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고종31년) 7월 20일 조선 외부대신 김윤식은 일본 특명전권공사 오토리 케이스케와
마주 앉아 일본의 내정간섭을 공식 선언한 '朝日暫定合同條款'에 굴욕적인 서명을 하고 만다.
이 조관을 근거로 일본은 내정을 바로잡기 위해 경성과 부산, 경성과 인천 사이에 철도를
건설하라고 조선을 압박한다.
만약 조선 정부 재정이 넉넉허지 못하다면 일본 정부 또는 일본 공사와 공동으로 철도를
건설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당시 힘이 없던 조선은 결국 1898년 일본인이 설립한 '경부철도회사'에 경부선 부설권을
허락한다.
이에 앞서 조선은 1896년 3월에 미국인 모스(Morse)에게 경인선 부설권을 허락했다.
그러나 지금 부족을 겪던 모스는 일본인 시부지와 에이이치에게 경인철도인수조합을
넘겨주었고, 1899년 9월 18일에 경인선은 완공된다.
이로써 조선철도사업은 완전히 일본인 손에 넘어간 것이다.
일본은 이미 경부선 사업을 준비하면서 민간인을 활용했다.
마쓰다 고조는 1885년(고종22년)에 4년 동안 조선 전 국토를 돌아다니며
지세~교통~민정과 경제 상황을 은밀히 조사했다.
철도기사 고노 덴바는 사냥꾼으로 가장해 서울~부산 간 철도 부설 예상 지역을 면밀히
답사한 뒤 측량 도면과 함께 보고서를 작성해 1892년 일본 정부에 제출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 보고서대로 노선이 확정돼 1905년 5월 25일 경부선이 개통된 것이다.
우리나라 침략 정책의 구체적 발판이 된 철도는 일본에 의해 이렇게 만들어졌다.
최근 철도 민영화 문제로 정부.코레일과 철도노조 간에 극한 대립이 이어지고 있다.
정부와 코레일 측은 수서발 KTX노선에 대한 민영화를 절대로 안한다고 주장하지만
철도노조뿐 아니라 많은 국민은 그 저의를 의심하며 온.오프라인에서 격렬하게 찬반
논쟁을 이어가고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대화와 소통이다.
이런 대립이 이어지는 것은 결국 정부에 대한 '신뢰'에 부족에 기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김준혁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