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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이미 미국에 버금가는 초강대국이다.
그럼에도 중국을 연상하면 <장님 코끼리 만지기> 식으로 딱 부러지게 잡히는 무엇이 없는 듯하다.
유인우주선을 쏘아 올리는 가 하면, 인구의 5% (우리나라 인구보다 많음) 가 고급 외제차를 타고
다니는 반면에 시골에는 아직도 우리나라 70년대의 생활모습도 얼마든지 볼수있다.
구채구의 황룡을 가노라면 해발 4,300m의 고개를 넘는데, 차안에서도 고산증세(두통, 구토 등)를
느끼는고지대에서 힘든 도로작업을 하는 근로자들을 보았는데, 달랑 빵과 단무지로 식사중이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중국은 국가만 부자지, 인민들의 삶은 별로 나아진 것이 없다." 라고 하는데,
실제 중국인민의 1인당 국민소득은 5천불이 안된다고 한다.
해발 4,300m고개길에는 도로확장공사가 한창이다.
중국은 원래 크다. 땅이 넓고 물산이 풍부해 예로부터 ‘지대물박(地大物博)’이라고 했다.
그러나 봉건 왕조의 가혹한 압제와 거듭되는 전란으로 그 민초들의 삶은 그야말로 눈물겹
도록 힘에 겨웠다. 오죽하면 “태평성세의 개가 될지언정, 난세의 사람으로는 태어나지
않겠다(寧爲太平狗, 不作亂世人)”는 비원(悲願)이 등장했을까.
이들의 인생에 네 가지 큰 즐거움이 있다고 한다. “신혼 방에 불 밝히는 밤(洞房華燭夜),
과거급제 방문에 이름 올릴 때(金榜題名時), 긴 가뭄에 단비 내릴 적(久旱逢甘露), 먼 곳
에서 고향 친구 만나기(他鄕遇故知)”다. 앞서의 비원을 이겨내려는 현실 긍정의 힘이 엿보인다.
2천년 역사도시 시안(西安)
시안은 중국 역사에서 주(周) 진(秦) 한(漢) 당(唐) 등 13개 왕조의 73명 황제가 1062년 동안
도읍으로 삼았던 곳으로 이전에는 <長安>이라 불렀다. 흔히 얘기하는 "장안의 화제"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을 만큼 당시 장안은 세계의 중심이었다.
가장 번영했던 당대(唐代)에는 동서 9.5km, 남북 8.5km의 규모에 인구 100만이 넘는 계획적인
대성곽 도시를 이루어 멀리 서방에도 그 이름이 알려졌다. (당시 세계최대의 도시였다고 한다).
그러나 당나라의 쇠퇴와 그에 따른 병란으로 장안도 파괴되어 쇠퇴하였다.
<西安>이라는 말은 '서쪽 이민족의 위협이 사라지고 평안하기를 기원한' 이름으로 북경을
수도로 정한 명나라때 지어진 이름이다.
시안은 천년 수도답게 가는 곳마다 역사 유적이요, 보는 것마다 보물이다.
파기만 하면 뭐가 나와서 지하철공사 같은 것은 생각도 못하고 있다고 한다.
절세미녀 양귀비와 당 현종의 '러브스토리'가 전해지는 곳이자 '실크로드'의 출발지답게
예로부터 불교와 이슬람교 등 다양함이 공존하는 국제도시로도 유명하다. 지금도 회교도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는 거리에 가면 양고기 굽는 냄새와 하얀 모자를 쓴 이를 쉽게 접할 수 있다.
시안은 당나라 멸망후 쇄락하기 시작하여 진시황의 병마용 발견전까지는 <국수 2그릇으로
하루를 때우는> 가난한 도시였다가 일약 역사관광도시로 급발전하여 현재 인구 4백만명의
대도시로 변모하였다.
진시황은 지금도 시안에서는 황제인 듯 하다.
9월11일 마눌님을 모시고 중국 시안과 구채구를 다녀왔다. 좋은 사진을 기대하며 장마철을
피해왔건만 장대비가 내리는 시안공항에 도착하니 기가 막힌다. 시안은 비가 잘오지 않는
지역이라는데........ 직구를 기다리던 타자가 커브공 3개에 삼진당한 기분을 느끼며...
첫 코스인 아방궁에 도착했다.
1. 아방궁 (The Apang Palace)
진시황이 수천명의 궁녀와 시종을 거느리고 호화롭게 살았다는 궁궐로, 진시황이 70만의
죄수와 포로를 동원하여 동서 2,5km, 남북 1km의 규모로 지었는데 앞의 전(殿)과 뒤의 궁(宮)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었다고 한다. 아방궁의 위치는 지금도 모며, 지금 것은 1960년대에
추정복원한 것으로 마치 영화세트장같은 모습이다. (문화재적 가치는 없다.)
당시 아방궁은 항우가 진나라를 멸망시킨 후 태웠는데 얼마나 큰지 무려 3개월이나 걸렸다고
한다. 중국 역대 왕조들은 새로 들어설 때 마다 前代왕조의 궁궐을 철저히 파괴하여 시안에도
궁궐은 없다.
(단, 이민족이던 만주족 왕조인 청나라가 중국의 정통성을 얻기 위하여 명나라 궁궐인 자금성
을 그대로 쓴 덕분에 유일하게 북경에 남아있다.)
아방궁입구에 들어서면 바로 보이는 모습. 장마철에도 보기 힘든 비가 내린다.
반대쪽에서 본 모습. 가운데 뒷모습이 진시황이다.
2. 대안탑(大雁塔, Great Goose Pagoda)
<서유기>의 삼장법사로 유명한 현장스님이 천축국(인도)에 불교유학을 다녀오면서 가져온
불상과 경전을 모시기 위해 (지금은 섬서역사박물관으로 이전) 652년에 지은 탑으로 높이는
64m의 7층전탑이다.
대안탑은 당고종이 645년 어머니를 기리기 위하여 건립한 <대자은사>내에 있으며, 탑내에는
나선형의 계단 284개가 있어 올라갈 수 있고, (아파트 약 20층의 높이로 올라 갔다가 혼났다.)
매층의 사방에는 아치형의 창문이 있어 먼 곳까지 볼 수가 있다.
이 탑은 워낙 커서 멀리서 보아야 제대로 보인다.
대웅보전 올라가는 길
.
대자은사 대웅보전 앞은 향을 피우고 절을 하는 사람들로 가득하며. 또한 대웅보전 내에 있는
현장의 목상과 금으로 된 사리탑을 보려면 인내심이 필요하다.
우리나라와는 좀 다른 법당지붕의 모습. 풍경의 물고기 방향이 위로 되어 있다.
대안탑의 유래는 기러기(雁)에 관한 설화로 유명하다. 현장이 천축을 가던 중 사막에서 길을
잃었는데 기러기가 구해주었고, 현장은 기러기가 <부처님이 현신>한 것으로 생각하고 탑
이름을 대안탑(大雁塔)이라 지었다. 현장은 16년간 인도에서 산스크리트어를 익혀 불경을
공부하고 귀국한다.
시안에 온 현장은 관직제안을 거절하고 오로지 불경번역에만 몰두한다. 가져온 불경은 657부의
방대한 분량이었고, 생전 73부 1,330권만 번역하였다고 한다.
이때 <서유기>의 토대가 되는 <대당서역기>도 지었다. 서역을 거쳐 인도를 다녀오는 험난한
여정을 그린 총 21권의 대당서역기를 본 중국인들의 상상력이 더해져 탄생한 것이 <서유기>
이다. 실제 인물이 아닌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 등 여러 요괴들이 등장할 정도로 현장의 여정은
힘들고 드라마틱 하였다고 한다.
3. 화청지(華淸池, Hua Qing Chi)
중국 현존 최대의 당나라 왕실원림으로 고대부터 수려한 풍경과 지하온천수 때문에 역대 제왕의
관심을 받던 곳이다. 특히 당나라 현종과 양귀비가 함께 겨울을 보내고 화려한 누각도 많이
지었는데, 양귀비가실제 목욕한 온천탕과 양귀비의 석상도 볼수 있다.
당나라 시에는 화청지를 소재한 작품이 매우 많으며, 특히 白居易가 806년 120행으로 지은 서사시
<장한가, 長恨歌>가 유명하다. 당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을 다룬 작품으로, 안록산의 난으로
양귀비는 죽었지만 둘의 사랑은 영원하다는 내용이다.
현재 화청지에는 밤마다 <민속쇼+오페라>형태의 장한가(장예모 감독 연출)가 공연되는데
관람료가 50불이나 됨에도 불구하고 관객이 넘치고 있다.
장한가 공연장 입구
화청지의 누각
온천고원 (溫泉古源)
화청지 누각의 주,야경
화청지의 양귀비석상 이나 서화를 보면 그녀는 매우 통통한 편이었다. 그리고 섬서역사박물관
에서 본 당나라 미인들은 하나 같이 턱부분이 큰 방실이 스타일이었다. 미인의 기준이 요즘과는
달랐다고 본다.
절세의 미녀라는 양귀비의 석상, 예쁩니까 ?
양귀비가 목욕하던 욕조
화청지의 옆으로는 중국 근대사를 확 바꿔놓은 '서안사변(西安事變)'의 현장, 오간청(五間廳)
이 있다. 1936년 12월 몰리던 중국 공산당은 하늘이 내려준 기회를 잡는다. 마오쩌둥(毛澤東)과
공산당 잔존 세력을 완전하게 소탕하기 위해 국민당의 실권자 장제스(張介石)가 시안에 온다.
이 곳에서 만주 군벌 장쉐량(張學良)을 만나 지원을 요청할 생각이다.
그러나 사태가 급변한다. 12월12일 한밤 중에 오간청에서 장쉐량은 장제스에게 총구를 겨누고
체포한다. 결국 장제스는 먼저 일본에 대항하기 위해 공산당과 통일전선을 결성(제2차 국공
합작)하는데 암묵적으로 동의한 뒤 성탄절에 석방된다. 이후 공동의 적인 일본과 전쟁을 하고,
1945 일본패망 후 다시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은 시작되고, 공산당이 승리하고 1949년 중화
인민공화국이 탄생된다.
시안사변이 없었으면 장제스가 마오저뚱의 공산당을 소탕하였으리라. 그랬다면 중국은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 신(新) 중국에서도 시안은 늘 남다른 의미로 남아 있다.
4. 시안성벽 (西安城墻)
6백여년 전 14세기 명나라 홈무제 때 건설된 세게에서 가장 크고 완전하게 보존된 고대성벽
으로 동서남북 모두 4개의 성문이 있다.
길이 13,6km, 높이 12m, 폭 15m의 규모이다. 한번 둘러보려면 걸어서 4시간, 자전거로 1시간
걸린다. 성벽에 올라서면 마치 자동차도로 처럼 매우 넓다.
서안성의 성벽은 서쪽 이민족의 침입을 막아내던 守城, 攻城무기들이 복원전시되어 있는데,
삼국지에 나오는 영웅호걸들이 장안문을 드나들며 전투를 벌인던 모습들이 연상된다.
바람도 없는데 작은 종이연을 하늘 높이 날리는 솜씨가 놀랍다.
처음 보면 자동차길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넓다.
성위에는 고대무기들이 전시되어 있다.
중국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모습
일행중 우리나라의 수원화성은 장난감 같다고 하신 분도 있었다.
물론 시안성벽의 거대한 규모와 좀 색다른 분위기를 느낀 소감일 것이다.
시안성벽과 수원화성은 공히 세계문화유산이며, 대등한 보존적가치를 지니고 있다.
크기로만 비교하면 시안성벽이 나무라면, 수원화성은 분재 정도이다.
시안성벽이 남성스럽다면, 수원화성은 여성스럽다.
수원화성 옆에서 1년반을 살아본 나는 그래도 수원화성이 더 아름답고 정겹다고 할 것이다.
첫댓글 잘 보았습니다...
올해 중국관광은 이것으로 대체해도 될듯.......역사공부도하고 관광 잘하고 갑니다. 다음에 만나면 뒷이야기 많이 해 주시구려
가보지 못했던 중국관광 잘 했고요. 수고 많이 하셨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