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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도 공사
박 화 성
격분된 삼백 명의 노동자들은 중정대리(中井代理)를 끌고 경찰서에 쇄도하였다.
보안계·위생계의 넓은 사무실 안에 있는 사람이란 사람은 급사*들까지 모조리 나와서 눈들을 둥그레가지고 마당에 겹겹이 들어서서 살기가 등등하여 날뛰는 군중을 둘러본다.
“자, 서장에게 면회시켜주시오.”
“중정 대리란 놈을 끌고 들어가자.”
낭하*로 우르르 몰려 들어가는 군중을 밖에 섰던 자들이 두 손을 벌리고 막는다. 사법계실에서도 뛰어나오고, 고등계 주임까지 층계에서 굴러 내려오는 듯이 뚱그적이고 내려왔다.
서장은 체면을 유지하느라고 나오지는 않으나 서장실에서 섰다 앉았다 하며 좌우를 시켜서 무슨 일인가를 알아오라고 하였다.
보안계 주임의 뚱뚱한 얼굴이 나타났다. 금테 안경 너머로 마당에 빡빡하게 박혀 선 군중을 둘러보며,
“무슨 일이 있으면 조용히 말해라! 시끄럽게 하면 안된다.”
하고 위엄을 내어 말했다.
“조용히 할 말이 못되오. 두말 말고 서장에게 면회시켜주시오!”
경찰서가 떠나갈 듯이 삼백 명의 소리는 외쳤다.
“서장에게 면회시켜라!”
“서장 나오라!”
고등계 주임과 형사들이 한편에서 수군수군하더니 보안계 주임을 불러가지고 다시 머리를 맞대고 수군거린다.
“당신들 의논은 나중에 하고 어서 우리들 청이나 들어줘요!”
한쪽에서 주먹들이 높직이 오르내리며 또 소리친다. 보안계 주임이 이쪽으로 오더니,
“그러면 대표를 내라. 이따위로 떠들어선 서장께 면회시키지 않는다.”
하며 눈망울을 불량하게 굴려 군중을 좌우로 훑어본다.
“자, 그럼 대표를 내세우자.”
군중은 흩어져 무더기 무더기로 둘러선다.
“장덕삼이 자네 하소.”
“김병수, 이재표.”
소리가 끝나지 않아 키가 호리호리한 사법계 주임이 점잖게 걸어와서 손가락으로 이 사람 저 사람 가리키며 대표를 뽑기에 신이 나서 소리치는 장덕삼의 어깨를 두 손가락으로 톡톡 쳤다.
“여보, 대표를 네 사람만 뽑으시오. 너무 많아도 재미없으니…….”
말소리가 부드럽고 조용하다.
“서동권이 뽑게.”
“서동권이가 빠져서 되겠는가!”
각 다른 음성이 여기저기서 났다.
“자 그럼, 네 사람 다 되었네. 서동권, 이재표, 김병수 다 이리 나오소.”
장덕삼은 자기가 먼저 한편으로˙ 따로 서며 세 사람을 부른다. 보안계 주임이 앞장을 서고 중정 대리와 네 사람이 뒤따라 서장실로 들어가는 것을 바라보며 또 제각기 한마디씩 한다.
“이 사람들! 하나도 빼지 말고 자세히 이야기하소!”
“그 도적놈에게서 단단히 다짐 받아가지고 나오게!”
“어떻게든지 오늘은 끝나도록 해가지고 나오게!”
이러한 격려의 소리를 들으며 대표들은 보안계 주임의 안내로 서장과 마주 앉게 되었다.
사십여 세나 되어 보이는 서장은 몸을 약간 들어 의자를 다가놓고는 무겁게 덜퍼덕 주저앉았다. 그는 무테 안경을 한 손으로 고쳐 쓰면서 헛기침을 두어 번 하였다.
“자네들 국어(일어) 할 줄 아는가?”
그는 네 사람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제일 나이 적은 서동권이가 머리를 굽실했다.
“네, 난 좀 알아듣습니다마는 다른 세 사람은 잘 못 알아듣습니다. 통역을 한 분 세워주십시오.”
그의 일어가 너무나 유창하여서 서장은 의외라는 듯이 동권을 주의하여 보며 보안계 주임에게 무어라고 하니까 그가 나가더니 키가 작고 얼굴이 넓적한 형사 비슷한 자를 데리고 왔다.
서장은 그자를 통하여 이들의 용건을 물었다.
“네, 우리는 아시는 바와 같이 하수도 공사 일하는 노동자들이올시다.”
제일 나이 지긋한 장덕삼이가 말을 꺼내었다.
“작년 십 이월부터 일을 하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넉 달이 되도록 돈이라고는 삼십 전 한 번 받고, 쌀 두 되 받아먹은 것밖에는 삯이라고는 받은 일이 없으니 이런 노릇이 어디 있단 말이오?”
손바닥을 뒤집어 보이면서 말소리가 차차 거칠어진다.
“그럴 리가 있는가?”
서장은 가법게 말마디를 무질렀다.⁕ 성질이 급한 이재표가 불쑥 나섰다.
“그럴 리가 있다니요? 그러니까 중정이란 놈이 도적놈이란 말이오.”
그는 소리를 버럭 지르며 중정 대리를 노려보더니, 다시 말을 계속한다.
“처음에는 삯이 하루에 칠십 전이니 얼마니 하던 것들이 칠십 전은 고사하고 삼십 전 받은 사람, 삼십오 전 받은 사람, 제일 많이 받은 사람이 오십 전 받았는데, 이것도 꼭 한 번밖에 받은 일이 없고, 삯전 대신으로 쌀을 받아먹 었다 해도 그게 어디 쌀이랍데야? 흉악한 싸래기 두 되 받은 일밖에 없으니 그래 죽도록 일하는 놈은 죽어가며 외상 일만 하라는 법이 어디 있단 말이오.”
그는 서장이 그의 상대자인 청부업자나 되는 듯이 눈을 부릅뜨며 얼굴에 핏대를 올렸다.
“그것이 정말이오?”
서장은 한풀 죽어 앉았는 중정 대리에게 물었다.
“네, 어찌 그렇게 되어버 려서……”
그는 머리를 득득 긁으며 말끝을 흐려버린다.
“이놈! 너도 속은 있어서 말을 우물쭈물하는구나. 넉 달 동안에 돈 한 푼 안 주는 벼락 맞을 놈이 어디 있단 말이냐.”
이번에는 김병수가 그 우렁찬 목소리로 대들었다.
“싸움하듯이 그런 욕 하면 안돼!”
서장은 점잖게 병수를 제재한다. 저편 유리창 밖에는 동료들이 왔다 갔다 하며 방 안을 들여다보기도 하고 말소리를 들으려는 듯이 귀를 기울이기도 하였다.
“그러니까 말이오. 서장영감 제 말을 좀 들어봅시다. 그래 넉 달 동안 일은 시키고 삯은 안 주니 누가 그놈의 일만 할 수가 있겠느냐 말이지요. 전표만 날마다 주면 종이를 씹어 먹고 살 수 없고, 그 전표를 팔든지 잡히든지 해먹었자 결국은 손해뿐이지 입에 들어오는 것이 없이 공짜 일만 하면서도 감독과 십장*들에게 까딱하면 두들겨 맞고 잔소리만 듣고 거 뭐 압제라니 말할 수가 없소. 우리 같은 사람은 객지라 싸래기밥이나마 함바*에서 얻어먹고 일했지마는, 덕삼이, 재표 같은 처자 있는 사람들은 거참 굶기가 일쑤지라우. 인제는 일도 더 할 수 없고 속기도 그만 속아넘어갈 테니 이 도적놈에게서 이때까지 일한 우리 삯이나 받게 해주시라고 이렇게 밝고 밝은 법 밑으로 원정(原情)* 온 것 이올시다.”
합장하듯이 손을 합하여 능청맞게 허리를 구부리며 병수는 말을 마쳤다. 간간이 밖에서 떠드는 소리가 들린다.
서장은 빨아들였던 담배 연기를 천천히 뿜으며 기침 한 번을 크게 하더니 두 손을 깍지 끼어 테이블 위에 놓으며 중정 대리를 돌아보면서,
“그것이 정말이라니 그러면 어째서 그렇게 되었던 말이오?”
하고 물었다.
중정 대리는 휘청휘청하도록 큰 키와 몸에 어울리지도 않을 만큼 방정맞게 고개를 연방 죄며,
“네 네, 저 역시 남의 밑에 있으니까 시키는 대로 할 뿐이지 어찌 제 맘대로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일이 이렇게 된 이면에는 내용이 있습니다.”
하고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씻는다. 삼월 하순이라 서장실 한쪽 난로에는 아직도 불이 피어 있는 일기이었건만 그는 속이 쪼들려서인지 이마와 콧마루에 땀방울이 솟아올랐다.
“그러면 그 내용이라는 것은?”
서장이 묻는 보람도 없이 중정 대리는 말하기를 꺼리는 듯이 입맛만 다시고 있다.
“자, 그 내용을 말해보시오.”
서장이 다시 재촉하여도 그는 주저하기만 하다가 마지못하여 ,
“처음에 중정이가……”
하고 말을 시작하였다.
“중정이가 부청과 계약하기는 칠만 팔천 원에 정부하기로 하여서 금년 오월 말일까지 준공하기로 계약이 되었습니다.”
통역을 통하여 말을 교환하게 되는 자리인지라 서동권은 속으로 마땅치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서장이 자기의 동료들에게는 하대를 하고 중정 대리에게는 경어를 쓰는 것이 대단히 비위에 거슬렸다. 더구나 통역이 서툴러 일어로 듣고 나서 통역을 듣게 되면 시간도 지루할 뿐 아니라 긴장미가 몇 배나 감하여 마음대로만 한다면 동권이 자기가 나서서 통역도 하고 말대꾸도 하고 싶었지마는 말할 기회가 오기까지를 참을 수밖에 없었다.
동권은 서장의 무표정하게 뚱뚱한 얼굴을 건너다보다가 세 동료의 긴장한 눈들을 둘러보기도 하고 중정 대리의 얍실거리는 입을 노려보다가 잔뜩 거드름을 부리면서 통역하는 자를 눈 흘겨보기도 하였다. 마음에 합당치 못한 말마디에 가서는 헛기침도 하고 손도 비비며 앉았노라니 열아홉 살밖에 되지 않은 동권으로는 이 자리에 차분히 앉아 있는 것이 안타깝기만 했다.
유리창 밖에서는 동료들이 추운 듯이 팔짱을 끼고 여전히 왔다 갔다 하며 혹은 주먹을 휘둘러 보이기도 한다. 날이 갑자기 흐려지면서 바람이 일어나는 모양이다.
삼백 명의 노동자들이 동맹파업을 단행하고 이처럼 격분하여 경찰서에 쇄도하게까지 된 하수도 공사의 내막은 이러하였다.
실업 노동자들을 구제하기로 목적한 하수도 공사가 근년에 유행과 같이 각처에서 일어났다.
목포부에서도 실업 구제의 하수도 공사를 시작하게 되어, 중정이라는 자와 칠만 팔천 원의 경비로 육 개월 안으로 공사를 준공시키기로 청부계약이 성 립 되었다.
중정이는 칠만 팔천 원의 사 할을 제 주머니 속에 따로 떼어놓고 나머지 사만 칠천팔백 원으로 공사를 끝마칠 예산을 세웠다.
그러나 그는 현금이 없는지라 산본(山本)이라고 하는 자를 전주(錢主)*로 하여 우선 일만 팔천 원을 얻어가지고 보증금으로 청부 경비의 십 분의 일, 즉 칠천팔백 원을 목포 부청에 납입하고 나머지로 목포 등지에서와 나주 등지에서 삼백 명의 노동자를 모집 하였다.
그리하여 공사를 시작하되 삼 부로 나누어 판구(坂口), 복부(腹部), 영정(永井) 세 사람에게 삼 조 감독을 시켜 각각 십장과 노동자들을 두어 일을 하게 하였다.
부청과의 계약에 노동자의 임금은 기술노동자와 십장은 매일 일원 이상이요, 보통 노동자는 최하 칠십 전으로 정한 것이나, 중정의 비밀주머니 속으로 들어간 삼만 일천이백 원의 큰 구멍을 감쪽같이 때우는 오직 한 가지의 길은 노동자의 피땀의 삯전에서 착취하는 수단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노동자들은 오십 전 이하 삼십 전까지의 적은 삯에 목을 매고 유달산에서 사정없이 내리닥치는 찬 바람과 뒷개펄판에서 몰려오는 눈보라를 맞으며 꽁꽁 얼어붙은 땅을 파기 위하여 종일 곡괭이질과 남포질*로 돌을 뜨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일을 시작한 지 석 달 동안에 삯이라고는 돈으로 한 번 받고 십이 전짜리(보통 쌀 십칠 전 할 때) 싸라기로 한 번 탄 일밖에 없었다.
중정이는 목포 공사 외에 보성 벌교에 다시 하수도 공사 청부를 맡아 그곳에 현금을 쓰느라고 노동자들의 임금 지불의 기한을 내일이니 모레니 미루어 속여오는 한편, 전주인 산본이가 중정을 의심하여 출자를 하지 않는 까닭에 중정의 돈길이 끊어진 것이다.
죄 없는 노동자들은 삯은 받지 못하고 전표만 매일 받으며 고픈 배를 움켜쥐고 뼈가 닳아지도록 외상 일을 하되, 걸핏하면 십장과 감독에게 두들겨 맞으면서 압제만 당할 뿐이었다.
“아니 우릴 허수아비로 아는 것이냐?”
“우릴 피가 없는 기계인 줄만 알고 있는 모양이지.”
영구한 허수아비인 줄만 알았던 그들도 마침내는 불평을 터뜨려 삼 개월로 접어들면서부터는 태업하기를 시작하다가 사 개월이 되는 삼월 하순에는 삼 조의 동맹파업 기분이 농후하여졌다.
부청에서 이 소식을 듣고 현장 시찰을 하기 위하여 북천(北川) 토목과 주임이 출장하여 보니 오월 말에 준공한다는 공사가 아직 호리가따*도 끝내지 못하고 있으며 게다가 좋지 못한 말까지 있어서 중정의 청부계약을 해약시켜버 렸다.
이러한 내막을 자세히 알게 된 노동자들은 이 돌연히 해약된 소문을 듣자 일제히 동맹파업을 단행하고 중정조 사무실에 몰려가 중정 대리를 붙잡고 이때까지의 임금을 지불하라고 격렬히 육박하다가 결국 경찰서에까지 이르게 된 것 이었다.
서장에게 그간의 내용을 말하는 중정 대리는 비밀한 사기행동의 말은 물론 하지 않고 다만 전주인 산본의 말과 청부계약의 해약만을 대강 얘기하여 동맹파업의 동기를 말하였다.
참을 수 있을 때까지 참느라고 애쓰던 동권이는 더 참을 수 없을 만큼 감정 이 폭발되었다.
“거짓말 말아라! 너도 중정이와 한 배짱이 아니냐? 왜 더 비밀한 말까지 하지 않느냐? 너도 양심이란 것은 있어서 옳고 그른 것은 아는 모양이지? 그러면서도 우리 노동자들에게는 사기수단을 쓰지 않았느냐?”
주먹을 쥐어 중정 대리를 겨누면서 유창한 일본말로 직접 대어들었다. 통역자가 깜짝 놀란 듯이 눈을 크게 떠서 동권을 훑어본다.
“하여간 그만큼 들으셨으니 부윤을 불러다 주십시오. 오늘 우리가 서장께 면회한 목적도 부윤과 직접 담판하여 그 책임을 물으려고 온 것입니다.”
처음에는 동료들이 알아듣게 하려고 우리말로 하고 다시 일본말로 서장에게 청하였다. 덕삼이와 재표, 병수도 말끝을 달아 부윤 불러주기를 청하였다.
서장은 통역자를 쳐다보며 의견을 말했다.
“촤우간 한번 쌍방의 말을 잘 들어보아야 알겠으니 부청에 전화를 걸어 토목과 주임을 오도록 하여주게나.”
통역자는 나갔다가 들어오더니 허리를 굽실하며,
“북천 주임이 곧 오시겠다고 합니다.”
하고 여쭈었다.
십 분쯤 지난 후, 밖이 갑자기 왁자해지면서 중정 대리와 거의 비슷한 키와 몸부피를 가진 북천 주임이 서장실에 나타났다.
서장은 그와 마주 앉아서 노동자 측의 요구와 중정 대리의 내용을 말한 후에,
“중정과의 정식 해약이 되었습니까?”
하고 물으니까 북천이는 큰 눈을 황당하게 더 크게 뜨며,
“아닙니다. 아직 정식 해약의 선언은 하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그렇다면 해약 송달을 하기 전에 노동자들의 임금을 먼저 지불해야 되지 않겠소?”
“그렇지만 어디 그렇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아니, 그러나 이때까지 한 번밖에 받지 않았다는 것은 너무나 지독하지 않소? 중정의 보증금에서라도 임금 지불을 하도록 하시구려.”
“그러나 해약하게 된다면 중정의 보증금은 몰수하는 것이니까 그럴 수도 없게 되지요.”
동권 이외의 세 사람도 말을 약간 알아듣기는 하는지라 북천과 서장의 입만 바라보고 있던 네 사람이 주임의 성의 없는 말을 듣자,
“그것은 안될 말이오.”
하고 소리쳤다. 동권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여보! 주임, 참 당신은 너무 책임 없는 말을 하오그려. 그래 그것이 실업자 구제라는 이름 좋은 하수도 공사의 내막입니까? 중정이는 칠만 팔천 원의 사 할을 혼자 떼어먹고 나머지로 역사*하느라고 칠십 전 이상의 임금을 삼사십 전으로 감하여놓았답니다. 그나마 매일 지불도 하지 않고 전표만 줄 뿐이었고, 받은 것은 돈으로 한 번 쌀로 한 번 두 번뿐이었소. 그뿐인가, 삼십이 전짜리 전표를 가지고 쌀을 받을 때는 한 되 십이 전짜리 싸라기를 십오 전에 주면서도 두 되에 삼십 전이면 이 전이 남는데 그 이 전까지 집어먹어버리는구려. 전표가 많거나 적거나 다 그렇게 당하였소. 그래 하루 종일 굶어가며 죽도록 당신네 일만 하는 것이 노동자의 실업 구제 목적 인 하수도 공사이오?”
동권의 목소리는 흥분으로 떨리기까지 하였다. 서장이 무슨 말을 하려 할 때 동권은 얼른 다시 말을 계속한다.
“그래, 그놈의 돈도 못 받는 전표는 무엇에 쓰란 말요? 저엉 군색할 때는 삼십오 전이면 삼십 전에 잡혀먹고 사십칠 전이면 사십 전에 팔아도 먹어보았소. 그래 한 사람 앞에 수십 장씩 다 가지고 있는 전표를 감쪽같이 살라버려주었으면 아주 고맙겠지요? 당신네가 중정이를 해약시킬 터이면 우리의 임금 지불을 끝내놓고 해야만 정당한 처리가 아니오? 당신네 손해보지 않을 일만 생각하고 수백 명이 굶는 일은 생각지 못하나요? 보증금에서 주라니까 뭐 그것은 압수니까 안되어? 그래 당신네 먹을 것은 칠천팔백 원 딱 떼놓고 삼백 명의 임금은 모른 척하려고 드니 정작 책임자인 부청 당국자는 중정이와 합동하여 삼백 명의 목을 졸라매어도 관계없단 말입니까? 서장! 이런 불법 자들도 가만두어야 옳습니까?”
그는 주먹으로 책상을 치며 입으로 불을 뿜는 듯이 북천이와 서장을 힐책하였다.
북천이가 오면서부터 밖에 있는 노동자 측의 태도가 불온해지는 것을 보고 서장실에는 보안계 외의 각계 주임과 형사들이 들어왔다가 동권이가 책상을 치며 힘 있는 말소리를 계속할 때 방 안은 잠잠하였고, 군중은 유리창으로 몰려와 들여다보다가 동권이가 말을 마치자,
“옳다! 그렇고말고! 어서 삯을 내놓아라! 안 준다는 법이 어디 있느냐?”
“버러지같이 보이는 우리라도 너희가 와락 그렇게만은 못할 것이다.”
하며 떠들어대는 것을 형사들이 밖으로 나가서 제재하였다.
북천이는 동권을 건방지다는 듯이 노려보았다.
“나 역시 나 한 사람의 결정으로 못하는 것이니까, 딱합니다마는 대관절 임금은 전부 얼마나 된다 합디까?”
정작 상대자에게는 외면하면서 북천은 서장에게 물었다. 네 사람은 삼백 명의 전표 계산서를 내놓았다. 북천이가 계산서를 앞으로 다가 본다.
“일천사백 원…….”
그는 한 번 뇌어보고 잠잠히 앉았다가 서장과 대표들을 둘러보며,
“닷새 이내로 중정이로 하여금 임금을 전부 지불하게 하되 만일 중정이가 할 수 없을 경우에는 부청에서라도 책임지기로 하겠소.”
하는 선언을 하였다.
삼백 명의 노동자들은 북천의 그 언약을 듣고서야 경찰서에서 물러났다.
삼부 노동조합 사무소를 나온 동권은 심한 피르를 느꼈다. 계모의 야단치는 서슬에 아침밥도 받았다가 그냥 내놓고 점심도 굶은 데다가 저녁때도 지난 황혼이 되고 보니 시장기가 몹시 들 뿐 아니라 경찰서에서 너무 흥분하였던 탓인지 열까지 오르는 듯하여 오늘 밤에는 집에 가는 길이 더 험하고 돌멩이도 많은 것같이 느껴졌다. 사립문을 힘없이 젖히고 들어서는 동권을 보자 계모는,
“오늘은 돈푼이나 생겼는갑다. 인자사 어술렁 어슬렁 기어오게……”
하면서 밥상을 마루 밑 부엌에 서 있는 딸에게 내어주더니 또 트집이다.
“오늘은 돈을 꼭 탄다고 하더니 그래 얼마나 가지고 왔냐?”
“흥 돈?”
어느 결엔지 동권의 입에서 탄식 같이 새어나왔다.
“뭐? 어째? 흥 돈? 아따 이놈 봐라. 이놈이 인자 조소까지 하는구나. 그래 돈 돈 하니께 돈에 미쳤다고 조소하는 셈이냐?”
계모는 납죽한 입을 악물고 딱부리눈을 똑바로 떠서 동권을 보며 체머리를 살살 흔든다.*
“누가 조소했소? 돈도 못 탔는데 돈 말 하니까 얼척 없어* 그랬지.”
“옳다. 말대답 자알 한다! 돈을 타서 까먹어버리고 조소를 하는지 참말로 못 탔는지 뉘 아들놈이 네 말을 곧이들어?”
말을 할 기운도 없거니와 조석으로 얼굴만 대하면 언제나 당하는 노릇이라 동권은 시들한 듯싶게 잠자코 앉아 있다.
“돈도 못 타고 일도 안하면서 진작 와서 밥이나 처먹을 것이지 어디가 자빠져서 놀다가 인자사 깔대와? 딴 상 차리기 좋은 사람은 어디 가 있는가? 종년이나 하나 데려다 놨는가보구만. 으응! 아니꼽게…….”
계모는 방정맞게 작은 제 키만한 담뱃대를 들고 발딱 일어나서 부엌으로 불을 붙이러 들어간다.
“어머니, 무슨 그런 말을 다 하시오? 그만해두시오. 오빠는 어서 방으로 들어가서 밥 먹어요.”
계모가 데리고 온 딸인지라 어머니의 하는 말이 온당치 못하다고 생각된 희순은 자기 어머니에게 가만히 핀잔을 주며 밥상을 들고 섬돌*로 올라온다.
“뭣이 어째? 주제넘은 년. 넌 가만히 자빠졌어. 편들어주면 고마운 줄 알께비?”
그는 담배를 뻑뼉 빨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동권을 흘겨보며,
“이때까지 키워놓은 공갚음 하노라고 흥 돈? 함서 코웃음 치는 것 봐! 이놈아, 뭐 공으로 큰 줄 알고 인자는 조소까지 해? 되지 못한 건방진 놈의 자식 같으니.”
하고 또 담뱃대를 든 채 발딱 일어선다.
“그만저만 해두소. 종일 굶은 놈 저녁이나 먹으라고…….”
방에 들어앉았던 동권의 아버지가 듣다 못하여 말했다.
“뭐? 종일 굶은 놈? 누구는 배 터지는 사람 보는가? 이녁 아들이라고 편짜놓는구만, 그만저만 해두제. 누가 제 아들 뜯어먹는다고?”
“어머니, 그만두시란 말이오. 큰방 아주머니 부끄럽소. 오빠는 들어가 밥 먹으라니께야.”
“이 가스낭년이 왜 이렇게 볼게진다냐? 늙은것 젊은것 나 하나 가지고 지랄들을 하네. 엥, 내가 죽어사 요런 놈의 꼴을 안 보제.”
동권의 아버지는 동창으로 고개를 내밀어 마루에 걸터앉아 있는 아들에게,
“이놈아, 들어와서 밥 먹으라는 말이다. 배가 안 고픈 것이로구나. 그렇게 넋 빠지고 앉았게…….”
한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동권은 그제야 일어나서 방으로 들어와 밥상을 받아 막 한 숟가락을 떠서 입에 넣으려니까 계모가 또 종알댄다.
“어멈보고 비웃던 아가리로 그래도 밥은 잘 들어가는구나.”
동시에 아버지에게서 재떨이가 날아와 앙알대는 계모의 어깨를 툭치고 떨어진다.
“빌어먹을 년, 그만두라고 해도 너무 지랄한다. 요망스럽게 계집년이 왜 그리 방정이냐?”
계모는 악이 나서 파랗게 질린 입술을 악물고 재떨이를 집어 영감에게 도로 던진다는 것이 동권의 밥상에 떨어져 김치그릇이 왁자지끈하고 깨어지며 김 치국물이 쏟아진다. 동권은 벌떡 일어났다.
“에이 참, 해도 너무한다. 원 사람을 볶아도 분수가 있어야지.”
그가 중얼대며 밖으로 나가니까, 계모는 문께까지 쫓아나오면서,
“뭐 너무해? 사람을 볶아? 저 사람 잡어먹을 놈이 제 에미 잡아먹고도 못마땅해서 생사람 잡아먹을라고 볶는다는 것 봐! 엥이 못된 놈! 이놈!”
하고 깨어진 쇠그릇 소리 같은 목소리를 힘껏 높여서 악을 썼다.
“이년 요망스럽게!”
동권의 아버지가 쫓아나와서 발길로 차니까 딸이 뛰어오고 큰방 사람이 달려온다. 계모는 영감에게 덤비어 물어뜯으며 치고받고 말리고 하는 소란스러운 시간이 잠깐 계속했다.
동권은 포악스러운 계모의 울음소리를 뒤로 하고 사립문을 벗어나 불만 반짝이는 기왓가마 동리를 내려다보며 한숨을 후유 내뿜는데 희순이가 따라와서 동권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오빠! 어디 가지 말고 거기 좀 섰다가 밥이나 먹고 나가요. 종일 굶고 저녁까지 안 먹어선 안되지 않아요.”
희순은 고개를 숙이고 손등으로 눈물을 씻는다. 약혼한 처녀인지라 치렁치렁 한 검은 머리채며 발육이 좋은 등어리와 어깨에는 처녀의 황금시대의 아름다움이 서려 있었다.
“항상 하는 말이지만 어머니가 그러시는 것은 도무지 대꾸를 말고 그저 지나가는 사람의 짓이거니만 하란 말예요. 그러니깐 너무 속상하지 말고 밥이나 먹고 나가요.”
그는 오늘 저녁에 분투하고 온 오빠를 먹이려고 바느질품을 팔아 모아둔 귀한 돈에서 그의 좋아하는 제육을 사서 찌개를 해놓았던 것이다.
모처럼 들여놓은 정성이 깨어지게 될 때 처녀의 마음에는 애닯게 생각되었다.
동권 역시 밥상에서 잠깐 본 제육으로 보든지, 몸을 지탱하지 못하도록 시장함이라든지, 사실 그렇게 할까도 생각하여 망설이는 차에 안에서 들리던 울음소리가 뚝 그치며 ,
“희순아! 이년 어디 갔냐?”
하고 악쓰는 소리가 들린다.
“오빠! 꼭 그래요? 조금만 있으면 조용해질 것이니깐 큰방으로 들어와 밥 먹고 나가요.”
희순이 신신당부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무엇하러 깔대다녀? 서방 찾아다니냐?”
계모의 소리가 총알같이 날아와 박혔다.
“에이 더러운 여편네!”
기침을 한 번 칵 토하여 더럽다는 듯이 침을 탁 뱉고 동권은 발을 옮겼다.
동권은 윗길로 사무소에를 갈까, 용희의 집 앞으로나 지나보게 아랫길로 갈까 하고 망설이다가 아랫길로 발길을 돌려서 두어 걸음 내려오는데, 용희의 집 대문 처마 밑에서 검은 그림자 하나가 나오더니 마주 올라온다.
동권이가 그냥 지나치 려는데 그림자가 가까이 왔다.
“동권오빠 아니야?”
용희의 음성이다. 동권은 지극한 반가움에서 와락 용희에게로 대들다가 스스로 놀라 조금 물러섰다.
“용희가 웬일이지? 어디 가는 길이여?”
그는 처녀의 동그스름하고 하얀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하도 희순네 집에서 야단이 나길래 여기까지 와봤어. 그런데 밥도 안 먹고 어디 가는 거야?”
그윽이 쳐다보는 용희의 눈은 캄캄한 속에서도 반짝인다.
“밥을 먹었는지 안 먹 었는지 어떻게 알아?”
두 사람의 발길은 용희네 대문 앞으로 향한다.
“내가 그 집 문 앞까지 가서 다 들어봤지 뭐.”
용희는 한 손을 입으로 가져가며 웃는 모양이다.: :
자기의 집 대문까지 와서 용희는 빗장을 달각달각 밀었다.
“우리 집에 좀 들어가.”
“뭐? 다들 어디 가셨길래?”
“할머니랑 어머니는 오늘이 큰댁 제사라고 아침부터 기집애 데리고 가셔서 종일 나 혼자 있었는데…… 다들 내일 오시니깐 오늘 밤엔 용기랑 나밖에 없어.”
동권은 망설이고 있었다. 용희는 대문 안에서 또 재촉하였다.
“용기도 아까 큰댁에 보내면서 놀다가 오라고 했어. 어서 들어와! 남들 지나가다가 보겠구만그래.”
동권은 마지못해 들어가면서도 어쩐지 서먹서먹 해하였다. 용희는 대청마루를 지나 자기 방인 뜰아랫방으로 들어갔다. 걸을 때마다 그의 머리채가 발뒤꿈치에서 치렁거리는 것이 안방에서 새어나오는 붙빛에 보였다.
전등불이 환한 방 안에 들어선 동권은 먼저 이상한 향기에 취하는 듯하였다. 용희는 아랫목을 가리켰다.
“거기 앉어요.”
부끄러운 듯이 손으로 입을 가린다. ‘앉아요’ 라는 말이 서툰 탓이었다. 동권이 용희의 말대로 아랫목에 앉으니까,
“잠깐만 혼자 앉았어. 나 얼른 밖에 갔다 올게.”
하고 옥색 저고리의 소매를 걷으며 분홍 치맛자락을 걷어 찌르면서 밖으로 나갔다.
동권은 방 안을 둘러보았다. 이 집에 오기는 여러 번이었으나 방은 처음이다. 처녀의 방인 만큼 놓여 있는 것이 다 고운 것뿐이었으나, 제일 눈에 띄는 것이 불란서 자수 바탕으로 만든 책상보와 그 위에 모양 있게 책꽂이에 꽂아놓은 많은 책들이었다.
‘언제 어떻게 저 많은 책들을 구했나.’
동권은 속으로 놀랐다. 벽에는 사진틀이 걸려 있고, 저쪽으로는 남치마 노란 저고리들이 걸려 있었다. 나무 꺾는 소리가 들리면서 어느 틈으로인지 연기가 새어 들어온다. 책상 위에 놓인 시계는 여덟 시다.
동권은 일어나 책을 검사하여보니 한쪽으로 독본과 일본말 부인 잡지가 몇 권 있는 외에 모두가 높은 정도의 문학서적이었다.
‘아무래도 전문 정도의 누구가 배경에 있구나.’
생각하니 어쩐지 마음이 슬퍼지려고 하였다.
문이 열리고 용희가 밥상을 무거운 듯이 들어다가 그의 앞에 놓고,
“어서 밥 먹어요. 희순이가 그러는데 아침도 안 먹었다니 얼마나 배가……”
하면서 밥그릇 뚜껑을 벗겨놓았다.
“밥은 무슨? 조금만 놀다가 갈 텐데.”
그러면서도 김이 무럭무럭 나는 밥과 국이며 상으로 가득한 반찬을 볼 때 절로 손이 숟가락으로 가려고 했다.
“어서, 국이랑 식는구만그래.”
용희는 수저를 그에게 들려주며 알뜰하게 권하였다.
“반찬이 참 걸다. 용희는 늘 이렇게 먹는가?”
동권은 용희를 보고 빙그레 웃으며 우선 곱게 썰어놓은 제육을 집어다가 맛난 듯이 먹었다.
“다른 반찬들은 어머니가 나 먹으라고 우선 보낸 것이고, 그것 말야.”
용희는 손가락으로 동권이 집어가는 제육을 가리키며,
“그것은 희순이가 오빠가 제일 좋아한다고 사길래 나도 샀지.”
하고 상끗 웃는다.
“뭐? 나 줄려고 샀어?”
“그럼. 아까부터 희순이 어머니가 막 욕을 하고 오면서 죽이니 어쩌니 벼르길래 또 야단이 나서 저녁도 못 먹을 줄 알고 내가 맘먹고 샀는데. 따로 불러다가 차려줄려고…….”
“저런, 참 용하네. 어찌 미리 알까.”
농담과 같이 말은 던졌으나 아닌 게 아니라 정성을 다하여 미리 준비하였던 밥상인 것만은 알 수 있었다.
“하여간 고마와. 용희가 아니면 누가 나를 그렇게 생각하겠어?”
가슴이 찌르르하도록 감격하여 용희를 보니까 용희도 마주 바라보다가 부끄러운 듯이 눈을 주전자로 떨어뜨리며 손으로 주전자 몸뚱이를 만져본다.
밝은 불빛에 가까이 보니 열일곱 살의 처녀로는 한 살 위인 희순보다도 더 처녀답게 예쁘고 의젓했다. 작년 추석에 일본에서 막 나와서 얼마 되지 않아 동권의 아버지는 섬으로 일하러 가고 계모는 동권의 누님의 아기 받으러 가서 희순이와 둘이만 있을 때, 보름 동안을 날마다 두 처녀에게 가르치느라고 한방에 있어보았고, 그 후로도 가끔 만나기는 하였으나, 말조차 변변히 건네지 못하다가 일 시작한 이후로는 새벽에 나가고 밤에야 들어오게 되어서 맘으로만 간절히 사모하였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이렇게 다정하게 앉아 오순도순 말을 하게 되니 동권이나 용희는 꿈과도 같이 생각되었다. 용희는 동권의 밥 먹는 모양을 바라보면서 가슴이 쓰렸다. 동권의 얼굴이 작년보다 말 못하게 수척해진 것이다.
과연 동권은 몰라보도록 파리해졌다. 나가면 힘에 겨운 노동이요 들어오면 계모에게 달달 볶이는 것이다. 놀면 논다고 잔소리요, 일하니 돈 타오지 않는다고 성화였다. 그에게 위안을 주는 희순이 없었던들 가정의 매일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요, 마음으로 생각하는 용희가 없었던들 그의 생활이란 너무도 황량했을 것이다.
이 두 처녀의 숨은 위안과 동정으로 그의 정신만은 윤택하였을망정 심한 고역에 얼굴과 손은 터지고 거칠어져서 어려서의 귀엽던 모습과 상업학교 시절의 활발하던 기상이며, 일본서 막 나왔을 때와 같은 청년미는 사라지고 빛나는 눈만은 그대로 있으나, 이제는 검은 얼굴에 광대뼈까지 보이게 되는 한 건장한 노동자에 지나지 못한 것을 볼 때, 용희의 가슴은 찢기는 듯이 아프면서 눈물마저 돌았다. 한 그릇 밥을 다 먹고 난 동권이가 물을 달래려고 용희를 건너다보니 그의 맑은 눈에 눈물이 괴어 있지 않은가.
“용희! 웬일이여, 웅?”
용희는 얼른 주전자를 들어 그릇에 물을 따르며 딴전을 쳤다.
“아이, 물이 다 식었네.”
동권의 가슴이 후끈 더워지면서 목구멍이 콱 막히는 것 같아 헛기침을 한번 하였다.
“용희!”
동권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는 듯하였다. 용희는 ‘응?’ 할 수도 없고 ‘네?’ 할 수도 없고 잠잠히 치맛자락만 만지고 있었다.
“용희!”
“왜 그래요?”
그제야 용희는 눈살을 찡그리는 듯이 하고 고개를 들며 대답하였다.
“무슨 속상하는 일이라도 있어?”
“아니.”
“그럼?”
“어릴 때 지나던 일을 생각하니깐 괜시리 눈물이 나서…….”
“으음!”
동권은 신음과 같이 용희의 말을 긍정하였으나 가슴만은 여전히 아팠다. 동권과 용희는 죽동(竹洞)에서 위아랫집에서 살았다. 여덟 살 때 동권의 어머니가 죽고 다음 해에 희순의 어머니가 동권보다 한 살 아래인 딸을 데리고 계모로 들어왔다. 그때는 가세도 넉넉해서 희순과 용희가 함께 보통학교에 다녔는데 얼굴도 쌍둥이같이 예쁘거니와 재주까지도 비슷해서 서로 석차를 다투었다.
동권은 누님이 시집가던 해에 상업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집안 형편은 차차 기울어져서 목수인 그 아버지의 날품팔이만으로 네 식구의 호구를 계속하게 되었다.
동권이 삼학년 되는 해에 용희와 희순은 보통학교를 졸업했다. 용희는 객지에 보낼 수 없다는 부모의 사정으로 C여학교에 입학을 시켜 동권과 용희가 아침마다 나란히 한방향으로 등교할 때마다 희순은 못 견디게 부러워하였다.
그러나 이학기가 될 때 의외의 사건이 일어나 존경하던 상급생들이 모조리 잡혔다. 그렇지 않아도 가정상태로는 도저히 더 학업을 계속할 수 없는 형편이라 동권은 친한 상급생의 원조로 그해 겨울에 말썽 많은 가정을 떠나 동경으로 갔다.
그는 신문 배달을 하면서 고학하던 중 어떤 기회에서 정(鄭)이라는 지도자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동권과 동향인이요 학교의 선배로서, 일찍부터 머리가 명석한 뛰어난 수재라는 소문을 들었던 터라, 그를 매일 방문하고 가르침을 받았다.
그들은 부부가 함께 고학으로 대학생활을 하고 있었다. 동권은 정의 학문과 인격을 깊이 흠모하여 부지런히 어학과 사회과학을 배우면서 정신을 연마하다가 그들이 귀국하자 동권도 뒤따라 돌아와서 셋방살이를 하고 있는 집안을 도우려고 노동자의 한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용희의 아버지는 여전히 번화가에서 큰 포목상을 하면서 가족들은 죽교리에 새집을 지어 있게 하였고, 동권의 부모는 용희 어머니의 소개로 이웃집의 방 한 칸을 세들었던 것이다.
“용희!”
동권은 긴 추억에서 깨어나 눈을 뜨며 다시금 용희를 불렀다. 용희는 동권을 보았다.
“용희는 날 좋아하나?”
용희는 새삼스럽다는 듯이 동권을 흘겨보았다.
“용희가 날 사랑하느냔 말야?”
“어쩜! 번연히* 알면서도……”
용희는 원망스럽다는 듯이 동권을 강하게 흘겼다. 순간 용희의 뺨이 확 붉어졌다. 동권은 용희의 팔을 끌었다. 용희의 중량이 동권의 가슴에 실렸다.
“난 정 말 용희를 사랑해. 그렇지만·…‥”
“그렇지만?”
용희가 동권의 가슴에 머리를 묻은 채로 반문하였다.
“우리의 사랑은 현재 우리의 정세에 합당하지 못하단 말야.”
“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
“그런 것쯤이야 용희가 생각해보면 알겠지만 지금 우리는…….”
그러다가 동권은 귀를 기울였다. 대문 흔드는 소리와 함께,
“누님! 누님!”
하는 아우의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그럼 그 말은 숙제로 두어요.”
용희는 바쁘게 방문을 열고 나가며 말했다.
삼월 이십오일. 이날은 북천 주임이 삼백 명 노동자의 임금 전부를 책임지고 지불하겠다 하던 닷새 되는 날이다. 오전에 과연 북천 주임에게서,
“정거장 앞 ×상점으로 가서 받으라.”
는 엽서가 온 것이다. 그들은 일제히 ×상점으로 달려갔다. 갑자기 많은 방문객을 맞은 상점의 사람들은 무슨 영문인지를 몰라 당황하다가 그들의 내용을 듣고는 모두 눈들이 둥그레서 그런 일은 모른다고 하였다.
극도로 흥분한 삼백 명은 중정 대리를 끌고 부청으로 몰려갔다.
“거짓말쟁이 북천이 나오너라!”
“민중을 속이는 관청을 없이하라!”
“부윤을 끌어내라!”
과히 넓지도 않은 부청 마당에 물샐틈없이 박혀 서서 각각 한마디씩 소리치다가 와아 하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사무직원들은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고 이층에서도 우당퉁탕 내려왔다. 부청 앞에 있는 도서관에서 책을 읽던 사람들도 뛰어나왔다.
부윤은 이층에 죽은 듯이 앉았고 다른 계원들은 경찰서에 전화를 거느니, 노동자들의 침입을 막느니 하며 요란스러웠다. 정복과 사복의 순사와 형사들이 오륙 명이나 달려와서 군중을 위협하였다.
“잔소리 말아라. 우린 정당한 방법으로 우리의 임금을 찾고저 하는 거다.”
“대중을 속이는 것이 불법이지 왜 우리가 불법이냐? 오늘은 세상 없어도 우리의 피땀의 값을 찾고야 말 거다.”
“어서 북천이를 내놓아라!”
위협도 권유도 그들에게는 효력이 없었다. 고등계 형사 한 사람이 현관마루에 올라서서 두 손에 입을 대고,
“대표가 나오너라! 저번 날 서장께 면회한 대표 네 사람이 나와!”
하고 크게 외치니까 잠깐 조용하여지고 대표 네 사람이 나왔다.
“자네들 대표 네 사람이 들어가서 북천 주임과 직접 면대하여 처리해야지, 이렇게 몰려 들어가면 되지도 않을 것이고 법에도 결리네. 조용히들 하게.”
경어를 쓰지 않는 것에 비위가 틀렸으나 형사의 먈대로 그들은 토목과에 갔다. 북천은 태연스럽게,
“중정이가 돈을 가지고 그 상점으로 한시까지 오마고 했으니 그때까지 기다려볼 게지 왜 야료*를 하느냐?”
고 도리어 책망하듯이 말을 던지고는 다른 일만 하고 있었다. 그들은 하는 수 없이 한시까지 기다리기로 하고 나왔다.
이날은 아침부터 날이 흐리고 춥기까지 하여서 밖에서 몇 시간이나 기다리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부청 바로 위의 오포산(午砲山)에서는 깜짝 놀라도록 큰 소리가 터져나왔다. 오포*는 전 시가에 울리며 각 공장의 기적도 따라 울었다. 음식점 아이들이 각각 주문 맡은 음식을 들고 자전거로 왔다 갔다 하며, 사무원들이 식당에 들락날락하는 동안에 점심시간도 끝난 모양이었다.
한시가 되자 군중은 다시 끓기 시작하였다. 북천 주임이 나타나 큰 눈을 짐짓 가늘게 떠서 좌우를 살피며 아첨하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지금 광주에서 전화가 오기를 세시 차에 꼭 도착하마고 하였으니 미안하지 만 잠깐 더 기다려주시오.”
“거짓말 말아라! 오늘도 속일 테냐?”
“오냐, 또 거짓말만 하여보아라!”
무더기로 외치는 큰소리를 뒤에 두고 북천은 다시 들어갔다. 그들은 춥기도 하려니와 배가 고파서 견딜 수 없었다.
“밥을 내라! 너희만 배부르게 먹고 우린 누구 때문에 생배를 졸이고 있는 것이냐?”
군중들은 와글와글 떠들다가 형사들의 제지로 겨우 그쳤다. 도서관에서 글 읽던 사람들도 몇 번씩이나 나와서 내막의 얘기를 듣고 놀라기도 했다.
동권은 정이 그의 친구인 김씨와 도서관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 그에게 달려갔다. 그는 반기면서 싱그레 웃었다.
“차분히들 기다리고 있네그려.”
“어떻게 여기 오셨어요?”
“틈이 좀 나기에 와봤지. 그런데 언제까지 이러고들 있을 것인가?”
“글쎄요, 세시 기차로 온다니까 그때까지 기다릴 작정입니다.”
“이렇게 추운 날 밥들을 굶고 밖에서·…‥ 에익 참.”
정은 입맛을 쩍쩍 다시며 시계를 꺼내 보더니,
“벌써 세시 십 분 전이 아닌가? 또 언제와 같이 슬그머니 늘어져서는 안되네. 모쪼록 끝까지…….”
하고 다음 말을 이으려 할 때 고등계 형사가 가까이 오니까 슬쩍 말을 돌렸다.
“우편국에 왔다가 부청에 누굴 만나러 왔었네. 먼저 가니 천천히 오게.”
그는 친구와 천천히 오포산으로 올라가는 뒷문으로 나가면서 군중을 슬슬 둘러보았다.
거진 세시가 되었을 때 군중은 다시 움직였다. 대표들은 주임에게 갔다.
“우린 이 이상 더 기다릴 수가 없소. 목석이 아닌지라 춥기도 하려니와 배도 고플뿐더러 당신들의 교활한 수단을 생각하니 더 참을 수없이 감정이 폭발되오. 아직도 우리에게 변명 할 말이 남았소?”
동권은 강경하게 들이댔다. 북천은 머리를 득득 긁으면서,
“오늘은 나라도 꼭 주선해서 지불하려고 했는데 지금 현재 수중에는 사백 원밖에 없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소?”
하고 제법 의논성스럽게 말했다.
“안돼요 안돼! 다 내야 되오.”
병수는 주먹을 흔들며 반대하고 동권은 다시 물었다.
“세시까지 온다던 중정이는 어찌 되었기에 또 딴말이오?”
주임은 한 계원을 시켜서 다시 전화를 걸게 하였더니, 중정의 대답은 지금 대리가 돈을 가지고 자동차로 떠났다는 것이었다. 대표들은 나와서 동료들에게 다시 그 뜻을 전하였다.
위아래층 직원들도 각각 돌아가고 어느덧 전등도 켜졌으나 북천은 군중의 눈이 무서워 그대로 앉아 있었다. 군중들은 또 떠들기 시작하였다.
자동차 소리가 길게 나면서 정문으로부터 악마의 두 눈 같은 큰 불을 가진 자동차 한 대가 올라오다가 소리치며 마주 달려가는 군중을 보자 딱 멈췄다. 키가 작은 자가 한 손에 가방을 들고 안으로 들어가더니 북천과 함께 나와서 그들 앞에 섰다. 대리의 말은, ‘오늘 불가피한 사정으로 현금 육백 원만 가지고 왔으니 먼저 받으라는 것이다. 군중은 다시 버글거렸다. 북천은 소리를 높였다.
“하여간 오늘 안으로 얼마가 되든 지불하겠다는데 왜 떠드느냐?”
“뭐라구? 네가 말하기를 오늘 안으로는 책임지고 전부 지불한다고 하였다. 우리는 전부의 지불을 승인한 것이지 일부의 지불을 언약한 것은 아니다. 안된다! 대중을 속이려고만 하는 너희들의 수단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이렇게까지 속인다는 것은 너무나 비열하지 않으냐? 전부 지불을 하지 않으면 우리는 여기서 야경할지언정* 부청과 너희들을 떠나지 않겠다!”
우렁찬 소리로 힘차게 부르짖는 것이 동권의 소리인 것을 알자,
“옳다! 전부 지불이다! 사람을 밤중까지 기다리게 하고 이게 무슨 개소리냐? 차라리 내놓고 도적놈처럼 떼어 처먹어라!”
하고 일제히 소리소리 외쳤다. 의외의 강경한 노동자 측의 태도를 보고 키 큰 먼저의 대리가 와서 허리를 굽실거렸다.
“여러분, 참 면목이 없소이다. 오늘 전부를 지불한다는 것이 불가피한 사정으로 이렇게 되었으니 먼저 전표를 많이 가진 사람부터 받으면 삼 일 이내로 꼭 전부를 지불하겠습니다.”
그는 연방 머리를 굽히며 달래듯이 말했다.
“안된다! 너희가 어떠한 말로 달랠지라도 곧이들을 우리는 아니다. 우리는 넉 달 동안 굶어가며 외상 일을 해왔고 서약 이후 닷새 동안, 또한 오늘 종일을 이렇게 추운 밖에서 떨며 이 시간까지 몇 번이나 양보해가며 기다린 것이 아니냐? 아무리 철면피인 너희이기로 너무도 지독한 사기수단이다. 어떠한 방법으로라도 전부를 지불하여라.”
동권의 소리는 다시 외쳤다. 군중도 따라 소리쳤다. 한동안 강경히 반항하다가 너무도 돈에 주리고 시달린 그들은 전표 적은 사람부터 받겠다는 조건하에서 두 사람이 중정 대리를 데리고 그들의 삼조 노동조합 사무실로 향했다. 동권은 양보하게 된 것을 눈물이 나도록 분해하였다. 이를 갈고 주먹을 쥐어 맹세한들 어쩌는 수가 없었다.
그날 밤 육백 원의 지불을 받기 위한 삼백 명의 노동자들은 혈안이 되어 날뛰었다. 대리며 감독과 십장들이 아무리 권력을 쓰려 하였으되, 그들은 선후를 다투느라고 몇 사람의 머리가 깨어지고 옷이 찢어지며 서기가 얻어맞고 바뀌는 등 돈 때문에 일어나는 비절처참한* 광경이 현출될* 때, 동권은 몇 번이나 주먹을 부르쥐고 치를 떨었던 것이다.
삼 일 이내에 전부 지불하겠다는 것은 그들의 무기인 대중 기만의 한때 수단이었고, 근 보름 동안이나 걸리어서 나머지 팔백 원의 임금을 받게 되었는데, 중정 이와의 청부계약은 표면 해약이 되고 이견(二見)이란 자가 그 뒤를 이었다.
이자는 더욱 수단이 교묘하여 밀가루 몇 부대만 대주면 말없이 일을 잘하는 청국 노동자를 칠십 명이나 사용하였다.
공사는 다시 시작되었다. 남포와 곡괭이질로 파내는 돌과 흙으로 정거장 앞바다를 메우느라고 삼부의 철로는 바다로 향하여 놓이었다.
동권은 보통학교 후면 공사지에서부터 학교 앞을 지나 고무공장과 시장 등지를 뚫고 지나는 구루마*에 철로 타는 일을 하는 동안 꽃이 지는 봄과 잎이 피는 첫여름도 지나 칠월이 되었다.
그동안 남포에 몸을 다친 사람들과 해를 입은 집들이 많고 구루마에 치인 사람들의 수효도 헤아릴 수 없었다. 그중에는 과부 떡장수가 막 떡판을 이고 팔러 나가려는데 지붕 위로 넘어오는 돌에 치어 떡판은 개천에 빠지고 그는 종신 발병신이 되었고, 여덟 살 된 삼대독자가 구루마에 치여 두개골이 깨어진 일까지 있었다.
그들 피해자의 치료비에 대하여 동권이 감독에게 격렬하게 언쟁한 일이 있은 후로부터 감독은 동권을 미워하였다. 폭양이 미련스럽게 내리쬐는 한낮에 하루에 몇 번씩 왕래하는 구루마 일을 하는 것은 괴로운 일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돌과 흙을 가득히 싣고 손잡이를 턱 잡은 후 주욱 내려가다가 커브를 슬쩍 돌아갈 때에는 여름인 만큼 시원하고 유쾌한 맛이 그럴듯하나 빈 구루마를 둘이서 밀고 팔 정*이나 되는 쇠길을 걸어 올라올 때에는 내려갈 때의 시원한 맛 몇 배의 심한 고역이 되는 것이다.
동권은 구루마 위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면 언제나 쾌활하게 웃고 목례하며 지나쳤다. 정씨의 아내를 세 번 보았고, 용희도 두 번이나 만났다. 흙땀에 착 달라붙은 잠방이를 입고 밀대모자를 쓴 흙빛같이 검은 동권이 청국 노동자와 함께 구루마를 밀고 오는 것을 보고 용희는 그날 밤에 잠을 못 자고 울었다는 말을 희순에게서 들었다. 희순도 계모의 눈을 속여 흙 싣고 내려가는 오빠를 보러 갔다 와서는 동권이 갈 때까지 울고 있는 것을 보고 동권은 두 처녀에게 준열한 계몽을 시키기도 했던 것이다.
며칠 동안 장마가 계속되어 동권은 일터에 나갈 수 없었다. 이런 날은 집에서 읽고 싶은 책을 읽었으면 좋으련만 아버지조차 놀게 되니 계모의 잔소리가 더 심할 뿐 아니라 무덥기는 한데 좁은 방 안에 네 식구나 들어앉아 있을 수도 없어 그는 책을 들고 병수의 함바로 갔다.
함바에는 고역에 지친 그들이 낮잠을 자느라고 좁은 방 속에서 발을 맞춰 누워서 코를 골고 있고, 다른 방에서는 잡담이나 육자배기가락이 튀어 나오기도 하였다.
그들은 동권을 반갑게 웃으며 맞았다.
“우리 선생님 오시는가. 어서 들어오게.”
그들은 다투어 자리를 내주었다. 동맹파업 이래로 그들은 동권을 유일의 지도자로 알고 작은 일에라도 동권의 의견을 물으며 그를 무조건 신임하고 존경하는 것이다.
“자네는 비 오는 날이면 꼭 책을 가지고 다니니 제갈량의 호풍환우하는* 비결책 이나 되는가?”
서당 훈장을 하였다는 나이 지긋한 나주 사람이 농담 비슷이 말했다.
“참, 난 자네가 책 가지고 다니는 게 제일 부럽데. 저렇게 책이라도 맘대로 보면 얼마나 행복할까?”
보통학교 삼학년에서 퇴학당하였다는 병수는 부러운 듯이 말했다.
“책보다도 여러분과 같은 실제의 체험이 우리에겐 더 귀중한 것입니다.”
동권은 이번의 동맹곽업의 내막 이야기를 알아듣기 쉽게 하여서 그들에게 어느 정도의 지식을 넣어주었다.
점심밥이 되었다고 하니까 세상모르고 자던 사람들도 어느 틈에 일어났는지 검고 누르스름한 밥 한 사발과 소금에만 절인 무 몇 쪽을 담은 접시 하나씩을 들고 온다.
“동권이 좀 떠먹어보려는가?”
병수가 자기의 밥을 동권의 앞에 놓으며 하는 말이다.
“별소릴 다, 난 먹고 왔어요. 어서들 잡수시오.”
동권은 좌우를 돌아보며 권했다. 나주양반이 얼굴을 찡그린다.
“그것도 일할 때는 모르겠더니 자고 난 입에라 그런지 밥이나 반찬이나 너무 하찮네.”
“이것도 십 전씩이니 놀면서도 삼십 전씩 까먹는 생각해서 참아두시오. 김치나 좀 줘봤으면…… 밤낮 이놈의 것만……”
한 사람이 무쪽을 집어가며 불평이었다.
“참, 말이 났으니 말이지 너무 비싸다니께. 종일 벌었자 잘난 이 밥값밖에 못하고 게다가 이렇게 비 오는 날은 외상까지 지게 되니 참 소위 생불여사로군.”
또다시 나주 사람의 탄식이다. 그는 옥편이라는 별명을 들을 만큼 문자를 애용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한탄들만 하고 있을 게 아니란 말입니다.”
동권은 뜻 모를 소리를 한마디 남기고 함바를 떠났다. 아까보다도 비가 더 쏟아지며 공사하다가 둔 하수도에 누른 물이 폭포같이 기운좋게 몰려간다.
동권은 정씨의 집에 또 물난리가 났겠구나 생각하며 발길을 그의 집으로 돌렸다. 파란 칠을 한 유리창을 열려니까 문이 안으로 걸려 있었다. 그는 문을 똑똑 두드렸다. 그제야 안에서 미닫이 소리가 났다.
“누구?”
하면서도 한동안 지체하다가 문이 열렸다:
“아, 동권인가? 이 빗속에 웬일인가?”
“너무 비가 퍼붓길래…… 오늘은 안 가셨습니까?”
“응 몸이 좀 불편해서, 들어오게.”
그는 깔아놓은 요 위에 앉으라고 동권에게 권했다. 미닫이를 모조리 닫고 한편 구석에 책상을 놓았다.
‘아마 무엇을 쓰셨나보다.’ ;
“정혜는 할머니 댁에 갔습니까?”
말이 끝나자마자 온돌과의 사잇문이 가만히 열리며 정혜의 작은 고개가 내다본다.
“아빠가 이놈 해. 가면 못써.”
샛별 같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납작스런 작은 머리통을 좌우로 흔들면서 누구에게인지 모르게 종알댔다. 정혜의 머리 위로 정씨의 아내의 환한 얼굴이 나타났다.
“서군 오셨소? 이리로 들어오지요.”
그는 남편의 눈치를 살펐다. 남편은 동권을 데리고 안방에 들어왔다. 아기가 색색 잠들어 있었다.
“비가 하도 오길래 또 물이나 들지 않았나 하고 와보았습니다.”
“글쎄 퍽 걱정돼요. 저 봐! 곧 넘치겠는데.”
그의 아내는 뒷미닫이를 열고 개골창을 가리킨다. 동권과 정도 일어서서 보았다. 과연 굼틀대는 황톳물이 넘칠 듯 넘칠 듯 사납게 흘러간다.
“물이 들면 무슨 걱정이오? 내가 다 퍼내주는데. 자긴 까딱 않고 화풀이나 하고 있으면서…….”
정은 아내를 보고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말은 좋지. 누가 할 말이오. 내가 죽어가며 혼자 하면 마지못해 하는 척하면서…….”
아내는 남편에게 애교 섞인 웃음을 보이며 눈을 흘긴다.
"엄마, 아빠 밉다, 응.”
엄마의 눈치를 챈 정혜는 엄마를 쳐다보며 엄마의 편을 든다. 아기가 깨었다. 가난한 살림에서도 항상 화기가 넘치는 이 가정에 동권은 오기만 하면 떠날 맘이 없으나, 오늘은 어째 자기의 존재가 방해나 되는 듯하여 만류도 듣지 않고 그의 집을 나왔다.
각색 과실과 참외 수박이 밤과 낮으로 길거리에서 썩어나는 듯 싶게 한창이었으나, 제법 수박 한 통을 온전히 먹은 일이 없는 노동자들의 여름은 지나가고 추석도 멀지 않은 구월 십팔일이 되었다.
동권이 아침 여섯시에 시작하는 일터에서 흙과 돌을 가득 싣고 첫구루마를 타고 내려갈 때 보통학교 앞길에서 구루마 통행을 기다리고 섰는 정씨를 보았다. ˙
온 여름을 줄곧 겨울 양복과 겨울 모자로 지내온 그가 오늘도 그 양복 그 모자에 넥타이까지 매고 나선 것을 보면 어디 급한 출입이나 하지 않는가 하고 다시 돌아다보다가 깜짝 놀란 동권은 하마터면 구루마에서 떨어질 뻔했다. 고등계 형사 한 사람이 그의 뒤에 서 있는 것이다.
‘무슨 일로 이렇게 일찍 경찰서에서 데려가는 것일까?’
구루마가 고무공장의 모퉁이를 돌 때 저편 길로 형사 네 사람이 정씨의 집으로 몰려가는 것을 보았다. 동권의 다리에서 갑자기 힘이 빠지며 가슴이 두근거리면서 몸이 떨리기까지 하였다. 심술궂은 일본 형사 둘과 조선 형사 둘이 무슨 수나 난 듯이 달려가는 것을 본 동권은 정씨의 아내가 어린것들과 얼마나 놀랄까를 생각하고 구루마에서 곧 뛰어내리고만 싶었다.
두번째의 구루마가 내려갈 때 정씨의 아내가 옥색 양산을 높이 들고 책을 많이 묶어 들고 섰는 형사들과 차가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섰다가 동권을 보자 반가운 듯이 눈짓하는 것을 보고 동권은 더욱 놀라 가슴을 태우다가 점심시간을 타서 정의 집으로 달려갔다.
정혜의 외조모가 아기를 업고 있다가 동권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보고했다.
아침에 형사가 와서 딸을 데려갈 테니 아기를 보라고 해서 덜덜 떨리는 다리로 겨우 왔다는 것이다.
“그래 애어멈이 그제야 세수를 하고 애기 젖만 좀 주고 그놈들과 갔는데 이때까지 안 오니 애기는 보채고 어멈도 굶고 가고…… 아이구 저놈들이 어쩔려고 저러는지 어서 내가 죽어야 이런 꼴을 안 볼 텐데…….”
노인이 흐느껴 우니까 정혜도 따라서 소리치며 울었다.
동권은 난리 난 뒤같이 함부로 뒤적이고 흐트러놓은 고리짝*들이며, 문짝까지 떼어놓은 일본식 벽장을 둘러보면서 그를 위로할 말을 찾지 못하다가,
“너무 근심 마십시오. 정선생님은 모르겠습니다마는 김선생님은 꼭 나오실 것입니다. 이따가 밤에 또 오지요.”
하는 말을 남기고 일터로 돌아왔다.
지루하게 기다리던 오후 일곱시가 되자, 동권은 빨리 집으로 돌아가 옷을 바꾸어 입은 후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정씨의 집으로 달려가서 유리문을 드르륵 밀자,
“누구?”
하고 바삐 나오는 사람은 행여나 자기의 남편이 아닌가 하고 바라는 정의 아내였다.
“아이구 김 선생님 나오셨습니 다그려.”
“인제 곧 나왔지. 어서 올라오시오.”
그는 아기를 안은 채 앞서 들어가며 일변 말을 했다.
“싱거운 자식들, 공연히 종일 앉혀놓고 말 몇 마디 물으면서 내 아들 배만 곯렸지.”
“정 선생님은 못 보셨지요?”
“글쎄 분해 죽겠소. 점심 때가 지나기에 애기 젖은 어떻게 하느냐고 막 대들었더니, 고등계 주임이 그제야 전화를 걸어서 어머니가 정혜 데리고 아일 업고 오셨구려. 그래 어머니랑 정혜 먼저 오고 난 애기를 데리고 있는데 일곱시가 되니까 내일 또 오라고 슬그머니 내보내지 않겠소?”
“그래서요?”
“그래 고등계실에서 애길 업고 뚜걱뚜걱 내려오는데 그이가 보안계실 한가운데 의자에 와이샤쓰만 입고 얼굴이 벌게서 앉았는데 머리까지 헝클헝클합디다. 그런데 밥집 아이가 담배 재떨이 같은 데다가 밥하고 무쪽하고 툭사발*에 멀건 물 좀 떠서 그 앞에다 놓아주겠지. 그이는 나를 보자 깜짝 놀라서 서로 쳐다보고 망설이다가 그냥 나오는데 내가 돌아보니까 자기도 가만히 돌아봅디다. 말이나 몇 마디 하고 나올 텐데 그냥 나와서 생각할수록 분해 죽겠소.”
그는 남편의 그때의 모습을 그리는 듯이 멍하니 천장을 쳐다보았다.
그동안 목포에는 세 번이나 격문사건이 있었다. 시내 각 학교 공장과 각 요처에 선동 격문이 산포되었다. 그 내용의 심각한 것이나 산포방법의 교묘한 것이 재래 운동자의 소위*가 아니고 타처에서 들어왔다는 소문이 돌았다.
고등계에서는 혈안이 되어 표면 운동자를 모조리 잡아다가 오랫동안 검속 취조했으나 결국 헛일밖에 되지 않았던 것인데, 세번째는 더 광범한 범위 내에서 구속하여 정의 친구인 김이 체포되더니 끝내 정마저 잡힌 것이다.
정이 검거된 몇 날 후에 검속된 자들이 하나씩 나오기 시작하고 김과 정만이 남게 되었다.
그들은 끝내 시월 구일에 정을 주범으로 한 격문사건의 혐의자 육 명을 송국하고 말았었는데, 발각된 동기는 김이라는 사람의 애인에게 있었다는 신문의 보도가 있었다.
동권은 정을 잃어버린 후로는 자기의 온몸을 의지하고 있던 골격이 부서진 듯이 마음을 지탱할 수가 없었다. 자기의 매일의 노동은 무의미한 호구의 수단으로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밤이면 가끔 정의 가정을 방문하기도 하나 돌연한 정의 입옥(入獄)으로 그의 아내가 어린것들과 생활난에서 허덕이는 것을 볼 때에는 항상 자기의 무능력을 한탄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언제나 무거운 가슴을 안고 돌아오는 것이다.
십일월 하순! 만 일 년 만에 하수도 공사는 완전히 끝을 마쳤다. 뒷개에서부터 보통학교 뒤로 김장자의 대귈 같은 뒷담을 감돌아 유달산록의 허리띠와 같이 흐르고 있는 목포의 하수도는 굉장한 장관이었다.
최후까지 일을 계속한 이백 명의 노동자들이 흩어질 때는 그립던 처자를 만난다는 기쁨보다도 눈 날리고 꽃 피며, 푸른 그늘, 가을 달이 번갈아 가고 오는 일 년 동안 공동의 이해(利害)에서 같이 일하고 함께 싸우며 동고동락하던 동료들의 우정과 떠나기를 더 어려워하였다.
혹독한 추위와 폭염에 배를 주리며 뼈가 닳아지고 살이 깎이도록 일한 것은 누구를 위함이었던가? 그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처자들에게 가지고 갈 것은 빈주먹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들에게서는 동권에게서 받은 선물이 있었다. 떠나는 그들 중에는 동권이와 장래의 상봉을 언약하는 뜻있는 굳은 악수를 교환한 사람도 있었다.
희순의 결혼날이 십 이월 오일이라고 희순의 모녀는 빨래와 다듬이질로 한동안 일삼다가 이제는 밤낮으로 바느질하기에 눈뜰 사이도 없이 바빴다. 희순의 남편 될 사람의 선물인 장롱과 경대가 윗목으로 자리를 차지한 것이 눈에 띄면 어쩐지 동권은 섭섭한 맘이 들었다.
공사가 끝난 후부터는 펀들펀들 놀며 공밥을 먹는다고 계모의 잔소리는 몇 배가 늘었다. 동권은 한시도 집에 있을 수가 없어 하루바삐 떠나고 싶었으나 그 역시 맘대로 되지 않았다. 밤에는 남의 집에 가서 자고 조석이면 밥을 얻어먹으러 다닌다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하고 추근추근한 짓이냐?
현재 그에게는 정의 아내 이외의 절친한 사이도 없고 밤이면 몸을 붙여 자는 그 동무도 맘에 싫은 자였다. 더구나 며칠만이면 희순이가 집에서 없어진다는 것, 이것은 그의 유일의 위안을 뺏어버리는 것이다.
거기다가 용희 역시 어려운 문제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이다. 동권은 계모에게서 ,
“용희를 욕심내는 당지 권력가의 대학생 아들이 용희 부모에게 청혼했더니 부모는 허락하고저 하나 용희가 저사하고* 듣지 않는다.”
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그 말 끝에,
“언젠가 용기가 보니께 저 자식이 용희네 집에서 용희랑 둘이만 놀더라고 용기 어머니가 저놈을 의심한단 말여. 창자 빠진 놈, 그래도 사내자식이라고 계집애는 욕심나던가부구만. 정신 차려! 남 못할 짓하지 말고·…… 네까짓 게 가당이나 하냐?”
하고 소리지르니까 희순이가 방 속에서 자기 어머니에게 핀잔주다가 계모에게 머리채를 잡히고 얻어맞은 일까지 있었다.
그래서 동권은 사실을 알기 위하여 희순의 혼인날 그 집에 사람 없는 틈을 타서 겨우 용희에게 만나자는 뜻만을 통하니까 용희는 닷새 후면 자기 집에 아무도 없을 터이니 그날 만나자는 대답이었다.
닷새 후에 그는 용희의 방에서 용희와 마주 앉게 되었다. 삼월에 이 방에서 만날 때는 까닭 모르게 기쁘기만 하더니 웬일인지 오늘 밤은 그날과는 별다른 감정과 기분이 두 사람을 지배했다.
동권은 계모에게서 들은 말을 하고 그것이 사실이냐 물었다. 용희는 고개만을 까딱하여 보였다.
“그렇다면 용흰 왜 반대하나? 당자가 그만하니 용희도 행복할 텐데……”
“사랑 없는 결혼이라도?”
“교제하노라면 사랑도 생기겠지.”
“교제라구? 하고 난 나머지인데 저 책은 누가 보냈기에? 저 혼자 미쳐서 사 보낸 것들이지.”
“뭣? 교제랑 해봤다구. 이것 봐라. 책까지 사보냈다구? 용희도 무던하군. 어쩐지 내 짐작이 맞긴 했어. 편지 내왕도 물론 있었겠구만.”
용희는 숙였던 고개를 들어 동권을 원망스럽다는 듯이 빤히 바라보다가,
“그렇게 비웃을 것까지 없잖아요? 어려서부터 알고 있었단 말이지, 편진 다 뭐야? 저 혼자 용기 이름으로 책만 보냈지.”
하고 변명 비슷이 말했다.
“그만둬요. 그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은 정말 몰랐어. 누구의 입으로 사랑이니 뭐니 해놓고 이젠 나더러 어떻게 하라는 거지?”
흘겨보는 눈에는 눈물이 괴었다. 동권의 가슴이 울렁울렁 흔들렸다. 그는 용희의 손을 잡았다.
“용희! 그럼 어쩌겠다는 말아?”
“그런 걸 다 물어요?”
용희는 잡힌 손을 살그머니 빼내면서 새침 해졌다.
“용희, 전에도 한 말이지만 우리의 사랑은 현재 우리의 환경에 합당치 못하지 않아?”
“참 그것은 숙제로 두었지. 왜 불합당해요?”
“생각해보면 알지 않아? 결혼할 수 없는 사랑이 아닌가베. 내 몸 하나도 변변히 처리 못하는 위인이 어떻게·…‥ 난 아무리 생각했자 열의 하나도 좋은 조건이 없으니…….”
“결혼만 해야 좋은가? 사랑만 하면 되지.”
“그런 막연한 말이 어디 있어? 결혼은 아니해도 사랑만 하면 그만이라는 사고방식은 아예 하지 말아야 해. 늘 하는 말이지만……”
“그럼 어떻게 하면 좋아? 어머닌 이번 동기 방학에 그자가 나오면 혼인해버리 겠다고 지금 야단들인데.”
“하하, 그렇게 급하게 되었던가? 단단히 욕심이 나시는 모양이군.”
“참 기막혀 죽겠네. 난 죽으면 죽었지 그자와 결혼할 수는 없어.”
“그렇지만 용희! 난 여기 있을 사람이 못돼.”
“뭐요? 그럼 어디로 가요?”
용희는 깜짝 놀라 동권을 쏘는 듯 쳐다보았다.
“글쎄 나야 어딜 가든지.”
“그럼 나도 가지.”
용희의 샛별같이 맑은 눈이 반짝 빛난다.
“될 말인가. 난 내 일이 따로 있어서 가는 거야.”
“나도 같이 일하러 가지. 희순이도 시집으로 가면서 우린 언제든지 오빠가 하는 일에는 무조건 협력하자고 내 손을 잡고 그러든데:”
“그렇게 일이란 쉽게 되는 게 아니야. 지금 내게는 한가한 결혼 문제보다도 더 절박한 문제가 있거든.”
동권은 다시 용희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에게 좀더 다가앉았다.
“난 용횔 애인보다도 한 동지로 생각하기 때문에 조금도 서로 떨어져 있고 싶지 않아. 그렇지만 정세가 허락하지 않는 데야 어쩌겠어. 만일 용희가 날 끝까지 사랑한다면 용희 스스로 자신을 개척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아? 용희!”
동권은 용희를 안아보았다. 용희는 사르르 끌려왔다.
‘내 일평생 사랑하는 용희! 이럴수록 난 어서 빨리 떠나야 한다.’
내일 떠나기로 결심한 동권은 금년의 처음 추위인 쇠끝바람에도 겁내지 않고 삼백 명 동료들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하수도를 굽어보며 그 언덕을 걸었다.
초승달이 유달산 봉우리에 걸려 고향의 마지막 밤을 지내는 그의 가슴을 홀로 알아주는 듯이 내려다본다. 그는 팔짱을 끼고 천천히 뒷개로 향하여 걸어온다. 이 굉장한 하수도를 보는 자, 돈과 문명의 힘을 탄복하는 외에 누가 삼백 명 노동자의 숨은 피땀의 값을 생각할 것이며, 죽교동의 높은 이 다리를 건너는 자, 부청의 선정을 감사하는 외에 누구라 이면의 숨은 흑막의 내용을 짐작이나 하랴.
동권은 이런 생각으로 흥분하여서 못 한끝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찬 줄도 모르고 발을 돌려 정씨의 아내가 살고 있는 셋방 동창 앞에까지 왔다. 방 안에서는 정혜의 창가 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아빠가 가르치던 메이데이의 노래였다.
동권은 이윽히 그 자리에 섰다가 발을 떼었다. 어린 정혜의 목소리를 모진 바람이 휩싸 지나간다. 그는 집 뒤 잔등에 올라 멀리 바라보았다. 검은 벌판은 가없이 열렸는데 정미장에 조는 듯이 서 있는 전등불조차 바람에 깜빡이는 듯하다.
그는 더 멀리 감옥 편을 바라보았다. 크고 두려운 함굴이 있는 곳이나 같이 컴컴하고 음침한 기운이 떠돌았다.
“저 속에는 나의 오직 믿을 수 있는 지도자가 그의 모든 자유를 잃고 갇히어 있구나. 당신은 아내와의 면회 때도 내 안부를 물었다구요. 전 이제 떠나갑니다. 그러나 당신이 출옥할 때쯤은 꼭 즐겁게 맞으러 돌아오겠습니다. 그동안 부디 안녕하십시오.”
그는 암흑에서 주먹을 들고 약속했다. 눈발이 펄펄 날리기 시작했다.
그 이튿날 첫눈은 거리와 산과 들에 고르게 내리며 쌓이는데 용희는 한 장의 편지를 받았다.
모든 객관적인 정세가 나를 이곳에 머무르게 하지 않으므로 나는 이곳을 떠나고야 만다.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떠나는 나도 종시* 사람인지라 어찌 한 줄기의 눈물이 없을까마는 나는 보다 뜻있는 상봉을 위하여 떠나는 것이다. 용희가 참으로 나의 뜻을 알고 나를 사랑한다면 자기 스스로 모든 장애를 돌파하고 자체를 개척하여 나아갈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여성이라고 나는 믿고 있는 것이다.
부디부디 굳세 게 살아다오.
1931. 12. 13.
떠나는 동권
용희는 영창의 미닫이를 열었다. 나비 같은 눈송이가 펄펄 춤추는 듯이 날린다. 그는 반짝이는 눈으로 눈발을 쳐다보며 애인이 주고 간 교훈을 생각한다.
『동광 33호』 (1932. 5); 『홍수 전후』(백양사 1948), 『한국여류문학전집』 1권 (신세계사 1976)
박 화 성
소영(素影) 박화성(朴花城)은 1904년 목포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경순(景順)이다. 숙명 여고보를 졸업하고 일본 니혼(日本)여자대학에서 수학했다. 1932년 『동광』 에 「하수도 공사」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문학활동을 시작했고, 이후 「백화」 「홍수 전후」 「고향 없는 사람들」 등을 통해 일제강점기의 암울한 현실과 저항의식을 다뤘다. 해방 뒤에는 현실비판보다는 남녀의 애정관계에 관심을 갖는 등 대중성을 띤 신문연재소설을 많이 썼다. 1988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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