 보여주는 거예요. 생명과 다 관계없고, 네 식구가 서로 서로 자기 이득을 챙기는 이런 속된 모습을 완벽하게 보여주는 것이 그 뒤의 전개과정입니다.
아버지는 그저 자기가 먹고 싶은 별미를 원했고 그 사냥한 고기를 가지고 별미를 만들어서 아버지의 기분을 맞춰줄 수 있는 것은 둘째아들 야곱이 아니고 첫째아들 에서가 다 채워줄수 있었습니다. 27장을 봅시다. 이삭이 눈을 들어 축복을 해 주시는데, 에서에게 “네가 사냥한 고기로 별미를 만들어서 나를 기쁘게 하면 내가 너에게 축복하리라.”
그러니까 인간들은 자기취향에 맞는 사람을 오히려 더 선호해서 밀어주려는 그런 더러운 속성이 실체가 다 드러나죠. 그것을 누가 컨닝했느냐 하면 자기 부인인 리브가가 그것을 듣고, 자기사람 밀어주기 위해서 야곱에게 축복하기 위해서 배후에서 야곱을 다 조종합니다. 야곱은 리브가의 조종대로 목소리도 변조하고, 형처럼 털로 위장해서 축복을 가로채게 됩니다. “어머니! 제가 이래도 되겠습니까?” “나만 믿고 해라.” “알겠습니다.”
이렇게 단짝이 되어서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라는 것을, 인간적인 방식으로 쟁취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인간적인 방식으로 쟁취하려는 음모가 여기 다 들어 있죠. 이 모든 것이 사실은 하나님의 생명하고 전혀 관계 없어요. 관계가 없는데, 인간은 원래 하나님이 뭘 주시겠다고 하면 방법은 자기들이 구상하잖아요. 이런 더러운 것을 유감없이 다 보여주는 것이 창세기 27장의 내용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이삭이 눈이 어두웠을 때에 그때에 어떻게 했습니까? 그것을 야곱이 인간적인 방법으로 가로챘습니다. 가로챘을 때 그 근거가 뭐냐하면,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긴다”는 명분입니다. 분명히 맞지요? 큰자가 어린자를 섬긴다고 하니까 분명히 이 축복은 나에게 올것이지 형에게 갈것이 아니고 형은 결국 자신을 섬기게 되어 있다고 해석합니다.
누가 봐도 그것은 맞는 이야기죠. 그러데 그것은 맞는 이야기 아닙니다. 야곱은 그런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해서 자기 입장을 정당화시켰지요? 그렇게 하고 나니까 형이 나중에 그것을 알고, 죽이려고 하니까 그때부터 야곱은 형을 피해서 떠도는 생활을 한겁니다. 축복과는 전혀 거리가 먼 삶이죠. 형과의 원수가 되어서 떠도는 생활이 되는 겁니다.
자 이렇게 볼때 두형제가 날때부터 싸우는 목적이 뭡니까? 전부다 생명을, 하나님의 축복을 누가 더 가지느냐에 대한 더러운 짓거리를 보여주는 두 사람이 야곱과 에서입니다. 이 싸움은 어디까지 연장되느냐 하면 레아아 라헬, 이 두 자매간에 - 여자가 싸움이 더 무섭다니까요 - ‘누가 남편의 사랑을 빼앗아서 독차지 하는가?’의 치열한 싸움이 야곱과 에서의 제 2탄으로 벌어집니다.
차지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자식을 낳으면 남편이 내 사람이 되겠지’라는 것입니다. ‘자식낳기’ 입니다. 제가 지난 주일 저녁에 그런 설교를 했습니까? 여자가 남편 빼앗기는 기분이 어떤 기분이냐 하면, 마치 애들이 오댕을 먹고 있는데, 언니가 와가지고 그 오댕을 쏙 빼가 버리면, 막대기만 들고 있는 기분입니다. “이게 뭐고 이거! 이 가시나가!”
그러니까 “내꺼야!” 하는 것이 이유가 있는 겁니다. 남자는 여자들의 그런 기분을 몰라요. 남자들은 “내가 왜 네것이 되느냐. 나는 그냥 나인데.” 하지만 그것은 남자 생각이고 여자는 결혼과 동시에 행복이기 그 행복을 지키기 위해서는 곧 남편을 지켜야 된다는 거죠. 옛날의 결혼이라는 것은 결혼하면 곧 결혼이 된 것으로 알지만, 지금의 결혼은 처음에 결혼할때의 그 조건이 유지되는 조건하에서만 결혼 생활을 유지합니다.
만약에 처음에 결혼할때의 그 기쁨과 사랑이 없다면 항상 헤어질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 오늘날 현대인들의 결혼이에요. 그래서 작년까지만 해도 이혼율이 33%였는데 올해 들어서 통계에 보면 47%입니다. 두쌍중의 한쌍은 이혼을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결혼하신 분들은 지금 대단한 인내성을 가지고 있는 겁니다.
아직도 안헤어지고 있는 사람들은 보통 인내성을 가진분들이 아닌데, 그러나 인내성이란 항상 한계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니까 시간이 좀더 짧아진다, 혹은 길어진다, 그뿐이지 항상 그러한 가능성을 누구나 갖고 있다는 말입니다. 10년을 잘해도 소용없어요. 지금 잘해야 되고.
하여튼 레아와 라헬 이 둘간의 싸움에서 나온 부산물이 뭐냐? 열두 아들입니다. 왜 열두 아들인가? 하나가 죽었거든요. 하나가 죽어버리니 더 이상 경쟁상대가 없으니까 열둘에서 멈춘거예요. 하나가 죽어버렸는데 뭘 경쟁해요. 싸움의 대상이 있어야지. 그래서 열둘에서 멈춘거죠. 아마 살아 있었으면 열셋, 열넷, 계속 낳았을거예요.
이런 여성의 시샘, 질투, 한 남자에 대한 사랑을 놓고 서로 차지하기 위해서 싸운 인간의 모든 흔적이 열두 아들이에요. 이게 무슨 축복입니까? 이게 무슨 축복이에요? 이게! 인간의 더러운 흔적이지! 남편이 하나고 아내가 하나였으면 열둘을 낳았겠습니까? 남편 하나에 여자가 둘이기 때문에 생긴 사건이에요. 아내가 둘이기 때문에.
보통 우리 주변에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만, 남자가 결혼하고 난 뒤에 아내가 죽었다. 여자는 혼자 살수 있지만 남자는 혼자 못살잖아요. 그래서 새로운 여성과 결혼을 했는데 그 남자에게 이미 자식이 하나 있다. 결혼할 조건이 내 능력이 안되기에 자식을 더 이상 낳기 싫다. 전처의 아들이지만 잘 키울수 있으면 결혼 하겠다. 여자는 남자를 좋아하고 사랑하기에 꼭 내몸으로 난 자식이 없어도 된다고 여기고, 결혼만 하면 그만이라고 여기고 결혼을 합니다.
그러나 막상 결혼 하고 난 뒤에는, 전처의 자식을 몹시도 미워하는 거예요. “♬~신데렐라는 어려서 부모님을 잃고요~♬. 그 다음에 뭡니까? “♬~언니와 계모에게 구박을 받았더래요. 아샤~ 아샤~♬.” 그처럼 갑자기 결혼하고 난 뒤에는 마음이 휙 바뀌어 가지고, 자기도 자식이 있어야 겠다고 남편에게 우겨서 자기 자식을 낳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자식 하나가 둘이 되지요.
왜 그렇게 전처의 아이를 싫어합니까? 싫은 것을 어떻게 합니까? 그것이 정답이에요. 인간은 라헬과 레아의 본성에서 한발자국도 못 벗어남을 왜 오늘날 교인들은 몰라요? 자꾸 믿고 난 뒤에 성화된다고 예수를 본받자고 하는 짓이 전부 다 말짱 소용없는 짓이에요. 본받기는 뭘 본받아요. 인간의 본성이 어디갑니까? 인간 성깔이 어디 가요?
이런 것을 감춘다고 사람이 깨끗해지고 더 거룩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자기 주제파악을 끝까지 해야 돼요. 점점 더 자기의 죄를 파는 것이 주의 일이에요. 내가 지금 죄를 지하 몇 미터 까지 파들어 갔나? 그걸 파헤치는 그것이 성도의 생활입니다. 내가 예수 믿고 새사람 되었다고 하는데 새사람 같은 소리 하고 있습니다. 성질은 그냥 감추어 두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그냥 감추어 두면 정신병 됩니다. 우울증 생긴다니까요. 전처 자식을 미워하는 그런 것이 어디로 가는줄 알아요? 자연적으로 자기 아들에게는 “얘야 먹어라” 하지만, 전처 자식에게는 “우이 씨”가 나오게 되어 있어요. “위풍당당 --”에 보면 나오잖아요. 그 드라마 끝났어요? 끝났는지 어쨌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거 뭐 일부러 보겠습니까? 그냥 아내가 어쩌다가 틀어 놓으면 “그만 자자” 하면서 실눈 뜨고 약간 보고 뭐 그 정도죠.
살짝 보니까 ‘신데렐라’, 그 내용이 나오더라는 말이죠. 하나님께서 주시려는 것은, 예수님의 생명을 주려는 것이지, 우리 인간성 달라져서 구원하는 그런 하나님은 없습니다. 절대로 안 달라지지요. 안달라지는 것을 은혜로,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친다는 식으로 용서를 해주시지, 우리 성질이 바뀌고 그런것은 없습니다.
다만 다른 것은 뭐냐? 전에는 죄지어 놓고도 “뭐가 죄냐?” 라는 식으로 자기를 위장하는 사람이 이제는 조그만한 것을 봐도, “그래. 나는 그것 밖에는 안돼.” 하고 점점 더 자신의 실체를 알아가는 것. 그것이 남들앞에는 온유와 화평으로, 성령의 열매로 등장하는 거예요.“제가 이렇게 못났습니다. 제가 이렇게 부족한데 그래도 천당 가는 것만 해도 감사할 뿐이죠.” 이런식으로 달라질 뿐이지, 죄 안 짓는다든지, 완벽하다든지, 그런 것은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결국 레아와 라헬이 낳은 이 열두아들의 모습은 바로 옛날 인간적인 야곱의 작품이에요. 옛날 인간적인 야곱의 속성이 레아와 라헬이라는 이 속성으로 그냥 확대 된 겁니다. 야곱은 나중에 이스라엘로 바뀌죠. 문제는 야곱의 옛날 속성인 그 열두 아들은 아버지처럼 바뀌지 않는 다는 거예요. 나중에 바뀝니다만 이 열두아들의 속성은 당장에 아버지처럼 바뀌지를 않아요.
결국 이것이 축복은 아니에요. 하지만 축복이 되게 하죠. 그 자체가 축복은 아닌데. 그것은 죄악된 흔적인데 그 죄악된 흔적을 축복되게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작용, 그것이 하나님의 주신 생명이라는 거죠. 생명! 무슨 말인가 하면 생명이란 뭐냐? 죽음을 들춰놓고 생명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그 뒤에 등장하는 것이 생명이다 이말입니다.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기 위해서, 죄에서 너를 구원한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죄가 무엇인가’를 지독스럽게 깨닫게 하는 그 과정을 통해서 ‘죄에서 구원이 무엇인가’를 동행해서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라는 거죠. 그러면 야곱의 열두아들이 생산되는 그 과정부터 야곱은 야심이 있죠. 그 야심이란 자기는 축복의 근원이라고 합니다.
창세기 28장에서 갑자기 뭐가 나옵니까? 야곱이 잠을 자는데 사다리가 꿈에 나타나서 천사가 오르락 내리락 했지요? 그때 야곱이 큰 오해를 합니다. ‘나는 축복의 사람이다. 마땅히 하나님이 나에게 찾아 오셨구나. 따라서 나에게 축복이 온다면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생각했는데 이것이 큰 오해였어요. 하나님은 야곱의 그런 생각을 들어 주시는 분이 아니고, 창 28장 14절, 15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28:14,15)
14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서 동서 남북에 편만 할찌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찌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생각하는 그 뜻을 이루는 것이 아니고, 야곱에게 따로 준비한 뜻이 있습니다. 그 뜻을 이루기까지 떠나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그 뜻은 뭐냐 하면, 야곱으로 하여금 야곱이가 생각하는 그 축복이 얼마나 잘못된 축복인가를 다 들추어내기 까지 하나님은 야곱을 떠나지 않는다는 거예요.
지금도 우리는 어떤 상황이 되면 그 상황을 가지고 자기에게 가장 유리한쪽으로 자꾸 상상을 해요. 사람에게 제일 괴로운 것이 뭐냐? 자꾸 상상한다는 것이 자꾸 자기를 괴롭게 만들어요. 자꾸 꿈과 비전을 상상한다는 것이 오히려 그것이 자기를 괴롭게 한다 이말이죠. 복권을 왜 삽니까? ‘왠 종이? 이거 하나 살까?’ 이래서 사는 사람은 없어요.
그걸 사면서 온갖 꿈을 다 꿔요. 어떤 경찰관은 삼백얼마를 해가지고 사표 내고 산다는데. 그런것이 자꾸 상상에 추가되면서, ‘지금 이것이 곱빼기에 곱빼기가 되면 백 몇억이 될텐데 그걸 가지고 뭘 할까?’ 자꾸 상상을 하기 때문에 그 상상과 돈을 맞바꾸기 위해서 그것을 사는 거잖아요. 그러한 인간적인 모든 것이 어디서 나왔다?
그것은 축복의 근원이 아니라, 죄악의 근원, 바로 야곱이 본성상 가지고 있었던 잘못된 죽음의 근원에서 나오는데, 그 죽음의 뿌리를 뿌리채 뽑아 내면서 그것을 축복으로 전화시켜요. 축복으로. 이것을 축복으로 전환시키는 이것이 오늘날 하나님의 우리에게 대한 작용입니다. 우리는 자꾸 거룩한 체 믿음 좋은체 하지 마세요. 그냥 솔직하게 있는대로 다 털어 놓으세요. 어차피 뽑힐것인데 매도 미리 맞는다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속성을 낱낱이 다 끄집어 낼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기도할 때 만약에 목사를 안하고 소를 키운다고 한다면, 그러면 기도하란 말예요. “하나님이여! 작년에는 소가 일곱 마리였는데 이제는 바다의 모래같이 하늘의 별같이 소가 많아지게 해 주시옵소서. 이게 내 소원이니까 주시옵소서.” 저혼자 하라는 말이죠. 그걸 교회와서 하면 안되고요. 어차피 그런 마음이 들어 있는 이상 그런 기도밖에 할 수가 없어요.
그렇게 기도는 내 마음대로 하고, 그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까, 소 다 죽어버리고. “주여! 감사합니다.” 그게 기도의 응답이고 뭐 그런 거죠. 그걸 “아니야. 그러면 반대로 생각 해야돼. 하나님! 소가 다 죽어도 좋습니다. 나는 주님만 사랑합니다.” 아침에 보면 또 다 죽어 있어요. 그런 식으로 위장한다고 될 문제가 아니잖아요. 그런 식으로!
내가 먼저 매 맞는 흉내를 내면, 설마 미안스러워서라도 하나님께서 못때릴 거라고 여기는데 그런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냥 때려버립니다. 어차피 나올 거. 어차피 죽을 때까지 나와야 될거. 야곱이가 인간적으로 간파한 축복은 열두 자녀였고, 막대한 재산이었잖아요. 결국 하나님께서는 뭘 칩니까? 자녀를 치는 것도 아니고, 재산을 치는 것도 아니고, 야곱을 쳐버립니다. 야곱을 죽이고 이스라엘로 축복의 사람으로 태어나죠.
전혀 자신이 예상치도 못한,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하리라고 생각지도 못한거죠. 전에 생각했던 하나님의 일은 교회 일이지만, 다시 태어나 보니 교회 일이 아니고 진짜 축복인 예수의 일을 할 줄이야 누가 알았냐 말이죠. 교회일이 아닙니다. 교회일은 축복이 자기 노동의 대가가 될 수 있기 때문이죠. 교회가 아니고 예수님의 일을 하는 사람. 그 사람은 예수님이 축복해 주시고 예수님이 만나줘야 가능하지, 인간의 힘으로는 예수 일을 못합니다.
왜냐하면 예수의 일을 하면서도 자꾸 뭘 생각하느냐 하면, “제가 예수님의 일을 할테니까 제가 원하는 것을 주시렵니까? 아들이 없는데 아들을 주시렵니까?” 자꾸 그런 거래 같은, 자꾸 흥정을 하려는 그런 심보가 자꾸 생겨나요. “제가 예수 일을 열심히 할 테니까 병든 아내를 낫게 해주시겠습니까?” “행복하십니까?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 자꾸 이런식으로 흥정하는데 그것은 예수가 자기 목적달성의 수단에 지나지 않지요.
주님의 하시는 생명은 그저 우리 인간의 속성을, 그러니까 열두 자녀도, 재산도 다 소용없고 나 자신이 문제라는 겁니다. 내가 스스로 야심을 없애고 이제부터는 그 껍데기에 하나님의 축복 생명되시는 분이, 생명이 들어오는 그러한 인생이 야곱부터 바뀌고, 요셉이 바뀌고, 그 다음에 열두 아들이 다 바뀌는 것이 바로 창세기의 남은 일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야곱과 이삭과 아브라함이 천국에 이미 도착했다는 소식을 우리가 접했습니다. 그들이 과연 훌륭했습니까? 그들이 과연 완벽했습니까? 우리처럼 똑같이 부족하고, 자신밖에 모르는 철저한 이기주의자라는 사실을 우리가 알았습니다. 그러나 생명은 따로 있었고, 그 죄를 죄되게 드러나게 함으로써 우리에게 생명을 구체화 시켜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이제는 우리의 행위를 가지고 자랑할것이 아니라, 주님의 용서하심을 증거할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