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욕의 나날들 - 3
'때르릉 때르릉.' 두어 번 신호가 가자 피로한 듯한 허열의 목소리가 들려 왔고,
전화의 주인공이 장인 어른인 것을 안 그는 화들짝 놀라며 용건을 물었다.
"아버님, 웬일이십니까? 이른 새벽부터."
"시간 없다. 듣기만 해라. 지금 너의 요원들을 출동시키는 데 시간이 얼마나 필요하겠느냐?"
"5분이면 모두 연락이 닿습니다."
"그럼 세 명만 불러서 청계천 7가의 청계 호텔 711호로 보내거라. 거기에 가면 기사키 하쓰요라는
일본 여인이 투숙해 있을 것이다. 무조건 체포해서 수원 공장 지하 창고에 감금시켜라.
그리고 즉시 내게 보고해라."
"알겠습니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허열은, 아직도 입원 중인 남성우를 제외한 최일우 등 세 명의 요원을 긴급으로
호출하여 청계 호텔로 파견 시켰다. 그리고 자신도 정신 없이 옷을 갈아 입고 권총을 품에 넣은 채,
청계천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기사키 하쓰요?"
도대체 이 일본 여인은 누구이며 왜 긴급 체포 명령을 내리는 것일까?
왜 연행 뒤에 기관으로 데려가지 않고 공장 지하 창고에 감금하라는 것일까?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났지만, 우선은 지시 사항을 먼저 이행하는 것이다.
청계 고가 도로를 타고 맹렬한 속도로 달리던 허열의 승용차가,
마침내 청계 호텔에서 신경질적인 급브레이크의 파열음을 내며 멈추어 섰다.
로비에는 이미 부하들이 와 있었고, 지배인을 앞세워 투숙을 확인하고 있었다.
"어떻게 됐나?"
"지금 기사키 하쓰요는 객실에 투숙 중입니다."
"가자."
허열이 지배인의 마스터 키를 빼앗아 들고 먼저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최일우!"
"네."
"똑똑히 들어라. 기사키 하쓰요를 체포해서 수원 아버님 공장으로 데려가라.
공장에는 연락이 가 있을 것이다. 지하 창고가 하나 준비되어 있을 텐데,
저 여자를 그 곳에 감금시켜 놓아라. 서울에서의 잔무가 끝나는 대로 내려가겠다."
'덜컹' 성능 나쁜 엘리베이터가 멈추어 섰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 최일우를 비롯한 특수대 요원들이 711호를 향해 우르르 몰려갔다.
마스터 키를 넘겨 준 허열이 복도에서 팔장을 낀 채, 날렵하게 움직이는 부하들을 지켜 보며 서 있었다.
객실 문이 열렸다.
한 여인이 모포를 머리까지 뒤집어쓴 채 누워 있었다. 인기척에 놀랐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가 채 입을 열기도 전에 사내들이 난폭하게 달려들어 수건을 집어넣고 테이프로 입을 막아 버렸고,
요원 하나가 손목에 수갑을 채웠다.
일어에 능숙한 최일우가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죽이지는 않는다. 그러니 걱정할 거 없어. 몇 가지 조사가 끝나 협의가 풀리면 석방시켜 준다.
우린 한국 기관원인데, 너에게 밀수 혐의의 제보가 들어왔어."
여인은 끌려나와 호텔 현관 앞에 주차해 있는 검은색 지프에 실려졌고,
지프는 다시 수원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호텔에 도착하여 기사키 하쓰요라는
일본 여인을 체포, 이송시키는 데 정확히 20분이 소요되었다.
청계 호텔을 빠져나온 허열이 장충동 새 본부 사무실로 돌아온 시간은 정확히 6시 20분이었다.
그는 삼선동의 장인 노범호에게 결과를 보고했다.
"지금 막 작전을 끝내고 장충동 본부로 돌아왔습니다."
수화기에서 약간은 상기되어 있는 노범호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차질은 없었겠지?"
"물론입니다. 이름도 데스크에서 확인했구요. 711호로 뛰어들어가 체포에 성공,
지금 막 수원으로 내려보냈습니다."
"저항은 없던가?"
"저항받을 틈도 없었습니다."
"좋다. 수고했다. 오후에 다시 전화하겠다. 요원들은 수원에 대기토록 지시하거라."
통화가 끝났고 노범호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국제적인 명성을 가진 기사키 하쓰요란 여인도
새벽 기습에는 어쩌지 못한 모양이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노범호는 뒤이어 이후락 정보부장의
자택으로 다시 다이얼을 돌렸다. 아침 일찍 기상하여 산책도 하고 운동도 하는 그의 부지런함을
잘 알기 때문에 이른 시간의 전화가 결코 실례가 안 되었다.
"회장님, 이른 아침부터 웬일이십니까?"
"네, 급히 좀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그러세요? 무슨 일이신데"
"이제 한30분만 지나면 제 집으로 기사키 하쓰요가 오게 되어 있지요?"
"아---, 그렇죠. 그런데"
"한 가지만큼은 꼭 들어 주셔야겠습니다. 그 여인을 제 지휘권 안으로 넣어 주십시오.
지금까지 열이가 뛰어 온 걸 감안한다면, 그녀의 움직임에 대해 제가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열이와 함께 작전에 투입시키든, 독자적으로 백수웅 추적에 나서게 하든,
아무튼 그녀에 대한 지시와 보고 모든 것은 제 장악하에 있어야겠다는 겁니다."
전에 없이 강경한 어조였다. 아무리 약점이 있다고는 하지만, 적어도 박 대통령이 신임하는 경제통이며
자신의 다음 가는 각하의 측근이다. 게다가 그는 이번 남북 회담의 의전 담당자로 지명 되었다.
그 정도의 명분을 살려 두는 건 자신을 위해서도 도움이 될 것이다.
이후락 부장은 너털 웃음을 웃으며 노범호의 기사키 하쓰요 장악 제의를 수락했다.
"회장님, 기사키 하쓰요를 불러들인 건 물론 저입니다. 하지만 최종 목표는 테러리스트 제거 아닙니까?
더구나 테러 분자 체포 책임을 지금 허 검사가 갖고 있는 이상, 기사키 하쓰요가 회장님 지휘를 받으며
통제된다고 해서 이상할 건 하나도 없을 겁니다. 앞으로 저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집니다.
북측과의 정보 교환, 합의서 작성, 남북 정치 협의 이후의 정국 구상 등 등 그러니 너무 절 의식하지 마시고
회담장 준비에만 몰두하세요. 차질 없도록 그건 제 목숨과도 관계가 있으니까요. 허허,
회장님도 참. 그럼 아침에 청와대에서 만납시다."
일본에서 온 정보 요원 기사키 하쓰요. 그녀의 통제와 지휘권을 절대 내주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노범호는 의외의 결과에 뛸 듯이 기뻐했다. 허열을 다그쳐 백수웅을 하루빨리 제거시킬 것이며,
그때까지 기사키 하쓰요는 수원 공장에 감금된 채 결판의 날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두 시간 동안 심사 숙고한 일본 여인 처리 문제가 깨끗이 정리 되었다.
그리고 그녀가 오기로 했던 7시가 되었다. 그는 비로소 신문을 집어 들며
가정부에게 커피를 끓이도록 부탁했다.
정각 7시. 단 1초의 오차도 없는 정각 7시, 이상하게도 밖에서 벨이 요란하게 울려 댔다.
현관으로 뛰쳐나간 비서로부터 인터폰이 울려 왔다.
"회장님, 접니다."
"무슨 일이야?"
"손님이 찾아오셨는데요. 약속이 돼 있다구요. 이 부장님이 보낸 사람이랍니다."
'이 부장?' 노범호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정원을 가로질러 현관으로 나갔다. 그가 나타나자,
비로소 비서가 육중한 철문을 열었다. 열린 철문 뒤에 한 여인이 웃고 서 있었다.
"기, 기사키, 하쓰요."
놀랍게도 거기에는 며칠 전 도쿄에서 만난 일이 있었던 기사키 하쓰요가 서 있었다.
노범호는 자기 눈을 의심했다. 그녀는 조금 전 허열이 청계 호텔에서 연행,
수원에 감금시켜 여기 나타날 수 가 없는 것이다.
"안녕하세요."
비교적 정확한 한국어를 발음하는 그녀가 깍듯이 인사했다.
"기, 기사키 , 하쓰요,"
"들어, 오시오."
마치 유령을 보는 것 같았다. 그녀가 여기 시간에 맞춰 나타났다면,
오늘 아침 연행한 그 여자는 과연 누구란 말인가? 너무나 놀라워 말문도 열지 못하는
노범호 앞을 지나, 그녀는 안채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응접실에 마주 앉아 커피를 마시면서도, 그는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어제 오전에 서울에 도착했습니다."
"그렇소? 어디 투숙하고 있죠?"
"퇴계로라는 곳에 있는 아스토리아 호텔에 투숙했습니다. 청계호텔에도 내 이름으로 예약해 놓고,
아스토리아의 접객 여성 하나를 매수해서 그 곳에 재워 두었죠. 제가 둘이 된 셈이 됐지만요."
노범호는 크게 실망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지난 일본 방문 때 받았던 첫인상의 평가가 잘못되었음을 뉘우쳤다.
"저를 보호하기 위한 방법이죠. 아무튼 이 부장님 지시로 찾아 뵙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테이블 위의 시거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노범호는 눈을 감고, 이후락 부장이 들려 준 이 여인에 대한 정보를 다시 한 번 생각하고 있었다.
국제적인 명성을 지니고 있는 전문 살인자. 그러나 어느 나라든 그 나라의 정부만을 위해 일하고
막대한 대가를 받는 여자. 초라하고 볼품 없는 외모에 비해 그녀의 눈은 광기에 가까운 매서움을
가지고 있었고, 전체적으로 싸늘하고 과묵한 것이 특징이었다.
이제 그녀의 능력을 평가한다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서울에도착하자마자
그녀는 자신을 보호하는 일부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 작업이 적중한 것이다.
노범호는 생각했다.
'그렇다. 이 부장의 말대로 가장 중요한 것은 회담의 성공이다. 필요하다면 이 여인의 힘을 빌리자.
열이와 합류시켜 백수웅을 제거하자.'
"지난 밤, 허열 검사가 당국에 제출한 수사 경과 보고서는 제가 세밀하게 검토했습니다.
그러나 더 알고 싶은 게 있습니다. 솔직하고 숨김 없는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백수웅 추적, 체포나 사살에 도움이 될 테니까요."
"말하시오. 알고 싶은 걸."
"백수웅과 허 검사, 노 회장님, 그리고 따님인 노옥진의 인간적 관계 말입니다."
백수웅에 대한 기초 자료는 모두 입수한 것 같았다. 그에게 추악하고 되뇌이기 싫은 과거를
말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지금은 또 그런 걸 따질 시간도 아니다. 더구나 이런 직업의 사람들은,
죽는 일이 있어도 비밀은 지킨다는 것이 불문율로 되어 있다.
죽기보다 싫었지만, 노범호는 얽히고 설킨 이들의 인간 관계를 모두 들려 주었다.
"결국 내 딸 옥진이는 백수웅의 목숨과 자신의 행복을 바꾸었다고 볼 수 있죠.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모든 것은 제 자리를 찾아가고 있었죠.
딸 아이는 미라라는 계집아이를 낳았고, 열이는 순조롭게 진급하고 있는 중
갑자기 백수웅이 출현 한 겁니다."
노범호는 비교적 자세히 지난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따님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지난번 그린파크 호텔에 백수웅이 나타났을 때 다쳐 입원 중 입니다. 발목을 다쳤죠."
여인은 잠시 생각에 잠기고 있었다. 그리고 얼굴을 들어 노범호를 바라보았다.
"저를 허 검사의 집 가정부로 취직시켜 주십시오."
"가정부?"
뜻밖의 주문이었다.
독자적으로 행동하리라 믿었던 기사키 하쓰요가, 허 검사의 집 가정부를 자원한 것이다.
무슨 생각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군요. 기사키 하쓰요 양."
"백수웅의 최대 목표는 테러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 정보를 얻는 것이 가장 큰 과제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어디를 노릴까요. 청와대? 이후락 부장? 평양? 아닙니다. 바로 노 회장님 입니다.
그리고 회장님을 치기 위해 그는 회장님의 따님이며 옛날 애인이었던 노옥진을 노릴 겁니다.
그는 노옥진을 아직도 사랑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사랑은 사랑이고 목적은 목적입니다.
백수웅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 아니라 목적입니다. 그는 우이동 집을 다시 습격하거나
따님을 유혹해서라도 납치할 것이며, 그것이 협상의 무기가 될 것입니다."
우이동 허열 검사의 집 가정부로 들어갈 것을 자청한 하쓰요는 몇 가지 의문점을 더 물었다.
"저의 신분에 대해 허 검사가 알고 있습니까?"
"그렇소. 내가 말했소."
"하지만 제 얼굴은 모를 것 아닙니까. 허 검사에게 제 신분을 감춰 주십시오.
그리고 저를 회장님 따님만을 보살피는 가정부라고 말해 두십시오. 따님 곁을 지키고 있으면
반드시 백수웅이 접근해 올 것이며, 저는 최종적으로 승리를 거둘 것입니다. 저는 한국인으로 행세합니다.
제 이름은 오늘부터 기사키 하쓰요가 아니라 김도경이라는 한국식 이름을 쓰게 됩니다."
"김도경?"
"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마디 더 하겠습니다. 허 검사는 허 검사대로 수사를 진전하도록 하십시오.
저는 그와 경쟁해 가며 싸울 겁니다. 물론 최종 승리는 제 것이 되겠죠.
한 번도 실패 한 일이 없는 여자니까요. 하지만, 제가 성공한 이후 그 공로를 허 검사에게
돌리고 싶다면 제게 10만 달러의 보너스를 별도로 지급 해 주시면 됩니다,
그럼 따님 댁으로 연락해 놓으십시오. 내일부터 따님이 입원한 병원에 가서
보호하며 추적에 나설 거니까요."
노범호는 완전히 얼이 빠져 있었다. 비록 이런 일이 전공은 아니었지만,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손에 무수한 피를 묻힌 노범호 였다. 그러나 이런 두뇌의 여자는 일생을 통틀어 처음 보았고,
그녀의 철저한 계산에는 혀를 내둘렀다. 기사키 하쓰요는 두 번째 시거를
재떨이에 비벼 꺼 버린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만일 제가 청계 호텔에 정식으로 투숙했다면, 지금쯤 저는 당신 부하들에게 잡혀 있겠지요?
아스토리아 호텔에서 매수한 콜걸이 지금 어디 있는지 모르지만, 이젠 풀어 주는 게 좋겠어요.
어디론가로 끌려가는 걸 보았거든요. 앞으로 협조 부탁드립니다."
그녀가 비서들의 안내를 받으며 철문을 빠져나가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는데도,
노범호는 마치 최면당한 사람처럼 의자에 앉은 채 허공만 바라보고 있었다.
백수웅말고 이토록 무서운 사람을 만나는 것도 이번이 처음 같았다.
잠시 후 그는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 맞아. 이 부장이 분명한 사람을 사 왔어. 하지만, 열이도 그리 쉽게 당하지는 않을 거야.
경쟁이다. 이건 게임이라구. 헌팅 게임. 잡아라. 네가 잡아라.'
이윽고 노범호는 천천히 수화기를 들어 장충동 새 수사 본부 허열의 책상 위로 전화를 걸었다.
당일 아침 9시. 커튼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아침 햇살에 백수웅은 눈을 떴다.
밖에는 주인 여자의 빨래하는 소리가 시끄럽게 들려 왔다.
지난 8년 전의 악몽 같던 회상으로 늦잠이 들어, 해가 꽁무니를 치밀도록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자, 주인 여자가 한심스럽다는 듯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봐, 노총각. 취직하려고 서울 왔으면 어디든 부지런히 돌아다녀 봐야지.
술 먹고 늦잠 자면 어떤 놈이 돈을 줘, 밥을 줘? 어서 나가 돌아다녀 봐.
그래야 취직도 하고, 계집 얻어 살림도 할거 아냐?"
백수웅은 웃으며 안집 주인 여자의 잔소리를 듣고 있었다.
장가? 허허허
열린 문턱에 턱을 기댄 채, 백수웅은 엉덩이를 흔들며 빨래판에 옷을 부벼 대는 주인 여자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입에 행복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어제 워커힐에서 보았던 박 대통령과 이후락 정보부장, 그리고 노범호 회장의 모습이 기억된 것이다.
한 끼의 점심을 위해 그 많은 경호원을 동원하고, 그나마 일반인들은 접근도 못하게 저지한 채
최고의 음식을 먹는다고 해서, 세상 물정 모르고 남편과 아이들의 옷읕 빨아 대며 낄낄대는
저여인보다 더 행복할까.
그리고 저녁이 되면 포장 마차를 운영하는 남편을 위해 달려 나가는 저 소박한
삶의 모습보다 더 아름다울까. 누구인가. 이 땅의 진짜 주인은 누구인가.
하루 세 끼 밥과 어린것들의 교육비를 위해 손톱여물을 썰어 살아가는
바로 저런 사람들이 이 땅의 주인이다.
그런데도 그들의 노력에 비해 수입은 형편이 없다. 아니다. 이제 한국은 이런 모습으로
살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대통령이나 지게꾼의 수입이 비슷비슷해지고,
일하고 땀흘리는 대가가 충분히 주어지는 그런 세상이 곧 올 것이다.
자본주의의 병폐인 빈부의 격차도 없어지고, 사회주의의 개성없는 획일주의도 사라질 것이다.
스스로 선택한 직장에서 모두가 충분한 대가를 받으며 일할 것이고,
권력이 국민 앞에서 겸손해지고, 국민을 두려워하는 그런 세계가 올 것이다.
그런데도 현실은 어떤가. 이런 소박한 사람들을 '통일' 이라는 볼모로 잡아 놓고,
그들은 영구 집권을 획책하고 있다.
백수웅은, 고열로 신음하면서도 음식을 팔기 위해 동대문 시장을 향해 나가던 어머니의 모습이
눈에 밟혔고, 허름한 스웨터를 입고 집을 찾아왔다가 쌀 한 뒷박을 얻기 위해 피를 뽑던
노옥진을 상기했다. 그런 기억들은 끝내 백수웅 자신의 치욕스러웠던 과거를 다시 되뇌이게 했고,
그런 기억들은 그를 슬프게 만들었다.
그러나 가슴 아픈 추억들도, 그런 슬픔도 눈물을 뿌리게 하지는 않았다. 용광로처럼 이글거리는
혁명의 야심으로 주먹을 힘껏 움켜쥐었고, 이제는 더 이상 흘릴 눈물도 없었다.
그런데 이런 상념과 비장한 각오도 끝내는 불꽃처럼 타오르던
옥진과의 비극적 사랑으로 귀결되곤 했다.
'그래, 테러가 성공하고 내가 구상하는 유토피아의 한국이 되면 노옥진도 어디선가
행복을 맛보며 살아가겠지. 그 주인공이 나란것을 알면 얼마나 놀랄까. 지금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지?
8년 세월이 흘렀어. 그녀가 아직도 나를 기다린다고 생각하는 건 나의 아집이거나 독선이겠지.
어디서든 배곯지 않고 살아 있기만 하다면 나는 만족하게 생각할 거야.'
이미 가난의 뼈아픔은 금호동 학창 시절 충분히 경험했고, 배고픔의 비통함과 절망은 납치당한 상선에서
충분히 맛보았다. 권력에 힘없이 무너지는 인간의 존엄성은 누구보다도 백수웅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다.
빨래를 털어 줄에 거는 주인 여자를 바라보며, 그는 자신의 목적이 얼마나 엄숙한가를 다시 한 번 생각했다.
'그래, 내 치욕스러웠던 지난 날들의 보상은 테러와 혁명의 성공이다.
나는 목숨을 걸고 분연히 일어설 것이다.
이 땅의 유토피아를 위하여 나는 젊음과 사랑과 목숨을 바칠 것이다.
영원한 유토피아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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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을 너무 얕잡아 보다니 노범호는 바보군요~! 특수 훌련을 받은 사람들에 맹활약? 기대 합니다~
백수웅 못지않은 기사키 하쓰요의 활약이 기대되네요
즐감요 ~~
잘 읽고갑니다~~
감사
잘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