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수리(야관문 : 夜關門)
냇가 둑이나 거친 땅 그리고 야산 가장자리에 많이 자생하고 있다. 잎은 작은 싸리나무 잎과 비슷한 형태를 띠고 다 자란 것을 베어 빗자루로 사용하기도 했다. 쑥 담배 풀 달맞이꽃 여뀌 등과 같이 자라고 있기에 찾기가 쉽다. 마을 주변에 흔하여 그다지 주목 받지 못하더니 최근에는 약효가 소리 없이 전파되면서 수난을 겪고 있다. 100세 시대를 바라보는 건강에 대한 관심은 각종 건강식품과 약용동식물에 높은 기대치를 보인다. 유명 의학박사나 한의학 전문의가 어떠한 동식물이 건강에 좋다는 한 마디 하면 그날로 싹쓸이에 나선다. 요즘은 방송매체 마다 한 프로씩 방송하다(치료에 효과를 보았다는 증언을 앞세운다. 하지만 자막으로 검증되지 않은 개인적인 사례라고 알리고 있다.) 보니 오히려 혼동이 생기기도 한다. 3백(밀가루, 설탕, 소금)의 공포를 확실하게 각인시키더니 각종 가공식품까지 그 범위를 확대시키고 있다. 즐겨 먹는 라면, 피자, 햄버거, 튀김 닭 등의 가공식품의 폐해에 대한 심각성(인공조미료, 트랜스 지방)을 보고 듣다 보니 유기농에 무농약 재배한 농작물을 선호하며 가족의 건강에 대한 지킴이의 역할에 적극성을 보인다. 또한 심심찮게 거론되는 것이 만성질환과 건강 적신호에 전전긍긍하는 노인들을 상대로 한 사기성 건강식품 판매로 피해자가 늘어나는 현실이다. 한국 남자들이 제일 선호하는 정력 강화란 강력한 유혹은 피해가기 힘들다. 해외여행을 핑계로 현지에서 뱀탕에 곰쓸개(웅담 : 熊膽)등을 먹는가 하면 호랑이 뼈(호골 : 虎骨) 코뿔소의 뿔(서각 : 犀角) 녹각 해구신 등 판매 금지 품목에 대하여도 촉각을 세우고 입수하려 기를 쓴다. 건강에 대한 비화는 불사를 꿈꿨던 진시황을 대표적 인물로 거론하지만 고금 이래 그 누구도 피해가지 못하는 화두이다. “재산을 잃으면 조금 잃은 것이고, 명예를 잃으면 조금 더 잃은 것이며, 건강을 잃으면 모두를 잃은 것이다.” 그래서 나온 말이 “천하를 얻고도 건강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이다. 인간의 유전자 지도가 완성되면서 신의 영역이라는 생명에 까지 도전하는 우려가 현실화 되고 있다. 난치병과 희귀병에 대한 치료의 길을 열었다는데 그 의미를 부여하지만 인간복제의 윤리성에 대한 논쟁과 함께 그 부작용에 대한 걱정으로 뜨거운 감자가 되고 있다.
비수리의 꽃말은 밤의 열림이다.
효능은 염증을 가라앉히고 뭉친 피를 풀어 주어 위염, 장염, 기관지염, 방광염, 요도염, 질염, 피부염 등을 치료하고 타박상이나 어혈을 풀어 줌.
성분은 잎, 줄기, 뿌리에 플라보노이드, 피니톨, 페놀, 탄닌, 베타 시토스테롤을 함유. 플라보노이드에서 퀘르세틴, 캠프페롤, 바텍신 등이 분리됨. 이는 황색포도상균, 폐렴쌍구균, 알파 연쇄상구균 및 카타르구균 등 억제 효능이 있어 기침, 가래 삭이며 천식증상을 가라앉힘.
야관문이란 별칭은 비수리를 복용한 남자와 하룻밤을 지내면 여자가 밤이면 대문의 빗장을 열어 놓고 기다리게 된다 하여 유래가 되었다 함.
무더운 여름철에 더위를 피해 냇가로 천렵을 나가거나 물놀이를 하러갈 때 지나는 벌판에 일군 밭두렁과 개울에는 늘 잡풀이 무성했다. 부지런한 사람은 크기 전에 베어서 산뜻하였지만 대부분은 방치하여 지나다니는데 불편하였다. 검정 고무신을 질질 끌면서 풀을 헤치며 가다보면 풀무치, 메뚜기들이 튀어 나오고 거미줄과 풀씨들이 옷에 묻었다. 이슬이 마르전인 아침나절에는 축축하게 적시기도 한다. 명아주나 소루장이 달맞이꽃 쇠무릎 가막사리 가마중이 조뱅이 여뀌 돼지감자 등이 큰 키를 자랑하고 한삼넝쿨이나 메 줄기 박주가리 나팔꽃 그리고 며느리밑씻개 등의 넝쿨이 서로 얽혀 자라기에. 냇가 가장자리에는 부평초(개구리밥)랑 옥잠화 그리고 부들과 말 풀들, 미나리와 띠 억새들이 무성했다. 풀 가운데에서 가장 왕성한 번식을 자랑하는 것은 역시 쑥이다. 쇠뜨기와 함께 고마리와 괭이밥 그리고 제비꽃 냉이 고들빼기 방가지똥 씀바귀 조개나물 차풀 마디풀 토끼풀 엉겅퀴 질경이 강아지풀 달개비 개 망초 등등이 군락을 이루며 위용을 자랑한다. 밭에는 쇠비름과 비듬나물 돌나물 반하 까치밥 등등이 자리한다.
한 해의 농사가 풍년이냐 아니냐에 따라 혹독한 춘궁기를 넘어가는데 고생하느냐 아니냐가 결정되기에 매우 민감한 사안이다. 그래 여명이 오기도 전인 꼭두새벽부터 논밭으로 나가 김을 매고 소에게 먹일 풀을 베어 지게에 산처럼 올려 집으로 돌아와 아침을 먹었다. 집집마다 봄이면 병아리를 부화시키거나 장에서 십여 마리 사다 키웠다. 그리고 돼지나 토끼 오리나 거위 등도 키워 부실한 영양보충을 하거나 팔아 현금을 만드는 중요한 자금원으로 활용하였다. 평소에 소원이 흰 쌀밥에 고깃국을 배불리 먹어보는 것이었으니까. 강원도를 감자바위라 빗대어 말하지만 별반 다른지 않은 식생활이었다. 찐 감자에 옥수수 그리고 칼국수에 깡 보리밥이 전부이었기에. 그러니 콩이니 보리 밀 고구마 등의 서리가 유행할 수밖에. 참외니 수박 포도 복숭아 등의 서리는 잘못하면 도지를 물 수가 있어 자제하였다. 먹을 수만 있다면 무조건 입에 넣고 보았으니. 어쩌다 얻은 껌 하나를 버리지 못하고 일주일 내내 씹었으니까.“살기 위해 먹느냐, 먹기 위해 사느냐.”란 명제가 무색한 시절이었다.
추억은 아름답다고 말을 하지만 슬픔과 회한도 자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