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행기(舟行記) 이곡(李穀)
기축년(1349, 충정왕 1) 5월 16일에 진강(鎭江) 원산(圓山)에서 한밤중에 배를 타고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서 용연(龍淵)에 이르니, 아직 동이 트지 않았는데도 송정(松亭) 전 거사(田居士)와 임주(林州) 반 사군(潘使君)이 언덕 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과 동행하여 뱃머리를 돌려 북쪽으로 가서 저녁에 고성(古城)에 정박하였다.
그 이튿날에 부여성(扶餘城) 낙화암(落花岩) 아래에 이르렀다. 옛날에 당(唐)나라가 소 장군(蘇將軍 소정방(蘇定方))을 보내 백제(百濟)를 쳤는데, 부여는 바로 그때의 도읍지였다. 당시에 포위를 당하여 상황이 매우 급박해지자 군신(君臣)이 궁녀들을 놔두고 도망쳤는데, 궁녀들이 의리상 당나라 군사들에게 몸을 더럽힐 수 없다고 하여 떼를 지어 이 바위에 이르러 강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그래서 낙화암이라고 이름 지은 것이다. 부여의 감무(監務)가 바위 모퉁이에 있는 승사(僧舍)에 음식을 차렸다.
정오가 지나서 닻줄을 풀고 조금 서쪽으로 가니, 물가에 거대한 암석이 반원(半圓)의 형태로 튀어나와 있었는데, 그 밑에 맑은 물이 잠겨 깊이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당나라 군사가 이곳에 와서 강을 사이에 두고 진을 쳤는데, 강을 건너려고 하면 구름과 안개가 끼어서 사방이 어두워졌으므로 방향을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사람을 시켜 염탐하게 하였더니 용이 그 밑의 굴속에 살면서 본국을 호위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에 당나라 사람이 술자(術者)의 계교를 써서 미끼를 던져 낚아 올리기로 하였는데, 용이 처음에는 저항하며 올라오지 않았으므로 있는 힘을 다하여 끌어 올리는 과정에서 바위가 갈라졌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물가의 암석에서부터 그 바위 꼭대기까지 한 자 남짓 되는 깊이와 너비에 길이가 거의 한 길쯤 되는 파인 흔적이 마치 사람이 일부러 깎아 내어 만든 것처럼 보이는데, 이를 일러 조룡대(釣龍臺)라고 한다.
조룡대에서 서쪽으로 5리쯤 가면 강의 남쪽 언덕에 호암(虎岩)이라는 승사가 있다. 거기에 암석이 벽처럼 서 있고 그 암석을 절이 등지고 있는데, 암석에 마치 바위를 타고 올라온 것 같은 호랑이의 발자국이 완연히 남아 있다. 그리고 호암의 서쪽에는 1000척(尺) 높이의 단애(斷崖)가 있는데, 그 꼭대기를 천정대(天政臺)라고 부른다. 대개 이곳은 백제 시대에 하늘과 통할 수 있었기 때문에, 사람을 등용할 때면 언제나 그 사람의 이름을 써서 이 천정대 위에 올려놓고는 군신이 조복(朝服) 차림에 홀(笏)을 쥐고 북쪽 강안의 모래톱 위에 줄지어 엎드려서 기다리다가 하늘이 그 이름 위에 낙점한 뒤에야 뽑아서 썼다고 한다. 그 지방 사람들이 서로 전하는 이야기가 이와 같다. 호암에서 걸어서 천정대에 오르니, 대에는 옛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은 없고 오직 바위가 반공에 솟아 있을 뿐이었다.
이상이 이른바 부여의 사영(四詠)으로서, 한 지방의 승경으로 꼽히는 곳이다. 그래서 놀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천리 길을 멀다 하지 않고 이곳을 찾아오곤 한다. 나의 고향은 여기에서 겨우 60여 리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그래서 소싯적부터 이곳을 지나다닌 것이 또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일찍이 눈여겨보지도 않았으므로, 나는 놀기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자못 자부해 왔다. 그런데 지금 그만 농사철을 당한 이때에, 노래하고 춤을 추며 빈객을 잔뜩 모아 100명 가까이 대접하면서 왔다 갔다 하느라 사흘이나 넘겼으니, 놀기 좋아하는 것이 어떠하다고 하겠는가. 비록 그렇긴 하지만 역사책에도 이 일들이 전해지지 않고 상고할 만한 비석의 기록도 남아 있지 않은 상황에서, 그 이야기를 들어 보아도 괴이쩍은 느낌이 드니 그 지방 사람들의 말을 믿어야 할지 어쩔지 모르겠다. 더구나 내가 눈으로 직접 본 경치가 귀로 들은 소문보다 훨씬 못한데야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내가 그래서 이렇게 기문을 지어서 후세의 놀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경계로 삼는 동시에 나의 허물을 기록하는 바이다.
舟行記
己丑之歲仲夏旣望。自鎭江圓山夜半登舟。泝流至龍淵。天猶未明。已有松亭田居士與林州潘使君候于岸上。與之俱行。折旋而北。晚泊古城。明日。至扶餘城落花岩下。昔唐遣蘓將軍伐前百濟。扶餘實其故都也。時被圍甚急。君臣棄宮娥而走。義不汙于兵。群至此岩。墮水而死。故以名之。扶餘監務設食于岩隈僧舍。日已午。解纜而小西。則有磯石窮然。其下淵澄。深不可測。唐兵旣至。隔江而陣。欲渡則雲霧晦冥。不知所指。使覘之。云有龍穴其下。衛護本國故也。
唐人用術者計。餌而取之。龍初拒而不上。竟力致之。石爲之刳。今有深廣尺餘。長僅一丈。自水際達于石頂。若斲而爲之者。謂之釣龍臺。自臺而西五里許。江之南岸有僧舍。曰虎岩。岩石壁立。寺負岩。岩有虎迹宛然若挐而上者。
之西有斷崖千尺。崖頭曰天政臺。盖百濟時得與天通。每當用人。書其名置臺上。君臣具袍笏列伏于北岸沙渚以侯。侯天點其名。然後取而用之。土人相傳如此。自虎岩步至其臺。臺無遺址。惟石聳于半空耳。此所謂扶餘之四詠。一方之勝境。而好事之人不遠千里而至者也。余鄕去此才六十餘里。自少經過又非一再。而不曾寓一目焉。頗自謂不好事。今乃當農月。載歌舞盛賓客。供給將百人。往還踰三日。其爲好事何如也。雖然。史失其事。又無碑紀可考。而事亦近恠。土人之言。不知信否。况凡所見。多不及所聞。余因記之。以爲後來好事者之戒。且志余過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