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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쉼터 스크랩 ‘나’ 라는 환상에서 깨어날 때 / Humanities_인문학 산책. 이기적 유전자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
ysoo 추천 0 조회 66 16.03.24 23:3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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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manities_인문학 산책



‘나’ 라는 환상에서 깨어날 때


‘나’라는 화두, ‘나’라는 망상


21세기로 접어든 이후 나를 사로잡은 가장 큰 화두는 ‘나’이다.

명색이 소설가라는 사람이 21세기에 이렇게 고전적 화두에 사로잡히다니, 어이없다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인류의 역사와 함께해온 지구의 개척자였고, 그것을 꽃피운 문명의 주체였다. ‘나’를 배제한 역사, 철학, 문학은 상상할 수가 없고, 그것으로부터 ‘나’의 존엄성은 천부 인권을 얻어내고 단순한 생명체 이상의 영적 체계를 지닌 우주적 존재로 인정받아왔다.


‘나’를 앞세워 인류에 귀감이 된 사람, ‘나’를 희생해 인류에 각인된 사람, ‘나’를 갈고닦아 인류에 구원의 메시지를 전한 성자에 이르기까지,
‘나’는 인류가 모든 분야에서 성취의 도구로 삼아온 가장 훌륭한 자산이었다. 그런데 20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과학 분야의 파상적 공격은 수천 년간 인류가 모든 분야에서 구축해온 ‘나’의 존엄성을 가차 없이 파괴하기 시작했다. ‘나’뿐 아니라 창조론까지 붕괴시켜 신을 내몰고 21세기 영성의 영역을 과학이 차지해버렸다.


 ‘나’를 박탈당하고 ‘나’의 근거로 믿어온 신까지 창졸간에 잃어버린 것이다. 득의만면한 표정으로 이제 과학자들은 입을 모아 합창한다. “‘나’는 없다, ‘자아’는 없다, ‘영혼’은 없다!”고.


나는 평생 ‘나’로 살아왔다. ‘나’와 싸우고, ‘나’를 극복하고, ‘나’를 신뢰하고, ‘나’를 갈고닦으며 살아왔다. 지구인 대부분이 나처럼 살며 인생의 희로애락을 겪었을 것이다. 그래서 인생에서 가장 다루기 힘든 게 ‘나’임을 배웠고, ‘나’를 어떻게 관리,운영하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짐을 알았다.


그래서 ‘나’를 유지하는 경계로서의 중도(中道)를 배우고, ‘나’에 대한 애착이나 집착이 지나쳐 자기애 인격 장애가 되지 않도록 ‘나’를 낮추고 ‘나’를 앞세우지 않는 겸허에 대해서도 배웠다. 그렇게 평생 ‘나’를 수양과 도야의 대상으로 삼아 인생을 살아왔는데, 그것이 터무니없는 망상과 착각에 불과한 것이라니 어찌 21세기의 화두로 품고 정면 승부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목동 나르시스는 호수에 비친 자기 모습에 도취돼 물에 빠져 죽었다. 프로이트는 나르시시즘의 가설 체계를 만들고 자기애의 여러 문제적 증상을 고찰했다. 하지만 정신분석학에서 문제시하는 나르시시즘의 관점으로 보자면 오늘날 자기애 인격장애를 지니지 않은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21세기는 자기애의 표출 능력이 극대화되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성형, 다이어트, 미용, 피트니스, 패션 따위의 산업 분야가 불황을 모르고 날로 팽창하고 있다. 나르시스 아닌 사람이 없고, 나르시스 아니고자 하는 사람도 없다. 자기애에 멋지게 도취해 사는 것, 그것이 행복한 인생이라고 믿는 사람들의 세상이 된 것이다.


 그런데, 이런 세상에 왜 과학자들은 고춧가루를 뿌려 도취의 흥감을 박살내려는 것일까.


오래된 ‘무아’의 역사


자기애는 자신을 대상으로 하는 사랑이다. ‘나’가 우선시되어야 가능하고, ‘나’가 없으면 애초에 불가능한 사랑이다. 자기애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나’를 철석같이 믿고 그것을 바탕으로 세상에 자신을 내세우고 싶어 하지만, 21세기의 과학자들은 ‘나’가 수십조 개의 세포 덩어리에 지나지 않고, 인간의 생각은 세포막을 따라 흐르는 전기 신호에 지나지 않는다고 입을 모은다.

영혼이 어디 있는가, 차라리 그런 게 있다면 믿고 싶다고 비틀어 말하는 과학자도 있다.

한발 더 나아가 리처드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에서 인간을 조종하는 진짜 주인이나 프로그래머가 유전자라고 단언한다.


"사람과 모든 동물은 유전자에 의해 창조된 기계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 인간은 불과 수십년밖에 살지 못하지만 유전자의 수명은 1만 년 또는 100만 년 단위다. 이와 같이 불사신인 유전자는 우리 몸을 자기 복제를 위한 생존 기계의 목적으로 사용한 뒤 무참하게 버린다.
생명체의 기본 단위는 어디까지나 유전자이고, 세포는 유전자의 화학 공장이며, 인간의 몸은 유전자의 군체일 뿐이다. 유전자는 컴퓨터 프로그램 작성자처럼 간접적으로 자기의 생존 기계인 우리의 행동을 제어한다.

그것들은 생존 기계의 체제를 미리 만들고 개체로 독립시킨 후 그 속에 점잖게 앉아서 행동을 조종한다."


이와 같은 과학적 입장은 20세기 후반부터 이미 흔해 빠진 상식이 되고 말았다.
양자 역학이 자리 잡은 이후 세상의 모든 물질이 속이 텅 빈 ‘분자의 춤’이라는 게 기정사실화되고, 우리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실체가 아니라 일종의 홀로그램이거나 환영임이 과학적으로 밝혀진 것이다.

결국 ‘나’를 위시해 실‘ 체’, ‘자아’, 영‘ 혼’ 같은 개념이 지구인이 만들어낸 허구의 언어임을 과학자들은 입증했다. ‘나’가 있다고 믿고, ‘자아’가 있다고 믿고, ‘영혼’이 있다고 믿고 살아온 지구인은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나는 없다’는 말, 다시 말해 ‘무아(無我)’를 최초로 주장한 사람은 2,500년 전에 세상을 떠난 석가모니였다.

인도 카필라 성의 왕자였던 그가 인생의 생로병사에 대한 의문을 품고 출가해 보리수 아래서 깨치고 발견한 세 가지가 바로 무아, 무상, 괴로움이었다.


당시 인도 브라만 계급이 아트만(영혼)을 종교적 금과옥조로 숭상하고 있을 때 ‘나는 없다’는 혁명적 주장을 하고 나섰으니 당대의 정통 교파로부터 그가 얼마나 극심한 이단 취급을 받았을까 상상하지 않아도 능히 짐작할 만하다.


"육체는 무상하다. 느낌은 무상하다. 지각은 무상하다. 형성은 무상하다. 의식은 무상하다.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이다. 괴로운 것은 무아이다. 무아인 것은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바른 지혜로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
이처럼 바른 지혜로 있는 그대로 보면 마음이 집착하지 않고 번뇌에서 벗어나 해탈한다."


현대의 과학자들은 ‘자아가 있다는 환상에서 깨어나는 것이 진정한 인간적 깨달음’이라고 말한다. 아인슈타인은 “어떻게 자아에서 벗어났는가 하는 것이 진정한 인간의 가치를 결정한다”고 했다.

2,500년 전 세상을 떠난 석가모니의 ‘무아’를 현대 과학자들이 입증하고 있는 셈이다. 아무려나 석가모니와 현대 과학자들이 입을 모아 우리가 ‘나’라고 믿어온 것이 망상이나 착각이라고 하니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인간 존재를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지 걱정이 아닐 수 없다.



‘나’가 없어도 우리는 살아야 한다


‘나’를 상실한 시대, 그래도 우리는 살아가야 한다.

‘나’도 아니고, ‘자아’도 아니고, ‘영혼’도 아니고, 고작 기억과 정보를 저장한 유전자의 ‘탈것(Vehicle)’이라고 해도 우리는 생명을 영위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설령 실체가 없는 환영이라 해도 미션으로서의 삶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선택과 개량, 도전과 응전을 요구할 것이다.

그래서 고민하고 고심한 끝에 내가 찾아낸 것이 ‘타자로서의 나’를 사랑하는 법이다. 하지만 나를 타인으로 의식하고 그것을 객관적으로 받아들이는 일은 생각처럼 쉽지 않다. 그것을 위해 상황이 발생할 때마다 관찰하듯 자신의 뇌를 주시할 필요가 있다. 가상의 이미지를 만들어서라도 그것의 작동을 자각, 주시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불필요하게 그것이 작동하고 욕망을 가동시킬 때마다 자신이 만든 OFF 버튼을 눌러 작동을 멈출 필요가 있다.


인간을 가두고 힘들게 하는 감옥이 두 개 있으니 그것이 바로 육체의 감옥과 뇌의 감옥이다.

 ‘나’, ‘자아’, ‘영혼’이라는 망상에서 깨어나 인간을 객관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면 망상으로서의 감옥은 과학적 시스템에 의해 절로 소멸된다.

그것을 위해 뇌 과학 분야의 책이나 다큐멘터리에 관심을 갖는 것도 좋을 것이다.

재테크도 좋고 처세술도 좋고 스펙도 좋고 웰빙도 좋지만, 그 모든 게 터무니없는 망상임을 일깨워주는 기회인데 무엇을 마다하겠는가!


‘나’를 타자로 받아들이면 ‘나’가 있다고 믿던 시절의 오만방자함이 소멸된다.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겸허한 삶의 발판이 마련되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을 있는 그대로 믿지 않고, 마음에서 일어나는 욕망의 움직임을 있는 그대로 따르지 않으면 과학자들의 말처럼 자아가 있다는 환상에서 깨어나 진정한 인간적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
나를 타자로 만들면 나와 남의 구분이 없어져 타인도 나와 동일시할 수 있고, 배타적 삶의 자세도 소멸된다. ‘나’와 완전히 결별할 때, 끈덕진 삶의 미망에서 비로소 깨어나는 것이다.


글 박상우(소설가)

일러스트 홍소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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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적 유전자


 

리처드 도킨스 지음/홍영남 옮김


“우리의 몸과 마음을 창조한 것은 유전자이며 우리는 유전자의 생존기계이다.”


기존의 생물학을 뿌리째 뒤흔든 이 책은 생명을 바라보는 관점은 물론, 인간의 본성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 책 소개


종래의 생물학을 뿌리째 뒤흔든 이 책은 동물의 사회적 행동의 진화를 유전자의 시각에서 살펴본 스릴 있고 환상적인 저서로서 세계의 주목을 받아왔다. 다윈이 진화론을 주장한 이후로 인류는 다위니즘 또는 자연선택설과 같은 일종의 패러다임들을 접해 왔다. 실제로 다윈의 이 패러다임은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쳤고 앞으로도 그 영향력은 계속 될 것이다. 이 책은 철저한 다윈주의 진화론과 자연선택을 기본 개념으로 기존의 진화 단위인 개체를 불멸의 존재인 유전자로 보는 독특한 발상과 놀라운 주장을 전개하고 있다.


저자는 인간을 포함한 생명체는 DNA 또는 유전자에 의해 창조된 기계에 불과하며, 그 기계의 목적은 자신을 창조한 주인인 유전자를 보존하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

따라서 자기와 비슷한 유전자를 조금이라도 많이 지닌 생명체를 도와 유전자를 후세에 남기려는 행동은 바로 이기적 유전자에서 비롯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을 포함한 생명체가 다른 생명체를 돕는 이타적 행동도 자신과 공통된 유전자를 남기기 위한 행동일 뿐이다.


이와 같은 이유에서 유전자의 세계는 비정한 경쟁, 끊임없는 이기적 이용, 그리고 속임수로 가득 차 있다.

이것은 경쟁자 사이의 공격에서뿐만 아니라 세대간, 그리고 암수간의 미묘한 싸움에서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유전자는 유전자 자체를 유지하려는 목적 때문에 원래 이기적일 수밖에 없으며, 그러한 이기적 유전자의 자기복제를 통해 생물의 몸을 빌려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유전자가 모든 생명 현상에 우선한다는 저자의 유전자 결정론적 생명관은 아직도 많은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서 인간 행동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해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 저자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


1941년 케냐 나이로비에서 태어나 옥스퍼드대학교에서 수학하고, 노벨상을 받은 동물행동학자인 니코 틴버겐(N. Tinbergen)의 제자로 일찍부터 사람들의 예상을 뒤엎는 아이디어를 발표해 왔다.

그는 1971년「네이처 Nature」지에 뇌세포 사이에서도 자연 선택이 이루어진다는 생각을 가지고 뉴런이 죽어 가는 방법 패턴과 기억 메커니즘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지 않을까 하는 기상천외한 발상과 아이디어를 발표하여 전문가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저서로『확장된 표현형 The Extended Phenotyp』『눈 먼 시계공 The Blind Watchmaker』『에덴 밖의 강 River Out of Eden』『풀리는 무지개 Unweaving the Rainbow』등이 있으며, 우리 시대의 가장 영향력 있는 과학자로서 토머스 헉슬리(T. Huxley)를 잇는 다윈의 신봉자이다. 도킨스는 동물행동학에 정통할 뿐만 아니라 분자생물학, 집단유전학, 발생학 등의 인접 분야와 고전문학, 시 등의 일반 교양 그리고 수많은 사회 현상에 이르기까지 지식의 폭이 넓다. 『이기적 유전자』에서 대담하고도 섬세한 이론을 무리 없이 전개함으로써 완벽한 이론가의 면모를 보인 그는 완전무결한 슈퍼스타임에 틀림없다.



■ 역자 홍영남

서울대학교 식물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교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독일 뷔르츠부르크대학교 객원교수를 지냈으며 현재 서울대학교 자연과학대학 생명과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역서로 『식물 생리학』『생물학』『생물 물리』등이 있다.


■ 차례
제1장 사람은 왜 존재하는가
제2장 자기 복제자
제3장 불멸의 코일
제4장 유전자 기계
제5장 공격-안정성과 이기적 기계
제6장 유전자의 친족관계
제7장 가족계획
제8장 세대간의 싸움
제9장 암수의 다툼
제10장 내 등을 긁어 다오, 나는 네 등을 타고 괴롭히겠다
제11장 밈(Meme)-새로운 자기 복제자
제12장 마음씨 좋은 놈이 일등 한다
제13장 유전자의 긴팔



이기적 유전자


사람은 왜 존재하는가


이 책이 주장하는 바는 사람과 기타 모든 동물이 유전자에 의해 창조된 기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우리의 유전자는 치열한 경쟁 세계에서 때로는 몇 백 만 년이나 생을 계속해 왔다. 이 사실은 우리의 유전자에 특별한 성질이 있다는 것을 기대하게 한다.

이제부터 논의하려는 것은, 성공한 유전자에 기대되는 특질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비정한 이기주의’라는 것이다. 이러한 유전자의 이기성은 보통 이기적인 개체 행동의 원인이 될 것이다.


우리는 이기적으로 태어났다. 그러므로 관대함과 이타주의를 가르치도록 시도해 보자. 우리 자신의 이기적 유전자가 무엇을 하려는 녀석인지 이해해 보면, 적어도 우리는 유전자의 의도를 뒤집을 기회를, 즉 다른 종이 결코 생각해 보지도 못했던 기회를 잡을지도 모른다. 인간만이 문화에 의해 학습되고 전승되어 온 영향에 의해서 지배받는다. 어떤 사람은 문화처럼 중요한 것이 없기 때문에 유전자가 이기적이든 아니든 간에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는 데는 실제로 관계가 없다고 할지도 모른다. 한편으로는 그렇지 않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이것은 모두 인간의 속성을 결정하는 요인인 ‘천성이냐 교육이냐’라고 하는 논의에서 어느 쪽의 입장을 취하느냐에 달려 있다.


여기서 나는 이 책의 논의 대상이 아닌 사항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은 ‘천성이냐 교육이냐’라는 논쟁에 있어서 어떤 입장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이에 대한 의견이 있으나 그것을 표명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 제시할 문화에 대한 견해에서 드러날지 모른다.

만약 유전자가 현대인의 행동결정에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고 할지라도, 그리고 우리가 실제로 동물계에서 특이한 존재임을 알았다고 할지라도, 최근에 인간이 예외로 됐다는 그 규칙에 대해 아는 것은 여전히 흥미 있는 일이다. 또한 우리 종이 우리가 생각하고 싶은 만큼 그렇게 예외적이 아니라면 그 규칙을 배워야 한다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오랜 기간에 걸쳐 생존 가능성에 대한 행동의 효과를 증명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실제 문제로서 실재하는 행동에 정의를 적용할 때에 ‘겉보기에’라는 말을 한정해야 한다.

겉보기에 이타적 행위는 표면상 이타주의자의 죽을 가능성을(가능성이 비록 적을지라도) 높이고, 동시에 수익자의 오래 살아남을 가능성을 높이는 것처럼 생각하게 하는 행위이다.

정밀하게 조사해 보면 이타적으로 보이는 행위는 실제로 모양을 바꾼 이기주의인 경우가 많다. 다시 말해서 근원적 동기가 숨어있는 이기적 동기라는 뜻이 아니라 생존 가능성에 대한 행위의 실제 효과가 우리가 생각한 것과는 반대라는 뜻이다.


나는 선택의 기본 단위, 즉 이기성의 기본 단위가 종도 집단도 개체도 아님을 논하고자 한다. 그것은 유전의 단위인 유전자이다. 일부 생물학자에게 있어 이것은 극단적인 견해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어떤 의미로 그와 같은 논의를 하려는지 알게 된다면, 비록 그것이 낯선 방법으로 표현되어 있을지라도, 본질적으로 그것이 정통 이론이라는 것에 동의해 줄 것으로 기대한다. 이러한 논의 전개에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므로 우선 생명 그 자체의 기원에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자기 복제자


다윈의 ‘최적자 생존’은 실제로 ‘안정자 생존’이라는 보다 더 일반적인 법칙의 특수한 예이다. 세계는 안정된 것들로 유지된다. 안정된 것이란 이름을 붙일 수 있을 만큼 지속적이거나 보편적인 원자 집단이다. 현재 생물은 매우 복잡한 큰 분자들로 구성되며 그 복잡성에는 몇 개의 단계가 있다. 우리의 혈액 중의 헤모글로빈은 전형적인 단백질 분자이다. 그것은 아미노산이라는 더 작은 분자의 사슬로 되어 있으며, 각 아미노산에는 정확한 패턴으로 배열된 수십 개의 원자가 함유되어 있다.


헤모글로빈은 오늘날 볼 수 있는 분자이고 원자가 안정된 패턴으로 되려는 경향이 있다는 원칙을 설명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지구상에 생물이 생기기 이전에 분자의 초보적인 진화가 물리나 화학의 일반 과정에 의해서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이다. 설계나 목적이나 지시를 생각할 필요는 없다. 에너지가 있는 곳에 한 무리의 원자가 안정된 패턴이 되면, 그것은 그대로 머물러 있으려고 할 것이다. 최초 형태의 자연 선택은 단순히 안정된 것을 선택하고 불안정한 것을 배제하는 것이었다.


화학자들은 옛날의 지구의 화학적 상태를 재현해 보려고 많은 시도를 했다. 가능성이 있는 단순한 물질을 플라스크에 넣고 에너지원을 가한 후 2~3주가 지나자 플라스크 속에서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처음에 넣었던 분자보다 복잡한 분자를 많이 포함한 연갈색의 액체가 생긴 것이다. 생물학자나 화학자가 40억년 전에 해양을 구성하고 있었다고 생각하는 ‘원시 수프 primeval‎ soup'에서도 이와 비슷한 과정이 일어났음에 틀림없다. 이들 유기물은 아마도 해안 부근의 말라붙은 물거품 속에서 국부적으로 농축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다시 태양으로부터 자외선과 같은 에너지의 영향을 받아 결합하여 더 큰 분자가 되었다.


이러한 경우 수프 속의 어떤 구성 요소는 자기 복제자의 일부분으로 자기가 친화성을 갖고 있는 부분과 만나게 되면 분명 들러붙으려고 할 것이다. 이렇게 해서 들러붙은 구성 요소는 필연적으로 자기 복제자 자체의 순서에 따라 줄짓게 된다. 이때에 그것들은 최초의 자기 복제자가 된 때와 마찬가지로 점차 결합하여 안정된 사슬을 만든다고 생각하기 쉽다. 이 과정은 순서에 따라 단계적으로 계속 이어진다. 이것은 결정체들이 형성되는 방법이기도 하다. 한편 두 가닥의 사슬이 세로로 쪼개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2개의 자기 복제자가 되어 그 각각이 다시 복제를 계속하게 된다.


최초의 자기 복제자가 실제로 어떻게 해서 자기의 사본을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것들의 자손인 현재의 DNA 분자는 인간의 가장 정확한 복사 기술에 비해 놀랄 정도로 정확하기는 하나 그 DNA 분자까지도 때로는 오류를 범한다. 진화를 가능케 하는 것은 결국 이와 같은 잘못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우리가 진화에 관하여 어느 정도라도 알고 있다면, 복제의 오류가 진화에 필요 불가결하다는 설과 자연 선택의 충실한 복제에 유리하게 작용한다는 설은 과연 양립하는 것일까?

우리는 자신이 진화의 산물이기에 진화를 막연히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실제로 진화하고 싶다고 바라는 것은 없다는 것이 그 답이다. 진화란 자기 복제가(오늘날의 유전자)가 오류를 막기 위해 모든 노력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막무가내로 생겨난 일이다.


자기 복제자의 변종간에도 생존 경쟁이 있었다. 잘못된 복사나 경쟁 상대의 안정성을 감소시키거나 새롭고 더 높은 수준의 안정성을 갖게 하는 복제 오류는 모두 자동적으로 보존되고 증가했기 때문이다. 안정성을 증가시켜 경쟁 상대의 안정성을 낮추는 방법은 점점 교묘해지고 효과적으로 되어 갔다. 그 중 상대 변종의 분자를 화학적으로 파괴하는 방법을 ‘발견하여’ 방출된 구성요소를 자기의 복사 제조에 이용하는 개체도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어떤 자기 복제자는 화학적 수단을 강구하거나 아니면 자신의 둘레에 단백질로 물리적 벽을 만들거나 하여 자신을 방어하는 방법을 찾아냈을 것이다.


자기 복제자가 이 세상에서 자신을 유지해 나가는 데 사용한 기술이나 책략의 점진적 개량에 어떤 종말이 있었던 것일까? 개량을 위한 시간은 충분히 있었을 것이다. 장구한 세월은 도대체 어떤 신비한 자기 보존의 기관을 만들어 낸 것일까? 40억 년이란 세월 속에서 고대의 자기 복제자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는가. 그것은 절멸되지 않았다. 과거 생존 기술의 명수가 아니었던가? 그러나 지금 바다 속을 유유히 떠다니고 있는 자기 복제자를 찾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다. 그것들은 이미 먼 옛날에 자유를 포기하고 말았다.


오늘날 자기 복제자는 외부로부터 차단된 로봇 속에 안전하게 거대한 집단으로 떼지어 살면서, 복잡한 간접 경로를 통하여 외계와 연락하고 원격 조정기로 외계를 조작하고 있다. 그것들은 당신 안에도 그리고 내 안에도 있다. 또한 그것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창조했다. 그리고 그것들의 유지야말로 우리가 존재하는 궁극적인 이론적 근거이기도 하다. 자기 복제자는 기나긴 길을 여기까지 걸어 왔다. 이제 그것들은 유전자라는 이름으로 계속 나아갈 것이며, 우리는 그것들의 ‘생존 기계’이다.


유전자 기계


유전자는 스스로가 직접 인형을 조작하는 것이 아니라 컴퓨터의 프로그램 작성자처럼 간접적으로 자기의 생존 기계의 행동을 제어한다. 그것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미리 생존 기계의 체제를 만드는 것이다. 그 후에 생존 기계는 완전히 독립하게 되며 유전자는 그 속에서 그저 수동적인 상태가 된다. 유전자들은 왜 그렇게 수동적이 될까? 왜 고삐를 잡고 일일이 명령을 내리지 않을까? 그것은 시간적 지연 문제 때문이다.


유전자는 단백질 합성을 제어하는 일을 통해 작용한다. 하지만 그 속도는 매우 느리다. 배(embryo)를 만드는 데는 인내를 갖고 몇 개월 동안 단백질(합성)의 끈을 조작해야만 한다. 반면에 행동의 특징으로 중요한 점은 빠르다는 것이다. 그것은 수 개월이라는 시간 단위가 아닌 몇 초 또는 몇 분의 1초라는 시간 단위로 작용한다. 유전자는 그처럼 신속한 반응을 가지고 있지 않다.

유전자가 할 수 있는 것은 자기의 이익을 위해 신속히 작동하는 컴퓨터를 조립하여 ‘예측’할 수 있는,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가능성들에 대처하기 위한 규칙과 ‘충고’를 사전에 프로그램으로 만들어 미리 최선의 대책을 강구해 두는 것뿐이다.


복잡한 세계에서 예측하는 일은 불확실한 일을 동반하는 것이다. 생존 기계가 내리는 결정은 모두 도박이다. 그리고 평균적으로 이로운 결정을 내리도록 뇌에 미리 프로그램을 짜 놓는 일이야말로 유전자가 할 일이다. 유전자는 일차적 방침 결정자이고 뇌는 집행자이다. 그러나 뇌가 다시 고도로 발달함에 따라 점점 더 많은 실제의 방침 결정을 맡게 되었다. 이때에 학습이나 시뮬레이션과 같은 책략을 쓰게 된 것이다. 어떤 종도 아직까지 이 시점에 도달하지 않았으나 이 경향이 계속 된다면, 그 논리의 귀결은 결국 유전자가 생존 기계에 단 하나의 종합적인 방침을 지령하게 될 것이다. 즉 우리를 살려 두는 데 가장 좋다고 당신이 생각하는 것은 무엇이든 하라고 말이다.


공격 - 안정성과 이기적 기계


이 장에서는 공격이라는 오해가 많은 주제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여기서도 편의상 개체를 자기의 전체 유전자에 적합한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무분별하게 실행하도록 만들어진 프로그램을 이기적 기계라고 본다. 생존 기계에게 논리적 방책은 자기의 경쟁자를 죽여서 가능하면 먹어 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같은 종을 서로 잡아먹는 종을 실제로 자연계에서 볼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유전자의 이기성 이론의 소박한 해석에서 예측하는 정도로 자주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사실 로렌츠는 그의 저서 『공격에 대하여』에서 동물을 싸움, 즉 ‘공격’은 억제 가능한 신사적인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가 주목하는 것은 동물의 싸움이 복싱이나 펜싱의 규칙처럼 규칙에 따라 싸우는 형식을 갖춘 시합이라는 것이다 동물들은 글러브를 낀 주먹과 끝을 둥그렇게 만든 칼로 싸운다. 위협과 겁주기가 목숨을 건 결투를 대신한다. 승자는 항복의 몸짓을 인정하고 때려죽이거나 물어 죽이거나 하는, 우리의 소박한 생각에서 예견되기 쉬운 행동을 삼간다.


이론적으로 싸울 것인가 싸우지 않을 것인가의 결단에 앞서 무의식적으로라도 복잡한 ‘손익 계산’이 앞서야 한다. 확실히 싸워서 이득을 볼 때도 있지만 싸울 때마다 그만큼의 이익이 있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싸우는 동안 그 싸움을 확대시키느냐 진정시키느냐 하는 전술적 결단에는 각각의 손실과 이득이 있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분석 가능한 것이다. 이 사실은 오랫동안 동물 행동학자들에게 막연히 인식되어 왔으나, 자신감을 가지고 이 발상을 분명히 표현하게 된 것은 일반적으로 행동학자로 인정되지 않는 메이나드 스미스의 힘이었다.

메이나드 스미스가 제창하고 있는 중요한 개념은 ‘진화적으로 안정된 전략(evolutionarily stable strategy, ESS)’이라 불리는 것이다. ‘전략’이라는 것은 미리 만들어진 프로그램의 행동 방침이다.


전략의 일례를 들어보면 “상대를 공격하라. 그가 도망치면 쫓아가고 응수해 오면 도망쳐라.” 이러한 전략의 중요한 점은 개체가 의식적으로 고안해 냈다고 생각하지 않는 데 있다. 여기서 동물을 근육을 제어하는 미리 만들어진 프로그램의 컴퓨터를 갖는 로봇 생존 기계라고 생각해 온 것을 상기하기 바란다. 이 전략을 한 세트의 단순한 명령으로 하여 말로 표현하는 것은 이것을 생각해 나가는 데 편리한 방법이다. 알지 못하는 어떤 메커니즘에 의해 동물은 마치 이들의 명령에 따르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진화적으로 안정된 전략, 즉 ESS는 개체군 대부분의 구성이 일단 그 전략을 수용하면 그것을 다른 대체 전략에 의해 능가할 수 없는 전략이고 정의된다. 그것은 미묘하고도 중요한 개념이다.

바꿔 말하면 개체로서 최선의 전략은 개체군의 대부분이 행하고 있는 전략이라는 것이다. 개체군의 나머지 부분은 각각 자기의 성공을 최대화하려는 개체로 성립되어 있으므로, 지속될 수 있는 유일한 전략은 일단 그 전략에 도달하면 그것을 벗어나려는 어떤 개별 전략은 이득을 볼 수 없다.

환경에 어떤 큰 변화가 일어나면 짧기는 하나 진화적으로 불안정한 기간이 생기고 개체군 내에도 변동이 생기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일단 ESS에 도달하면 그것은 그대로 남는다. 즉 자연 선택은 이 전략에서 이탈되는 행위를 벌할 것이다.


내등을 긁어 다오, 나는 네 등을 타고 괴롭히겠다


만일 동물이 무리를 지어 함께 산다면 그들 유전자는 이 연합에 의해 그들이 투입한 것보다 더 큰 이익을 얻는다고 볼 수 있다. 무리를 짓는 하이에나는 단독으로 먹이를 잡는 것보다 훨씬 큰 먹이를 포획할 수 있다.

물론 먹이를 서로 나누어야 한다는 문제가 있지만 떼 지어 사냥하는 것은 개개의 이기적 개체에게 유리하다. 어떤 종의 거미들이 협력하여 거대한 공동의 망을 치는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집단생활의 이점으로서 가장 많이 제안되는 것은 포식자에게 먹히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라는 설명이 지배적이다. 해밀턴은 〈이기적인 무리의 기하학〉이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이러한 이론에 대하여 훌륭하게 설명하고 있다. 오해의 여지가 없도록 다시 한 번 강조한다면 해밀턴이 말하는 ‘이기적인 무리’란 ‘이기적 개체들의 무리’를 뜻한다.


다른 종의 개체에게 상호 이익을 주고받는 관계를 ‘상리공생’이라고 한다. 다른 종의 개체는 서로 틀린 ‘기능’을 가지고 협력할 수 있으므로 때로는 서로 큰 이익을 주고받을 수도 있다. 이와 같은 기본적 비대칭성은 진화적으로 안정된 상호 협력 전략을 발생하게 하는 경우가 있다.

개미와 진딧물의 관계가 그러하다. 진딧물은 식물의 즙을 흡입하기에 적합한 입을 가지고 있으나 그와 같은 흡입용의 구기는 자기 방어에는 별로 적합하지 못하다. 한편 개미는 식물의 즙을 흡입하기에는 서툴지만 싸움에는 유리하다. 따라서 진딧물을 보호하고 시중드는 유전자가 개미의 유전자 풀 속에서 유리하게 됐고, 개미와 협력을 바라는 유전자가 진딧물의 유전자 풀 속에서 유리하게 됐다는 것이다.


마음씨 좋은 놈이 일등 한다


‘마음씨 좋은 놈’이라는 구어체의 의미를 그에 대응하는 다윈주의의 말로 번역하면, 자기와 같은 종의 다른 구성원들을 돕기 위해 스스로 희생하여 그들의 유전자를 다음 세대에 전하게 하는 개체이다.

따라서 마음씨 좋은 놈의 수는 감소하게 될 운명에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마음씨 좋은 nice'라는 단어에는 또 하나의 전문 용어로서의 해석이 있다. 이 정의를 쓴다면 마음씨 좋은 놈이 일등이 될 수 있다.


게임 이론가는 게임을 영합게임(zero sum game)과 비영합게임(nonezero sum game)으로 나눈다.

영합게임은 한쪽 선수의 승리가 다른 쪽 선수의 패배가 된다. 비영합게임은 돈을 지불하는 물주가 있고 두 선수는 팔짱을 끼고 시종 물주를 봉 잡고 나가는 것이 가능하다.

한 축구 경기를 예로 들어보자.

어떤 축구팀들이 각각 승패에 따라 4부로 나뉘게 된다. 1부에 드는 것은 대단한 명예이며 1부의 하위팀 3개 팀은 다음 시즌에서 제2부로 격하되게 된다. 그 날은 제1부에서 격하되는 팀 중 마지막 한 팀이 결정되는 날이다. 브리스톨과 코번트리라는 팀이 시합을 벌여 지는 팀이 2부로 떨어지게 되는데 이 경기와 동시에 열리는 선더랜드와 제4위팀의 승패에 따라, 만일 선더랜드가 패하면 브리스톨과 코번트리는 무승부만 되면 두 팀 모두 제1부에 머무를 수 있으며, 선더랜드가 이기면, 두 팀 중 이기는 한 팀만이 1부에 남게된다.

당시의 신문기사를 보면, 브리스톨 대 코번트리의 경기는 매우 격하게 진행되다가, 선더랜드팀의 패배 소식이 전해지는 순간 2대2로 진행되던 두 팀의 경기는 무승부로 끝내기 위해 아무 쪽에서도 공격을 하지 않는 비영합게임으로 변했다. 결국 양쪽 모두 제1부에 남게 되는 좋은 결과를 얻었다.


위의 경기는 처음에는 영합게임이었다가 외부의 조건이 바뀌면서 비영합게임으로 바뀌었다. 현실 생활에 있어서 인간과 동식물의 생활은 대부분 비영합 게임에 대응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이 종종 ‘물주’의 역할을 하고 개개인은 서로의 성공에서 이익을 얻을 수가 있다.

자기의 이익을 위해 반드시 경쟁자를 누를 필요는 없다. 이기적 유전자의 기본 법칙에서 이탈하지 않고 서로 기본적으로 이기적인 세계에서조차도 협력과 상호 부조가 어떻게 번창하는지 우리는 알 수 있다. 따라서 왜 ‘마음씨 좋은 놈이 일등을 할 수 있는지’를 이해할 수가 있는 것이다.


유전자의 긴 팔
유전자는 영원하다


성공하는 유전자는 하나의 공통된 배(embryo)에 속하는 다른 유전자들에 의해 영향을 받는 환경에서, 그 배에 유리한 효과를 미치는 유전자이다. 유리하다는 것은 성공할 것 같은 성체, 즉 잘 번식하여 똑같은 유전자를 미래의 세대에 전해 줄 수 있는 성체가 되도록 배를 발생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표현형’이라는 전문 용어는 하나의 유전자의 몸으로 나타남, 즉 배 발생 과정을 통해 유전자가 그 대립 유전자와 비교해서 신체에 끼치는 효과에 대해 쓰인다. 몇 개의 특정 유전자의 표현형 효과는 녹색의 눈과 고수 머리털 같은 둘 이상의 표현형 효과를 가지고 있다. 자연 선택이 한 유전자를 선호하는 것은 유전자 그 자체의 성질이 아니라 그 결과 - 그 유전자의 표현형의 결과 - 때문이다.


날도래의 예를 들어보자면, 날도래는 자신이 분비하는 물질이 아닌 외부세계의 재료로 집을 짓는다. 날도래의 집이 다윈주의적 선택에 의해 진화해 온 하나의 적응이라는 사실은 아무도 의심할 수 없다.

그것은 선택에 의해 유리하게 되었음에 틀림없다. 그것은 몸을 보호하는 덮개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생물 개체 및 그 개체의 모든 유전자에게 이익을 가져온다. 현실적으로 중요한 이익은 껍질에 개체 보호적 성질을 주는 유전자의 이익인 것이다.


숙주와 기생자


기생자의 유전자와 숙주의 유전자 사이의 이해관계는 매우 큰 정도까지 일치하고 있을지 모른다. 기생자는 숙주의 유전자와 같은 운반자를 통해 미래의 세대로 전해지는 경우라면, 기생자는 숙주가 단순히 생존뿐만 아니라 번식도 할 수 있도록 전력을 다해 도와줄 것이다. 긴 진화적인 시간에 걸쳐서 그것은 기생자임을 멈추고 숙주와 협력하여 최종적으로 숙주의 조직에 합체하여 이미 기생자라고는 인정받을 수 없게 돼 버릴 것이다.

아마도 우리의 세포도 이 진화적인 스펙트럼의 먼길을 거쳐온 것인지도 모른다.

즉 우리 모두는 태고의 기생자들의 통합체의 유물일지 모른다. 기생자는 바로 숙주의 알 속에서 숙주 자신의 유전자와 함께 전해지기 때문에 결국 그들 자신의 몸은 아마도 소실되어 숙주의 몸에 완전히 합체되어 버릴 것이다.


불멸의 자기 복제자


모든 생명의 근본적인 단위인 원동력은 자기 복제자이다. 우주에서 자신의 사본을 만들 수 있는 자는 어떤 것이든지 자기 복제자이다. 자기 복제자는 최초로 우연히 작은 입자들이 마구 부딪혀서 출현한다. 자기 복제자가 일단 존재하게 되면 그것은 스스로의 복제를 한없이 만들어 나갈 수 있다. 생물학자에 의하면 생물 개체가 먼저 등장하였고, 자기 복제자는 생물 개체가 쓰는 장치의 일부로 인정됐다.


생물학을 다시 올바른 길로 돌려 역사에서뿐만 아니라 중요성에서도 자기 복제자가 앞선다는 것을 우리 스스로가 명심할 필요가 있다. 이미 자기 복제자는 바다 속에 제멋대로 흩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거대한 군체(개체) 속에 포장되어 있다. 그리고 표현형 효과의 결과는 세계 전체에 균일하게 분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대개의 경우 그 동일 개체에 응결해 왔다. 그러나 이 지구에서는 그렇게도 낯익은 그 개체가 존재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우주의 어떤 장소이든 생명이 생기기 위해 존재해야만 하는 유일한 실체는 불멸의 자기 복제자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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