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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Wir haben das Glück erfunden" - sagen die letzten Menschen und blinzeln.
“우리는 행복을 고안해 냈다.” — 최후의 인간은 이렇게 말하면서 눈을 깜박거린다.
영원이 아닌 시간 속에서의 무한한 삶을 살기 위해서 ‘행복’을 고안해 냈다는 것. 무한히 이어지는 삶에서 행복이란 무엇일까. 무한히 이어지는 시간 속에서 권태를 이기는 나름대로의 방식이 아닐까. 행복을 느끼는 것이 아니다. 행복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인공적인 것. 고안해 낸 인공적인 행복은 이 인간의 삶을 이어지게 하는 요소가 되고 있다. 인간의 삶은 이 행복으로 점철되어 있다. 행복을 만들어냈으므로 자기가 만들어낸 행복을 즐거워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 즐거움은 본래적인 의미에서의 즐거움이라고 할 수 없는 것. 허상의 허상의 허상을 보면서 즐거워하는 인간은 눈을 깜박거리는 표정을 짓고 있다. 느낌이 없는 상태가 아닐까. 눈만 깜박거릴 뿐 행복에 대해서 어떤 감응도 느낄 수 없는 상태. 자기가 고안해 낸 행복은 인간을 변화시킬 수 없다. 무료하고 권태로운 시간이 무한히 흘러갈 뿐.
Sie haben den Gegenden verlassen, wo es hart war zu leben: denn man braucht Wärme. Man liebt noch den Nachbar und reibt sich an ihm: denn man braucht Wärme.
그들은 살기 힘든 고장을 떠났다. 인간은 온기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여전히 이웃을 사랑하면서 그에게 몸을 비벼대고 있다. 인간은 온기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영원이 아닌 끝없이 이어지는 시간 속에서 사는 이 최후의 인간은 살기 힘든 고장을 떠나는데 그 이유는 인간은 온기를 필요로 하기 때문. ‘온기’란 인생의 가혹함(hart)을 이겨내는 방편. 왜 가혹한가. 끝이 없기 때문. 벼룩과 같이 뛰어 다니면서 왜소한 삶을 사는 인간에게 어느 곳이든 살기 힘든 곳이 아닐 수 없다. 이 가혹함을 이기려면 온기가 필요한데 그 온기를 얻기 위해서 이웃에게 몸을 비벼대고 있다는 것. ‘사랑’은 이웃에게 비벼대기 위한 전단계에 해당된다. 사랑이 목적이 아니라 사랑을 수단으로 해서 온기를 얻게 된다. 최후의 인간에게 사랑이란 방편에 지나지 않는 것. 차라투스트라는 이런 방편으로서의 사랑이 아니라 절대적인 사랑을 알려주려 한다. 이 사랑은 끝도 없이 이어지는 삶 속에서 온기를 얻고 인생의 가혹함을 일시적으로 피해보려고 하는 자들이 기울이는 노력에 불과하다는 것. 지금 시장의 사람들은 이런 상태에 있는 최후의 인간으로 나아가서는 안 되기 때문에 최후의 인간에 대해서 역설하고 있다.
Krankwerden und Misstrauen-haben gilt ihnen sündhaft: man geht achtsam einher. Ein Thor, der noch über Steine oder Menschen stolpert!
병에 걸리는 것과 의심을 품는 것은 그들에게는 죄악에 빠지는 거나 다름없다. 그들은 걸음걸이도 조심한다. 아직도 돌부리에 걸리거나 인간과 부딪쳐서 비틀거리는 자는 바보다.
병에 걸리는 것과 의심을 품는 것의 공통점은 약해지는 것. 병이 걸리는 것은 몸이 약해지는 것이고 의심을 품는 것은 정신이 약해지는 것. 약해지는 것은 죄악에 빠지는 것과 같다고 한다. 죄를 범하면 벌을 받는 것. 그들은 약해지는 것이 벌을 받게 되는 원인이 된다. 약해진다는 것은 무엇인가. 벼룩과 같이 작아진 최후의 인간에게 있어서 약해지는 것은 더 약해지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끝도 없이 이어지는 시간 속에서 이리 저리 튀어다니지도 못하게 되니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그들은 걸음걸이도 조심하는 것이다. 약해지지 않기 위해서. 최후의 인간은 주도면밀하게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을 보낼 차비를 갖추고 있다. 걸음걸이를 조심하기 때문에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거나 사람과 부딪쳐서 비틀거리는 자도 없다는 것이다. 어떤 것과도 충돌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 오직 ‘온기’를 얻기 위해서 다른 사람에게 몸을 비벼대는 사람. 아무런 충돌도 없이, 더 이상 약해지지도 않고 살아가는 사람. 최후의 인간은 ‘벼룩과 같아서 근절되지 않는다’는 말이 실감된다. 최후의 인간은 영원이 아니라 끝없이 이어지는 시간에 자신을 최적화시킨 존재이다.
Ein wenig Gift ab und zu: das macht angenehme Träume. Und viel Gift zuletzt, zu einem angenehmen Sterben.
이따금 복용하는 소량의 독(毒), 그것은 그들에게 안락한 꿈을 꾸게 해준다.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는 다량의 독을 마신다. 안락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서.
‘이따금 복용하는 소량의 독’은 앞서 말한 바, 종말의 인간이 고안해 낸 행복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 이 소량의 독은 안락한 꿈을 꾸게 해준다. 안락한 꿈속에서 현실을 잊어버리는 것. 현실이란 끝없이 이어지는 시간. 이 끝없는 시간 속에서 독, 즉 행복을 통해서 현실을 잊는다. 그 대신 그 독은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를 소멸에 이르게 한다. 영원이 아닌 끝없는 시간 속에서 인간 존재의 소멸이란 자기 자신이 없는 삶의 무한한 연속을 가리키는 것. 이것은 진정한 안락이 아니고 저주에 다름 아니다. 이렇게 소량의 독을 마시던 최후의 인간은 마지막에 가서는 다량의 독을 마시는데 그 목적은 안락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함이다. ‘안락한 죽음’이란 ‘안락한 꿈’ 속에서의 죽음이므로 실재의 죽음이 아니라 꿈속에서의 죽음과 같이 실재가 아닌 것.
최후의 인간이 왜 이렇게 하는가. ‘안락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함인데 죽음이 없는 인간이기 때문에—이 종족은 근절되지 않는다고 했으므로 이 최후의 인간에게는 죽음이 없다—꿈속에서라도 죽음을 원한다. 하지만 죽음은 오지 않고 끝없는 시간 속에서 저주가 있을 뿐이다. 이 최후의 인간과 초인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그 사람이 그 사람이라는 것. 최후의 인간이 곧 초인이라는 것. 그 차이는 없다고 할 수도 있고 있다고 할 수도 있다. 이 시장의 사람들이 초인의 씨앗이므로 이들은 이미 초인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씨앗이 자라나지 않는 한 초인이 절대로 될 수 없기도 하다. 이 초인과 최후의 인간 사이에 차라투스트라가 서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최후의 인간이면서 또한 초인이다, 그러므로.
Man arbeitet noch, denn Arbeit ist eine Unterhaltung. Aber man sorgt dass die Unterhaltung nicht angreife.
사람은 여전히 일하고 있다. 일은 일종의 유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은 그 유지가 잡지 않을까 걱정한다.
사람은 일을 하고 있는데 그 일은 현상 유지를 위한 하나의 방편이다. 일을 하지 않으면 현상 유지를 할 수 없다. 그러면서도 그 일에 사로잡히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다. 현상 유지를 위한 방편으로 일을 택해서 하고 있는데 그 일에 사로잡히게 되면 방편에 얽매이게 되는 것. 인간이 하는 일은 궁극적인 목적이 될 수 없고 삶을 유지해 나가는 데 필요한 방편에 불과하다. 삶을 유지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시간을 이어가는 것. 일을 하지 않고 가만 있으면 시간 속에 매몰되어서 자기의 존재 자체가 없어져 버릴 것 같은 불안이 있다. 그래서 일을 하고 있지만 일을 하면 또한 그 일 속에 매몰되어 버릴 것 같은 불안이 또 생겨나는 것이다. 인간은 어떤 일을 해도 그것에 사로잡힐 것 같은 불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존재임을 말하고 있다. ‘일’(Arbeit)은 인간이 하는 모든 행위를 가리키는 것. 모든 행위를 인간이 지배하고 장악하지 못하고 그 행위에 사로잡힐 가능성이 늘 있는 존재, 그것이 인간이라는 것. 이것은 시간 속에 있는 인간의 존재이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끝나지 않는, 영원하지는 않은 시간 속에서 인간은 시간에 사로잡힐 것 같은 불안에 늘 노출되어 있다. 시간을 살면서도 시간에 사로잡히지 않을까 걱정하면서 살아가는 존재가 인간이라는 것. 이 시간과 인간과의 관계는 인간과 모든 일, 모든 것과의 관계를 규정짓는 잣대가 되고 있다. 사실상 시간은 인간에 사로잡히지도 않고 인간이 시간에 사로잡히지도 않고 있다. 시간은 그저 흘러가는데 인간은 시간과의 관계에서 늘 불안해 하고 있다. 이것을 넘어서는 것이 초인이라는 것.
Man wird nicht mehr arm und reich: Beides ist zu beschwerlich. Wer will noch regieren? Wer noch gehorchen? Beides ist zu beschwerlich.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가난해지지도 않고 부자가 되지도 못한다. 둘 다 너무 번거로운 일이 되었다. 누가 아직도 지배하기를 원하는가? 누가 아직도 복종하기를 원하는가? 둘 다 너무 번거로운 일이다.
일을 하면 가난해지고 부자가 되는데, 사람이 일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난해지지도 않고 부자가 되지도 않는다. 이 일은 이전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일은 ‘일종의 유지’이기 때문에 부자가 되거나 가난해지는 일 모두 ‘너무 번거로운 일’이라는 것이다. 하지 않을 수 없고,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 된 것이다. 인간은 현상 유지를 위해서 일을 시작했는데 일에 얽매이고 만 것이다. 지배와 복종의 관계도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 지배와 복종의 주종관계는 일을 하면서 생겨난 것이다. 이 주종관계에 얽매이게 되었지만 원하던 바는 절대로 아니라는 것. 사람이 일을 하고 그로 인해 빈부 격차가 생겨나고 주종관계가 생겨나는 것이지만, 모두가 이 일과 그로 인해 생겨나는 것들을 번거로워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 인간 사회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권태롭기 그지 없다. 무한히 이어지는 시간 속에서 인간은 모든 것에 흥미를 잃고 그저 현상 유지를 위해서 일을 하고 그로 인해서 생겨난 것들에 얽매여서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을 뿐이다. 이런 인간에게 초인의 씨가 있는가. 있다는 것이 차라투스트라의 생각이다. 이 권태로운 인간 사회가 초인의 세계로 어떻게 바뀔 것인가. 이 인간의 세계가 그대로 초인의 세계로 변화(變化)한다는 것. 애벌레가 나비로 바뀌는 것처럼. 초인과 이 인간과 겹치는 부분은 무엇일까.
Kein Hirt und Eine Heerde! Jeder will das Gleiche, Jeder ist gleich: wer anders fühlt, geht freiwillig in's Irrenhaus.
목자는 없고 한 떼만 있을 뿐이다. 모두가 같아지고 싶어 하고 모두가 평등하다.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은 자진해서 정신병원으로 간다.
인도자가 없고 양떼나 소떼의 무리처럼 한 떼의 무리만 있으므로 모두가 평등한 세상이 되었다. 게다가 모두가 같아지고 싶어 하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은 자진해서 정신병원으로 가버리니까, 남아 있는 사람들 가운데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이는 어떤 세상인가. 획일적인 세상. 획일적인 가치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세상.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은 미친 사람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세상. 목자가 없으므로 이 떼를 인도할 이가 없다. 방향성도 없고 목적도 없다. 이들은 오직 같아지고 싶어 할 뿐이다. 이런 세상과 이런 사람들에게서 초인의 씨를 보고 있는 차라투스트라. 초인의 씨는 이들에게서 보이는 아나키즘의 정서가 아닐까.
"Ehemals war alle Welt irre" - sagen die Feinsten und blinzeln.
“예전에는 온 세상이 미쳤었다.” — 가장 세련된 자들이 이렇게 말하면서 눈을 깜빡거린다.
눈을 깜빡거린다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현재를 순간적으로 경험한다. 현재란 순간적으로 나타나는 무수한 점의 끝없는 연속이다. 이 점들은 눈을 깜빡이는 순간 다가오고, 눈을 깜빡이는 순간 사라진다.” (문광훈 지음 『가면들의 병기창』(민음사))
가장 세련된 자들이 눈을 깜빡거리고 있다. 이들은 현재를 순간적으로 경험하는 자들. 세련되었다는 것은 투박하고 자연스럽다는 것에 반대가 된다. 모두가 인위적인 세계에 있고 과거의 세상을 미친 세상으로 기억하고 있다. 자연적인 세계는 미친 세상이라는 것.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은 자진해서 정신병원으로 가는 세상은 이 세련된 자가 보기에 미친 세상이 아니다. 이전에는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이 정신병원으로 가지 않고 있었으므로 이 세련된 자가 보기에 세상은 미친 세상으로 보이는 것. 이 세련된 사람은 조작된 세계 가운데서 조작된 세계를 보면서 이전의 세상이 미친 세상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눈을 깜빡거리는 것은 또한 이 사람의 한계라고 할 수 있다. 눈을 깜빡거리면서 단속적(斷續的)으로 보고 이해할 수 밖에 없다. 이 사람에게 있어서 세상은 모두 구획된 것이고 잘린 것이다. 이것은 영원하지 않고 끝없이 흘러가는 시간을 파악하기 위한 일종의 편법이다.
Man ist klug und weiss Alles, was geschehn ist: so hat man kein Ende zu spotten. Man zankt sich noch, aber man versöhnt sich bald - sonst verdirbt es den Magen.
사람은 영리해져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이 조소하는 것은 끝이 없다. 사람은 여전히 다투면서도 곧 화해한다. —그렇지 않으면 위를 상하게 하기 때문이다.
일어나는 모든 일을 알고 있다는 것은 인간의 삶이 단순하다는 것. 누구나 예측할 수 있는 그렇고 그런 일들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 사람의 영리함이라는 것은 이 세계 안에서의 일. 그렇게 제한적이고 비슷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고 그것을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인간은 끝없이 조소할 수 밖에 없다. 참된 발견을 통한 경이에 이르지 못하고 진정한 미지의 세계를 향한 탐험도 없다. 여전히 다투지만 곧 화해함으로써 이 그저 그런 현실에서 벗어나지 않고 균열이 생기지 않는다. 위를 상하게 하지 않고 먹은 것을 소화시키면서 평온하게 살아가는 법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삶에 만족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이 영리한 인간은 마치 도사와 같이 초연한 듯하지만 자신의 비속함과 어떤 정해진 한계 안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를 비웃고 있다. 이 조소는 자기를 지탱하는 하나의 에너지로 화하고 있다.
이런 인간에게서 초인의 씨를 발견할 수 있는가. 있다는 것. 무엇인가. ‘조소’가 아닐까. 조소는 자기 반성이 있음을 뜻하는 것이므로. 자기 반성이 없는 어린이와 같은 미숙한 정신이 아니라 초인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바탕이 되는 것.
Man hat sein Lüstchen für den Tag und sein Lüstchen für die Nacht: aber man ehrt die Gesundheit.
"Wir haben das Glück erfunden" — sagen die letzten Menschen und blinzeln. —
사람들에게는 낮을 위한 작은 쾌락과 밤을 위한 작은 쾌락이 따로 있지만, 그들은 자신의 건강을 중히 여긴다.
“우리는 행복을 고안해 냈다.” — 최후의 인간은 이렇게 말하고는 눈을 깜박거린다.
‘쾌락’이 아니라 ‘작은 쾌락’(Lüstchen)은 벼룩과 같이 작아진 인간들을 위한 쾌락이 아닌가. 인간은 밤이고 낮이고 온전한 쾌락을 누리지도 못한다. 자신의 건강을 중시하고 있기 때문에. 건강을 해치는 어떤 쾌락도 용납하지 않는다. 아무 일 없는 생활이 이어지고 있고, 그 생활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불만족스럽지만 거기에서 벗어날 생각도 하지 않고 그 안에서 행복을 고안해 내면서 살아가고 있다. 눈을 깜박거리면서 살아가고 있다. 무미건조한 삶이 아닐 수 없다.
Und hier endete die erste Rede Zarathustra's, welche man auch "die Vorrede" heisst: denn an dieser Stelle
unterbrach ihn das Geschrei und die Lust der Menge. "Gieb uns diesen letzten Menschen, oh Zarathustra,
- so riefen sie - mache uns zu diesen letzten Menschen! So schenken wir dir den Übermenschen!"
Und alles Volk jubelte und schnalzte mit der Zunge. Zarathustra aber wurde traurig und sagte zu seinem Herzen:
Sie verstehen mich nicht: ich bin nicht den Mund für diese Ohren.
Zu lange wohl lebte ich im Gebirge, zu viel horchte ich auf Bäche und Bäume: nun rede ich ihnen gleich den
Ziegenhirten.
Unbewegt ist meine Seele und hell wie das Gebirge am Vormittag. Aber sie meinen, ich sei kalt und ein Spötter
in furchtbaren Spässen.
Und nun blicken sie mich an und lachen: und indem sie lachen, hassen sie mich noch. Es ist Eis in ihrem Lachen.
그런데 여기서 사람들이 ‘서설(序說)’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차라투스트라의 첫 번째 설교는 끝났다. 왜냐하면 바로 이때 군중의 고함소리와 환호가 그의 말을 막았기 때문이다.
“오, 차라투스트라여, 우리에게 최후의 인간을 달라.” —군중은 외쳤다.
“우리를 이 최후의 인간으로 만들어 달라! 그러면 우리는 그대에게 초인을 선사해 주겠다!”
그러면서 모든 군중은 환호성을 지르며 혀를 찼다. 그러나 차라투스트라는 서글퍼져 자신의 마음에 대고 이렇게 말했다.
“저들은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구나. 나는 저들의 귀를 위한 입이 아니다. 너무 오랫동안 내가 산 속에 살면서 시냇물과 나무들에 지나치게 귀를 기울였나 보다. 이제 내가 저들에게 말을 거는 것은 마치 염소치기들에게 말을 거는 것과 같구나.
나의 영혼은 흔들림이 없고, 아침나절의 산(山)처럼 환하다. 그러나 저들은 나를 차갑고 무섭고 기괴한 짓을 하는 냉소자(冷笑者)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지금 그들은 나를 바라보며 비웃고 있다. 또한 비웃으면서 여전히 나를 증오하고 있다. 그들의 웃음 속에는 얼음이 들어 있다.”
차라투스트라의 첫 번째 설교는 자발적으로 마친 것이 아니라 강제적으로 마쳐진 것. 군중의 고함과 환호에 막힌 것. 예수를 재판하던 빌라도는 예수를 놓아주려 했으나 큰소리로 재촉하면서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는 군중의 소리가 이겼기 때문에 빌라도는 자기의 의지와는 달리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넘겨주었다(누가복음). 여기 차라투스트라의 설교를 군중들의 소리가 이겼으므로 설교를 그친 것과 유사하다. 차라투스트라는 빌라도의 입장과 유사하다. 군중들은 빌라도에게 예수를 달라고 했고 여기 군중은 차라투스트라에게 ‘최후의 인간’을 달라고 요청한다.
군중은 최후의 인간을 원하고 있다. 자기들을 최후의 인간으로 만들어 달라고 외친다. 그러면 자기들은 차라투스트라에게 초인을 주겠다고 호기를 부린다. 차라투스트라에게 초인을 주는 일은 자기들이 정말로 할 수 있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차라투스트라를 조롱하고 있는 것. 자기들에게 초인을 말하는 차라투스트라에게 초인을 자기들이 주겠다고 말하며 혀를 차고 있다. 차라투스트라를 비웃는 것이 아닌가. 차라투스트라가 서글퍼지지 않을 수 없다.
이 군중은 차라투스트라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실망을 금치 못한다. 이 군중 속에서 초인의 씨앗을 보고 초인을 기꺼이 설교하던 차라투스트라에게 자기들이 초인을 주겠다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가장 경멸스러운 인간인 최후의 인간을 자기들에게 주겠다고 하는 것은 차라투스트라의 말을 고의로 거스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차라투스트라는 자기의 영혼은 흔들림이 없고 아침나절의 산처럼 환하다고 말한다. 이 군중의 자기를 냉소자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자기는 전혀 흔들림이 없다는 것. 이 군중은 차라투스트라를 비웃고 또한 증오하고 있다는 것. 웃음 속에는 얼음이 들어 있다. 차가운 냉소.
이 군중의 반응을 보면서 염소치기에게 말을 거는 것과 같다고 자기의 마음에 대고 말한다. 그런데 이 군중의 반응을 보면 차라투스트라의 제대로 듣고 있었다는 반증이 된다. 차라투스트라의 말을 잘 듣지 않았으면 이런 반응을 보일 수가 없다. 당장은 실망스러운 일이지만 이 군중에게는 여전히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 군중 안에 초인의 씨앗은 여전히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6. Da aber geschah Etwas, das jeden Mund stumm und jedes Auge starr machte. Inzwischen nämlich hatte der
Seiltänzer sein Werk begonnen: er war aus einer kleiner Thür hinausgetreten und gieng über das Seil, welches
zwischen zwei Thürmen gespannt war, also, dass es über dem Markte und dem Volke hieng. Als er eben in der
Mitte seines Weges war, öffnete sich die kleine Thür noch einmal, und ein bunter Gesell, einem Possenreisser
gleich, sprang heraus und gieng mit schnellen Schritten dem Ersten nach.
그런데, 그 사이에 모든 사람의 입을 말 없게 하고 모든 눈을 놀라게 하는 일이 일어났다. 그동안에 줄 타는 광대가 재주를 부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작은 문에서 나와 두 개의 탑 사이에 뻗어 있는, 즉 사람들이 있는 장터 위로 팽팽하게 매어 있는 밧줄을 타기 시작했다. 그 광대가 막 밧줄의 중간쯤에 이르렀을 때에 작은 문이 다시 한 번 열리더니, 알록달록한 옷을 입은 익살꾼 같은 사내가 튀어 나와 빠른 걸음으로 앞서의 사내 뒤를 따라갔다.
3단락의 끝에 보면, 군중 가운데 한 사람이 나와서 차라투스트라에게 ‘줄 타는 사람에 대해서는 충분히 들었’으니 ‘이제는 그 사람을 우리에게 보여 달라’고 하자 줄 타는 사람은 이 말을 자기에게 하는 것으로 알아 듣고 ‘재주를 부’린다. 그리고 나서 단락 4와 5의 ‘설교’가 이어지고 ‘서설’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첫 번째 설교가 마쳐지게 된다. 그리고 단락 6의 맨 앞에서 그 줄 타는 광대는 본격적인 재주를 부리기 시작한다. 단락 3의 끝에서는 이 줄 타는 광대가 줄을 탄 것이 아니고 줄타기를 준비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줄을 타고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제 줄을 타고 앞으로 나아가게 되자 모든 사람은 입을 다물고 놀라게 된다.
‘그 사이에’(inzwischen)는 언제를 가리키는가. 차라투스트라가 첫 번째 설교를 마치자 군중들이 그를 비웃고 그는 속으로 말하고 있을 때를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군중들의 고함소리와 환호, 차라투스트라의 속말 사이에서(zwischen) 줄타기가 시작되고 있음을 뜻하기도 한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은 놀라움을 자아내고 입을 다물게 한다. 줄타기는 두 개의 탑 ‘사이에서’(zwischen) 벌어진다. 그리고 줄 타는 사람이 중간(Mitte)에 이르렀을 때에 익살꾼 같은 사내가 튀어나오는 일이 벌어진다. ‘사이’와 ‘중간’은 사람들로 하여금 놀라움을 자아내는 시간이자 공간이다. 이제 ‘사이’의 ‘중간’에서 이 줄 타는 사람은 떨어져 죽는 일이 벌어지게 될 것이다. ‘사이’에서 ‘중간’에서 ‘아래’로의 이동, 이것은 차라투스트라 자신의 이동 경로와 맞아떨어진다. 차라투스트라는 나이 서른에서 마흔이라는 인생의 ‘중간’의 나이에 10년 동안 태양과 고향의 호수 ‘사이’의 산맥 속에서 있다가 산 ‘아래’로 내려온다. 줄을 타다가 떨어져 죽은 이 광대는 곧 차라투스트라 자신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어지는 이야기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이 죽은 광대의 시체를 짊어지고 길을 떠난다. 차라투스트라는 죽어서야 세상으로의 본격적인 행보를 시작할 수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제 죽었으나 죽지 않은 자, 죽음과 삶을 동시에 사는 자로 등장하게 된다.
"Vorwärts, Lahmfuss, rief seine fürchterliche Stimme, vorwärts Faulthier, Schleichhändler, Bleichgesicht! Dass ich dich nicht mit meiner Ferse kitzle! Was treibst du hier zwischen Thürmen? In den Thurm gehörst du, einsperren sollte man dich, einem Bessern, als du bist, sperrst du die freie Bahn!" -
“앞으로 나아가, 절름발이야. 그자의 무시무시한 목소리가 소리쳤다. 앞으로 가란 말이야. 게으름뱅이, 밀수꾼, 얼굴이 창백한 녀석아! 내 발뒤꿈치로 너를 간질이지 않게 하려면 말이다! 여기 이 두 탑 사이에서 뭘 하고 있는거야! 너는 탑 속에나 있어야 어울린다. 더 나은 자의 자유로운 앞길을 너는 가로막고 있단 말이다!”
‘알록달록한 옷을 입은 익살꾼 같은 사내’는 줄 타는 광대를 재촉해마지 않는다. 이 익살꾼 같은 사내는 ‘무시무시한 목소리’로 줄 타는 광대를 몰아붙이고 있다. 줄 타는 광대는 곧 차라투스트라 자신인데 이 차라투스트라를 몰아가는 이 익살꾼 같은 사내의 정체는 무엇인가. 이 사람은 ‘광대’도 아니고 ‘익살꾼’도 아니고 ‘익살꾼 같은 사내’이다. 익살꾼과 익살꾼이 아닌 자의 중간(zwischen, mitte)에 있다는 점에서는 차라투스트라와 같으나 사이비(似而非) 광대요 익살꾼이다. 저 줄 타는 광대는 사이비 광대가 아니고 진짜 광대. 진짜 광대로서 중간에 있는 자. 저 익살꾼 같은 사내는 사이비 광대, 말하자면 사이비 차라투스트라로 볼 수 있다. 사이비 차라투스트라는 진짜 차라투스트라를 몰아붙이고 결국 떨어뜨려서 죽게 만든다. 진짜가 죽고 사이비는 기세등등하다. 차라투스트라는 하강, 혹은 몰락을 계속해서 노래하고 있다. 이것은 죽음의 노래. 차라투스트라는 떨어져 죽음으로 진짜 하강 혹은 몰락 혹은 죽음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자격을 갖추게 된다.
그 죽음의 노래는 동전의 양면과 같이 곧 삶의 노래, 생명의 노래이기도 한 것. 사이비가 진짜를 무섭게 호통치고 죽음으로 몰아넣는 세상, 그것이 이 세상이라는 것. 이 세상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이 세상의 죽음을 죽음으로써 이 세상이 되어서 이 세상을 구원하는 길로 나아간다. 그것이 곧 초인의 길이라는 것.
익살꾼 같은 자는 이 진짜 광대를 ‘절름발이’라고 부른다. 빨리 걷지 못하는 자. 게으름뱅이 역시 빨리 나아가지 못하는 자. 밀수꾼은 꿍꿍이를 감추고 있는 자. 얼굴이 창백한 자, 자기만의 고민에 빠져 있어 햇볕을 보지 못하고 방구석에 쳐박혀 있던 자. 이 모두 고민하고 머뭇거리는 저 중간에 있는 자를 가리키는 것. 줄 타는 광대를 향해 ‘두 탑 사이에서’ 빨리 앞으로 가지 않고 ‘뭘 하고 있’느냐고 다그친다. 밖으로 나오지 않고 탑 속에 갇혀 있는 신세가 더 어울린다고 조롱한다. 충분히 생각하고 고민하고 있는 저 중간에 있는 자는 이 세상에서 사정없이 조롱당하고 있다.
그리고 자기 발뒤꿈치로 간질일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자기가 이 광대를 짓밟아버릴 수 있음을 말하는 것. 아무렇지도 않게 그 일을 할 수 있다는 것. 자기는 ‘자유로운 앞길’을 가고 있는데 그 길을 가로막고 있다고 말한다. 자기에게는 자유가 있음을 말하고, 자기가 이 광대보다 더 나은 자라고 자부하고 있다. 이 광대, 차라투스트라와 같은 자, 중간에서 어정거리는 자들, 쓸데 없이 고민하는 자들은 모두 떨어뜨려 없애버리는 것, 그것이 이 세상의 인심이라는 것.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모두 일방통행의 도로에서 속도를 내면서 아무런 생각도 없이 살아가는 군상들만 양산되는 것이 아닌가. 이 속도의 도로에서 엎드러져 죽은 차라투스트라는 거기에서 초인의 길을 열고 있는 것이다.
Und mit jedem Worte kam er ihm näher und näher: als er aber nur noch einen Schritt hinter ihm war, da geschah das Erschreckliche, das jeden Mund stumm und jedes Auge starr machte: - er stiess ein Geschrei aus wie ein
Teufel und sprang über Den hinweg, der ihm im Wege war. Dieser aber, als er so seinen Nebenbuhler siegen sah, verlor dabei den Kopf und das Seil; er warf seine Stange weg und schoss schneller als diese, wie ein Wirbel von
Armen und Beinen, in die Tiefe. Der Markt und das Volk glich dem Meere, wenn der Sturm hineinfährt: Alles floh aus einander und übereinander, und am meisten dort, wo der Körper niederschlagen musste.
그러나 줄광대의 뒤로 불과 한 걸음 떨어진 곳에 이르자, 모든 사람의 입을 말 없게 하고 모든 눈을 놀라게 하는 일이 일어났다.—그가 악마처럼 소리를 내지르더니 그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사람을 뛰어 넘은 것이다. 그러나 줄광대는 자신의 경쟁자가 승리한 것을 보자 제 정신을 잃고 밧줄도 놓쳐 버렸다. 그는 들고 있던 장대를 내던져 버리고는 그 장대보다도 더 빠른 속도로 손발을 허우적거리면서 밑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모든 사람들이 뿔뿔이 또는 서로 짓밟으면서 흩어져 도망했다. 특히 줄광대의 몸이 떨어진 자리가 가장 심했다.
군중은 줄 타는 광대가 줄을 타기 시작했을 때와 똑같은 반응을 보인다: ‘모든 사람의 입을 말 없게 하고 모든 눈을 놀라게 하는 일이 일어났다(das jeden Mund stumm und jedes Auge starr machte).’ 지금 벌어지는 일은 본격적으로 줄 타는 일에 버금가는 일이라는 것. 줄광대 뒤를 따라 나와서 줄광대를 몰아붙이던 익살꾼 같은 사내는 ‘악마처럼 소리를 내지’른다. 이 사내는 익살꾼 ‘같고’ 악마‘처럼’ 소리를 지른다. 본질에는 이르지 못하고 흉내만 내고 있거나 중간에 머물고 있는 자. 그런데 이 사내가 줄광대를 뛰어넘는다. 사이비가 진짜를 압도하고 있다. 장대로 중심을 잡으면서 줄을 타고 건너가는 줄광대를 단숨에 뛰어넘는 이 사내는 사이비. 이 세상은 이처럼 사이비가 진짜를 압도하는데, 진짜를 완전히 압도하면서 나아간다. 이렇게 압도당한 줄광대는 제 정신을 잃고 밧줄도 놓쳐버리고 있다.
그가 한 가닥 의지하고 있던 밧줄을 놓쳐버렸으니 의지할 것이 없어진 것. 그리고 들고 있던 장대도 스스로 내던져버린다. 자포자기하는데, ‘자신의 경쟁자가 승리한 것’을 본 것이 그 원인이라고 말해준다. 경쟁에서 졌기 때문에 목표 의식을 잃어버리게 되었고 그 결과 자포자기하고 밑으로 떨어지게 된다.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 전형적으로 인간이 사는 방식이 아닌가. 이 줄광대의 목표가 줄타기 자체에 있었던 것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이 줄광대는 자기보다 먼저 자기 경쟁자가 목표점에 이른 것을 보고 바로 포기해 버린다. 자기가 하는 일 자체가 목적이 되지 못하고 그 일은 수단이 되어 버린 것. 이 줄광대는 차라투스트라 자신으로 보이는데, 어떤 면에서 같다고 볼 수 있을까. 거대한 함성에 압도당하고 있는 차라투스트라의 모습과 저 사내에 의해서 압도당하고 있는 이 줄광대는 겹치고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 줄광대처럼 떨어지고 있는 것. 이 떨어짐, 혹은 몰락, 혹은 하강은 상승을 위한 전제로 일어나고 있다.
이 줄광대가 떨어지는 모습을 ‘그 장대보다도 더 빠른 속도로’ 떨어지고 있다고 묘사한다. 만유인력의 법칙에 따라서, 자연현상에 따라서 일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표나게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경쟁에 내몰리고 목표를 상실하고 자연현상에 따라서 떨어지는 이 줄광대의 실패는 이 세상을 사는 보통 사람들의 실패를 뜻하는 것. 차라투스트라는 이 보통 사람의 실패를 자기의 실패로 받아들이고 부활과 같은 상승을 꾀하고 초인으로 나아간다.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지는데 서로 짓밟으면서 도망한다. 줄광대의 떨어진 몸도 저들의 발에 짓밟힌다. 게다가 줄광대가 떨어진 그 자리가 가장 심했다는 것. 줄광대가 혹시라도 죽지 않았을 수도 있는데 사람들이 흩어져 도망하면서 짓밟아버림으로 해서 완전히 죽게 되었음을 알게 해준다. 이 줄광대를 혹은 차라투스트라를 완전히 죽인 것은 이 사람들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자기를 죽인 사람들과 더불어 초인에 이르고자 한다. 죽이는 자와 죽임을 당하는 자가 구분되지 않는 초인의 세계. 죽음도 삶도 없는, 죽이는 것도 죽임을 당하는 것도 없는 초인의 세계로 자기 혼자가 아니라 모든 사람과 함께 이르고자 하는 것. 초인은 개인이 아니라 개인이면서 전체인 것.
Zarathustra aber blieb stehen, und gerade neben ihn fiel der Körper hin, übel zugerichtet und zerbrochen, aber noch nicht todt. Nach einer Weile kam dem Zerschmetterten das Bewusstsein zurück, und er sah Zarathustra neben sich knieen.
그러나 차라투스트라는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 옆으로 줄광대의 몸뚱이가 떨어졌는데, 무참하게 상처 입고 찢겨졌지만 아직 목숨이 붙어 있었다. 잠시 후에 온몸이 깨진 그 남자의 의식이 돌아오자 자기 옆에 무릎을 꿇고 있는 차라투스트라를 보았다.
줄타기를 구경하던 사람들은 떨어진 광대를 짓밟아 거의 죽게 해놓고 다 가벼렸고 차라투스트라는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서 머물러 서 있다. 차라투스트라와 광대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 광대의 의식이 돌아오기 전, 광대는 ‘몸뚱이’(der Körper)만 존재하고 있다. 차라투스트라의 정신과 광대의 육신이 섞이면서 광대가 차라투스트라가 되고 차라투스트라가 광대가 되고 있다. 차라투스트라도 죽고 광대도 죽어 새로운 인간이 태어났다. 인간들의 발 밑에서. 무참하게 찢겨진 몸에서. 광대는 줄타기에 실패했고, 차라투스트라는 첫 번째 설교에서 실패했다. 광대와 차라투스트라가 함께 떨어진 것. 광대와 차라투스트라는 마지막으로 대화를 나누고 광대가 죽자 등에 그 송장을 짊어지고 길을 떠나게 된다. 차라투스트라의 죽은 정신과 광대의 죽은 육체가 하나가 되고 죽은 육체가 죽은 정신을 살리고 죽은 정신이 죽은 육체를 살리는 길로 나아가고 있다. 초인은 육체와 정신의 구분을 이처럼 넘어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Was machst du da? sagte er endlich, ich wusste es lange, dass mir der Teufel ein Bein stellen werde. Nun schleppt er mich zur Hölle: willst du's ihm wehren?"
"Bei meiner Ehre, Freund, antwortete Zarathustra, das giebt es Alles nicht, wovon du sprichst: es giebt keinen Teufel und keine Hölle. Deine Seele wird noch schneller todt sein als dein Leib: fürchte nun Nichts mehr!“
“거기서 뭘 하고 있소? 남자가 마침내 말했다. 나는 벌써 오래 전부터 악마가 다리를 걸어 나를 넘어뜨리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소. 이제 악마가 나를 지옥으로 끌고 갑니다. 그대가 그 악마를 막아 주겠소.”
“내 영예를 걸고 말하건대, 친구여. 차라투스트라는 대답했다. 그대가 말한 것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악마도 없고, 지옥도 없다. 그대의 영혼은 그대의 육신보다 더 빨리 죽을 것이다. 그러니 이제 더 이상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말라!”
의식이 돌아온 줄광대는 마침내(endlich) 말하고 있다. 광대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음을 알 수 있다. 마지막까지 이 사람을 압도하고 있던 생각은 악마에 의해서 넘어지게 된다는 것. 그리고 악마가 자기를 지옥으로 끌고 간다는 것. 넘어지는 일이 일어났고 이제는 악마가 자기를 지옥으로 끌고 가는 일이 남아 있으니 차라투스트라에게 악마를 막아 달라고 부탁한다. 이 줄광대는 있지도 않은 악마와 지옥을 두려워하고 떨면서 살아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인생의 마지막에 차라투스트라를 만나서 지옥도 없고 악마도 없다는 말을 듣게 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 줄광대의 영혼이 육신보다 더 빨리 죽을 것이라고 말해준다. 육신의 죽음이 오기에 앞서 영혼이 먼저 죽게 된다는 것. 그런데 왜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는가. 이 사람이 줄에서 떨어져서 짓밟히는 것과 같은 괴로움을 더 이상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 아닐까. 이제 이 사람의 육신이 그런 괴로움을 당하기도 전에 영혼이 먼저 죽을 것이니 고통을 당할까 두려워하지 말라는 뜻이 아닐까. 차라투스트라는 영혼의 죽음을 말한다. 영혼의 죽음이란 무엇일까. 육신보다 빨리 죽는 영혼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