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후(王煦)는 초명(初名)이 권재(權載)이고 몽고 이름은 탈환(脫歡, 토군)이며 정승 권부(權溥)의 아들이다. 그의 형 권준(權準)이 충선왕(忠宣王)에게 신임받았는데, 왕이 〈권준에게〉 형제에 대해서 묻다가 권재의 이름을 듣고는 기뻐하며 만나보기도 전에 낭장(郞將)으로 임명하고 얼마 뒤 삼사판관(三司判官)으로 옮겼다. 왕이 원(元)에 있을 때 그를 불러서 한번 보고는 〈자신의〉 아들로 삼고 ‘왕후’라는 성명을 하사하여 〈왕실의〉 적(籍)에 넣었다. 왕이 환국하자 출입할 때마다 같은 수레에 태웠으며, 사복부정(司僕副正)을 거쳐 사헌집의(司憲執義)로 임명하였다. 충숙왕(忠肅王) 원년(1314)에 승진하여 삼중대광 계림부원군(三重大匡 鷄林府院君)이 되었고, 충숙왕 3년에 부원대군(府院大君)을 더하니 당시 사람들이 왕의 동생[王弟]이라고 불렀다.
〈왕후가〉 나이 20살 남짓하였을 때, 충선왕(忠宣王)이 원(元)으로 돌아가서 〈그를〉 황태자의 속고적(速古赤, 시구르치)으로 삼고 계림군공(鷄林君公)으로 봉작(封爵)하기를 아뢰었고, 대도(大都)안에 있는 전택(田宅)을 주었다. 〈충숙왕〉 7년(1321)에 환관 백안독고사(伯顔禿古思, 바얀투구스)가 충선왕을 음해하였으므로 티벳[吐藩]으로 유배 보냈는데 왕후가 대신 가고자 하였다. 황제가 〈이를〉 듣고서 그를 가엾게 여겼으므로 백안독고사도 해를 끼치지 못하였다. 왕후가 문객(門客) 2~3명과 함께 티벳으로 가려 하는데, 길에서 서쪽으로 가는 사신을 만나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신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나는 조서를 받들어 왕을 맞이하러 왔습니다. 나는 제로(諸路)를 순시해야하기 때문에 늦어질까 걱정되니 공이 먼저 가서 왕에게 보고하시오.”라고 하면서 인하여 역마 3기(騎)를 주었다. 왕후가 쉴 새 없이 달려[兼行] 임조(臨洮)에 도착하여 왕을 뵈었는데, 조금 있으니 사신을 마침 만나게 되어 드디어 〈왕을〉 모시고 경사(京師)에 도착하였다. 충선왕이 훙서하자 상복[衰麻]을 입고 시신을 받들고 귀국하였다. 장례를 치른 후에는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사사로이 능에서 제사를 지냈는데, 죽을 때까지 계속하였다.
충숙왕(忠肅王)이 원에 머무르자 심왕(瀋王)이 마음속으로 왕위를 엿보려는 뜻[覬覦]을 품고 온갖 방법으로 계책을 꾀하는데 왕은 어찌 할 바를 몰랐으며 좌우(左右) 사람들이 배반하는 자가 많았다. 〈그러나〉 왕후는 홀로 의리로써 스스로 지키니 처음부터 끝까지 〈그를〉 헐뜯는 말이 없었다. 충선왕이 훙서한 뒤로부터 거의 20년이 되도록 시호가 없었으므로 왕후가 원에 가서 시호를 요청하고 아울러 충숙왕의 시호도 요청하였다. 〈그러나〉 정권을 잡은 자가 도와주지 않았으므로 왕후는 스스로 그것을 자기의 책임이라 여기고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비용을 써서 끝내 요청한 것을 달성하였다.
충목왕 원년(1345)에 모친상을 당하였으나 기복(起復)되어 첨의우정승(僉議右政丞)이 되었다. 〈아버지〉 권부가 오히려 근심이 없어[無恙] 두세 번 강권하여 부득이 일을 보게 되었는데, 먼저 선법(選法)으로 전리사(典理司)와 군부사(軍簿司)에 귀속시켰다. 구제(舊制)에는 관리의 녹봉이 적었으므로 경기(京畿)의 토지를 사람마다 약간 무(畝)씩 하사하고 녹과(祿科)라고 불렀다. 〈그런데〉 권귀(權貴)들이 그것을 거의 다 빼앗아갔으며, 〈그 중에서도〉 여러 영부(領府)가 더욱 그 피해를 받았다. 왕후가 명령을 내려 〈녹과전을〉 되돌려주도록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간악하고 탐욕스러운 자들에게 미움 받아 파직되고 김영후(金永煦)가 그를 대신하도록 하였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서운해 하고 원망하였다. 이듬해 권부가 죽고 한 달이 지나자 황제가 왕후에게 명하여 상복을 벗고 원으로 들어오라고 하였다.
또 이듬해에 왕후가 좌정승(左政丞) 김영돈(金永旽)과 함께 황제의 명령을 받들고 귀국하여 왕에게 보고하기를, “황제께서 선왕이 덕을 잃은 것을 물으셨는데, 신들이 아뢰기를, ‘선왕이 처음에는 이와 같지 않았는데, 단지 소인배들이 〈선왕을 나쁜 길로〉 인도했을 따름입니다. 그 무리들이 아직도 남아있고 없어지지 않았으므로 또한 지금의 임금도 망치려고 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황제께서 옳다고 여기시고 신들에게 칙서를 내리시기를, ‘너는 가서 그들을 다스려라.’라고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태비(太妃)가 이를 듣고는 눈물을 흘리면서 술을 내려 위로하였다. 김영돈이 황제의 밀지(密旨)를 전하였는데 〈그 밀지에〉 말하기를, “왕후를 복직시켜 정승으로 삼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당시 우정승(右政丞) 노책(盧頙)이 옆에 있었는데 부끄러워 얼굴을 붉히며 물러가더니 병을 핑계 대고 나오지 않았다. 이에 정치도감(整治都監)을 설치하고, 왕후와 김영돈, 찬성사(贊成事) 안축(安軸), 판밀직(判密直) 김광철(金光徹)을 판사(判事)로, 정연(鄭珚)과 김규(金㺩) 등을 속관으로 삼았으며, 속관들을 나누어 파견하여 각 도(道)의 토지를 측량하게 하고 〈이들〉 모두에게 안렴사(安廉使)를 겸직하게 하였다.
김규가 양광도(楊廣道)를 맡았는데, 이천현(利川縣)의 이속(吏屬)이 일찍이 공전(公田)을 정승 채하중(蔡河中)과 이문(理問) 윤계종(尹繼宗)에게 뇌물로 바쳤었는데 〈발각되자〉 김규가 〈그〉 이속의 귀를 잘라서 도내(道內)에 조리돌린 후 도감(都監)에 첩문(牒文)으로 보고하였다. 〈그런데〉 녹사(錄事) 안길상(安吉祥)이 윤계종의 옛 은혜를 생각해서 보고하지 않자, 왕후와 김영돈이 화가 나서 그의 뺨을 때리고 북을 울리며 쫓아내었다. 원에서는 사신을 파견하여 왕후와 김영돈에게 옷과 술 및 교초(交鈔)를 하사하여 정치(整治)를 독려하였다.
왕후 등은 기황후(奇皇后)의 집안 동생[族弟]인 기삼만(奇三萬)이 권세를 믿고 남의 토지를 빼앗고 불법을 자행하므로 장형에 처하고 순군옥(巡軍獄)에 하옥하였는데 〈기삼만이〉 죽어버렸다. 정동행성 이문소(征東行省 理問所)에서 정치도감(整治都監)의 관리인 좌랑(佐郞) 서호(徐浩)와 교감(校勘) 전녹생(田祿生)을 신문하자 왕후와 김영돈이 첨의부(僉議府)에 글을 올려 말하기를, “우리들은 직접 황제의 명을 받들어서 우리나라를 정치(整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정동행성이문소에서 기삼만의 죽음을 정치도감(整治都監)의 허물로 돌려 서호와 전녹생을 가두었고, 이문(理問) 하유원(河有源)은 사적인 감정을 품고 제멋대로 신문해서 어떻게든 거짓 자백을 받으려고 합니다. 지금부터는 정치(整治)할 수 없으니 중서성(中書省)에 전달하여 주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얼마 후 왕후와 김영돈이 황제에게 직접 아뢰고자 원으로 갔는데, 이문소에서 누차 사람을 보내어 그들을 뒤쫓게 하고 도감의 관리들을 모두 가두었다. 〈그런데〉 마침 황제가 중서성 우사도사(右司都事)인 올리불화(兀理不花, 우리부카) 등을 보내어 왕과 왕후, 김영돈에게 옷과 술을 하사하여서 정치에 대한 상을 주었으므로 왕후와 김영돈이 동선역(洞仙驛)에서 그를 만나 〈같이〉 돌아왔다. 올리불화가 황제의 명에 따라 정치 사업이 어떠한지 물었는데, 이문소가 이 말을 듣고는 서호 등을 석방하였으며, 또 서호가 거짓 자복하였으므로 수감되었던 정치도감관 오경(吳璟)·진영서(陳永緖)·안극인(安克仁)·이원구(李元具)·전성안(全成安)을 이어서 석방하였다. 〈그러나〉 다시 무고하여 죄를 가하려고 하였으나 자복하지 않자 모두 하옥시켰다.
원에서는 기삼만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공부낭중(工部郞中) 아로(阿魯, 아루)와 형부낭중(刑部郞中) 왕호유(王湖劉) 등을 보내 와서 그들을 국문하고, 다시 직성사인(直省舍人) 승가노(僧家奴)를 보내어 정치관(整治官) 백문보(白文寶) 등 수십 명을 장형에 처했다. 오직 왕후와 안축(安軸)만이 황제의 명으로 용서받았으며 김광철(金光轍)과 이원구(李元具)는 병으로 장형을 면했다. 〈하지만〉 황제가 이어서 새서(璽書)를 내려서 다시 정치도감을 설치하게 하고 왕후를 판사(判事)로 임명하였다. 이 때 김영돈이 자기 의견을 고집하였는데, 왕후가 그와 다투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자 황제가 그를 책망한 후 모든 일을 왕후에게 맡기고, 곧이어 영도첨의사사(領都僉議司事)로 삼았다.
〈충목왕〉 4년(1348)에 〈왕후가〉 다시 정승(政丞)이 되었다. 〈당시〉 개경[京城]에 크게 기근이 들었으며, 양광도(楊廣道)와 서해도(西海道)가 더욱 심하였다. 왕후가 창고를 열어 구휼하여서 〈목숨을〉 보전하고 살아난 사람들이 매우 많았다. 충목왕(忠穆王)이 훙서(薨逝)하자 덕녕공주(德寧公主)가 왕후와 부원군(府院君) 기철(奇轍)에게 명하여 정동행성(征東行省)의 일을 대신 하게 하였다. 왕후 등이 이제현(李齊賢)을 원으로 보내어 표문(表文)을 올려 다음 왕을 세워줄 것을 청하였다. 충정왕(忠定王) 원년(1349)에 〈왕후가〉 원으로 가서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고 귀국하던 길에 창의현(昌義縣)에 이르러 병으로 죽었으며, 요동부(遼東部)의 사신이 그 시신을 전달받아서 운구하여 돌아오니, 나이가 54살이었다.
〈왕후는〉 사람됨이 강직하고 장중하였으며 얼굴은 크고 몸은 말랐으나, 바라보면 의연하였으니, 평생 동안 망언을 하지 않았으며, 제법 글을 읽어서 대의에 통하였으므로 능히 선현(先賢)의 일을 말할 수 있었다. 손님 접대하는 것을 좋아해서 비록 하찮은 선비라도 반드시 예를 다하여 대우하였다. 두 번 재상이 되었는데 〈나라를〉 이롭게 하고 해로운 것을 제거하는 것[興利除害]을 마음으로 여겼다. 〈왕후가〉 죽자 노책(盧頙)은 〈그가〉 정치도감에 있을 때 자기의 일을 조사해서 치죄했던 것[究治]에 원한을 품고 관청에서 장사를 치르는 것을 저지하였으며, 또 운구하는 도중에 있는 여러 역에 명령하여 운구한 시신을 정청(正廳)에 두는 것을 금지하였으나 역리(驛吏)들은 영구를 바라보고는 부르짖으며 울며 맞아들여 부모처럼 제사를 지냈다.
공민왕(恭愍王) 원년(1352)에 교서(敎書)를 내려 말하기를, “내가 10년 동안 원에 있을 때 종신(從臣)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한 마음으로 공력을 바친 자들 〈중에서〉 특히 뛰어난 이들이 자못 이미 관상(官賞)을 받았다. 정승 왕후는 불행하게도 먼저 죽었으니 내가 매우 안타깝게 여기노라. 마땅히 시호를 높여 추증하고 그의 자손을 녹용(錄用)하라.”라고 하였다. 시호는 정헌(正獻)이며, 뒤에 공민왕의 묘정(廟廷)에 배향하였다. 아들은 왕중귀(王重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