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81년 10월 대통령지시로 한강종합 개발사업에 착수하여 총예산 4,133억원 (그 중 시비는 2,171억원)으로
연인원 4백만명이 동원되어 계획 5년만인 86년 9월 완공했다.
이 사업은 이수(利水)와 치수(治水)의 표본사업으로 강류 514.4킬로미터와 유역면적 26.270평방킬로미터를 정비하여
한강의 수질을 향상시키고 경관을 개선한것이다.
이를 위해 직경 1.5미터 하수관을 54.6킬로미터 매설하여 생활하수 강변 요소요소에 건설한 하수처리장에
집중시켜 한강 유입을 차단하고 강변지역에는 시민공원과 올림픽대로를 조성하여
시민생활과 교통소통에 크게 기여하는 것으로 하였다.
이로 인해 한강의 수질이 향상되어 물고기가 다시 찾아들었고 강류에는 유람선이 떠다니는 서울의 대표적 경관을 이루게 되었다.
12. 대통령이 직접 주관하는 과학기술확대회의를 설치하여 80년에 CNP 대비 0.8%에 불과했던 연구개발투자를
<81년 0.9%> <83년 1.23%> <84년 1.44%> <85년 1.77%> <86년 2.00%> <87년 2.22%> <88년 2.05%>로 계속 끌어올려
업계의 세계일류상품개발을 독려하였다.
80년대 초에는 세계의 경쟁력이 집중되었던 반도체개발에 총력을 기울여 성공을 거두었다.
그것이 오늘의 반도체산업의 초석이 되었다.
13. 70년대에는 전화가 회선부족으로 희귀한 보물처럼되어 상류층과 특권층의 점유물로 점거되었다.
5공은 국민의 불만을 부추기는 전화문제해결에 총력을 기울였다.
80년초 대통령의 지시로 착수한 전화교환기 연구개발에 성공하여 80년에 270만대에 불과했던 전국의 전화회선을
88년에는 1천30만대로 확장하여 산간벽지에까지 집집마다 전화를 가설하게 되어 국민생활에 혁명적 변화가 일어나게 하였다.
반도체와 결합된 이 통신산업은 한국 IT산업의 시발이 되었다.
14.5공정부의 초미의 문제는 폭등하는 물가를 안정시키는 것이었다.
80년에는 소비자물가가 32.2% 도매물가가 42.2%로 폭등했다. 정부와 국민이 일체가 되어 물가잡기에 나서서
2년만인 82년 소매물가를 7.1% 한자리숫자로 잡았다. 정부가 물가안정에 고심한것 중 하나가
소비자의 물가오름새 심리를 막기 위한 경제교육이었다.
안정추세에 들어선 소비자물가는 <83년 3.4%> <84년 2.2%> <85년 2.3%> <86년 2.8%> <87년 3.1%>로 2%대의 안정을 유지하여
88년 퇴임때까지 지속되었다.
15. 5공 정부는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국제수지(경상수지)의 흑자를 달성했다. 81년 46억 6백만달러였던 적자를
86년에 46억 9백만달러의 흑자로 전환시켰다. 그리고 87년에는 100억달러 88년에는 141억 5백만달러로 흑자의 폭을 확대시켰다.
이러한 5공의 국제수지 흑자전환은 한국경제에 대한 국제사회의 평가를 높이는 것이 되어 한국경제위상이 크게 향상되었다.
이 성과는 바로 수출과 경제운용에 반영되어 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16. 5공 정부는 81년 244억 9천만달러에 달한 외채를 88년에는 72억달러로 격감시켰다. 반면 기업과 가계와 정부가 일체가 되어
추진한 국민저축운동이 주효하여 80년에 23%였던 저축율을 88년에는 39.3%로 신장시켜 국제자본으로 활용하게 하였다.
17.이렇게 성공적으로 구축된 경제기조는 수출사업 확대에 집중되었다. 그리하여 80년에 175억달러였던 수출을
임기말인 88년에는 607억달러로 신장시켰다.
18. 이러한 5공의 경제운용은 국민소득을 가시적으로 높이는 것이 되었다. 임기초인 80년 600억달러였던 GNI를
임기말인 88년에는 그 3배에 달하는 1.790억달러로 신장시켰다.
따라서 개인소득도 향상되어 80년 1598달러가 87년에는 3천달러의 고비를 넘어 88년 4268달러로 5천달러에 육박하게되었다.
2%대의 안정물가는 소득증대와 상승하여 가계경제에 더욱 알차게 성장시키는 것이 되었다.
19. 한일관계를 새로운 관계로 발전시켰다.
83년 1월 나카소네(中曾根康弘) 일본 수상이 일본의 수상으로서는 처음으로 한국을 공식방문하였고
같은 해 9월 전두환 대통령이 한국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일본을 공식방문하여 천황을 만나 한국에 대한 사과의 말을 들었다.
한일양국은 새 시대를 구가할 정도로 관계가 개선되었다. 특히 전두환 대통령의 요청을 받아 일본정부가
한국에게 40억달러를 차관한 것은 양국역사상 유례없는 일이었다.
83년부터 시행된 양국간의 청소년 교환교류는 지금까지 이어져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20. 안보와 외교에 있어서도 각별한 발전이 있었다.
한미일의 삼각안보체제강화는 물론 아시아 각국과 유럽, 아프리카, 중남미에까지 순회외교를 확대하여
태평양시대의 개막을 촉진시키는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다. 특히 레이건 대통령이 취임 첫번째 정상회담으로
전두환 대통령을 맞아 격의 없는 우의를 표시하며 대한민국의 위상을 제고시켰다.
주한미군의 철수문제를 백지화하고 한국에 대한 무기판매 제한조치를 해제한것은 한국의 안보구축에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첫댓글 공무원들의 기강도 지금과는 달리 확립되어 있었던 시기였지요......
진짜지금은... 막장의 끝을보고있는듯 하네요
그때 그 시절을 다시 만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