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화사에서 발길을 옮겨 모충동 청화사 비로자나불을 찾았지만 끝내 뵙지 못했다. 또한 용정동 순치명 석불 입상 역시 동리 주민들도 소재지를 몰라 다음으로 인연을 미루어야 했다. 네비게이션에도 표기된 문화재를 눈앞에서 두고 돌아가야만 하는 심정 우리님들은 잘 알 것이다.
청주 시민들의 약수터로 자리한 보살사는 청주에서 가장 오래된 고찰로 사바세계에서 고뇌하는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세워진 관음도량으로 알려져 있다.
낙가산 보살사(洛迦山菩薩寺)는 조선시대의 각종 지리지에 빠짐없이 등장하고 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한국사찰전서>에 의하면 신라 진흥왕 28년(567년)에 법주사를 창건한 의신조사가 창건하였으며, 신라 혜공왕 14년(778년) 진표율사의 제자인 융종대사가 중창하였다.
그 후 고려 태조 원년(918년) 태조의 다섯번째 아들 증통국사가 중수했다. 또한, 보살사 중수비에 의하면 고려 공민왕대에는 토전이 하사되었고, 조선조 세조 4년(1458년)에 어명으로 중수되었음을 알 수 있다고 한국전통 사찰정보에는 전한다.
보살사의 금당은 아미타삼존불을 모신 극락보전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 맞배건물이다.
1970년 사월초파일 행사 중 보살사 경내에서 발굴된 병립불상(竝立佛像)으로,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일광이불상(一光二佛像)이다. 병립상은 대좌와 광배는 물론 두 불상이 한 돌에 나란히 부조(浮彫)된 모습으로, 동일한 조각수법에 동자(童子) 같은 모습을 취하고 있다.
머리는 나발에 넓적한 육계가 솟아 있으며, 젖살이 가시지 않은 도톰한 얼굴에는 천진스런 미소가 가득하다. 코는 심하게 마멸되었으나 양 귀는 정제된 모습으로 어깨까지 흘러내려 자비로운 모습을 보여주며, 목에는 삼도를 표현하여 고불(古佛)의 모습이 남아 있다. 신체는 3등신으로 전체적으로 부드러운 굴곡의 모습을 가지나 탄력과 힘이 없는 단아한 자태가 돋보인다.
법의는 통견으로 옷주름이 신체에 비해 굵게 표현되었으며, 양발은 가지런히 정면을 향하고 있다. 수인은 두 상이 대칭적인 모습으로 우상(右像)은 왼손으로 시무외인을 취하고 오른손은 쌍구형의 보주를 받들고 있으며, 좌상(左像)은 오른손을 시무외인하고 왼손은 복대의 띠 주름을 쥐고 있다.
3등신 동자의 애리한 신체에 천진한 미소와 상호의 표현에서 순진무구한 모습을 엿볼 수 있으며, 단아한 묘사와 고부조의 세련된 기법에서 고불의 모습을 느낄 수 있다.
통일신라 또는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석가불(釋迦佛)과 다보불(多寶佛)의 병존불좌상(竝尊佛坐像)과도 연관성이 있는 귀중한 불상으로 한국불상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위의 자료는 전통사찰정보에서 가져온 글이며, 아울러 병립불상과 함께 발굴된 지장보살상도 모셔져 있지만 제를 준비하는 보살님 때문에 금당안에 들어가서 셔트를 누르지 못했다.
청주시 용암동 낙가리라는 마을 뒤에는 낙가산(洛迦山)이 있다. 이 산은 관음보살이 항상 머무른다는 ‘보타낙가산’을 이르는 것인데, 이러한 산 이름이 붙여진 것은 보살사의 창건과 관련이 있다.
법주사를 창건했던 의신조사(義信祖師)는 수행을 하면서 중생들을 교화할 새로운 도량을 찾고자 하였다. 그래서 지심으로 기도를 시작했는데 마침내 회향일이 다가오게 되었다. 회향을 앞둔 어느 날 기도를 하던 의신스님은 비몽사몽간에 선인(仙人)이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 선인은 “그대의 기도가 지극하니 좋은 인연이 있을 것이다. 지금 대문을 나가보면 한 노파가 있을 테니 그 노파에게 물어보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지는 것이었다.
선인의 말에 놀란 의신스님이 밖으로 나가보니 실제로 한 노파가 걸어가고 있었다. 이에 스님은 노파를 부르며 쫓아갔지만 노파는 불러도 돌아보지 않은 채 계속 걸어가고 있어, 스님과 노파의 거리는 전혀 좁혀지지 않았다. 뒤도 한번 돌아보지 않고 걸어가던 노파가 한참 후 한 장소에서 멈춰 섰는데, 스님이 다가가서 얼굴을 보니 그 노파는 관세음보살이었다.
깜짝 놀란 의신스님은 환희에 젖어 무릎을 꿇고 예배하며 새로운 도량을 일러달라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관세음보살은 “그대가 찾고 있는 성지가 바로 이곳”이라고 일러주었다. 의신스님은 어렵게 친견한 관세음보살이 발길을 돌리려는 것을 보자 조바심에 “보살님께서는 어디로 가시나이까?” 라고 물었다. 관음보살은 스님의 마음을 아시는 듯 “나 또한 이곳에 항상 머무르고 있을 것이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의신스님은 이곳에 절을 짓고 관세음보살이 일러준 곳이라 하여 절 이름을 ‘보살사’라 지었으며, 관세음보살이 항상 머무르는 곳이라 해서 산 이름을 ‘보타낙가산’이라 하였다.
극락보전 앞에 있는 조선시대 오층석탑으로 2층 탑신에 ‘강희계미(康熙癸未)’라는 조성연대를 나타낸 음각명문이 있어 1703년(숙종 29)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지대석 위에 3단으로 된 받침을 하고 그 위에 중판복엽의 복연화문이 화려하게 장식된 단층 기단, 초층 탑신의 각면에는 우주를 새겼으며, 가운데에 2개의 사각형과 내원(內圓)을 음각하고 그 안에 범자(梵字)를 음각하였다. 초층 옥개석은 1매석이고 층급받침은 2단으로 표현하였으며, 전각부는 반전되지 않아 둔중한 느낌을 준다.
2ㆍ3ㆍ4ㆍ5층의 탑신과 옥개석도 모두 1매석으로 구성되었고, 조각수법도 초층과 동일하다. 상륜부는 5층 옥개석과 같은 돌로 되었는데, 노반(露盤)이 생략된 복발(覆鉢)과 보륜(寶輪), 그리고 그 위에 연봉이 장식되었다. 성연대가 새겨져 있어 조선후기의 석탑을 연구하는데 있어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2008.08.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