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한지 26년만에 둘만의 명절을 보내다

안방 침대에서 죙일 잠옷패션으로 뒹글거리며 책읽다가 자다가 영화보다가 대충 먹다가를 반복함^^
우리는 결혼한지 26년만에 둘 만의 명절을 지내기로 굳은 결심을 했다. 우리의 결심은 5박 6일동안 빛을 발했다.
무쟈게 즐거웠던 명절인지라, 명절 후유증도 없었다.
이 날을 기록하고자, 글을쓴다. 우리 부부사에 있어서, 참으로 획을 긋는 역사일지라고 본다.
사마천이 사기를 쓰듯이 꼭 써야만 할 것 같아서 쓴다.
사실성(있는 그대로)과 도덕성(관습에 의문을 제기하는 정신) 그리고 진정성(개인의 즐거움이 얼마나 컸던지)을 삼등분하여 이러한 사적인 명절기록사를 후대에 남기노라. 우리 애들이여, 꼭 보시라^^ 너네들은 명절에 꼭 올 필요 없고, 필요한 때에 적절한 시기에 가족이 즐겁게 만나기를 바란다.
지난 2월 5일 금요일 부터 구정 휴가였다.
춘천에 가서 장을 보고 춘천에 사는 지인을 만나다. 속물사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오다.
오는 길에 춘천에서 유명하다는 '옛날통닭'집에서 7500 원짜리 통닭을 사서 차 안에서 기름범벅인 손으로 운전하는 남편에게도 부욱 뜯어서 주고, 나도 옆에서 폭풍흡입.
갑자기 지구 멸망후에 몇명 남은 이들의 삶을 그린 '더 로드'가 생각나기도 함. 맛은 있었다.
이웃 분이 마실 오라고 하셨는데, 너무 늦어 집으로 들어와버림.
전화드리니, 그래도 오라고 하시길래 그냥 우리집으로 오시라고, 매운 닭발 사왔다고 유혹함.
밤 11시까지 놀다가 가심. 콜라비를 먹으니 덜 매움. 나는 매운 것이 영 안 맞음. 눈물이 막 나더만.
속초 닭강정도 안 매운 맛 사는사람한테, 춘천 롯데마트의 매운 닭발은 고문이었다는.

*문유석의 '개인주의자 선언'
그 다음날, 6일 토요일.
눈이 펑펑 쏟아진다. 눈 치우고 책 읽고 빈둥빈둥
문유석의 '개인주의자 선언' , 개인주의자 좋구나, 좋아^^
벌써 8쇄를 찍었다니, 집단주의가 득세하여 몰개성, 동질화로 치닫던 이 땅에 드디어 개인주의자의 씨앗이 퍼져나가는갑다. 왜 이리 신나노! 80쇄 찍어서, 집단주의 쫌 고만 물러가시기를 기원하노라.
저녁에 이웃 분이 떡국 먹으러 오라신다. 떡국 먹고 놀다가 옴. '개인주의자 선언' 책을 읽어보시라고 빌려드림.
천사아줌마네, 그동안 따뜻한 밥 해주셔서 감사하다고 석류 한 박스 사들고 인사드리고 놀다 옴.
부녀회 놀러가시라고 채근하고 옴.

*소포클레스, 열린연단 강연
그 다음날, 7일 일요일.
남편이랑 둘이서 책쓰기 목차에 대한 대토론.
남편의 지적 허세 쩐 큰 그림의 책쓰기를 몰아내느라 심신이 지치고, 서로 삐짐.
그리스 비극을 쓴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과 안티고네'를 열린연단 강연으로 듣고, 바로 책들고 읽음.
와우, 그 대사에 놀라고 놀람. 그 비유와 문체를 금방 따라하고 싶어짐.
서울 사는 애들한테 카톡으로 문자 보내면서 흉내내어 보니, 애들이 웃어댐.
이한의 '삶은 왜 의미가 있는가' 를 읽으며 속물사회 비판에 대한 이론적인 토대를 마련하면서.
속물의 특성과 그들에 대한 대처법을 읽다. 즉, 그들과 어떻게 공존할 것인가. 내 안의 속물성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등등..내면의 성찰로도 이어짐.

*이한의 '학교를 넘어서'
이한의 '학교를 넘어서'와 매트 헌이 엮은 '학교를 버려라'를 읽다.
남편이 책쓰기에서 나의 편집을 받아들이다. 디테일한 현장이 있는, 정보가 있는 홈스쿨링 책으로 나가기로 다시 합의하다. 대타협을 했다. 둘 다 죙일 책읽기 모드로 갔더니 불협화음이 잡힌 듯 하다.
이것은 모두 빈둥거림의 힘에서 나온 일이다! 명절때 아무런 일정도 잡지 않고 둘이서 거의 합숙빈둥훈련을 정말 잘 한듯 싶다.

*클라우드 아틀라스
그 다음 날, 8일 , 월요일 두둥 드디어 까치까치 설날.
양쪽 집안에 구정맞이 대문안 인사를 드리고. 서울살이하는 애들한테도 그들의 젊은 고생을 격려하고.
어제의 책쓰기 대타협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무쟈게 머리 써야 한다는 영화, 워쇼스키 감독의 '클라우드 아틀라스'를 보다. 흠, 구름지도 맞네. 구름을 봐라, 언제 어떻게 얽히고 설켜서 무엇을 뿌려댈지 모르는 것이 구름들의 운명이니. 우연인지, 필연인지, 알 수 없는 듯.
그러나, 인간의 운명이란 내적인,기압(氣壓)이라고 볼 수도 있는 개인의 성정과 외적인 조건들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 아닌가. 그랴, 늘 움직이는 것이 인간의 삶이지. 나는 어떤 구름인지? 어떤 다른 구름과 만나고자 하는 것인지?
나를 만나고자 부딪혀 오는 또 다른 구름들과도 이제는 전략적으로 만나주리라. 이제는 두렵지 않도다. 나를 잃지 않고, 나를 다치지 않고 만날 수 있는 구름이 될지니.
(어째 소포클레스 문체를 흉내내는 듯 ㅋㅋ)
'클라우드 아틀라스' 리뷰를 드리 파다가, 다시 남편이랑 둘이서 토론..
다시 영화를 보고, 또 대토론. 무쟈게 머리 아프지만, 캐릭터 지도를 봐야 하는. 누가 환생한건지, 단순한 분장쇼인지 또 대토론. 빈둥거림은 머리쓰는 놀이를 하고 싶어지게 한다. 이런 빈둥합숙훈련 넘 좋다.
역시, 문화는 빈둥거림에서 싹트는도다! 특히나, 명절에 세시간 짜리 영화를 두 번 연달아 보며 놀 수 있다니. 이보다 특별히 좋은 일이 있으랴?

눈을 이틀만에 설렁설렁 치움, 하루는 진입로, 하루는 마당^^
*소포클레스의 트라키스 여인들
그 다음날, 9일 화요일
며칠을 죙일 잠옷바람에, 책에, 낮잠에, 밥은 대충 먹고. 영화보고...신나게 놀고 있는 중.
저녁 먹으러 오라고 이웃분이 유혹을 한다. 오랜만에 사람 보는 기분으로 가서 엘에이 갈비에 고구마순 붕어지지미에. 내가 좋아하는 그 집 갓김치를 폭풍흡입하고 맥주 한 잔 하고나니. 그 집 너른 거실을 계속 걸어야만 했으니. 아, 나의 위장은 왜 이리도 왜소하단 말인가? 위대해지고 싶은데 ㅠ
나의 위를 한탄하며, 집에 와서 소포클레스의 '트라키스 여인들'을 읽다. 헤라클레스, 그 바람둥이에 영웅적으로 성질 더러운 남편과 사는 가련한 여인 데이아네이라. 한 담요를 둘이서 나눠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ㅠ
헤라클레스가 또 젊은 여인을 데리고 일년 반만에 집에 돌아오면서 일어나는 비극. 2500 년전의 여인중에는 이렇게 두려움많고 걱정많은 순종적인 캐릭터도 있구나.
용감하고 여성들의 연대를 할 줄 아는 아르테미스와 전략과 전술이 뛰어난 지혜의 여신 아테나, 든든한 울타리를 만들 줄 아는 화로의 여신 헤스티아 같은 처녀 여신이 왜 매력적이고 아름다운지 알겠구만.
데이아네이라의 친구들이 이들이였다면 그녀에게 그런 비극적인 결말이 일어나지는 않았을텐데.
상황을 잘 이해하고, 아들과 함께 통치를 할 수도 있었을텐데 말이다.
'클라우드 아틀라스'의 복제인간 손미가 생각나기도 하네. 세상을 다르게 보는 눈을 가진 사람이 데이아네이라 곁에 있었더라면, 그러한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텐데..손미 옆에는 유나와 정해주가 있었다는. 흠, 영화와 책이 범벅이 되는 며칠동안 빈둥거린 뇌의 화학작용이 일어나는 글쓰기를 하고 있는 오늘은, 10일 수요일.
오늘은 여동생네 가족과 딸내미가 와서 일박 이일 놀고 간다고 하니. 놀아야겠다^^
잘 놀 수 있을지, 모르겠네 ㅎ
첫댓글 정말 알찬 휴가를 보냈네요...^^ 저도 이렇게 보낼 수 있도록 꼭 변화하겠습니다 ㅠ
휴가를 정말 알차게 보내셨군요...
저도 나름 알차게 보냈다고 생각을 했는데 아줌마, 아저씨의 휴가에 비하면 정말 안 알찬휴가였네요..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