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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남(雩南) 이승만
우남 이승만의 본관은 전주(全州). 초명은 승룡(承龍). 호는 우남(雩南). 황해도 평산 출신. 세종의 형인 양녕대군(讓寧大君)의 16대손이고, 아버지는 경선(敬善)이고, 어머니는 김해김씨(金海金氏)이다.
1877년 서울에 이사하여, 낙동(駱洞)과 도동(桃洞)에 있는 서당에서 과거 지향의 한학을 공부하다가 1894년에 과거제도가 폐지되자 이듬해 4월배재학당(培材學堂)에 입학, 영어와 신학문을 연마하였다. 1895년 말 미국에서 돌아온 서재필(徐載弼)이 배재학당 내에 협성회(協成會)를 조직하자 이에 가담하였다.
그 뒤 ≪협성회회보≫와 ≪매일신문≫을 창간하여 그 주필과 사장직을 맡아 활약하였고, 독립협회 산하의 만민공동회를 통해 부패·무능한 정부를 비판하고 독립·민권사상을 고취하는 등 민중계몽에 앞장섰다. 이러한 개혁운동을 벌이던 끝에 1898년 11월에 중추원(中樞院) 의관(議官:종9품)에 임명되었다.
중추원 의원이 된 다음 그는 일본에 망명중인 박영효(朴泳孝)를 영입하여 강력한 내각 중심제 정부를 조직하고 고종 황제를 양위시키려는 음모에 가담한 결과 고종 측의 노여움을 사 1899년 1월 경무청에 구금되었다.
구금된 지 20일만에 탈옥을 시도하다가 실패하여 평리원 재판에서 종신형 언도를 받고 한성감옥서(漢城監獄署)에 수감되어 1904년 8월까지 5년 반 이상 영어(囹圄)생활을 하였다. 옥중에서 그는 ≪청일젼긔 淸日戰紀≫를 편역하고 ≪독립졍신≫을 저술하였으며, ≪신영한사전≫을 편찬하면서 ≪뎨국신문≫에 논설을 투고하였다.
1904년에 발발한 러일전쟁을 계기로 석방된 그는 1904년 11월 민영환(閔泳煥)과 한규설(韓圭卨)의 주선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윤병구(尹炳求) 목사와 함께 1905년 8월 미국의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대통령을 회견하고 러·일전쟁 종결 후 미국이 한국의 독립을 보존하는 데 힘써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외교에 실패한 그는 1910년까지 5년 동안 미국에 머물면서 조지 워싱턴대학, 하버드대학 및 프린스턴대학에서 각각 학사·석사·박사 과정을 이수한 끝에 1910년 7월에 프린스턴대학에서 <미국의 영향하에 발달된 국제법상 중립>이라는 주제의 논문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910년 8월 일제 식민지로 전락한 조국으로 귀환하여 황성기독교청년회(YMCA)의 학감(學監)직을 맡아 후진 양성에 주력하였다. 또한 전국적으로 청년회 조직망을 구축하던 중 1912년 일제가 조작한 ‘105인사건’에 연루되었다.
이 때 그는 감리교 선교부 동북아 총책 해리스(M.C.Harris) 감독의 도움으로 (1912년 3월 미국 미네아폴리스에서 열릴 국제기독교 감리회 4년총회의 한국대표로 참가한다는 명목하에) 출국함으로써 위기를 모면했다.
미국에 도착한 그는 당시 뉴져지주(州)의 지사(知事)이고 은사인 윌슨(Woodrow Wilson)을 찾아가 ‘105인사건’에 연루된 한국기독교인들의 구명운동을 펼쳤으나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 뒤 네브라스카에서 옥중 동지 박용만(朴容萬)을 만나 상의한 다음 1913년 2월 하와이의 호놀루루로 건너가서 한인중앙학원(1918년 ‘한인기독학원’으로 개명)을 인수, 운영하면서 <태평양잡지>(1930년에 태평양주보로 개제)를 창간하였으며, 1918년에는 한인기독교회를 설립하였다.
외교를 통하여 독립을 달성해야 한다는 외교독립론을 주장하던 그는 박용만의 무력양성론에 반대하였고, 1915년 ‘대한인국민회 하와이 지방총회’의 재정문제로 박용만파와 대결함으로써 미국 내 교포사회의 분열을 초래하였다.
1918년 12월 ‘대한인국민회’(회장:안창호)로 부터 정한경(鄭翰景)·민찬호(閔燦鎬)와 함께 파리 강화회의의 한국대표로 임명된 그는 워싱턴에서 백악관 및 국무성을 상대로 파리행 여행권을 얻으려고 노력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미국 국무성으로부터 여행권 발급 거부통보를 받기 이틀 전(3월 3일)에 그는 정한경과 공동 명의로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한 윌슨 대통령에게 ‘장차 완전한 독립을 준다는 보장하에 한국을 신설될 국제연맹(The League of Nations)의 위임통치하에 둘 것’을 요청하는 청원서를 제출하였다.
파리행을 포기한 그는 서재필과 함께 1919년 4월 14∼16일간 필라델피아에서 ‘한인대표자대회(The First Korean Congress)’를 소집하여 독립방략을 논의하고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세계여론에 호소하였다.
국내에서 3·1운동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3월 10일에야 전하여 들은 그는 4월과 5월에 3월 21일에 선포된 노령의 임시정부에서 국무급(及) 외무총장으로, 4월 10일에 구성된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국무총리로, 그리고 4월 23일에 선포된 한성임시정부에서 집정관총재(執政官總裁)로 임명된 사실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6월에 대한공화국 대통령(President of the Republic of Korea)의 명의로 각국 정부수반과 강화회의 의장에게 한국의 독립을 통고하는 한편, 8월 25일에는 워싱턴에 구미위원부(The Korean Commission to America and Europe)를 설치하고 외교활동과 독립자금 모집운동에 전념하였다.
1919년 9월 6일 상해의 임시정부(약칭 임정) 의정원으로부터 임시 대통령으로 추대된 그는 상해로 건너가 1920년 12월부터 1921년 5월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직을 수행하였다.
상해 임정 내의 반대세력들의 협조거부로 대통령직을 원만히 수행하지 못한 그는 1921년 10월에 개최될 워싱턴 군축회의(일명 태평양회의, The Washington Disarmament Conference)에 참석하기 위해 미국으로 돌아갔다.
워싱턴 군축회의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전권 대사로서 한국인의 독립문제를 의제로 상정시키려는 외교활동을 폈지만,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1922년 9월 하와이로 돌아간 그는 다시 언론·교육·종교사업에 종사하였다. 1924년 11월 호놀루루에서 조직된 대한인동지회에서 그는 종신총재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상해 임정의 의정원에서 1925년 3월 탄핵함으로써 그는 임시대통령직에서 면직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동안 한성의 임시정부의 법통을 내세우며 임시정부 대통령임을 자처하였고, 구미위원부를 활용하면서 독립운동을 지속하였다.
1933년 초 그는 제네바에서 개최된 국제연맹회의에 참석하여 열강대표들에게 한국의 독립문제를 환기시켰다. 회의 종결 후, 모스크바를 방문하고 미국으로 귀환한 그는 뉴욕에서 1934년 10월에 제네바에서 만났던 프란체스카 도너(Francesca Donner) 양과 결혼하였다.
이승만 부부는 1939년 11월에 호놀루루를 떠나 워싱턴에 자리잡고 ≪일본내막기 Japan Inside Out≫라는 영문저서 집필에 몰두한 끝에 이 책을 1941년 여름에 출판하였다.
1941년 12월 진주만사건을 계기로 미·일간에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중경(重慶)에 위치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자격으로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D.Roosevelt)와 국무성을 상대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승인을 요구하는 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운동의 일환으로 그는 미국 육군전략사무처(O.S.S.)의 항일 게릴라전 계획에 적극 협조하였다. 그리고 1945년 4월 샌프란시스코에서 개최된 국제연합 창립 총회에서 한국 대표단 단장으로 임정 대표의 참석권을 요구하는 외교활동을 폈다.
1945년 8월 광복 후 10월에 귀국한 그는 독립촉성중앙위원회 총재, 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의장, 민족통일총본부 총재 등을 역임하면서 미·소 등의 신탁통치안 반대, 좌우합작 반대, 미소공동위원회 참가 거부, 김구(金九)·김규식(金奎植) 등의 남북협상 거부 등 반탁과 반공노선을 견지하였다.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무산되자, 그는 1946년 6월부터 남한 단독정부 수립 불가피론을 주창하고 이의 실현을 위해 1946년 12월부터 1947년 4월까지 워싱턴을 방문하여 그곳에서 로비활동을 전개하였다.
미국 방문 기간중(1947년 3월)에 발표된 트루만(Harry Truman) 대통령의 대 소(對蘇) 봉쇄 및 반공주의적인 트루만 독트린은 그의 반공·단정노선의 입지를 강화시켜 주었다.
1947년 11월 유엔총회에서 총선거를 통해 한국을 독립시키기로 결의한 다음 유엔임시한국위원단(UNTCOK)의 감시하에 1948년 5월 남한에서의 총선거가 실시된 다음 제헌국회가 구성되자, 그는 초대국회의장에 선출되었다. 국회의장으로서 그는 대통령 중심제 헌법을 제정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그리고 그 해 7월 20일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함께 대통령직에 취임하였다. 초대 대통령으로 그는 농지개혁을 단행하여 농민들의 불만을 해소하고, 의무교육제를 도입하고 각급 학교를 증설하여 전 국민의 교육수준을 높이는 한편, 국내의 공산주의운동을 분쇄하고, 일본에 대해서는 강경외교를 견지하였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대미외교를 통하여 미군의 신속한 개입, 파병을 실현시키고 유엔군의 도움을 얻어 공산군을 격퇴하였다. 전쟁중 무력통일을 실현시키려했던 그는 국토가 분단된 상태에서의 휴전협상에 강력히 반대하다가 1953년 6월 남한 각지에 수용되어 있던 반공포로 2만 7,000여 명을 유엔군 측의 사전 양해 없이 석방하였다.
같은해 7월 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되자, 미국이 한국과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한다는 조건으로 이를 수락하고 10월에 그 조약을 실현시킴으로써 휴전 후 한국에 대한 미국의 군사지원을 확약받았다. 6·25전쟁으로 정부가 부산에 피난해 있던 1951년 12월 정치안정과 장기집권을 위하여 자유당(自由黨)을 창설하였다.
그리고 다음해 정치파동을 일으켜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을 통과시킴으로써 4년임기의 대통령직에 재선되었다. 1954년 국회는 이승만에게 대통령 3선금지를 면제해 주는 사사오입(四捨五入) 개헌을 통과시켰다. 1956년의 선거에서 민주당 대통령후보 신익희(申翼熙)가 투표 몇 일 전에 사망하여 유권자 56%의 지지를 얻어 세 번째 당선되었다.
1960년 3·15 정·부통령 선거에서는 민주당 대통령 후보 조병옥(趙炳玉)이 선거전에 사망하여 그의 4선이 확실시되었으나, 자유당은 부통령후보 이기붕(李起鵬)을 당선시키기 위하여 대대적인 선거부정을 감행하였다. 이를 계기로 4·19혁명이 일어나자, 그는 이 사태에 책임을 지고 4월 27일 대통령직을 사임하였다.
같은해 5월 휴양차 하와이로 떠난 그는 후속 정권에 의해 귀국을 허락받지 못하고 호놀루루에서 1965년 7월 19일에 서거하였다. 유해는 하와이에서 국내로 옮겨 와 가족장으로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저서로는 ≪독립졍신≫·≪한국교회핍박≫·≪쳥청일젼긔 淸日戰紀≫·≪Neutrality As Influenced by the United States 미국의 영향하에 발달된 국제법상 중립≫·≪Japan Inside Out 일본내막기≫ 등이 있고, 한시(漢詩)모음 ≪체역집 替役集≫을 남겼다.
이승만 없었다면 박정희도 없다
어느 집안에 훌륭한 사람이 배출되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그 부모가 있었기에 훌륭하게 자랄 수 있었다. 부모없는 자식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그 부모도 그 선조가 있었기에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었고 그 자식이 훌륭하게 자랄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될 수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매년 조상의 음덕을 기리며 제사를 올린다. 결코 조상의 공을 소홀히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조상에 대한 경배는 왕조에서도 행한다. 예를 들어 조선왕조에서는 종묘를 설치하여 태조 이성계를 개국의 왕으로 모신다. 조선왕조에서 아무리 훌륭한 임금이 배출되었다고 하여도 태조 이성계가 조선왕조를 열지 않았다면 결코 훌륭한 왕으로 배출될 수 없었을 것이다. 세종대왕이 아무리 훌륭하여도 태조 이성계가 없었다면 그 자리에 오를 수 없었을 것이며 그 업적을 쌓을 기회를 얻지 못하였을 것이다.
대한민국도 마찬가지다. 건국대통령 이승만 박사가 없었다면 대한민국은 건국되지 못하였을 것이며, 대한민국이 없었다면 박정희 대통령도 배출되지 못하였을 것이다. 이승만 박사가 자유민주주의에 입각한 대한민국을 건국하였기 때문에 4.19의거도 발생할 수 있었고 박정희 대통령도 배출될 수 있었다.
따라서 박정희 대통령은 훌륭한 대통령으로 받들면서 이승만 대통령, 건국 대통령의 공적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것은 우리나라의 이상한 풍토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보수애국 세력 중에서도 유독 박정희 대통령은 존경하면서도 이승만 건국 대통령에 대해서는 별 관심을 갖지 않은 사람들도 많다. 이것은 이승만 건국 대통령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
건국 대통령 이승만 박사가 4.19의거에 의해 대통령직을 내놓았기 때문에 그에게 독재자라는 누명이 씌어져 있으나 사실 그것은 억울한 누명이다. 세계 역사상 어느 독재자가 국민이 원한다면 하야한다는 말 한마디를 남기고 권력을 내놓았는가? 이승만 대통령은 국민의 뜻을 존중하여 권력에 집착하지 않고 하야의 길을 택하였다. 그리고 그 당시 반대 데모에 참가하였던 사람들도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서는 별다른 악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3.15부정선거는 부통령 후보인 이기붕에 의해 저질러진 것이며 국민들고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부정선거에 대해 책임을 지고 하야한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서는 국민들이 별다른 악의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다.
그 보다도 건국 대통령 이승만 박사가 공산주의자들의 온갖 방해를 극복하고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또 6.25동란을 통한 공산주의자들의 무력 침략에서도 대한민국을 지켜내고 이를 계기로 대한민국의 동맹국으로 미국을 끌어들여 대한민국의 안보를 지킬 수 있게 하고,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유민주주의를 굳건히 지켜냈기 때문에 그 이후의 발전이 가능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승만 대통령이 닦아 놓은 기초 위에 대한민국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만약에 박정희 대통령이 건국 초기에 나라 운영을 맡았다면 이승만 대통령 이상으로 잘 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오히려 어쩌면 대한민국이 자유민주국가로 발전하지 못하고 북한과 비슷한 독재체제로 퇴보하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따라서 대한민국은 건국 대통령 이승만 박사가 세운 그대로, 자유민주주의를 기본으로 하여 발전할 수 있었다. 그 후 우리는 모두 자유민주주의에 입각한 선진조국을 건설하기 위해 매진하였으니 그 기초는 건국 대통령 이승만 박사가 세운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4.19의거를 ‘혁명’이라고 부르거나 5.16군사쿠데타를 ‘혁명’으로 부르는 것은 문제가 있다. 혁명이라고 할 수 있기 위해서는 국가의 기본체제가 바뀌어야 하는데 이들 사건들은 이승만 대통령이 기초를 닦은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고 유지하기 위해 발생한 것이기 때문이다. 혁명이라고 하기 위해서는 마치 불란서시민혁명과 같이 왕조체제가 민주체제로 바뀌는 것과 같은 체제상의 변화가 수반되어야 한다.
가정에서도 조상을 모시고 왕조에서도 종묘사직을 지키기 위해 후대 왕들이 최선을 다하였다. 그런데 어찌하여 대한민국은 건국 대통령을 사람들이 잊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 건국 대통령이 대한민국을 건국하지 않았다면 어찌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존재할 수 있었으며, 어찌 4.19의거나 박정희 대통령이 존재할 수 있었겠는가? 우리 모두 다시 기본으로 돌아가 건국 대통령 이승만 박사의 공적을 되새기고 그의 공적을 기리고 그의 정신을 되살리기 위한 기념관을 건립하여야 한다. 뿌리 없는 나무가 어찌 크게 자라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마찬가지로 뿌리가 없는 국가가 어찌 흥성하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우리 모두 건국 대통령 이승만 박사를 기념하는 기념관 건립을 발원하고 추진하자.
이승만 박사가 없었다면 우리는 김일성 가문의 노예가 되었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고 하지만 해방 이후 이승만 박사가 없었다면 우리가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왜냐하면 이승만 박사는 당시 유일한 자유민주주의자였기 때문이다.
이승만 박사가 없었다면 대한민국도 없었다는 글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들이 더러 있었는데, 그것은 그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정치적 지도자들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당시의 역사를 공부하게 되면 대한민국은 이승만 박사의 개인적 집념과 노력으로 건국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물론 국민의 지지가 있었기에 가능했지만 지도자가 없는 국민의 지지는 의미가 없다.
이승만 박사가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추정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정치상황에서 이승만 박사를 빼면 금방 알 수 있다. 이승만 박사를 당시 정치상황에서 제외하면 주된 정치 참가자는 다음과 같다. 미국과 소련, 김일성, 조만식, 김구, 김규식, 여운형, 박헌영 등이다. 물론 더 많은 사람들이 존재하지만 그들을 다 고려하여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역할이 그리 크지 않기 때문이다.
우선 미국은 소련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미 대일전에 참전하는 조건으로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를 약속하였기 때문에 4대국 신탁통치를 그대로 실시하였을 것이다. 신탁통치는 이승만 박사가 유일하게 반대하였다. 김구가 이승만 노선을 지지하여 반탁운동을 한 것을 사실이지만 후에 좌우합작에 기대를 걸게 되는 만큰 김구 혼자였다면 아마 반탁운동을 전개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승만 박사는 해방 이전부터 한국민이 자치능력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세계를 상대로 홍보하였다.
신탁통치가 중요한 이유는 소련은 신탁통치 기간에 한반도를 공산화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련은 북한을 점령하자 곧 북한 정권 수립에 착수한다. 북한을 점령한 소련 25군이 주체가 되어 북한에 괴뢰정부를 세웠다. 중공은 중국을 장악하기 전에 이미 북한에 2개 사단을 지원하였다. 남한에는 해방직후 여운형의 건준을 거쳐 인민공화국이 선포되어 있었다. 따라서 신탁통치가 그대로 실시되었다면 남한에는 좌우합작정부가 들어설 수밖에 없었을 것이며 이것은 곧 바로 공산화 되었을 것이다. 북한에서 조만식이 축출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남한의 정치지도자는 공산주의자를 제외하고 모두 숙청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당시 미국의 정책은 소련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좌우합작정부를 세우는 것이었다. 미국 정책을 충실하게 실행하려는 하지 중장은 그래서 이승만 박사를 가택연금까지 시키면서 정치권에서 제거하려고 하였고 김규식이나 안재홍 등과 같은 좌우합작파에게 정부수립을 맡기려 하였다. 심지어는 미국 시민인 서재필까지 이용하여 이승만 박사를 제거시키려 하였다. 종국에는 김구까지 좌우합작에 기대를 걸고 김일성을 만나러 평양으로 갔다. 이들 좌우합작파들은 미국의 정책이 좌우합작이니만큼 좌우합작이 아닌면 살아남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오직 이승만 박사만이 좌우합작은 공산주의자에게 나라를 바치는 결과를 가져오니 자신이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나 공산주의자의 지배를 받기 위해 독립운동을 한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좌우합작을 반대하였다.
그렇다면 이승만 박사가 철저한 자유민주주의자가 아니었다면, 또는 철저한 반공주의자가 아니었다면, 총선거에 의한 자유민주국가를 건국하려는 이상을 가지고 또 실천하려는 정치인이 그 당시에 또 존재하였는가? 답은 아니다이다. 뿐만 아니라 그 당시에는 오직 이승만 박사만이 미국 정부와 미국 국민에 대해 한국의 독립을 설득할 수 있는 수단과 의사소통 통로를 가지고 있었다. 이승만 박사는 1919년 이후 워싱턴에 구미위원부를 유지하고 있었고, 이 조직을 통해 미국 정부와 국민을 상대로 끊임없이 한국민의 자치능력을 과시하고 한국의 독립의 당위성을 설득하였던 것이다. 그 당시 정치인들 중 누가 이런 조직을 가지고 있었는가? 아무도 없었다.
따라서 이승만 박사가 아니었다면 한반도는 공산당의 지배를 받는 것은 피할 수없는 결과다. 소련의 25군은 북한을 점령하자 바로 김일성을 괴뢰를 내세워 공산정권을 수립하였다. 그 이유는 북한에 공산정권을 수립하는 것 자체보다는 북한의 부동항과 핵무기를 제조할 수 있는 우랴늄이 풍부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련이 세운 김일성은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고 1950년에는 전쟁을 도발할 만큼 무력지원도 받았다. 소련은 확고한 정책을 가지고 북한에 괴뢰정권을 세웠으나 미국은 좌우합작정부를 세운다는 정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헤메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끝까지 반공을 내세워 총선거에 의한 독립국가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한 이승만 박사가 없었다면 누가 공산세력을 물리치고 자유민주국가를 건국할 수 있었겠는가?
이승만 박사가 없었다면 한반도는 분명 공산화되었을 것이다. 지배자는 물론 김일성이 되었을 것이고 지금은 김정일의 지배를 받고 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한국이 잘 살게 된 것은 당연한 결과이고 이승만 박사가 없었더라도 당연히 자유민주주의에 입각한 대한민국이 건국되었을 것으로 믿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를 되돌아보면 오히려 자유민주체제에 입각한 대한민국이 건국된 것이 기적이며 그 공로는 오로지 이승만 박사 한 분에게 돌려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이승만 박사가 없었다면 대한민국도 없었다는 이야기는 다시 말하면 이승만 박사가 없었다면남한은 공산화되었다는 이야기이며며, 그 이야기는 우리가 지금은 김정일의 노예가 되어 비참하게 살고 있을 것이란 이야기다. 얼마나 끔찍한 이야기인가.
이래도 우리가 이승만 박사를 독재자로 욕할 수 있으며, 이승만 박사를 국부로 부르는 것을 주저하며, 이승만 박사를 건국 대통령으로 존경하는 것을 반대하며, 이승만 건국 대통령의 기념관 건립을 반대할 것인가? 모두들 두 손 모아 조용히 생각해보기 바란다.
이승만과 박정희가 '歷史의 가해자'인가
1965년생인 정청래 의원은 이승만 정권 때는 세상에 없었다. 박정희 정권 시절에는 '안타깝게도' 탄압받을 나이가 안 됐다. 그런 개인적 체험 없이도 '유대인의 히틀러 묘소 참배'니 '우리가 야스쿠니 신사에 가서 절하는 것'에 비유하는 걸 보면 그의 능력은 한쪽으로 몹시 발달했다. 하지만 이승만과 박정희를 히틀러처럼 보는 시각은 그쪽에서는 새삼스러운 게 아니다.
몸으로는 '국민 통합을 위해' 참배는 했지만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도 머릿속에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었을 게 틀림없다. 그는 쉽지 않은 참배를 마친 뒤 이런 소감을 밝혔다.
"진정한 국민 통합은 '역사(歷史)의 가해자' 측에서 지난 역사의 잘못에 대해서 반성하고, 또 국민들께 진솔하게 사과하고, 피해자들을 위로하고…."
그가 아무 생각 없이 원론적인 얘기를 했을 리 없다. 박근혜 대통령에게 들으라는 소리 같기도 하고, 분명히 메시지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신문사에서 반평생 밥벌이해온 나는 대체 이 말이 해독(解讀)이 안 됐다.
우선 '역사의 가해자'는 누굴 지칭하는 것일까. 박근혜 대통령은 역사 속에 들어간 것이 아니고, 설마 아버지의 유산(遺産) 때문에 그가 '역사의 가해자'라는 유치한 논리를 펴지는 않았을 것이다.
역시 '역사의 가해자'는 이승만·박정희가 유력하다. 무덤 속 그들이 어떻게 반성하고 무슨 수로 국민에게 진솔하게 사과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 시절 정권에 의해 탄압받고 희생된 피해자들은 있었다. 문 대표도 대학에 다닐 때 투옥된 적이 있었다. 역사의 거대한 수레바퀴가 굴러가면서 무고한 사람들까지 깔리고 피를 묻혔다. 피해자의 입장에서는 당시 대통령이 잔혹한 가해자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속에 살았던 대다수 국민과 역사의 흐름에서 보면 이승만과 박정희를 '역사의 가해자'라고 부르는 것은 초등학생 수준에서나 할 소리가 아닌가. 시대마다 당면한 과제가 있는 법이다. 나라를 끌고 가는 철학과 우선순위가 다를 수 있다. 공과(功過)가 있었지만 그래도 국민에게는 '건국' '자유민주체제 편입' '근대화와 경제 부흥'의 혜택이 더 컸다. 그 시대에 대한민국 오늘의 기반이 만들어졌다.
'민주화'가 소중한 가치이지만 그 잣대에 맞지 않으면 역사의 가해자로 모는 것은 오만과 독선이다. 32년 뒤 재심(再審)에서 무죄판결을 받은 '인혁당 사건'(1975년)으로 부친을 떠나보낸 친구는 개인적인 한(恨)은 간직해도 박정희를 역사의 가해자로 보는 데는 동의하지 않았다. 그 시절 10년 가까이 감옥살이를 한 보수 논객 류근일씨나 시인 김지하씨도 그렇게 사적으로만 그 시대와 역사를 읽지 않는다.
그래서 문 대표가 "역사의 가해자 측에서 국민들께 진솔하게 사과하라"고 했을 때 몹시 혼란스러웠다. 그 국민은 어느 나라 국민을 말하는가. 그 국민은 '역사의 가해자' 이승만을 새롭게 발견하고 "해방 공간에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선택한 그가 없었다면 우리의 운명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라며 재평가를 하고 있는 중이다. 그 국민은 또 다른 '역사의 가해자' 박정희를 역대 최고의 대통령으로 꼽아 왔고, 그에 대한 고마움으로 그의 딸까지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역사의 가해자'에 대한 다수 국민의 판단이 그릇된 것일까, 아니면 문 대표나 그쪽 진영에서 세상을 잘못 바라보고 있는 것인가. 박근혜 대통령처럼 과거 시절의 개념으로 현재의 정국을 운영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지금의 한쪽 잣대로 과거 시절을 재단하는 것도 참고 봐주기 어렵다.
대통령 묘역(墓域) 참배는 역사와의 대화(對話)다. 우리가 어디서 왔고, 어디에 있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가. 무덤 속에 잠들어 있는 사자(死者)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에게는 우리의 시대적 과제가 주어져 있다는 걸 깨닫는 데 있다. 역대 대통령이 생전에 매달렸을 국가적 고민을 기억하며 지금의 해답을 찾으려는 것이다.
이런 깊은 인식과 각성에서 문 대표가 참배에 나섰을까. 검은 양복에 엄숙한 표정으로 이·박 전 대통령 묘역에 섰지만 그 생각은 '역사의 가해자'에 머물렀다. 당초 의도한 대로 중도층의 반응은 좋았다. 하지만 주위의 비판이 거세거나 여론이 나빠지면 그는 언제든지 다르게 행동할 것이다. 한낱 정청래 의원의 퍼붓는 발언에도 그가 꼼짝 못하는 것도 그런 이치다.
지도자급 정치인이 높은 자리를 맡으면 바로 다음날 현충원에 가고, 어느 대통령의 묘역에 참배했느니 안 했느니로 잡음과 분열을 만드는 장면은 일상의 코미디처럼 됐다. 참배한들 무엇이 달라졌는가. 무덤 속 사자들이 그런 참배를 원했을 리도 없다. 차라리 자신의 부모 묘소나 납골당에 가서 효자 노릇이라도 제대로 하는 게 좋을 듯하다.
1. http://ko.wikipedia.org/wiki/%EC%9D%B4%EC%8A%B9%EB%A7%8C
2.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35021&cid=40942&categoryId=33385
3. http://ko.wikipedia.org/wiki/%EB%B6%84%EB%A5%98:%EC%9D%B4%EC%8A%B9%EB%A7%8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