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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바른 비평’은 ‘정말 그러한가?’ 자세에서 나옵니다. ③>을 쓰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양무리 마을}에서 ‘순간 중생 시 회심이라는 청교도 신학자들 중생론’을 두고 여전히 “해괴한 이론”으로 주장하시는 윤영상 목사님 때문에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그것도 출처도 밝히지 않은 채 앞뒤 자르기 특기를 살려, ‘청교도 신학자들 준비(예비) 은혜’에 대한 조엘 비키 목사님 강의를 들으신 Paul Han 목사님,
Paul Han <조엘 비키 ‘예비 은총’에 대해>
http://paul-prodeo.blogspot.kr/2012/12/blog-post_7541.html
에서 7번 “비키가 생각하는 ‘예비 은총’ 개념의 긍정 측면들은 이렇다. ···(중략) ··· 성령의 일반 사역을 강조하고”는 자르고, 윤영상 목사님 자기 입맛에 맞는 8번만 골라서 말입니다.
제가 {뉴스앤조이}에서 ‘개혁 교회 성도의 견인 교리’를 부정하는 박창진 목사와 2009년 가을부터 토론을 나눌 때였습니다. 인터넷 예의 없이 말 짧은 박창진 목사님을 보면서 ‘이런 사람을 어떻게 목사라고 할 수 있는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인터넷 검색으로 박창진 목사 정보를 알아봤습니다. 예장 고신 목사 명부에서 제명당한 목사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리고 ‘박창진 목사님 논리 오류를 끄집어내어 상대해 주다 보니, 박창진 목사님 논리를 발전하게 해주는 역효과가 있구나.’ 생각하고 있던 차에 그 때부터 박창진 씨와 토론하는 것을 그만뒀습니다.
2012년 여름 {양무리 마을} 연중론 비평 토론 때였습니다. ‘한국 교회 연중론 목사님들 영적 상태는 이 땅 위 예수님을 신성을 부정한 이단 박창진 씨보다 더욱더 악하구나.’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박창진 씨는 {뉴스앤조이}에서 저와 토론하면서 논리 발전이라도 있었는데, 한국 교회 연중론 목사님들은 논리 발전이 없고 앞뒤 자르기 억지 왜곡 특기만 더욱더 발전해 답답합니다. 답답해서 <‘바른 비평’은 ‘정말 그러한가?’ 자세에서 나옵니다. ③>을 쓸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른 비평’은 ‘정말 그러한가?’ 자세에서 나옵니다. ③>을 쓰기 전에 지난 2월 말에 {페북} 제 담벼락에서 <연중론의 거꾸로 독해법> 댓글란에서 손성은 목사님과 토론하면서 썼던 댓글들 끝 부분을 옮깁니다.
<저에게 “논점을 흐리지 마십시오.” 하신 손성은 목사님, ①>은 이전에 {개혁주의 마을}에 올린 [‘손성은 목사님 “존 머레이 중생론은 혼란스런 중생론이다.”는 주장’에 대해 ②]에 있는 글로서 반복되는 글입니다. 제가 ‘손성은 목사님과 강릉예명 목사님 부산대학교 심리학과 시절’을 언급한 <저에게 “논점을 흐리지 마십시오.” 하신 손성은 목사님, ②>를 마지막으로, 손성은 목사님은 제 예상대로 {페북}에서 저를 차단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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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성은: <박채동 님에게 씁니다.>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제가 제시한 점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도 하지 않은 채로 님은 얼토당토 않는 비판이나 질문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논점을 흐리지 마십시오. 제가 응답하지 않는다고 해서 님의 견해나 비판이 얼마나 논점을 흐리는 일인지 아는 사람은 알 것입니다.
좁은 의미의 중생은 “immediately”하게 넓은 의미의 중생은 “mediately”하게 되는 것이라는 후크마 교수 설명만이라도 진지하게 숙고해 보면, 어떤 비유로 중생을 설명해야 할지 명명백백해질 것입니다.
2월 27일 오전 7:08
박채동: <저에게 “논점을 흐리지 마십시오.” 하신 손성은 목사님, ①>
제가 <“존 머레이 목사 중생론은 혼란스런 중생론이다.”는 손성은 목사님 주장에 대한 답변입니다. ①~⑥>으로 손성은 목사님 주장에 대해 설명해 드렸습니다. 그럼에도 조재열 전도사님에게 쓰신 댓글에서 여전히 “존 머리 교수 ‘부르심’ 정의가 모순된다.”고 하셨습니다. 제 답변 <“존 머레이 목사 중생론은 혼란스런 중생론이다.”는 손성은 목사님 주장에 대한 답변입니다. ①~⑥> 전체를 읽으셨습니까?
현 시점에서는 굳이 이런 이야기 쓰고 싶지 않습니다만, ‘통전(종합, 조직) 사고를 하지 못하는 이단들 특징 하나는 앞뒤문맥 무시한 채 자기들 교리에 맞춰 얼른 눈에 띄는 구절만, 보고 싶은 구절만 내세워 앵무새와 같이 그 구절만 강조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진리 문제에서는 독해력과 논리력이 뛰어나신 한국 교회 연중론 목사님들 역시 중생론에서는 연중론에 맞춰 앞뒤문맥 무시한 채 얼른 눈에 띄는 구절만, 보고 싶은 구절만 내세워 앵무새와 같이 그 구절만 강조하십니다. 이를 ‘임진년 여름 {양무리 마을} 연중론 비평 윤영상 목사님과 노승수 목사님’에 이어 또 ‘존 머레이 목사님 {조직신학} [부르심]과 [중생]에 대한 글을 가지고 손성은 목사님’이 여실히 보여 주셨습니다.
제가 <“존 머레이 목사 중생론은 혼란스런 중생론이다.”는 손성은 목사님 주장에 대한 답변입니다. ⑥>에서 ‘에드윈 팔머 {칼빈주의 5 대 교리}’ [제1장: 완전 타락]에 적힌 글까지 인용해 드렸습니다. 이 점에서 질문 드립니다. 먼저 제가 인용한 에드윈 팔머 목사님 글 첫째문단을 다시 적습니다.
≪알미니안주의자는 중생치 못한 자를 이층 창문에서 뛰어내려 갈빗대 3 개가 부러지고 다리가 상하기는 했지만 아직도 살아있는 자로 비유한다. 인간은 자기가 심한 상처를 입었음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의사를 필요로 한다. 요컨대 인간은 지나가는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거나 자기 몸을 질질 끌고 가서 의사를 부르기 위해서 전화를 걸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가 완전해지고 완쾌되기를 바라고 있다고 한다.≫
이 글 “의사”를 ‘유일한 영혼의 의사이신 성 삼위 하나님’으로 본다면, 이 글에서 ‘부름, calling, 소명’의 주체는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십니까? 아니면, “의사를 부르기 위해서 전화를 걸 수 있”는 “중생치 못한 자”입니까?
알미니안 신학은 중생에서 ‘신인협동설’을 주장합니다. ‘≪ ≫’ 속 다음 글은 ‘존 머레이 {조직신학}’ 176쪽에서 옮겨오는 글입니다. [제15장: 부르심]에 있는 글입니다. 피터 마스터스 목사를 ‘절대 진리’로 여기시는 손성은 목사님이야말로 ‘존 머레이 오류를 끄집어내기 위해 존 머레이 글들을 읽을 때 앞뒤문맥 무시 “비판을 위한 비판”을 위해 읽는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 주는 글입니다.
≪부르심이 하나님의 행위요 하나님만의 행위라는 사실은 실제로 향유되는 구원의 개시에서 ‘신적 신단세설, monergism : 신인협동설의 반대 개념’을 우리에게 각인한다. 우리는 우리를 구원의 영역 안으로 들어오게 하시는 하나님의 행위로 구속의 참여자가 되고, 우리의 태도와 반응 같은, 부르심에 따른 우리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변화들은 하나님의 주권과 권능 있는 사역으로 우리가 영입된 영역 안에서 역사하는 구원 능력들의 결과다. 예정의 목적이 효력을 발휘하기 시작하는 것으로서 부르심은 이 점에서 예정 자체의 모범을 좇아 ‘신적 신단세설’에 속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만의 것이다.≫
2월 27일 오후 5:47
박채동: <저에게 “논점을 흐리지 마십시오.” 하신 손성은 목사님, ②>
“비판을 위한 비판”이라는 말이 나와, 논점을 또 흐려 봅니다. 강릉예명 목사님 제안으로 {양무리 마을}에 {김성수 목사 신학 알아보기} 게시판이 생긴 뒤인 2011년 12월이었습니다. 손성은 목사님은 (故) ‘김성수 목사 신학’을 비평하시는 강릉예명 목사님을 두고 “이러한 강릉예명 님 글에서 나타나는 태도는, 의심의 해석학이라고 알려져 있는 현대 세속적인 철학에 물든 해석학적 태도입니다. 김성수 목사가 말하는 것 자체를 읽으려고 하기보다는 일단 의심해 보고 그 의심에 따라서 예단하는 것입니다.”라는 비평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의심의 해석학” 문제는 비화悲話돼 강릉예명 목사님께서 {양무리 마을}을 탈퇴하시는 일이 있게 됩니다.
손성은 목사님이 “의심의 해석학”이라는 말로 강릉예명 목사님을 치실 때, 제가 심리학과 출신은 아닙니다만, 손성은 목사님 심리를 두고 생각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 생각은 ‘강릉예명 목사님과 손성은 목사님 부산대학교 심리학과 시절에 두 분이 무슨 일이 있으셨나? 강릉예명 목사님은 손성은 목사님을 사랑으로 대하시는데, 손성은 목사님은 강릉예명 목사님에게 콤플렉스가 있으시나, 지난 추석 목사의 권위 토론 때부터 사랑으로 대하시지 않는구나.’였습니다.
그 뒤 강릉예명 목사님 {양무리 마을} 탈퇴 무렵이었습니다. ‘경주에서 손성은 목사님을 만나신 강릉예명 목사님께서 손성은 목사님에게 {김성수 목사 신학 알아보기} 게시판과 {연속적인 중생론 알아보기} 게시판을 {양무리 마을}에 개설할 것을 제안하셨다.’는 사실을 안 뒤였습니다. 저는 ‘아, 강릉예명 목사님으로 하여금 연중론을 비평하지 못하게 하시려고 “의심의 해석학”이라는 말로 강릉예명 목사님을 먼저 치셨구나. 기를 죽이셨구나.’라는 추측을 했습니다.
{김성수 목사 신학 알아보기} 게시판······. 저는 판단 자료가 부족할 때 비평에 뛰어들지 않습니다. 판단 자료가 부족한 채 하는 비평은 ‘폄론’이기 때문입니다. ‘비판을 위한 비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김성수 목사 신학에 대해 모르는 저는 {김성수 목사 신학 알아보기} 게시판을 지켜만 봤습니다.
그리고 판단 자료가 생기자 {김성수 목사 신학 알아보기}에 첫글을 올렸습니다. {양무리 마을}에서 성경의 인물들 회심을 연중론에 맞춰 해석하는 이른바 “연속적인 중생관 실전 예제”가 끝난 뒤인 2012년 1월 12일이었습니다. 그 글은 ‘헤르만 바빙크 <성도는 땅을 다스리는 왕이다.>’였습니다. ‘헤르만 바빙크 {신앙의 확신} 조주석 역 (서울: 나침반, 1987)’ 93쪽~95쪽(끝쪽)에서 옮긴 글이었습니다.
제가 첫글로 이 글을 올린 까닭이 있습니다. ‘김성수 목사 신학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으시는 {양무리 마을} 운영자 바보새 노승수 목사님’을 ‘김성수 목사 신학 비평 토론’에 불러내려는 의도 때문이었습니다. 즉, ‘{신앙의 확신} 역자 조주석 목사님은 노승수 목사님 합동신학원 수학 시절 합동신학원 출판부 국장이셨는데, 그렇다면 조주석 목사님과 노승수 목사님이 친하시라. 만약 그렇다면 노승수 목사님께서 김성수 목사 신학에 관심을 드러내시리라.’는 추측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제 예상대로 노승수 목사님께서 ‘김성수 목사 신학 비평 토론’에 함께 하셨습니다.
2월 27일 오후 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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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의사}에서 피터 마스터스 목사님은 ‘가정법에 따른 추측’으로도 존 머레이 목사님 중생론을 이단시하십니다. 그런데 {양무리 마을} [손 목사의 회심 이야기]를 보면, 손성은 목사님 부산대학교 심리학과 시절은 방황의 시절이었습니다. 이 방황의 시절에 후배 강릉예명 목사님(1955년 양띠)과 선배 손성은 목사님(1958년 개띠)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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