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누나랑 고향 마을 콧바람쐬러 와서ᆢ심봤다~ 옛 서낭당으로 오르는 길을 따라 걸어 오르는데 내 앞서 간 누나에겐 눈에 띄지 않고 내 눈에 띈 것으로 보아 그날은 산신령님께서 내게 더 많은 사랑을 내려주시려고 했나 보다. 저 정도 크기의 더덕이면 적어도 5년 안팎 성장기를 거친 중간 크기의 더덕 순이다.
어린 시절 저렇게 물이 고여 있는 곳에 가을이면 낙엽이 쌓여 겨울잠을 자려고 개구리들이 모여든다. 그러면 마을 사람들은 모여서 개구리를 잡아서 튀겨도 먹고 매운탕처럼 끓여 먹기도 하고, 화롯불에 구워 먹기도 했다. 개구리는 단백질 밀도가 높아 산골 사람들에겐 겨울철 보양식이었다. 우리 집 뒤 밭을 따라 내려오는 작은 도랑에 모여든 개구리는 모두 내가 잡아 와 엄니에게 착한 막내로 자리매김했으니, 어린 마음에도 개구리나 가재를 잡아 오는 날에는 왠지 어깨가 으쓱 올라가곤 했다. 진정한 효자였다.ㅋㅋ
취나물이다. 산나물 중에 향기가 좋기로 으뜸이다. 미물에 가까운 녀석이 어찌 좋은 것은 알아가지고 일찍이 찾아와 시식하고 떠났다. 이 또한 생명체가 살아 숨 쉬는 자연의 질서여서 그들이 먼저 먹은 뒤 내 몫으로 남겨 둔 것에 감사했다. 오지 마을에 가서 계곡 물에 씻어 벌레 먹은 부위도 버리지 않고 쌈을 싸 모두 맛있게 먹었다.ㅎ
하늘로 돌아가신 뒤에도 늘 동행하는 울 엄니 울 아버지. 작은 사진은 내 초등학교 시절 부모님 모습이다. 늦둥이 막내로 태어나 요즘 같으면 아이들이 할머니 할아버지니? 하고 놀려댈지도 모르겠다. 당시에는 자녀를 많이 둔 학부모들이 많았고 당연히 학부모 평균 연세들도 높았으니 그저 평범한 가족 구성원이었다. 요즘처럼 화장품이 있었나, 일이 곱기나 하나. 매일 땡볕에 그을리고 험한 농사일에 피부를 가꾸는 건 사치에 가까워 생각조차 하지 못하니. 아프리카나 동남아나 중남미 일부 국가들의 삶을 다루는 다큐에서나 볼 수 있는 모습이다. 당시 엄마 아버지 연세가 오십 대 중반이었다. 돌아보면 그때가 고생스러웠어도 마음속에 행복지수는 더 높았다.ㅠㅠ
고향 마을 산에서 딴 몇 개의 두릅을 오지 마을에 가서 즉석에서 데쳐 큰누나가 씻고 있다. 큰누나는 나를 키우다시피 해 제2의 엄니나 다름없다. 엄니가 농사짓는 짬짬이 장사를 다니셨기에ᆢ지금도 큰누나가 나를 가장 많이 아낀다. 착하게 자라서일까? 삼 남매를 두어 두 녀석은 제법 규모가 있는 사업체를 운영하고 가운데 양념 딸은 공직에 근무하며 사위는 공기업에 다닌다. 웃긴 게 누나 딸과 작은형네 큰아들이 동갑인데ᆢ누나 딸이 생일이 빨라 찍소리 못하고 누나라 부른다. 2월, 9월이니 거의 한 살 차이다. 근데 작은형네 큰애가 자기네 회사에 34살 먹은 노총각이 있다고 30살 노처녀인 누나네 딸을 소개해 결혼했다. 누나네 딸 신랑은 부장이고 작은형네 조카는 차장이라 모두 구조 조정 감원 1순위다. 그러고 보면 정년이 없는 내가 걸어 다니는 20억 동산이나 다름없다.ㅋ
점심을 큰누나는 누나 대로, 나는 나대로 밥과 양념장을 준비하고ᆢ과일이랑 라면이랑 달걀은 내가 가지고 갔다. 각자도생이다.ㅋ 실은 내가 된 밥, 매운 음식을 좋아하지 않아. 누나는 심마니처럼 아주 실용적으로 비닐에 밥을 싸 왔고, 나는 밥그릇을 그대로ᆢ엄니 모시고 전국 일주 다닐 땐 차 안에 침구, 좌식 의료용 소변기, 구급약, 기본적인 취사 도구 등 캠핑카나 다름없었다. 그랬기에 마음이 내키면 목적지도 정하지 않고 마음 편히 떠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참 많이 돌아다녔다. 제주도를 며칠 돌아볼 때도 차를 배에 싣고 갔다 왔으니 말이다. 언제 누나도 데리고 다녀야 마음 빚을 갚는데...
어린 시절엔 방학이나 휴일에 엄니 따라 산에 많이 다녔다. 성적인 조숙은 아니어도 어려서도 키가 큰 편이어서 아버지 지게도 잘 지고.
큰형하고 소여물을 작두로 썰며 힘에 부쳐 울기도 하고, 아무리 어린애가 잘한다고 해도 힘이 달리는데 옥수수 짚 볏짚 콩깍지 등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형은 편안히 앉아서 짚을 먹이고 나는 위에서 작두를 디뎌야 썰어지는데, 누가 더 힘들까. 아무리 먹이는 일이 더 위험하고 기술이 필요하다지만, 어린것이 여물 썰다가 힘들어서 우니 그제야 형이 쳐다보고 "좀 쉬었다 하자" 했다. 그때 서러웠던 생각이 잊히지 않아서..ㅎ
아버지 따라서 나무하러도 곧잘 따라가곤 했는데, 기억으론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한 기억이! 요즘은 여물도 기계로 써니 작두가 사라졌지 싶다. 나는 막내라고 특별히 보호받고 오냐오냐 크질 않아 어린 시절 엄마 아버지께 진 빚이 많지 않다고 하면, 엄니가 웃으면서 "너야 무슨 속을 썩였나" 하셨다.
휴일이나 방학이면 냇가에 나가 물고기 개구리 가재 등 잡아다 엄마에게 드리고, 바늘 훔쳐다가 낚싯바늘 만들어 낚시도 잘하고,(내가 좋아서 하긴 했지만ㅎ) 바늘 때문에 엄마한테 말은 많이 들었다.ㅋ 그래도 물고기를 잡아다 드리니 "또 바늘 가져다가 했지?" 하며 눈을 흘기면서도 나무라지는 않으셨다.(바늘 값은 충분히 했기 때문이다!ㅋ) 바로 위 누나랑 딸기랑 오디랑 따러 다니고ᆢ새 사냥은 기본이고 토끼 사냥, 꿩 사냥 등 남자애들이 하는 놀이는 빠지지 않았다. 내가 부모님께 늘 고맙게 생각하는 것 중 한 가지는 '나를 산골에서 낳아 주셔서 마음껏 뛰어놀고 자랄 수 있었다'는 감사함이다. 그래서 도시에서 태어나 성장한 사람들과는 정서적으로 맞지 않는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 아버지 따라 산에 나무해놓은 것 지게에 져서 나르다가 안방 부엌 앞마당에 세워둔 커다란 김장독을 건드려 항아리가 넘어지면서 폭삭 깨져서 아버지가 지겟작대기를 내 허리 높이까지 들었다가 그냥 놓았다. 요즘도 마찬가지지만 당시에도 어른이 안아도 한 아름쯤 되는 김장독 항아리는 꽤 비쌌는데, 그걸 깨트렸으니 얼마나 속상하셨을까. 겁이 나서 삼십육계 줄행랑을 쳐서 타작을 앞둔 논에 열십 자(+) 형 볏가리 사이에 기대앉아 억울해(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나름 아버지를 도와드리다가 저지른 실수인데) 훌쩍이는데, 우리 집 토종견인 메리가 찾아와 끌어안고 위로받으면서도 밤이 늦도록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가 꽤 늦은 밤(아홉 시?)이 되어서야 뒤란 울타리 사이 쪽문으로 들어가서 윗방 문을 살며시 여니, 엄니가 그때까지 양말을 꿰매며 기다리고 있었다.
엄니가 차려준 저녁이자 밤참을 먹고, 아버지는 사랑방에서 주무시고... 그래도 엄닌 항아리 얘기는 하지 않으셨다. 그런 모습을 보면 우리 엄닌 참 어질고 자식들에게 험한 말 한 번 하지 않으신 신사임당 감이었다. 아버지도 마찬가지였지만ᆢ그 뒤 여름 방학에 뱀을 잡아다가 마을 약수터 근처에서 요양하는 사람들에게 뱀탕을 파는 내 친구 집에 가져가 팔아서 당시로는 몇천 원(작은 돈이 아님) 되는 돈을 엄니에게 가져다 드린 추억이 새록새록하다. 당시 독사 한 마리에 5백 원, 유혈목이(꽃뱀)는 3백원, 구렁이는 2.3천원 했던 기억이ᆢ항아리값이라고.ㅋ 70년대 얘기는 밤을 새워도 끝이 없을 듯해ᆢ이만ᆢ😄😭
이 나무들은 사진에서 보기와 다르게 내가 안아도 팔이 한참 모자란다. 내가 어린 시절 엄니 따라갔을 때도 지금이나 별 차이가 없었다. 아마 적어도 이백 년 이상은 되지 않았을까 싶다. 찾아갈 때마다 안아주고 인사를 한다. 같은 거리의 선상에 있는 누나와 나무의 표면적을 보니 나무의 크기가 실감 난다. (아래 사진)
2001년식 나의 애마인 1세대 스타렉스. 첫사랑 연ㅇ이를 비롯해 나를 찾아 춘천에 놀러 온 수많은 친구와 동행하기도 하고ᆢ가장 많이 사랑받기까지는 엄니와 내가 준 사랑이다. 주인 겸 주치의를 잘 만나 배출가스 5등급 신분이지만, 아직 매연 10% 안팎으로 유지하며 엔진소리도 조용하니 착하게 잘 굴러간다. 5등급이라는 호적 때문에 수도권엔 감히 얼씬도 할 수 없지만, 엄니랑 같이 전국(서해안고속도로-남해고속도로- 동해안 7번 국도 통일전망대는 기본이고, 임도(林道)를 따라 대관령 능선도 올라다녔고... 심지어 완도에서 배를 타고 제주도까지 건너가서 섬을 누볐다.)을 누비며 동고동락한 정이 들어 자동차가 고향으로 갈 때까지 같이 지내려 한다. 현재 누적 주행거리는 19만 좀 안 됐다. 늘 고맙게 생각하며 가끔 대견하다고 울 엄니가 하시던 대로 차 궁둥이를 토닥여 준다. ㅋㅋ
오지 마을로 넘어가는 고갯길에 개복숭아 나무에 분홍 꿈이 영글었다. 얼마나 고개가 가파른지 진입로에서는 2단 기어로 조금 오르자, 1단 기어로 바꾸곤 걸어가는 속도로 오르며 앞 좌우 유리창을 모두 내리고 오지 마을 자연이 베푸는 오월의 선물을 다 받으며 넘어갔다.
돌아오는 길에 잠시 작은누나네 집에 들렀다. 마침 양수기 펌프가 고장 나서 서비스센터에 가려던 참이었다고 누나네 차인 스포티지 뒤에 실렸던 펌프 모터를 분해하여 수리해 줬다. 적어도 5~7, 많게는 10만 원 정도 아꼈다.ㅎ 누나들이 가까이 있어 도움받는 점도 많지만, '교환가치'로 환산하면 내가 훨씬 밑지는 장사다.ㅋ 양수기 펌프 해결해 주고 얻어먹은 저녁밥 메뉴ᆢ예고도 없이 찾아갔는데 누나는 내가 좋아하는 나물 종류의 반찬과 닭 다리 볶음 탕에 호박죽까지 덤으로 차려줬다. 오늘은 그런대로 괜찮은 장사였다.ㅎ 웃자고 하는 얘기다. 누나가 챙겨 주는 것들이 훨씬 많다. 물도 늘 누나네 집에 가서 길어다 먹고 가끔은 반찬도 챙겨 주고 하니 형제간이라도 마음 빚이 크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고작 누나네 자동차 두 대와 각종 농기계와 기기들 손봐주는 것밖에 없기 때문이다. 작은누나는 아들만 둘이다. 둘 다 대기업에 근무하는데 계열이 달라서 큰애는 전문계 고고 졸업 후 기술사관으로 근무하다 한화조선해양에 직장이고 작은애는 같은 학교에서 공부했지만 국제기능올림픽 메달리스트로 HD조선해양에 스카웃되어 직장에서 장학생으로 대학까지 나와 지금 중간관리자다. 지금 이순간 중요한 건 나를 엄마처럼 돌봐준 큰누나보다 내 입맛(맵고 짜지 않고 삼삼하게)에 맞는 반찬을 해 주는 작은누나다.ㅎㅎ
첫댓글 (26.07.04) 사진 하다 메모 정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