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흥사의 직제 명칭에 도섭리 (지금의종정) 내산섭리 좌우교정 대선의 상강의 이무(理務=지금의 총무?) 등이 있는데 이는 지금의 일본에서 통용하는 사찰의 직제 명칭이다
종로구 창신동 128 -3번지와 종로구 지봉로 73 번지에 있었던 원흥사가 지금은 창신초등학교 가 되어 있다 이절을 대한제국이 비용을 대어 창건 했는데 원래는 영미정이라는 별장이었다고 한다 - 불교신문 2016년 1월 13일 수요일 판 <한국불교 100년 발자취를 찾아서> 참조-
** 구한 말에 요리집이나 기생집은 무슨 무슨정이라고 하였다 영미정도 기생집이나 요리집 이 아닌가 싶다**
원흥사는 1899년 창건 인데 1년전인 1897년에 대한제국이 선포되었다
불교를 탄압하던 이씨왕조가 대한제국을 선포한 후 제일 먼저 한 것이 당시돈 20만냥(지금돈 으로 대충 2천억원)을 들여서 절을 창건 했다는 야그다 왜 그랬을까 ????
메이지일본에 합병된 이씨조선이 메이지가 점령하고 있는 필리핀이나 대만 인도 차이나 반도를 기반으로 하여 대한제국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신분상 하인에 불과하던 왜놈들이 고종을 황제로 만들고 자기들이 황제 다음의 서열에 올라선 것이다 이른 바 공작 백작 후작 남작 등등으로 신분상승 한것이다
당시 고종은 제국이라는 명칭을 쓸 형편이 못 되었지만 메이지 왜놈들의 점령국을 제후로 삼고 메이지의 힘으로 황제가 된 것이다
불교신문은 원흥사 가 메이지 왜색불교의 한반도 진출을 막아내는 목적으로 세워졌고 이곳이 조선불교의 총본산이라는 논지를 전개 했지만 그러나 원흥사의 일본식 사찰직제 명칭 때문에 이는 설득력을 잃는다
매일신보는 1910년 10월 6일자에서 '' 동대문 밖에 있는 원흥사는 불교 원종 종무원이라 개칭 되다 ''' 라는 기사를 실었다
1912년에는 원종 종무원을 폐하고 30본산 회의소로 개칭 되었다
원종이라는 종단은 친일파 종단이니 메이지 일본 조동종 것이고 30본산 회의소라는 말도 메이지 일본이 한반도 땅에 건재한 대가람들을 일본승려들로 하여금 강탈케 하려고 만든 단체이다
기관단총으로 무장한 일본 헌병과 일본인 승려가 한반도 여러 사찰들을 찾아가 '' 여기는 오늘 부터 우리가 접수하니 양도해주시오'' 이것을 하기 위해 만든 단체가 30본산 회의소 라는 야그다
기관단총이 무서워 한반도를 버리고 북쪽으로 길을 떠난 한반도의 스님들은 북방 대승불교 부라트야 유발승들이다
메이지 왜놈들은 지금의 일본열도와 지나남쪽 섬에 살던 사람들로 왕의 백성에 들지 못하는 백성들이다
이들은 주로 해적이 되었다
메이지 왜놈들이 서양세력의 지원을 받아 총을 가지게 되자 북방 대승불교왕조들의 지배를 거역하기 시작했다
차이나 대륙은 쑨원의 신해혁명으로 삼민주의 정치가 시작되니 청왕조가 붕괴되고 이 왕가는 한반도로 거점을 옮기어 대한제국을 만들어 왕정을 계속했다 메이지 왜놈들의 꿈을 이루기 위해 대한제국이 탄생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일본 조동종의 한반도 진출거점이 원흥사 인 것이다
위 불교신문은 대구에서 활약한 유명가수 김광석이 창신초등학교 출신이라고 하면서 1941년에는 창신국민학교라고 했고 1971년에는 명신국민학교라고 했다고 소개한다
이렇게 역사의 변천을 거친 창신초등학교는 그 전신이 원흥사였다가 원종 종무원이 되었고 신해혁명이 일어난 다음해인 1912년에 원종종무원을 폐지하고 삼십본산 회의소가 되었다가 1916년 문을 닫고 능인학교를 계승한 창신보통공립학교가 되었던 것이다
위 불교신문은 대한제국의 주체를 오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대한제국을 만든자들은 메이지 야쿠자들이다
고종을 꼭두각시로 내세워 고종의 브랜드를 이용해 신분상승을 하고 한반도에서 왕정을 계속하려는 시도가 대한제국 였다는 것을 간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모두 이씨 왕조의 마지막 왕궁 경복궁이 있었던 호북성 무한에서 한반도로 이주 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지나대륙에서 왕정이 붕괴 되고 선거로 대통령을 선출하는 혁명의 태풍을 피하고자 한반도로 이주한 것이다
지방토호의 의 별장 이든가 아니면 기생집 내지 요리집 이였던 영미정을 매수해 만든 원흥사는 한반도 조선승려들을 대적하는 일본승려들의 거점을 목적으로 만들어 진 것이지 조선불교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위 불교신문에는 이런 기사가 있다
1909년 5월 3일 일본헌병대의 경성지방 집회 상황보고(헌기 제 926호)
'''' 경성지방의 승려들이 요사이 동대문 밖 원흥사내에 집회하여 협의 중'' 이라고 하면서
''' 오늘에 이른 우리 한국의 기초를 완전하게 존재케 한 것은 승려들의 공이기에 따라서 우리한국도 일본처럼 나라의 종교를 불교로 통일하여 일본을 본 뜨고자 하여 정부에 이 종교 포교의 인가를 얻기로 결정하고 운동방법에 대해서 연구중이다'''
일본헌병은 식민지 한반도의 정보기관이자 통치기관이다
이들은 일본도와 권총 그리고 자동소총 그리고 오토바이 와 찝차를 가지고 있는 당시로선 독일의 게슈타포와 맞먹는 최강의 무력 통치기구였다
이들이 원흥사에서 가진 친일승려들의 회의 내용을 정보수집한 것이다
당시에는 기독교가 조금 있었고 대부분 단군 대종교 그리고 칠성 산신 제석등 토속종교였다
이들은 모여서 여타 종교를 배격하고 오직 일본식 불교로 한국의 종교를 통일하자고 결의 한 것이다
경술국치 한일합방 전의 한국승려들은 일본의 공포정치에 굴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승려들도 무술실력이 있었지만 메이지 야쿠자들이 자동소총까지 가지게 되자 모두 굴복한 것이다
첫댓글 불교라는 종교에 대한 많은 지식을 이곳으로부터 배우고 있습니다.
통상적인 불교에 관한 지식밖에 없었는데, 은밀한 내면적인 불교에 관한 것들을 설명해 주시니 아주 이해가 빠릅니다. 감사드립니다. 또 늘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새해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최남석 선생님 평안 하신지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한양 삼각산 자락의 조계[漕溪], 이 곳에 있었던 조계사[漕溪寺], 이 조계사[漕溪寺] 옆에는 폭포수가 있어서 은하의 물보라를 사시사철 흩날려습니다.
반도에 있는 거의 대다수 가람들의 명칭은 과거 일제의 고찰 조작의 산물 입니다. 선풍을 드날렸던 옛 고승들의 발자취를 역사를 따라 찾아가노라면, 일제의 불교 역사 왜곡이 그대로 들어나게 됩니다.
왜 한국 불교는 이러한 일제의 불교에 대한 왜곡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까 ? 참으로 안타까움이 많습니다.
무상대도 [無上大道], 정법안장 [正法眼藏]의 서릿발 같은 심법[心法]은, 무상무득[无喪无得] 세속의 진애를 한줌에 날려 버릴 수는 없는 것일까 ?
해인사가 어찌 반도에 있을 것이며, 금강산 오대산이 어찌 반도에 있을 것이겠습니까 ? 금강산의 유점사와 장안사는 지금도 옛 자태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도총섭 청허의 삼각산 천길 암벽에는, 서산대사 청천백일의 자취가 그대로 흐르고 있으며, 가람 또한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새해를 맞이하여, 봄의 정령을 따라 선풍이 다시 드날려, 고찰의 연원과, 옛 선사들의 본원이 다시 돌아 오기를 축원해 봅니다.
감사 합니다 세해 건강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