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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기탁 梁宜鍾 (1871 ~ 1938) "한국 독립운동의 살아있는 역사"
1 한국 독립운동의 살아있는 역사
양기탁은 한말 계몽운동 시기 대한매일신보 총무로부터 시작하여 1936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위원에 이르기까지 국권회복운동과 독립운동에 한 평생을 바쳤다. 운동의 영역도 대한매일신보의 언론활동으로부터 시작하여 만주의 무장단체를 거쳐 임시정부에서 활동에 이르기까지 광범하여 한국 독립운동의 살아있는 역사라고 할 수 있다.
2 영어와 인연을 맺다
양기탁은 서북지방 출신이다. 그는 1871년 평안도 평양 소천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이름은 의종(宜鐘)이었으며 호는 우강(雩岡)이었다. 그는 15세 때 청운의 꿈을 품고 상경하였다. 1885년 제중원이 세워지면서 외국인 의사를 보조할 사람이 양성하기 위해 제중원 내에 일종의 외국어학교가 부설되었다. 알렌은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을 통해 팔도에 이 학교에 입학할 학생을 추천해줄 것을 의뢰하였는데 평안도에서는 양기탁을 추천하였다. 그는 이때 추천을 받아 서울에 올라와 이곳에서 영어를 배웠다. 이것이 그가 영어와 인연을 맺은 첫 번째 계기였다.
양기탁이 영어와 인연을 맺은 두 번째 계기는 미국 선교사 게일Gail,J,S. 奇一) 과의 만남이었다. 게일은 1891년 초부터 1897년 3월까지 약 6년간에 걸쳐서 《한영자전》 편찬사업을 벌였는데 양기탁은 부친과 함께 이 사업에 참여하였다. 당시 게일은 원산에 머물면서 이 사업을 벌였는데 양기탁 부자도 원산에 옮겨가서 이 사업을 도운 것으로 보인다.
양기탁은 《한영자전》 편찬사업이 마무리될 무렵인 1896년 5월경부터 일본 나가사키로 건너가 그곳의 상업학교에 근무하면서 일본 학생들을 상대로 한국어를 가르쳤다고 한다. 그는 원산에 주재한 일본영사관원의 소개로 이 학교에 초빙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33세가 되던 해 귀국했다고 하는데 그렇다고 한다면 그가 귀국한 연도는 1903년 무렵이 된다.
양기탁은 귀국한 직후인 1903년 무렵 한성전기회사의 사무원으로 취직하였다. 한성전기회사는 원래 대한제국 왕실에서 설립하였지만 실제 운영은 미국인 H. 콜브란과 H. R. 보스윅이 맡고 있었다. 황실은 전차부설을 위한 사업비를 제대로 지급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 회사는 1904년에 두 사람 소유로 넘어가고 말았다. 그가 사무원으로 취직할 무렵에는 이 회사는 아직 황실 소유로 있었다.
양기탁은 한성전기회사 사무원으로 취직한 이듬해인 1904년 3월 10일에는 예식원의 영어 통역관으로 임명되었다. 예식원은 궁내부 소속 관서로서 당시 외국 사신들의 문서와 국서 등을 해석하거나 통역하는 일을 맡아보고 있었다. 즉 그는 한성전기회사를 디딤돌로 해서 대한제국의 관원으로 발탁된 것이었다. 당시 그의 출세를 위한 무기는 영어였다.
3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하다(1900년대)
양기탁이 예식원 통역관으로 임명된 후 주어진 첫 번째 임무는 대한매일신보의 창간이었다. 그는 1904년 7월 18일 영국인 기자 베델과 손을 잡고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하였다. 베델이 1904 4월말에 그가 몸담고 있던 Daily Chronicle에서 해임되었으므로 적어도 5월 이후 대한매일신보 창간 작업이 시작되었을 터인데 당시 그의 신분은 예식원의 현직 관원이었다. 그리고 그와 베델을 연결해 주는 역할을 한성전기회사의 덴마크인 전보교사 묄렌스테트였다. 그리고 항간에는 고종이 내탕금을 내어 대한매일신보의 창간을 도왔다는 소문도 있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대한매일신보의 창간은 고종의 뜻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양기탁은 대한매일신보가 창간된 이후에도 상당 기간 예식원 관원으로서의 신분을 유지하였다. 1905년 3월에는 번역관보에서 주사로 승진하기까지 하였다. 1905년 12월 28일에 가서야 비로소 예식원의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런데 이것은 그 자신이나 고종의 뜻이 아니라 일본의 압력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이 무렵이면 그가 대한매일신보를 통해 을사늑약에 대해 맹렬히 비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고종황제는 1906년 9월 18일에 그를 한미전기회사 검찰관에 임명하여 위로하였다.
양기탁은 대한매일신보에서 총무 및 주필로 활동하였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를 규탄하는 사설을 게재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황성신문에 게재된 시일야방성대곡을 전재하였으며 이를 영어로 번역하여 자매지인 Korea Daily News에 게재하기도 하였다. 이후 고종황제가 을사조약이 무효임을 주장하는 친서를 각국에 전달했음을 보도하였으며 의병항쟁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다루었다.
양기탁이 대한매일신보를 통해 이렇게 항일적인 보도를 이어나가자 일제는 이를 억압하기 위해 술수를 부렸다. 대한매일신보가 국채보상운동에 따른 모금활동을 주도한 것을 기화로 해서 그에게 보상금 횡령 혐의를 뒤집어 씌워 구속하였다. 대한매일신보 사장인 베델이 이 혐의가 조작된 것임을 입증함으로써 그는 구속된 지 2달 만에 풀려날 수 있었다. 그는 이후에도 항일적인 자세를 굽히지 않았다.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에 의해서 처단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가 사원들과 함께 축배를 들면서 만세를 불렀다는 소문이 날 정도였다. 통감부가 1910년 베델을 이어 대한매일신보를 경영하던 만함으로부터 이 신문을 인수하자 그는 눈길 한번 돌리지 않고 회사를 떠나 버렸다.
4 신민회를 조직하여 독립전쟁을 준비하다(1910년대)
양기탁은 1908년 미국에서 돌아온 안창호를 비롯하여 전덕기, 이회영, 이동휘, 이동녕, 이갑 등과 비밀결사인 신민회를 결성하였다. 신민회는 비밀결사로 조직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일제의 침략에 맞서 끝까지 항전을 벌일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그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신민회 결성에 참여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당시 대한매일신보 구성원 대다수를 신민회 운동에 끌어들였다. 신민회의 이념을 정립하는 데 큰 역할을 한 신채호나 대한매일신보의 살림을 담당한 임치정도 신민회의 운동에 참여하였다. 대한매일신보는 신민회의 기둥 가운데 하나였다. 그런만큼 그도 신민회의 큰 기둥이었다.
신민회는 독립전쟁 전략을 채택하고 있었다. 그래서 신민회 회원들은 국망을 전후하여 대거 망명하여 국외에 독립전쟁을 위한 근거지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를 위한 자금을 국내의 신민회 비밀조직 통해 조달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신민회 국내조직이 일제로부터 대대적인 탄압을 받는 비극적 사태가 초래되고 말았다.
그 빌미가 되었던 것은 1910년 11월에 있었던 안악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안중근의 사촌동생인 안명근이 황해도 안악지방에서 무관학교의 설립`자금을 모금하다가 검거된 사건이었다. 일제는 이 사건을 빌미로 평안도와 황해도 일대의 신민회 회원들을 대대적으로 검거하였다. 그리고 데라우치 총독 암살미수혐의를 뒤집어씌워 이른바 105인 사건을 만들어냈다. 당시 국내에 머물고 있다가 체포된 그도 이 사건을 피해갈 수 없었다. 그에게는 1심에서 징역 10년의 중형이 선고되었다.
양기탁은 4년간 옥고를 치른 후 1915년 2월 하순쯤에 석방되어 평남 강남군 쌍룡면 신경리에 유배되었다. 그는 1916년경 만주로 탈출하여 동지를 규합하려다 1918년 12월 톈진에서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었다. 이후 그는 전남 거금도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3·1운동을 맞이하였다. 3.1운동 이후인 1919년 12월 유배에서 풀려나 서울로 올라올 수 있었다.
5 서간도에서의 무장투쟁(1920년대)
양기탁은 1920년 4월 동아일보가 창간될 때 유근과 함께 편집고문으로 추대되었다. 그가 언론계의 대원로인 까닭에 편집고문으로 추대하였고 그도 이러한 요청에 응했지만 그의 마음은 더 이상 신문에 있지 않았다. 따라서 신문 발간의 실무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고 더 큰 일을 찾기 시작했다. 그는 1920년 8월 미국의원단이 한국을 방문하였을 때 독립공고서(獨立控告書)를 제출하고 독립만세를 부르다가 체포되었다. 마침 모친이 별세하여 가출옥된 것을 틈타 만주로 탈출하였다. 보다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국내를 벗어난 것이었다.
양기탁은 만주에 건너가 당시 난립해 있던 여러 무장단체를 통합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는 1922년 오동진, 김동삼 등과 함께 광복군총영, 서로군정서, 대한통군부, 한교민단 등을 통합하여 통의부를 창설하였다. 이 과정에서 의병 출신 전덕원과의 무력충돌이 빚어져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그도 이 과정에서 부상을 당했다. 그는 이듬해인 1923년에는 편강렬 등과 함께 무장단체인 의성단을 조직하였다. 편강렬은 1892년생으로 그에게는 20년 연하였다. 이 단체의 무장투쟁은 편강렬이 이끌었고 그는 이 단체에서 일종의 정치 고문 역할을 하였다.
양기탁은 1924년 통의부, 의성단, 길림주민회 광정단 등을 규합하여 정의부를 조직하였다. 그는 정의부에서도 실무에 직접 참여하기보다는 외곽에서 지도 감독하는 역할을 맡았다. 다만 정의부는 선전을 위해서 기관지인 〈대동민보〉를 발간하였는데 그는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들 매체의 편집에는 깊이 관여한 것으로 보인다.
양기탁은 1926년 고려혁명당을 결성하는데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20년대 후반에는 러시아혁명과 신해혁명의 영향으로 정당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었다. 당시 이러한 생각을 이당치국(以黨治國)이라고 불렀다. 먼저 정당을 건설하고 이를 바탕으로 정부와 군대를 만들어 나간다는 것이었다. 고려혁명당은 정의부와 천도교 혁신파, 형평사 등의 세력이 힘을 합쳐 만들었는데 정의부를 이끌어나가기 위한 전위정당이었던 셈이었다.
6 임시정부와의 인연(1930년대)
양기탁은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처음 만들어질 무렵 국내에 있었다. 따라서 현실적으로 임시정부의 수립에 참여할 수 없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국내에서 탈출한 뒤에도 상해가 아니라 만주로 건너갔다. 다만 1923년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될 무렵 만주에서 국민대표회의남만촉성회를 조직하여 김동삼을 남만주 대표로 파견한 것으로 미루어 임시정부와 아주 무관하게 지낸 것만은 아니었다. 1926년에는 임시정부의 헌법이 개정되어 대통령제에서 국무령제도 바뀜에 따라 국무령에 추대되었지만 이를 거절하였다. 그가 국무령 추대를 거절한 이유가 무엇인지 분명히 알 수는 없지만, 그는 이후 만주에서의 활동에만 전념하였다.
양기탁은 1930년대에 들어서 활동무대를 중국 관내로 옮겼다. 그것은 만주사변으로 인해 일제가 만주를 점령함에 따라 만주에서는 항일활동을 지속하기 어려워졌기 때문이었다. 그가 만주로 활동무대를 옮기면서 임시정부와 다시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는 1934년 1월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에 취임하였다. 이 무렵에는 임시정부가 윤봉길의거로 말미암아 부득이 판공처를 상해에서 항주로 옮긴 상황이었다. 이 무렵 김구는 가흥으로 피신하는 바람에 국무위원에 선임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양기탁은 이러한 비상상황에 임시정부를 지키기 위해 국무위원에 참여한 것이었다. 그는 국무위원회에서 주석으로 선출되어 임시정부의 최고 통수권자로서 법통을 지켜냈다.
양기탁은 임시정부의 활동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독립운동 관련 정당 단체의 통합이 급선무라고 판단하여 1935년 7월 한국독립당,대한독립당,의열단,조선혁명당,신한독립당 등 5개 정당을 통합하여 민족혁명당을 결성하는데 참여하여 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한국독립당, 한국국민당, 조선혁명당 등 3개 정당에다가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6개 단체를 연합하여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를 결성하는 등 독립운동 진영의 통합을 위해 진력하였다. 이러한 분투의 과정에서 병을 얻어 1938년 6월 21일 강소성 율양(溧陽) 길당암(吉堂菴)에서 요양하다가 별세하였다.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