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男兒到處是故鄕 幾人長在客愁中 一聲喝破三千界 雪裡桃花片片飛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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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란 어디메나 고향인 것을 그 몇 사람 나그네 근심 잦단 말을 일런는가. 한 마디 큰소리 질러 삼천 대천 세계 뒤흔드니 눈 속에 복사꽃 붉게 붉게 피네. |
시대정신을 꿰뚫어 본 한용운은 붉게 붉게 피어나는 그의 마음을 천봉만학이 우쭐대는 설악의 깊은 골짜기에 파묻을 수만은 없었다. 그래서 봄눈이 미처 녹기도 전에 그는 다시 대중의 품 한양으로 달려왔다.
4. 운동의 선봉에 서서
만해는 늘 마음속에 세 가지의 커다란 바램(願)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는 부처님 정신으로 철저하게 살기 위해 혜초처럼 부처님 땅을 가보는 것이었고, 둘째는 중생제도에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서 언론매체를 생각하고 잡지사와 신문사를 하나 경영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셋째는 백두산 천지에 오르는 것이었다.
“이순신 사공 삼고 을지문덕 마부 삼아 파사검(破邪劍 : 사악을 베는 칼) 높이 들고 남선북마(南船北馬 : 남쪽으로 배 달리고 북쪽으로 말 달려) 하여 볼까” 하는 시의 내용처럼 남아의 이상을 마음껏 펼쳐보고 싶은 그런 원이었다. 그런 큰 뜻을 가진 만해이었기에 우리 민족 전체를 다 들어 올릴 수 있는 저울추의 역할을 기미년에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었다.
1910년 8월 일제의 조선 강점 이후 조선총독부는 무단정치 10년을 통하여 민중의 귀와 눈과 입을 다 막아버렸다. 서울로 되돌아온 그는 먼저 민중의 입과 눈과 귀를 열게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종합교양잡지 《유심 惟心》(1918년 9월 1일)을 창간하였다. 불교 근대화와 신문화 운동의 전개로서 주로 민족의 정통성과 자존성을 가진 우리 청년들에게 용기와 신념을 잃지 말라는 내용의 잡지였다. 여기에 기미 3·1운동에 동지로 규합될 육당 최남선, 최린, 백용성 등이 글을 기고했다. 많은 원고를 총독 검열에서 삭제당하는 아픔을 겪으면서 만해는 굴하지 않고 언론활동에 필요한 세계정세에까지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기고했다.《유심》잡지 제2호를 내고 제3호를 만들 무렵, 세계정세는 급격히 변하고 민족의 자주독립을 주장하는 소리가 높아갔다. 1918년 12월 초에는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제창되었는데 때마침 기사가 매일신보에 게재되었다. 약소민족은 모두 일어나서 독립운동을 하라는 기사의 내용은 바로 만해 스님의 끓는 가슴에 기름을 붓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이에 그는 구황실의 귀족들과 종교계 인사는 물론 지도급 인사들을 다 끌어 모아 200명 정도의 동지들을 규합하여 거국적인 행사로서 민족의 자존심을 세계만방에 외치자는 의논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1919년 1월 27일(음력 1918년 12월 26일) 그는 최린을 은밀히 만나 그간의 결심을 털어 놓으면서 우리도 가만히 앉아만 있을 수 없지 않느냐고 말했다. 최린의 동의를 얻은 후 권동진, 오세창도 적극 참여한다는 뜻을 확인했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으로는 자주독립해야 한다는 사실은 자명하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을 모으기란 그렇게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월남 이상재 선생을 찾아가 독립운동에 대해 소상히 설명하자 그는 잘못하면 폭동이 일어나 많은 사람이 다칠 것이니 일본 총독부에 <독립청원서>를 내자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때 만해는 ‘조선독립이라고 하는 것은 제국주의에 대한 민족운동이요 침략주의에 대한 약소민족의 해방투쟁인데 청원에 의한 타의의 독립운동이 웬 말입니까? 민족 스스로의 결사적인 힘으로 나가지 않으면 독립운동은 불가능한 것이다’라고 반박하며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와 버렸다. 그 이후 월남 이상재와는 영원히 결별해 버리고 말았다. 또한 박영효, 한규설, 윤용구 등 귀족들과 접촉했으나 가진 자들은 한결 같이 꽁무니를 뺐다. 처음 200명으로 계획했던 거사가 실패할 지경에 이르렀다. 귀족들과 지도급 사람들은 다 빠지고 종교 운동가들만 남게 되었다. 서울을 중심으로 기독교 세력을 규합하던 월남 이상재가 빠져나가자 남강 이승훈 선생이 평양 사람들을 중심으로 기독교인 16명을 모으고 천도교에서 15명, 불교에서 2명으로 33인이 구성되었다. 그리하여 손병희 선생의 승낙을 받고 당시의 거부 민영휘를 찾아가서 거사자금을 마련하여 이를 계획하였다.
손병희 선생을 33인의 대표로 추대하고 최남선이 작성한 <독립선언서>에 만해 한용운의 <공약 3장>이 첨가되었다. 기미년 3월 1일, 종로 태화관에서 최린의 사회로 "이제 우리는 조선의 독립을 선언했으니 죽어도 한이 없다"는 만해의 축사와 독립만세를 선창하고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마포경찰서로 잡혀가게 되었다.
붙잡혀간 독립지사들은 말할 수 없이 심한 고초를 당해야 했는데, 국가내란죄로 사형된다는 소문에는 모두 마음이 약해졌다. 미결수로 있는 동안 너무 힘들어 눈물 흘리는 그들에게 똥통을 둘러엎으며 만해는 "나라 잃고 죽는 것이 서럽거든 당장에 취소하라"고 불호령을 내렸다.
만해는 옥중에서 옥중투쟁 3대원칙을 정하고는 몸소 실천에 옮겼다. 첫째는 변호사를 대지 말자는 것이었다. 내 나라를 내가 찾는데 누구에게 변호를 부탁할 것이냐, 변호해 줄 사람도 받을 사람도 없다는 것이었다. 둘째는 사식을 받지 말자는 것이었다. 온 천지가 다 감옥인데 호의호식하려고 독립운동하지 않은 이상, 밖에서 넣어 주는 사식을 먹지 말자는 것이었다. 셋째는 보석을 요구하지 말자는 것이었다. 만해는 이렇게 3대원칙을 정해놓고 옥중에서까지도 철저하게 항거했다.
공판할 때 33인을 한 사람씩 불러 사실 심문이 시작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에 관심을 가지고 몰려들어 방청석은 꽉 찼다. 그 중 당시 가장 엘리트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는 최린 선생이 아주 명쾌한 논리로 일본의 무단정치 10년을 고발했다. 시대적인 배경과 함께 일본 정치의 잘못된 점을 낱낱이 고발해 사람들의 마음을 시원하게 했다.
그때 만해는 최린의 진술을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최린의 논리에 의하면 만약 일본이 정치를 잘했다면 오늘의 독립운동 같은 것은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과 같았다. 만해는 당장 그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나 ‘고우(古友, 최린의 호), 내가 내 나라 찾자는 일에 일본 정치 잘하고 못하고가 무슨 소리요’ 하며 최린 선생을 크게 꾸짖었다.
스님의 취조 차례가 왔지만 처음부터 입을 열지 않았다. 몇 번 반복해 보아도 재판장의 인정신문부터 묵살해 버렸기 때문에 재판은 조금도 진행되지 못했다.
하루는 재판장이 피고는 왜 말이 없느냐고 다그치자 그는 ‘조선인이 조선 민족을 위하여 스스로 독립운동을 하는 것이 백번 마땅한 노릇인데 일본인이 어찌 감히 재판하려 하느냐’고 오히려 호령을 했다.
또 <독립선언서 공약삼장>에는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폭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냐고 묻자 만해는 "조선 사람은 단 한 사람이 남더라도 독립운동을 하자는 뜻이다"라고 당당히 말했다. 최후의 일인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발표하라는 공약삼장은 광명, 정대, 화합이라는 바로 불, 법, 승 삼보정신을 말한 것이었다.
재판정에서 ‘피고는 금후에도 조선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라는 재판장의 물음에 대하여 그는 ‘그렇다. 언제든지 그 마음을 고치지 않을 것이다. 만일 이 몸이 없어지면 정신만이라도 남아 영세토록 가지고 있을 것이다. 너희 나라에 승려 월조대사가 있지 않느냐, 조선에도 한용운이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라’고 대답했다.
또 만해는 ‘나는 할 말이 많다. 서면으로 할 터이니 종이와 펜을 달라’고 요구하여 그 유명한〈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개요〉란 장문의 조선 독립 이유서를 써내려갔다. 53장(200자 원고지 20매 분량)의 논문을 옥중에서 참고 서적이나 자료 하나 없이 완성할 만큼 만해의 독립에 대한 신념은 확고했다. 평화를 획득하고 인간의 기본적 권리를 회복하기 위하여 목숨을 바치고 희생하는 것이 사람으로서 얼마나 가치 있고 고귀한 행동인가를 주장했다. 탁월한 식견과 정연한 논리로 조선독립의 목적을 옥중에서 당당하게 주장함과 동시에 침략 강점한 일본 군국주의를 준엄하게 꾸짖었다. 더욱 놀랄만한 점은 1919년에 벌써 군국주의 일본군도 제1차 세계대전 때의 독일처럼 반드시 패망의 쓴 잔을 마실 날이 올 것이라고 확언한 사실이다. 그의 통찰력은 이미 세계 대세의 흐름을 꿰뚫어 보았던 것이다. 자유, 평등, 평화, 정의에 입각한 민족자결원칙에 의한 조선 독립은 시간문제일 뿐, 반드시 성취될 것이라고 자신만만하게 단언했다.
그는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개요〉에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였다.
첫째, 민족 자결의 원칙은 정의이며 인류가 누릴 행복의 근원이기 때문에 어떠한 무력도 감히 조선 민족이 다른 국가의 간섭을 받지 않고 스스로 정치적 운명을 결정하는(自決)의 원칙과 독립의 의지를 꺾을 수 없다고 공언했다.
자유는 만유의 생명이요, 평화는 인생의 행복이다.·……. 압박을 당하는 사람의 주위는 무덤으로 바뀌고 쟁탈을 일삼는 자의 주위는 지옥이 되는 것이니 ……. 자유를 위해서는 생명을 터럭처럼 여기고,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는 희생을 달게 받는 것이다. 이것은 인생의 권리인 동시에 또한 의무이기도 하다··· 자유와 평화는 전 인류의 요구일지로다······ 전 세계를 대표할 만한 군국주의는 서양에 독일이 있고 동양에 일본이 있도다······ 오호라, 총칼이 어찌 만능이며 무력이 어찌 승리이리요. 정의가 있고 사람의 도(道)가 있도다. 극악한 군국주의는 독일로써 최종 막을 나타내지 아니하였는가······ 독일의 총칼이 적지 아니하거늘 전쟁의 끝(終極)을 고함은 무엇 때문인가. 정의 인도의 승리요 군국주의의 실패니라.
둘째, 조선 독립 선언의 동기에서 조선 민족의 실력과 세계 대세의 변천과 민족 자결 조건에 대하여 역사적 현실성과 미래의 이상을 분석하여 설명하고 있다.
셋째, 조선 독립 선언의 이유를 4개 항목으로 밝히면서 참으로 침통하고 부끄러움을 금치 못하겠다고 비분강개했다. 민족적 자주성과 회복 때문에 독립의 목적을 달성치 아니하면 저항을 멈추지 않을 것임을 밝히고 있다. 남쪽 나라 새도 옛 보금자리가 그리워 남쪽 가지에 집을 짓고, 중국 북방에서 타던 말(胡馬)도 자기가 깃든 곳이 그리워 북녘 바람을 향하여 우는 것은 그 근본을 잊지 아니한 것이다. 동물도 이렇거니 하물며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어찌 근본을 잊겠는가라고 하며 조선의 독립은 당연한 일임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민족 독립의 원동력은 자유주의에 있음을 지적하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신념을 표현하고 있다. 만주와 중국 본토까지 넘보는 침략주의 군국 일본의 야심을 폭로하고 조선 독립은 곧 신성한 역사적 의무라고 천명하고 강조하였다.
넷째, 조선은 독립 국가의 필수요소인 토지, 백성, 문화가 구비된 당당한 독립국임을 인식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조선 독립은 산꼭대기에서 굴러 내려오는 바위와 같아서 목적지에 도달하지 않으면 멈추지 않는다. ‘일본인은 기억하라! 마관조약, 포오츠머드 조약의 먹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갖은 흉계와 폭력으로 조선 독립을 유린한 것은 어떠한 배신인가. 오직 평화만이 상호공존을 가능케 하니 일본은 깊이 각성하라’고 경고했다. 생사를 초월한 그는 불의와 대항하며 정의의 화신으로 끝끝내 굴하지 않았고, <공약삼장>에 나오는 그대로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투쟁했다. 그에게는 따뜻한 동포애와 진한 인류애가 있었다. 독립을 선언한 직후 마포경찰서로 붙들려 가는 우국지사를 향하여 목이 터져라 부르는 어린 학생들의 만세소리를 들었을 때, 그의 눈에서는 알지 못하는 사이에 눈물이 쏟아졌다 한다. 그때 그 소년들의 모습과 소리는 일생에 잊히지 않는다고 술회하였다. 그는 옥중에서 극심한 고통을 겪으면서
달아 달아 밝은 달아
내 나라에 비친 달아
쇠창을 넘어와서 나의 마음 비친 달아
계수나무 베어내고 무궁화 심으고저
라는 절절한 애끓는 시(號哭)를 남겼다.
만해는 그 당시 최고형이던 3년 징역의 유죄 선고를 받고 복역 중 1921년 12월 22일(음력 1921년 11월 24일) 2년 10개월 만에 풀려나게 되었다. 출옥 후에도 만해는 자항자세를 조금도 흩뜨리지 않고 기독교 청년회, 불교 청년회 등에서 강의를 하는 등 많은 활동을 했다. 강연 마당에서 만해는 이런 이야기를 했다. "진정한 자유는 누구에게서 받는 것이 아니다. 또 주는 것도 아니다. 서양인들은 하나같이 ‘신이여 자유를 주소서!'라고 자유를 구걸하지만 자유를 가진 신은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할 필요도 없다. 사람이 부자유할 때는 부자유할 것이고, 신이 자유로울 때는 사람도 자유로울 것이다. 신이 만약에 있다면 ‘이여 자유를 주소서!'가 아니라, ‘이여 자유를 받으소서!'라고 얘기해야 할 것이다"라고 했다. 불교의 참된 자아(眞我)에서 향유되어지는 자유권을 제시하고 그것이 인간의 본성, 민족의 자존성에 연결되어 조선의 독립이야말로 자유의 광범위한 의미임을 크게 가르친 것이다.
‘철창철학'이라는 연제로 강연을 하던 어느 날, 청중의 가슴에 민족혼을 불어넣기 위하여 비장한 어조로 ‘개성 송악산(松岳山)에 흐르는 물은 선죽교의 피를 못 씻고, 진주 남강(南江)에 흐르는 물이 촉석루의 먼지는 씻어가도 의암(義岩)에 서려 있는 논개(論介)의 이름은 못 씻는다.’라고 끝맺었을 때, 장내에는 떠나갈 듯 한 박수와 함성이 가득 찼고 그 자리를 감시하기 위하여 참여하였던 일본 경찰까지도 박수를 쳤다고 한다.
또 다른 강연회에서는 ‘여러분! 얼큰한 된장찌개 맛보는 기분으로 내 말을 들어보소. 우리들의 가장 큰 원수는 대체 누구일까요. 소련입니까, 미국입니까? 아닙니다. 소련도 미국도 우리의 원수일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가장 큰 원수는 대체 누구입니까? 일본이라고 남들이 그럽디다. 모두들 일본이 가장 큰 원수라고······’ 연설을 하는데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임석한 경찰이 연설 중지를 외쳤다. 하지만 그는 태연하게 연설을 계속 하였다. ‘우리의 원수는 일본이 아닙니다. 일본이 어째서 우리의 원수이겠습니까? 우리의 원수는 바로 우리들 자신의 게으름, 이것이 바로 우리의 가장 큰 원수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렇게 말을 다했다. 그의 음성은 시냇물처럼 흐르다가도 폭포수가 되어 떨어졌다.
그의 생활은 옥중에 있을 때나 민중들의 곁에 있을 때나 언제나 한결같았다. 민중의 편에 서서 그들과 함께 고통을 나누며 호흡하고 있었다. 변절한 동지들을 질타하며 옥중에서도 옥 밖에서도 굴하지 않고 투쟁한 만해는 자유 , 평등 , 평화의 독립 사상은 바로 우리 민족의 저울추로서 영원한 역사의 귀감이 되기에 충분하다.
1923년 2월에는 <조선물산장려운동>을 적극 주도하였다. ‘인류는 향상적 동물이다. 향상이 자기의 실력에 의해서 한 단계 두 단계 뻗어나가야지 그렇지 목할 때에는 파괴와 멸망만이 있다’고 하며 소박하고 검소한 생활을 통하여 우리 경제의 힘을 기르자고 주장하였다.
그는 또 교육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표명했다. 그해 4월 20일 민립대학설립운동을 지원하는 민립대학 기성회 주최의 기념강연회에서 ‘다 같이 조선 민족이 된 의무감으로 일치단결하여 우리 2천만의 피와 정성을 모아 민립대학을 설립하자’고 했다. 그리고 오늘보다 내일의 삶을 위해 철저한 교육으로 내일을 준비하자고 역설했다.
5. 침묵의 미학
만해 한용운은 다시 설악산 오세암으로 들어가 지난날을 정리하면서 집을 나와 진리를 찾아 처음 수행하던(出家寺門)의 길을 처음 밟던 그 시절을 회상하며 오세암 장경각의 책 속에 파묻혔다. 자신보다 400년 앞서 이곳을 지나갔던 매월당 김시습(1435∼1493)의 흔적을 발견하고 시대는 많이 흘렀어도 느끼는 바는 오히려 새로움이 있었다. 그는 중국 동안(同安) 상찰선사(常察禪師. ?~961)의 선화게송인《십현담 十玄談》에 주(註)를 달았던 김시습의《십현담 주해》를 읽고 마음에 새로운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자신도 직접 매월당의 주와 비교, 대조하면서 주(註)와 해(解)를 달았다. 선(禪)의 오묘한 이치에 이해가 깊었던 그는 선에서 사회를 움직이는 원동력이 솟아 나와야 함을 강조하였다.
그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의 모국어로 깨달음의 경지를 노래하고 싶었다. 그의 시집《님의 침묵》은 설악의 영상과 그의 마음과 혼이 담긴 노래다. 1925년 8월 29일 《님의 침묵》을 탈고한 그는 노도광풍이 지난 후의 잔잔함에 비유할 만한 마음의 평안을 느꼈다. 자유, 평등, 평화의 사상을 침묵 속에 담고 그 침묵의 노래를 상징적 님을 향하여 투영했다.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 너에게도 님이 있더냐, 있다면 님이 아니라 너의 그림자니라. 나는 해 저문 벌판에서 돌아가는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양이 기루어서 이 글을 쓴다.
여기에서 말한 ‘기리운’ 존재가 바로 님의 정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기룹다’는 말을 어느 국문학자는 ‘그립다’는 말이 변형된 말이라고 하지만 시의 전체적인 내용으로 봤을 때 단순한 문자풀이로서 변형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기리운’ 것이란 바로 보살의 서원(誓願)사상이다. 우리에겐 많은 원하는 것이 있다. 욕망도 있고 갈망도 다 원하는 것이다. 그런 것은 ‘나’라고 하는 소아적 집착으로 바라는 원이다. 그러나 대승불교의 원은 나보다 당신에게 비중을 두었을 때 참다운 님의 얼굴이 보인다는 대비의 원력 보살사상으로 나타난다.
만해의 시는 시이면서 철학적인 시이고, 종교적인 분위기가 가미된 시이다. 눈물을 분석해서 슬픔의 농도를 알 수 없듯이 ‘님’이라는 단어 자체에 집착하는 것으로는 만해의 세계를 알 수 없다. 침묵의 세계에 바로 접하지 않고는 알 수 없는 세계이다. 팔만대장경이라는 수많은 경전은 모두가 중생의 수준(根機)에 따라 설해진 이야기이다. 그런데 화엄의 세계에 와서는 근기 자체가 부정되어 버린다. 그래서 논리적 사고로 분별이 가능하지 않는 세계, 지혜 그 자체인 비로자나 법신사상으로 침묵의 세계를 해석할 수밖에 없다. 비로자나는 바로 광명 자체, 곧 ‘공’이라는 그 설명의 세계를 뛰어넘어 존재하는 바로 그것이다.
새봄이 ‘내가 지금 갈 테니 너희들 잘 맞이하라’고 말하면서 오는 것은 아니다. 아지랑이가 움을 틔우는 현상 그 자체로 존재되어지는 것일 뿐이다. 보이는 현상 그 자체가 바로 침묵의 세계인 것이다. 보살은 그것을 보고서 봄이라고 느끼고 중생은 그것을 보고서도 자신의 무명 때문에 바로 느끼지 못하는 슬픈 존재이다. 보살은 그 슬픔을 대신하며 끊임없이 부처의 세계를 비추어 제도한다.
침묵의 세계를 비로자나 법신세계로 보았을 때 보살의 할 일은 무한한 것이다. 이 사회 속에서 구현되어야 할 실천덕목이 끝없이 나열되는 것이다.
기리운 것은 다 님이라고 했다. 생명이 있든 없던(有情 ? 無情) 존재하는 것 그 자체는 모두가 님이다. 불성이 있는 부처님이라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님은 내가 사랑할 뿐 아니라 나를 사랑하나니라.’고 하여 님과 나의 일체화를 설명하고 있다. 보살의 입장에서 중생의 문제는 자신의 문제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너희에게 님이 있느냐, 있다면 님이 아니라 너의 그림자니라. 허상을 참된 모양(眞相)이라고 떠들지만 말고 이 사회와 중생을 위하여 무슨 일을 했는지 행위 그 자체를 반성해 보라는 것이다.
‘나는 해 저문 들판에서 돌아가는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양이 기루어서 이 시를 쓴다.’에서 우리는 중생을 구원하려는 만해 스님의 대비 원력을 볼 수가 있다.
이렇듯 우리 문학사상 유례없이 순화된 정서로 엮어진 88편의 시는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주고 있다. 님이란 다름 아닌 생명의 근원이고, 영혼이고, 또 종교적 신념의 결정이다. ‘장차 이 나라의 시인들은 시학(詩學)을 배우려고 《님의 침묵》을 읽는 일은 드물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떻게 전통을 생생하게 몸에 지니고 어떻게 미래를 개척하며 사느냐’ 하는 문제와 맞설 때마다 《님의 침묵》이 지닌 사자후에 귀를 기울이라.”고 송욱 교수는 지적하였다.
깨달음의 증험을 내용으로 한 시를 증도가(證道歌)라고 하는데, 시집 《님의 침묵》은 전체가 하나의 깨달음의 노래 즉 증도가다. 그의 시는 사랑의 시이므로 우리는 이 시집을 ‘사랑의 증도가'라고 부를 수 있다. 그는 이 시집을 통하여 선(禪)의 세계를 구체화하고 현대화하는데 성공했다.
“이 나라의 신문학은 한문과 작별하여 모국어로써 표현된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신문학은 한문과 함께 사상까지 작별하고 말았다. 신문학사 전체를 통해서 오직 하나의 예외는 시집 《님의 침묵》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 시집처럼 불교 전통이 우리말로써 시화된 사례도 이 나라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라는 송욱 교수의 탁견을 확인할 수 있다.
그의 시집은 예술적인 면으로는 20세기 모국어가 이룩한 석굴암이다. ‘웅변은 은이고 침묵은 금이지만 이 금으로 자유의 꽃을 몽땅 사고 싶어라 (雄辯銀兮沈默金 此金買盡自由花)'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중생에게 새벽을 알리는 보살로서, 어둠 속의 중생을 싣고 물을 건너야 하는 나룻배의 역할을 원하였다. 그는 시를 쓰되 영원 속으로 도피하지 않았다. 시를 쓰되 조국의 역사와 우리의 전통을 한 순간도 잊어버리지 않았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 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적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 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만은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님의 침묵〉의 전문이다. 부처님의 세계가 억만 겁이 지나도 영원하듯이 만해의 침묵의 세계가 바로 그러한 것이다. 소월 등 우리 근대시가 대부분 감성의 세계를 표출하고 있는데 비해, 만해의 시에 와서는 감성과 이성의 세계가 강하게 마주쳐 조화된다. 서양에는 초월이나 명상의 시는 있지만 이와 같이 깨달음의 세계를 노래한 시는 없다.
현상의 님은 갔다. 현상이 영원하지는 못하다는 자각은 날카로운 첫 키스의 대전환으로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사라졌다. 그러나 만날 때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떠날 때 다시 만날 것을 믿는다는 회자정리의 내용으로 가고 옴이 따로 없다는 것을 말한다.
원래 무상한 인생 자체에 있어 님은 갈 수도, 가지 않을 수도 없는 것이다. 단지 우리들의 착각된 생각에 의해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가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돌 뿐이다. 《님의 침묵》은 바로 팔만대장경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널리 애송하는 시 〈알 수 없어요〉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바람도 없는데 어떻게 수직의 파문이 생기며, 떨어지는 오동나무가 발자취를 남길 수 있을까. 논리를 떠난 시적인 파격일 뿐이라고 설명들을 하지만, 바람도 없는 공중은 바로 우주적멸의 세계이다. 부처님의 세계인 적멸보궁이다. 만법의 성품(法性)은 본래 모든 이치가 한데 통하여 구별이 없어서(圓融) 두 가지 모습이 아니다. 즉 일체만법 그것은 본래 고요하다. 적멸(寂滅)의 세계며 근원의 세계인 것이다. 여기에 현실의 세계로 변화를 가져온 것이 수직의 파문, 인간사의 첫 페이지가 기록된다는 것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곳엔 기쁨도 있지만 슬픔도 있고 영광과 번민도 함께 있다. 이 두 가지가 항상 우리에게 공존하고 있다. 지리한 장마와 무서운 검은 구름에 대칭되는 것이 서풍, 서방정토 극락세계를 말하는 것이다. 언뜻 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우리의 이상세계이며 부처의 세계이다. 검은 구름과 푸른 하늘은 인간생활의 두 가지 면을 말한 것이다. 옛 탑 위의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와 근원을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굽이굽이 길게 이어져 오늘에 이르는 우리의 역사다. 연꽃 같은 발꿈치와 옥 같은 손으로 떨어지는 날을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바로 창조의 정신이다. 뿌리 깊은 전통을 가진 오늘의 역사 속에서 새로운 것을 재창조해야 하는 것이다. 오늘은 바로 어제의 모임이며, 오늘이란 내일을 향해 가는 출발인 것이다. 오늘의 행위에 의해서 내일이 결정되는 것이다. 이렇게 새 역사를 창조해 가는 마당에 있어서 타고 남은 재는 다시 기름이 된다. 타버리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바로 거기에 시작이 있다. 재가 된 일체만법이 그대로 기름인 것이다.
‘그칠 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이는 중생이 존재하는 영원 속의 현장에 바로 서야겠다는 다짐이다. 진흙 속에서 깨끗한 꽃을 피워내는 연꽃처럼 중생의 현장에서 중생의 괴로움을 자신의 괴로움으로(同體大悲의) 마음으로 새로운 역사를 구현해 가야겠다는 이야기이다.
그가 남긴 《님의 침묵》 중 〈찬송〉의 시를 다시 생각해 보자.
님이여 당신은 백번(百番)이나 단련된 금(金)결입니다.
뽕나무 뿌리가 산호(珊瑚)가 되도록 천국(天國)의 사랑을 받으소서.
님이여 사랑이여 아침별의 첫걸음이여
님이여 당신은 의(義)가 무서웁고 황금(黃金)이 가벼운 것을 잘 아십니다.
거지의 거친 밭에 복(福)의 씨를 뿌리옵소서.
님이여 사랑이여 옛 오동(梧桐)의 숨은 소리여
님이여 당신은 봄과 광명(光明)과 평화(平和)를 좋아하십니다.
약자(弱者)의 가슴에 눈물을 뿌리는 자비(慈悲)의 보살(菩薩)이 되옵소서.
님이여 사랑이여 얼음바다여 봄바람이여
누구를 위한 찬송인가? 만해 그 자신인가! 민족을 위한 만해의 비전인가! 불교는 완료형이 아니라 영원히 진행형이어야 한다. 최고를 향해서 가는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해 갈 뿐이다. 바로 저 부처의 세계가 바로 내 속에 있기 때문이다. 나의 일상 모든 행동을 통하여 자신의 껍질을 벗기며 끝없이 가는 길, 보살의 길이 불도인 것이다.
만해는 〈독자에게〉라는 시에서 시인으로서 여러분 앞에 보이는 것을 부끄러워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새벽종을 기다리며 붓을 던진다고 했다. 여명의 순간을 바라보며 우리의 어둠을 살라버릴 태양을 기대하며 새벽종을 기다리는 것이다. 수십 겁이 지나야 미륵부처가 온다고 한다. 무한한 시간, 한계를 벗어난 시간을 설명하기 위해 순간을 말하며 붓을 던진 것이다. 《님의 침묵》으로 새벽종 역할을 하던 비원이 여기 있는 것이다. 스님의 시는 문학지상주의나 피상적인 계몽주의가 아니라 바로 민중과 민족의 철학적 각성의 노래였던 것이다.
6. 설중매화
자유는 만유의 생명이요, 평화는 인류의 행복이라고 주장하며 옥중투쟁을 하다가 1921년 12월 22일 출옥한 만해는 물속에 피어나는 신비로운 연꽃 같은 시세계를 통하여 미묘한 법문의 세계를 열었다.
시집 《님의 침묵》을 내놓은 이후 만해는 낙산사 홍련암에서 기도를 하고 있었다. 그때 마침 총독부에서 새로 부임한 군수가 관광차 홍련암에 오게 되었는데 도로정비까지 해가며 다른 스님들은 모두 나가 영접을 하는데 만해는 요지부동 관음정근만 하고 있었다. 약이 오른 군수가 ‘저 자를 끄집어내라’고 하자 ‘네가 군수면 네 나라 군수지 내 나라 군수는 아니다.’라고 만해는 벽력같은 소리로 호령했다. 그에 대해 군수는 할 말을 잃어 버렸다.
1927년 49세가 된 만해는 서울에 올라와 민족운동에 가담했다. 민족항일전선인 신간회 창립위원으로 활약하여 6월 10일(음력 5월 11일)에는 이 모임의 서울지회장이라는 막중한 위치에 올라 좌파·우파로 갈려져 있던 그들의 사상을 하나로 모으려고 노력했다.
바쁜 생활 중 하루는 이런 일이 있었다. 신간회에서 전국에 돌려야 할 긴급 공문이 있었다. 그런데 인쇄된 봉투 뒷면에 일본 연호인 소화(昭和) 몇 년 몇 월 며칠이라는 글자가 찍혀 있었다. 이것을 본 그는 아무 말 없이 천여 장이나 되는 그 봉투를 아궁이 속에 넣고 불태워 없애버렸다. 이 광경을 보고 깜짝 놀란 사람에게 가슴이 후련한 듯 "소화(昭和)를 소화(燒火)해 버리니 가슴이 시원하군!" 하는 한마디만 남겼다. 참으로 만해가 아니고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1929년 겨울에는 조병옥 박사와 함께 광주학생운동을 전국적으로 확대 여론화에 앞장서고자 당대 유수의 민족 운동가들과 민중대회를 계획했으나 총독부의 탄압으로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만해는 젊은이들을 사랑하며 모든 기대를 늘 그들에게 걸었다. 따라서 청년들이 좀 더 열심히 정진하기를 마음 깊이 바라고 있었다. 그러다가 소심小心하고 무기력한 젊은이를 보면 사정없이 호통을 쳤다. ‘이놈들아, 나를 매장시켜. 나 같은 존재는 독립운동에 필요도 없을 정도로 네놈들이 앞서 나가 일 해봐!’라고 말하며 젊은이들 가운데 독립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가는 이가 있으면 그는 오히려 축하한다는 격려의 말로 위로하였다. 그를 따르던 젊은이들을 대하면 엄격한 반면 따뜻한 마음으로 맞아주었다. 만해의 방에서 밤늦도록 이야기하다가 방 한구석에 쓰러져 잠이 들어 깨어보면 어느 틈에 옮겨졌는지 따뜻한 아랫목에 눕혀져 이불이 잘 덮여 있었으며 그 자신은 윗목에서 꼼짝하지 않고 앉아 참선을 하고 있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다고 김관호 선생은 술회하고 있다.
만해는 민중들을 지도하고 계몽하려면 역시 언론의 힘이 필요하다고 절실히 생각하였다. 그래서 늘 신문사 경영의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사정을 눈치 챈 총독부에서는 식산은행을 통하여 서류 뭉치를 들고 그를 찾아왔다. 도장을 찍어 달라는 것이었다.
‘왜 도장을 찍으라는 거요?’
‘성북동 일대의 산림 20여만 평을 무상으로 드리려는 겁니다. 도장만 찍으시면 재산이 되는 것입니다.’
이 말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그는 돌아앉았다.
‘난 그런 거 모르오! 어서 나가보시오.’
그는 그것이 무엇을 하자는 것이며 어디에서 나온 돈인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는 어렵고 힘들지만 옳은 일이 아니면 사정없이 통박을 가했다. 고난의 칼날 위에 올라서는 고통이 있더라도 사람으로서 사람의 도리를 다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우리들의 가슴 속에 심어주었다.
조선불교총동맹 조직으로 일제의 종교 억압에 맞서서 불교 대중화의 선봉이 된 만해는 1931년 6월에 당시 유일한 불교 잡지인《불교》지를 인수하여 《유심》지에서 못 이룬 종교개혁운동에 박차를 가했다. 84호부터 시작하여 108호에 이르기까지 종교에 관한 글뿐 아니라 청년의 교육문제, 민족의 진로문제 등 다양하고 깊이 있는 내용으로 스님의 혼을 실어 발표했다.
그 뿐 아니라 그는 1931년 전주 안심사에 내려가 그동안 쌓여있던 한글경판을 하나하나 조사하고 손질하여 책으로 만들어냈다. 조선 500년 동안 박해받아 오던 불교가 민중에게 전달하는 수단으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토끼전》이나《별주부전》등 부처님의 전생담을 옮겨놓은 이야기들이었으나, 그 출처를 모르는 채로 묵혀 두었던 것들이었다.
그해 9월 24일에는 윤치호, 신흥우 등과 나병구제연구회를 조직하고 여수, 대구, 부산 등지에 간이 수용소 설치를 결의하여 나병구제에 온 정력을 쏟았다. 그러나 사실 자신은 방 한 칸 없는 생활을 하며 떠돌아다니는 외톨이 신세였다.
만해는 김법린, 김상호, 최범술 등 청년 승려들이 조직한 비밀결사 만당의 영수로 만해가 추대 받은 사실이나 54세의 나이로 당시 불교계를 대표하는 인물로 지목된 사실들은 바로 그의 지조와 기개, 이미 감춰질 수 없는 설중매화의 법의 향기로 만인을 감화시킨 것에 기인한다. 그러나 식민지 치하의 만해에겐 소망스런 활동의 터전이 주어질 리 없고, 만들어도 곧 단절될 수밖에 없었으므로 인도의 유마거사처럼 중생의 병을 도맡아 앓을 수밖에 없었다.
요시찰 인물이었던 만해는 늘 갈 곳이 없었다. 주로 가있던 곳이 안국동 선학원이었는데 무슨 사건만 생기면 일차로 잡혀갈 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까지 괴롭혀야 했기 때문에 늘 불편한 처지였다. 그때 경봉 스님의 은사이신 구하 스님께서 서울에서 고생하지 말고 통도사에 내려와 조그만 암자나 하나 맡아 편히 지내라는 간곡한 권유를 받고 통도사로 내려가게 되었다.
만해가 내려온다는 소식을 들은 구하 스님은 신바람이 났다. 도량 청소며 만반의 준비를 해놓고 기다렸다. 스님을 흐뭇하게 해드리려는 마음에서 통도사 일주문 옆 큰 바위에다 기념글자를 새겨 넣어야겠다고 했다. 그러나 만해는 ‘나는 돌에다가는 내 이름을 안 새깁니다. 나는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나의 이름을 새기면 새겼지 돌에다가 이름을 새기지 않겠습니다.’라고 거절했다.
그런데 양산경찰서에서 만해를 떠나게 하려고 통도사에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어느 곳을 가든지 조선인 경찰이 뒤를 따랐다. 그는 펜을 들었다. ‘모기 너는 영웅호걸의 피를 빨고 어린아이의 피도 빨고 지조가 없는 얄미운 놈이다. 하지만 너에게 두 손 합장하고 크게 배울 것 하나는 동족의 피는 빨지 않는다는 점이다.’라는 내용의 시를 썼다. 이것은〈모기〉라는 제목으로 조선일보에 발표되었다. 이 시를 보자 일본 앞잡이로서 만해의 뒤를 쫓던 그 조선인 경찰은 그만 그곳을 슬그머니 떠나고 말았다.
풍난화의 매운 향내를 토하듯이, 설중매화와 같이 찬바람 눈비를 원망할 것이 없이 그는 당당한 모습으로 그렇게 버티고 섰다.
7. 심우장의 정절
만해는 말년(1933년, 55세)에 이르러 비로소 성북동 막바지에 집 한 칸을 갖게 되었다. 마음 놓고 기거할 방 한 칸 없는 생활을 보다 못한 몇몇 뜻있는 분들이 마련해 준 것이었다.
당시 조선일보사 사장이던 방응모 선생이 다시 서울로 돌아온 스님께 거처를 마련해주려 하자 벽산 스님이 토굴을 지으려고 성북동에 마련해 놓았던 54평의 땅을 기꺼이 내놓았다. 거기에 60여 평을 더 보태어 120평 정도의 한옥을 지을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집을 지을 때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볕이 잘 드는 남향으로 주춧돌을 놓았다. 이것을 본 그는 “그건 안 되지, 남향이면 바로 조선총독부를 바라보게 될 터이니 차라리 좀 볕이 덜 들고 여름에 좀 덥더라도 북향하는 게 낫겠어.” 하며 주춧돌을 돌려놓아 북향집이 되었다. 보기 싫은 총독부 청사를 자나 깨나 바라보며 살아간다는 것이 여간 불쾌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북향으로 주춧돌을 놓고 집을 지으니 이 집이 돌아가시는 날까지 몸담았던 심우장(尋牛莊)이었다. 손수 지은 이 집의 택호(宅號)는 소를 찾는다는 뜻이다. 소는 마음에 비유한 것이므로 마음자리 바로 찾아 위없는 큰 도(無上大道)를 깨치기 위해 공부하는 집이란 뜻이다. 이곳에서 만해는 마지막까지 몸과 마음을 닦았다. 조선의 땅 어디라도 왜놈의 발아래 짓밟히지 않은 곳이 없어도, 이곳 심우장 만은 민족의 혼을 간직하고 조국을 지켜준 마지막 보루였다. 조선의 땅에 핀 한 그루의 무궁화였다.
그 심우장에서 만해는 당시 금서로 묶여있던 단재 신채호 선생의 《조선상고사》를 부도 속에 넣어 ‘단재탑’을 만들려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곤욕을 치르기도 했으며 〈흑풍〉,〈박명〉,〈후회〉 등의 신문 연재소설을 남겼고, 단재 신채호 선생의 묘비명을 썼다. 우리의 역사를 지키고 보존하겠다는 눈물어린 노력이었다.
1937년에 만해는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 우리의 애국지사 일송 김동삼 선생께서 서대문 구치소에서 돌아가신 것이다. 조선은 앞으로 꼭 해방이 될 것인데 해방 이후 혼란이 있을 경우 그 혼란을 수습할 사람은 김동삼뿐이라고 믿고 있던 만해는 천지가 무너지는 듯했다. 연고자는 김동삼의 시신을 인수해 가라는 공고가 나왔는데도 총독부의 눈이 무서워 어느 누구도 그 시신을 책임지려 하지 않았다. 만해 한용운은 그 길로 달려가 그 시신을 인수하여 심우장에 모시고 와서 애통해 하며 5일장으로 모셔드렸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총독부 회의실에서 31본산 주지 회의를 주최한 미나미(南次郞) 총독을 호령한 만공 스님을 만나 ‘호령만 하지 말고 스님이 가지신 주장자로 한 대 갈길 것이지’ 하였다.
이에 만공 스님은 ‘곰은 막대기 싸움을 하지만 사자는 호령만 하는 법이지’라고 응수했다. 그러고 보니 만공 스님은 사자가 되고 만해 스님은 곰이 되어 버린 셈이다.
그러나 만해는 미소를 지으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새끼 사자는 호령을 하지만 어미 사자는 그림자만 보이는 법이지’
당대의 고승인 이 두 분이 주고받은 격조 높은 이 대화는 길이 남을 만한 일화다.
지사답게, 법사답게, 시인답게 일관된 길을 한 치도 흔들림 없이 걸은 만해 한용운은 변절한 동지들을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다. 더구나 창씨 개명한 당시 식자들을 똥보다 죽은 시체보다 더 더럽게 여겼다. 변절한 최린, 이광수, 윤치호 등을 일러 주인에게 충복하는 개만도 못한 놈들이라고 말했다.
1939년 세수로 61세 회갑을 맞으니 감회가 새로웠다.
총총히 지나간 예순 한 해 이것이 짧은 생애 엇어라. 가난과 병을 마음대로 하니 누가 묘방 얻은 줄 알겠지만 그러한 문제들이 나의 마음을 바꿔 놓을 수 없으며 이미 한 모습 변하여 님께 향하는 마음뿐이네. 물같이 흐르는 여생을 그대여 묻지 마라. 다만 매미 소리가 석양을 맞았을 뿐이다.
동대문 밖 청량사에서 마련된 회갑날 오세창, 권동진, 홍명희, 안종권, 박광, 장도환, 김관호 등이 스님의 송수 만년을 기원하는 송수첩에 한 수씩 시를 지었다.
만해는 일제 말기 혹독한 무단정치 아래서 일제의 황민화 운동을 전 조선인에게 강요할 때 끝까지 굴하지 않고 버티면서 비타협의 정신으로 나갔다. 창씨개명반대운동을 벌이고 조선인학병출정을 반대하면서 한편으로는《유마경》을 번역하였다. 중생이 아프기에 내가 아프다는 유마거사의 가르침을 따르면서 민족의 아픔을 당신의 아픔으로 아파했다. 만지풍설(萬地風雪) 차고 거친 뜰에 쌓인 눈, 찬바람에 아름다운 향기를 토하려는 매화, 그는 매화나무를 바라볼 때마다 ‘조국 청년들아! 너희들은 시대적 행운아다. 현대는 조국 청년들에게 행운을 주는 득의得意의 시대이다. 만지풍설 속에서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매화, 이것은 너희들의 모습이다’라고 말하면서 청년들에게 저 매화의 정절을 닮으라고 역설하였다. 주위가 어떻고, 환경이 어떻고, 불우하다, 슬프다 말하지 말고 눈보라 속에서 꽃피우는 매화의 정절을 닮으라 하며 한줄기의 맑은 바람을 불어 넣기를 잊지 않았다.
민족운동가, 불교사상가, 근대 시인으로 집약되는 만해는 청정심으로 극락정토를 지상에 꾸미려는 깊은 뜻을 버리지 않은 채 1944년 6월 29일 심우장에서 66세를 일기로 입적했다. 학병 징병을 거부하고 일체의 배급을 거부하며 영양실조가 되었던 스님의 육신은 홀연히 사라졌다. 그러나 그의 법신은 영원히 이 조국 땅에 남아 역사의 등불이 된 것이다. 민족사의 암흑기에 수많은 사람이 있지만 인간의 근본정신과 큰 가르침을 이 땅에 심고자 노력한 이가 어디에 또 있는가.
그는 민족의 갈망을 절실하게 노래한 시인이었고 또 구국 일념으로 살아온 독립지사였고, 가혹한 고난과 탄압 속에서도 의연함을 보여 지조를 꺾음이 없었다. 불굴의 투지로써 겨레를 이끌었다.
만해 스님을 추모하여 쓴 조종현(1906-1989)의 시는 만해 스님의 큰 삶을 잘 집약시키고 있다.
만해는 중이냐? 중이 아니다.
만해는 시인이냐? 시인도 아니다.
만해는 한국 사람이다. 뚜렷한 배달민족이다. 독립지사다. 항일투사다.
강철 같은 의지로 불덩이 같은 정열로
대쪽 같은 절조로 고고한 자세로
서릿발 같은 기상으로 최후일각까지 몸뚱이로 부딪쳤다.
마지막 숨 거둘 때까지 굳세게 결투했다.
꿋꿋하게 걸어갈 때 성역(聖域)을 밟기도 했다.
보리수의 그늘에서 바라보면
중으로도 선사(禪師)로도 보였다.
예술의 산허리에서 돌아보면
시인으로도 나타나고 소설가로도 등장했다.
만해는 어디까지나 끝까지 독립지사였다. 항일투사였다.
만해의 진면목은 생사를 뛰어넘은 사람이다. 뜨거운 배달의 얼이다.
만해는 중이다. 그러나 중이 되려고 중이 된 건 아니다. 항일투쟁하기 위해서다.
만해는 시인이다. 하지만 시인이 부러워 시인이 된 건 아니다.
님을 뜨겁게 절규했기 때문이다.
만해는 웅변가다.
그저 말을 뽐낸 건 아니고
심장에서 끓어오르는 것을 피로 뱉었을 뿐이다.
어쩌면 그럴까? 그렇게 될까?
한 점 뜨거운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도사렸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