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소수간초선』의 발문을 지으신 이계 남몽뢰
영양남씨(英陽南氏)의 시조 남민(南敏)의 둘째 아들 남군보(南君甫)를 중시조로 하여 계보가 이어지면서 회령공 남우량의 8세손으로 문과에 급제, 통례(통례원에 속한 정3품 벼슬)에 오른 이가 바로 이계(伊溪) 남몽뢰(南夢賚)선생이다. 선생의 자는 중준(仲遵), 호는 이계(伊溪)이며 본관은 英陽으로 광해군 12년(1620)에 점곡면 윤암에서 태어났다. 부친 남해준(南海準)과 권지(權誌)의 딸 안동권씨(安東權氏) 사이에서 3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아우 남용뢰(南勇賚)‧ 남중뢰(南重賚)가 있다. 부인은 신지의(申之義)의 딸로 아주신씨(鵝洲申氏)이다. 어릴 때부터 문장이 일세에 뛰어났고 성리학과 예학 등의 공구(功究)가 깊었으며 정치적 신념 또한 투철하여 평생 절의를 굽혀본 적이 없던 분이라 한다.
23세 때인 인조 20년(1642)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효종 2년(1651)에는 식년문과에 급제하는데 성균관 학유 등을 거쳐 현종 12년(1671) 4월에는 함양군수로 부임하기도 한다. 이때 흉년으로 굶어 죽는 유민들을 진휼(軫恤)해서 이듬해 봄에 구황치적 제일의 공의로 준직(準職:조선시대 堂下정3품의 벼슬)의 명을 받게 된다. 이듬해인 현종 14년(1673) 2월에 진주목사로 승진하고서야 함양군수로 재직 시 정홍현(1621-?)에게서『구소수간초선(歐蘇手柬抄選)을 전해 받은 것을 비로소 간행하고 발문을 짓게 된다. 이는 선생이 함양에 있을 때 흉년을 구제하느라 이 책을 간행할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구소수간초선』은 구양공(歐陽公:歐陽修)과 소동파(蘇東坡:蘇軾)의 수간(手簡:주고받은 편지)을 수록한 모음집인데 구양공 편지가 47편, 소동파 편지는 95편으로 모두 142편이나 되는 분량이다. 이 편지들의 내용이 얼마나 귀감이 되었으면 병약했던 세종대왕이 세자 때 이 책을 무려 1,000번이나 읽었다는 이야기가 쉽게 지나쳐 버릴 수 없는 부분이다.
한편 ‘이윤이 배운 바를 배우고 이천이 뜻한 바를 뜻하리라 (學伊尹之所學 志伊川之所志)’ 하며 호를 이계(伊溪)라고 짓고 고을 이름을 윤이실(尹伊谷, 尹谷)이라고 불렀으며 지금도 속명으로 부르고 있다.
또한 선산부사로 근무하면서도 고을 백성을 위한 여덟 가지의 근심이 담겨 있는 시
⌜선산팔고(善山八苦)⌟를 지었는데 그 가운데 둘째 검전고(撿田苦) 의 내용을 보면
傷暵傷滛又損風 슬픔과 상심이 그칠 사이 없고
今年饑饉最南中 이 해의 굶주림은 남쪽이 제일일세.
葛峴水田生火焰 도개 갈현의 수전에는 화염이 생기고
洛江浦畝産魚龍 낙동강포구에는 어룡도 허덕이네.
下戶迭呼庚癸急 앞집에선 흉년이 들 해라고 소리치고
上司猶責丙丁豊 윗사람은 아직도 풍년든 해의 세금을 내라 하네
多病此身那忍苦 병치레 많은 이 몸이 어찌 견디랴?
不如歸去作山翁 돌아가서 산옹으로 지내기만 못하네.
(此時自戶曺一依丙申丁酉田結數勒定責辨民苦之 : 이때 큰 흉년이 들었는데도 호조로부터 일률적으로 병신, 정유 두해 풍년이 들었을 때의 세금을 산정하여 독촉했기 때문에 백성들이 어려웠다.) ㅡㅡㅡ
이때 흉년이 든 시기였는데도, 세금을 독촉했기 때문에 백성들이 힘들어했고 선생의 심경도 고단했음을 표현해 주는 글이라고 볼 수 있다.
고성(固城)과 임실군수(任實郡守)를 지낼 때는《거관불망기(居官不忘記)》를 지어 자신과 후임 수령들에게 경계로 삼기도 했다. 이렇듯 선생의 애민정신은 곳곳에서 묻어 나오는 몸소 실천한 일들과 글들로 실타래를 엮어도 될 것이다.
숙종 1년(1675) 겨울에 병을 이유로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남인이 몰락하게 되는 경신환국(1680년 숙종6) 3월, 61세 때 의금부에 하옥되고 이듬해 겨울에 전남 고흥으로 귀양 갔다가 열흘 만에 다시 압송되어 11월 15일에 남원시에 이르러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된다. 관이 함양을 지날 때 선정비를 세웠던 함양 주민들이 남녀노소 없이 통곡하였고 상여 줄을 잡는 이도 있고 제사를 지내는 이도 있었다고 한다.
바로 함양군수로 재직 시 흉년이 들었음에도 많은 선정을 베푼 결과인 것이다.
선생이 남긴 저서로는 많으나 그 중 이계집(伊溪集)과 이계속집(伊溪束集)이 있다.『이계집』은 6권 3책, 목판본으로 증손 남성천(南聖天) 등에 의하여 정조 2년(1778)에 간행되었고,『이계속집』은 3권 2책, 목판본으로 10세손 남우룡(南佑龍) 등에 의하여 1937년에 이계당(伊溪堂)에서 간행되었다. 이계당은 선생이 태어나신 곳에 직접 축조한 초가삼간을 짓고 이계당이라고 당호를 지었으나 소실되어 현손이 12칸 와가로 재건했지만 재차 소실되어 지금은 사랑채만 보존되어 있으며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43호로 지정되어 있다. 당시 남인인 미수 허목과 고산 윤선도와 교유한 관계로 편액은 미수 허목 선생이 썼고, 유림에서 선생의 공을 기려 이산서원을 지어 배향했으나 대원군 때 훼철되었다.
초간(草澗) 권문해(權文海)는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에서 영양남씨(일명 宜寧 南氏)를 조선조(朝鮮朝) 20대 명벌(名閥)의 하나로 꼽고 있다. 정승(政丞) 6명, 대제학(大提學) 6명, 판서(判書) 22명, 문과급제자(文科及第者) 140여명이 나왔다. 남이장군, 남은, 대한민국(大韓民國)정부(政府)수립(樹立) 이후(以後)에는 남덕우(南悳祐)국무총리(國務總理)를 비롯하여 많은 인재(人才)가 정(政)-재계(財界) 등 여러 분야(分野)에서 대단한 활약(活躍)을 하고 있다.
선생의 11세 주손 규우(圭佑)는 청송 영덕 등지에서 연락을 취하여 독립운동을 모의하다가 체포되어 고문당하고 수년간 옥고(獄苦)를 치르기도 하였다. 규우의 밀영(密令)으로 사역에 임했다가 역시 옥고를 겪은 황금종(黃金鍾)과 더불어 1983년 8월 대통령 포상을 받은 바 있기에 임진왜란 때 의성의진의 선두에서 가장 활발했던 곳인 점곡에서 선생과 더불어 후손들의 귀감의 일화는 앞으로도 오래도록 회자 될 것이다.
조선 후기 학자 유장원(柳長源)이 쓴 ⌈상변통고⌋등을 중심으로 하는 예법 또한 경북 북부의 안동(하회마을), 영양(주실마을), 봉화(닭실마을), 영주, 의성과 통해 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이는 선생의 문중과 같은 올곧은 선조들이 자리하고 있기에 가능한 경북 북부의 자랑인 것이다.
첫댓글 몇 해전에 김홍배소장님과 이 분의 묘소를 둘러본게 생각납니다~^^
네^*^
늘 배웁니다. 국장님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