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겁한 프로페셔널
‘십년이면 도가 튼다’라는 말이 있다. 한 분야에서 십년을 공들이면 그 분야에 전문가가 된다는 뜻이다. 전문가는 프로페셔널과 상통하기도 한다. 진정한 프로는 프로냄새를 풍기지 않는다는 말도 있다. 하지만 어떤 문제의 답을 놓고 아마추어는 이러쿵저러쿵, 프로는 침묵한다(?), 그러면 그게 진정한 프로인지 묻고 싶을 때가 있다.
근자에 이르러 일반 매체는 기독교에 관한 뉴스를 연일 내보내고 있다. 그게 목회자에 관한 평이든, 교회에 관한 평이든 가리지 않는다. 유감스럽게도 매체를 통해 쏟아진 기사는 대개가 선정적이거나 비판적 문체로 덮여있다. 기독교의 이런 뉴스들을 접하면서 생각한 것은 뉴스의 가치성보다 독자에게 어떻게 하면 흥미를 끌게 할 것인가에 초점을 둔듯한 느낌이다. 감동보다는 비판일색, 개혁과 대안제시에 앞서 치욕적 면모부터 드러내고 보자는 심보, 한마디로 표현하면 한사람의 글재주에 놀아나는 꼴(?)처럼 보인다. 사실, 사실적인 내용에 반박한 내용 찾기는 힘들다. 적당하게 치부(?)를 드러내주면 안되겠냐고 사정할 수밖에는 달리 없다. 그러나 사정이 다른 사안이 있다. 형이상학적인 접근에서 풀어보는 신학적인 문제나 신학적인 논쟁이다. 최근 어느 일반매체 칼럼에서 ‘다빈치코드’에 관한 글을 접했다. 칼럼에서 필자는 해박한 지식을 나열하듯 원작소설의 기본얼개부터 결론도출까지 조목조목 설명했다. 예컨대, ‘다빈치코드’의 핵심인 예수의 혈통문제부터 거룩한 성배를 유사 고고학적 관점까지 아울러서 다뤘다. 기독교의 성배신화는 고대 신화를 기독교적으로 변용시켰다는 가설, 기독교의 다빈치코드는 서구사회가 끊임없이 매달려왔던 고고학적 성배 찾기의 변용이라는 등의 소설내용도 담았다.
그런 후 필자는 예수의 결혼여부가 예수의 존재의미(신화적이든 역사적이든)를 바꾸는 것은 아니라며 예수가 성서의 주장대로 독신이었든, 아니면 어떤 사람들의 주장대로 결혼을 했든, 그것은 예수의 가르침의 본질과 아무 상관도 없는 문제라고 자신의 견해를 밝히기도 했다. 지금 한국교회는 자신의 영적건강을 회복해야 할 것 이라며 주문도 했다. 이어 ‘한국교회여, 진짜 위험한 이유좀 알고 싸우시라’는 필자의 따끔한 충고, 글을 접으면서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듯 멍했다. 과연 일반매체를 통하여 이런 필자와 대적할 한국교회 필자는 없는 것인가. 일반 대학교수의 글보다 더 명쾌하게 설명해줄 신학자 또한 없단 말인가. 아니라고 본다. 한국교회는 교회 수만큼, 신학교 수만큼 덕망 있고 학식 많은 목회자 신학자가 수두룩하다.
그런데 왜 이런 예민한 문제가 있을 때마다 침묵으로 일관하는지 이해되지 않는다. 신학문제 등을 다룰 때 일반학자는 아마추어 아닌가. 진정한 프로(신학자)는 이럴 때 팔짱끼고 침묵하는 게 옳은 처사인지 묻고 싶다. 그 이유는 뭘까. 괜한 일로 나섰다가 교권에 벗어나기라도 해 심의대상에 오를까 염려하는 것인가, 정통 이단의 예민한 문제에 휩싸여 곤혹을 치를까봐 미리 포기하는 것인가, 여러 추측이 든다. ‘다빈치코드’영화얘기가 겨우 교계지를 통해 막연히 현혹되지 말라는 당부 등의 내용을 표면적으로 다룰 뿐, 심층분석은 드물다. 더욱이 일반매체를 통해 명쾌한 답을 제시하는 글은 찾아볼 수 없다. 한국교회의 입장을 명확하게 대변해줄 명칼럼니스트 신학자 목회자가 그립다.
“사단은 문화예술이라는 미명아래 기독교의 뿌리를 출발부터 흔들고 있다. 영화상영은 곧 기독교의 명예를 훼손하는 처사다. 당상 상영을 철회하라” 막연한 구호로 작성된 성명서 문안에 왜 영화가 문제되는지 신학적 관점에서 조목조목 짚어줄 프로페셔널 목회자 신학자의 명쾌한 답을 보고싶을 뿐이다. 전용관부장 jjk616@hanmail.net
|
첫댓글 하나님편인지 마귀편인지 색깔을 분명히 해야할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