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세대는 말할 나위 없고 기성세대의 기억에서도 잊혀져 있지만 지난 15일은 8·15광복 후 미군정하에서 창설돼 우리국군의 모체가 되었던 국방경비대(미군정 당국은 당초 국방경비대의 명칭을 ‘조선경찰예비대’로 명명하였으나, 우리나라 측에서 ‘남조선경비대’라고 호칭)가 탄생한 날이다.
국방부가 1984년 편찬한 ‘국방사’에 의하면 국방경비대는 당시 주한미국육군사령부의 뱀부(BAMBOO)계획에 의거, 국내치안 유지에 부족한 경찰력을 지원한다는 명목으로, 2만 5000명 규모의 병력을 책정하여 남한의 8개 도청소재지에 각각 1개 중대(장교 6명, 사병 225명)씩의 경비부대를 편성하게 되었다.
통위부(미군정기의 국방과 경비를 전담하던 기구. 오늘의 국방부) 산하기구로 하여 1946년 1월 15일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공덕리(태릉: 지금의 육군사관학교)에서 1개 중대(제1연대)를 창설한 것을 효시로, 8개 도청소재지에 각각 1개 중대씩을 편성하였으며, 제1연대본부에 남조선국방경비대 총사령부를 설치하고, 이들 부대를 관장하게 한 것이다.
해방이후 군대의 필요성이 화급한 시점에서 국방경비대는 우리 국군의 효시이기도 하다. 국방경비대 창설 주역 또한 우리 군의 최고 원로로 ‘6․25전쟁 영웅’이자 ‘살아있는 전설’로 일컬어져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군 고위 장성이나 주한미군부대에 부임하는 미 장성이라면 전장에서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한 전쟁 영웅을 한번 만나 보는 것만으로도 영광이요, 특히 그가 저술한 [군과 나],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나 [백선엽의 6․25전쟁 징비록]과 같은 책에 장군의 친필 서명을 직접 받게 되면 개인은 물론 가문의 영광으로 여길 정도로 감격해 한다고 한다. 필승불패의 노(老) 장수(將帥) 백선엽 장군을 두고 하는 말이다. 백선엽 장군은 현재 몇 분 계시지 않은 미군정 군사영어학교 출신으로 창군동우회 회원이다.
창군동우회는 해방 직후 서울에 세워진 군사영어학교 출신 간부들의 모임이다. 군사영어학교는 미군정 당국이 장차의 주한 미군 감축 및 철수에 대비해 한국에 미국식 군사제도와 교리에 입각한 토착군사력을 양성하고자 영어를 이해하는 간부요원을 확보하기 위해 1945년 12월 5일 개교했다.
이듬해인 1946년 4월 폐교 전까지 110명이 졸업해 장교로 임관되었고, 나머지는 남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 제1기로 편입되었다가 임관하였는데, 이들 창군동우회원들은 국군의 창설과 발전에 큰 발자취를 남겼을 뿐만 아니라 소련군의 사주와 중공군의 지원을 받아 북한 김일성이 불법 남침을 개시한 6 ·25전쟁에서는 자유대한민국을 지켜내는데 결정적 공훈을 세웠다.
그러나 세월의 흐름에 따라 창군동우회원도 몇 분 생존해 계시지 않는다. 창군 과정부터 6․25전쟁과 산업화 과정을 거치며 사회적 공헌도가 크신 분들임에도 불구하고 사회변화와 여건에 따라 이 분들에 대한 사회적 관심도 덜해질 수밖에 없었다.
창군동우회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거동에 크게 불편이 없는 회원들을 중심으로 국방경비대 창설 일이자 창군동우회의 날인 1월15일이면 전쟁기념관에서 모임을 갖고 이 날을 기념해 왔다. 또 이 날이면 재향군인회장이 참석해 향군의 안보활동을 설명하고 국군탄생의 산파역을 해온 창군동우회원들의 노고에 감사와 경의를 표하면서 국가적 지원을 위한 노력을 기울여 왔다.
▲ '창군동우회의 날' 기념행사의 한 장면. 사진은 2011년 1월 전쟁기념관 뮤지엄홀에서 열린 기념 행사에 참석한 당시 박세환 대한민국재향군인회장(사진 왼쪽 맨 앞)이 백선엽 대장 등 원로들과 오찬을 겸한 환담을 하고 있다. 백선엽 대장 한 사람 건너는 故 강영훈 전 국무총리. ⓒkonas.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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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들도 세월의 무게는 비켜가지 못하고 있다. 1946년 4월 110명이던 회원들은 지난해 황헌친 장군의 사망으로 현재 해외 거주 임선하 장군 등 단 네 명만 생존해 계신다. 모두 90세가 훨씬 넘은 연세와 연로함으로 창군동우회의 날 모임은 중단되고 최고령임에도 백선엽 장군만 전쟁기념관 사무실을 나오는 것으로 알려진다.
향군에 의하면 이번 1월15일 창군동우회의 날에도 행사를 할 수가 없어 창군동우회원 분들 앞으로 건강식품을 전해 드릴 계획이라고 한다. 군과 국가를 위해 평생을 바치고 이제는 조용히 역사의 뒤안으로 물러나는 군의 예비역 최고 선배님들을 끝까지 잊지 않고 예우하는 향군의 모습이 더 미덥고 다감함으로 다가온다.
10년이 훨씬 넘는 이전부터 기자는 창군동우회 기념식이나 행사가 있을 때면 자주 행사장을 찾았다. 그 분들의 말씀을 귀담아 들으며 기사화 했다. 노(老) 장군들의 말씀은 늘 한결같았다. 오직 군과 국가의 안위를 염려함이었다. 그러면서도 한편 국가에 서운해 하는 마음도 있었다.
기자가 더듬어 본 2011년 1월14일 열린 창군동우회의 날 행사에서 지금은 고인이 되신 미국 공로훈장을 받으신 한분이 이런 말씀을 기자에게 했다. “몇 년 전 미국을 가면서 그 훈장(미 공로훈장)을 가슴에 차고 갔는데, 공항 입국장에 들어서자 입국장 직원이 나를 보더니 차렷 자세로 서서 거수경례를 하더라. 나에게 경례를 한 것이라기보다는 그 훈장에 대한 경례로 보였다. 그리고 그 직원은 다른 어떤 심사도 생략한 채 프리패스로 나를 통과시키며 정중하게 안내해 주는 것을 경험했다”고 말하면서 자국(自國) 훈장을 받은 외국인까지 존경하는 미국사회를 보고 느낀 게 많았다고 얘기를 이어갔다.
그러면서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 무공훈장은 겨우 한 달에 얼마 주는 요식 행위에 다름 아니다. 우리나라 어디 기관에서도 훈장은 주민등록증이나 운전면허증 보다도 못한 대접을 받는다. 이런 푸대접이 어디 있느냐”하며 탄식도 잊지 않았다.
그해 백선엽 장군께서도 예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좌중을 향해 말씀을 꺼냈다. 백 장군께서는 6․25전쟁 당시 한 전투에서 겪었던 어려웠던 상황을 예로 들며, 청와대서 열린 국가 안보정책과 관련한 국민원로회의 석상에서의 발언 내용을 소개하면서 “군 생활을 마치고 일직 전역하는 장교와 하사관의 재취업 문제, 엄동설한에도 나라의 파수꾼으로 진력하고 있는 장병들에 대해서도 국민의 성원과 위문이 있으면 좋겠다고 (대통령에게) 요청했다”고 말했다. 오직 국가안보와 후배 장병들을 염려하는 백전노장의 심경이 어떤 것인가를 읽게 했다.
그런데 지난 2012년 10월 당시 야당 비례대표이던 김 모 국회의원이 백선엽 장군을 ‘민족 반역자’라고 폄훼해 군과 예비역은 물론 절대다수 국민의 반발을 크게 사기도 했다. 이에 당시 장성출신 의원들이 기자회견을 갖고 김 의원을 강력히 성토하기도 했다. 그 해 김 의원은 백 장군이 만주에서 독립군을 토벌했다며 그 근거로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백 장군이 포함됐기 때문이라고 밝혔었다.
그러나 이에 기자회견을 가진 황진하, 한기호, 정수성, 송영근 의원 등은 “백 장군은 독립군을 토벌한 바 없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며 김 의원의 발언을 규탄하고 사과를 촉구하기도 했다.
이제 우리 국군의 모체 국방경비대 탄생의 산파역할을 다 했던 군의 대 원로 창군동우회원들은 지난 2016년 강영훈(육 중장) 전 국무총리와 김계원(육 대장) 전 박정희 대통령 비서실장이, 그리고 2017년 황헌친(육 준장) 전 1군사령부 참모장이 세상을 떠나면서 백선엽 ․ 김웅수 ․ 김종면 ․ 임선하 장군 네 분만이 창군동우회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konas)
이현오 / 코나스 편집장. 수필가(holeekva@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