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정부에 ‘위안부’ 배상 책임” 재확인한 역사적 판결
일본 정부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유족들에게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음을 재확인하는 법원 판결이 나왔다. 2021년 서울중앙지법에서 일본 정부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한 첫 판결이 나온 데 이어, 서울고등법원이 같은 취지의 판결을 내린 것이다. 전쟁 시기 ‘군 위안부’와 같은 반인도적 범죄를 저지른 '국가'는 '국가'라할지라도 그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원칙을 천명한 것으로, 역사적·법적 의미가 큰 판결이다( 2023년 11월 23일).
소설가 조정래의 『아리랑』 마지막 권 12권에서 종군위안부들의 한맺힌 고통의 행로를 간략 요약해봅니다.
<종군 위안부들의 행로>
“돈벌이 좋은 공장에 취직하러 가는 거여. 남자들이 다 군대 나갔응께 여자들이 일허는 것이고, 집안식구들 살리는 길이여. 우선 이 선도금 20원만해도 식구들이 세 끼니 밥 척척 먹고 살 것이여. 고것만이간디? 거기 가면 다 멕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주면서 한 달 벌이가 30원이란 말이여. 1년이면 360원, 2년이면 720원이여. 딱 2년 만에 떼부자가 되는 것이여.”
복실이는 어머니 손을 꼭 마주 잡았다.
“엄니, 나 인자 열일곱인 게 2년 갔다 와도 열아홉 밖에 안돼요, 나~가 돈 많이 벌어갖고 와서 논도 사고, 집도 사고, 엄니 비단옷도 해디리고, 금반지에 금비녀도 혀드리고 호강시킬라요. 글고, 엄니 나 없다고 심심해허덜 말어. 오빠 징용간 지 발써 1년 되았응께 인자 1년만 더 참으면 오덜 안 혀?”
월전댁은 눈물이 쏟아지려고 해 복실이를 와락 끌어안았다.
“내일 떠나니까... 나 엄니 젖 맨지고 잘라네....”
다음날
“그려, 그려. 몸 성하고, 타관살이잉게 몸 더 정히 간수히야 혀.”
“야아, 엄니도 무병허니......”
복실이와 순임이는 버스를 타고 전주의 어느 여인숙으로 갔다. 그 방에는 다른 여자들이 쪼그려 앉아 있어 깜짝 놀랐다. 두 남자의 감시 아래 겨우 변소만 오갈 수 있고, 밥도 하루 두 끼 시켜다 주는 것만 먹었다 방이 좁아 일곱 명이 누울 수가 없어서 웅크리고 앉아서 잤다. 서로 가만가만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임실, 장수, 진안에서 온 걸 알았다. 이틀 지나자 세 처녀가 또 들어왔다. 그런데 한 처녀는 집에 보내달라며 울다가 조선 남자에게 사정없이 따귀를 얻어맞았다. 그 처녀는 이모 집에 심부름 다녀오다가 순사에게 붙들려 왔다. 선도금은 커녕 아무도 모르게 잡혀온 처녀들이 절반 가까웠는데 이제 와서 따져봐야 걸핏하면 주먹질을 해서 모두 겁에 질려 있었다.
다음날 여인숙에서 나가 기차를 타고 내린 곳은 부산이었다. 해변가의 수용소로 들어갔는데 밥 때가 되자 일본군들이 주먹밥 한 덩어리와 단무지 한 쪽씩 나눠주었다.
7일 만에 수용소에서 80명의 처녀들이 트럭을 타고 부두로 갔다. 50명은 오사카, 30명은 시모노세키로 가는 배를 탔다.
오사카에 도착해서는 군부대의 군인 막사에 들어갔다. 옆의 막사에는 50명가량의 처녀들이 먼저 와 있었다. 일본에 왔는데도 공장에 보내줄 낌새는 전혀 보이지 않고 20일이나 지나갔다. 그때 모두 트럭에 실려 가 배에 태우더니 어딘지 모르는 곳을 향해 배가 움직였다.
배는 멈출 줄 모르고 며칠이고 갔다. 마침내 배가 정박하고 처녀들을 다 밖으로 끌어냈다. 나중에야 그곳이 오키나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시 트럭에 태워져 도착한 곳은 군부대였는데 해거름이 되자 주먹밥을 나눠주며 처녀들의 젖가슴을 만지고 쥐어 잡으며 통쾌하게 웃어댔다.
날이 어두워지자 여러 날 배 타고 오느라 지칠대로 지쳐 잠이 들었다. 그런데 문이 벌컥 열리면서 군인들이 쏟아져 들어와 침상으로 뛰어올랐다. 처녀들은 소스라쳐 일어나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다. 그러나 처녀들은 삽시간에 붙들려, 처녀 하나씩 붙든 군인들은 무작정 바닥에 넘어뜨리고 눕혔다. 처녀들은 몸부림치고 발버둥치며 떠다밀고 비명을 질렀으나 군인들은 욕설과 함께 따귀를 치며 처녀들의 원피스를 위로 걷어 올리고, 군인들의 바지는 발목에 걸려 있었다.
군인들이 바지를 끌어 올리며 하나씩 나가기 시작했다. 잠시 후 군인들이 또 쏟아져 들어왔다. 처녀들은 다시 몸부림치고 발버둥 치며 비명을 질렀다. 또 욕설이 터지며 따귀 치는 소리들이 질퍽거렸다. 군인들이 바지를 끌어올리며 나갔다. 다 나갔나 싶자 또 군인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나가고 또 쏟아져 들어왔다. 또또 나갔다 또또 쏟아져 들어왔다. 다섯 차례 되풀이된 다음에 군인들은 더 들어오지 않았다. 20명 처녀에게 다섯 명씩, 100명의 일본군이 거쳐 간 것이었다.
처녀들은 6일 동안 그 막사에 갇혀 해만 지면 그 일을 당했다. 적으면 다섯 차례였고 많을 때는 열 차례도 되었다. 처녀들은 아랫배와 거기가 아파서 걸음도 제대로 못 걸었다. 어떤 처녀는 거기서 날마다 피가 흘렀다.
그들은 7일째에 다시 배를 탔다. 며칠 만에 이번에 내린 곳은 사이판 섬 아래의 파라오 섬이었다. 이 방 저 방에 열댓 명의 여자들이 있었다. 복도 사이에 마주 보고 번호표 붙은 방들이 죽 이어져 있었다. 주인 여자가 목욕탕 앞에서 회초리를 들고 “목간 시작이다. 순서대로 빨리빨리 해. 물은 한 통!” 목욕이 다 끝나자 “이건 샷쿠(콘돔)다. 군인들한테 이것을 꼭 끼고 일을 보게 해. 그래야 성병도 안 걸리고 임신도 안 한다. 다들 알았지!”하며 샷쿠를 한 통씩 나눠주었다.
불면 날아갈 것 같은 안남미 밥에 된장국과 단무지 한 쪽으로 저녁밥을 먹고 방에 들어가 한숨을 돌리기도 전에 밖이 왁자지껄 하자 조금 있다가 방문이 벌컥 열리고 군인 하나가 불쑥 들어왔다. 군인은 바지를 까 내리고 순임이의 두 발목을 사정없이 끌어당겼다.
복실이 일행 60여 명은 오사카를 떠나 20여일쯤 만에 사이공에 도착하여 수용소에 들어갔다. 20명씩 갈라져 복실이는 배와 기차를 바꿔 타며 열흘을 가 도착한 곳이 너무 더워 숨을 쉬기도 어려운 버마 랑군이었다. 트럭을 타고 서너 시간을 험한 산길로만 달려 도착한 곳은 ‘위안소’라는 간판이 붙어 있었다. 저녁밥을 먹이고는 “세면소에 가서 목간들 하고 푹 쉬어.” 목욕을 끝낸 처녀들 앞에 군인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웃음소리와 함께 복실이의 치마를 헤집고 들어왔다.
- 조정래 『아리랑』 12권 pp.144~171 요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