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순천시 별량면 동송리에 있는 첨산(295m)을 암(♀)첨산,
고흥군 동강면에 있는 尖山(313m)을 숫(♂)첨산 이라 부른다.
별량에 있는 암첨산은 옛부터 국가에 큰 변란이 있기전에 사람 울음 소리와 비슷한 곡성이
난다고 전해지며, 여순사건, 6.25한국전쟁, 80년 5.18때에도 이 같은 소리가 들렸다고
전해 온다.
고흥군의 수문장인 첨산
“ 멀리서 보니 작아보인다.....소설 태백산맥의. [첨산부분]
김범우는 순천행 기차를 기다리며 첨산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첨봉산 이라고 부르는
그 산은 언제 보아도 신비롭게 느껴졌다. 그 기이한 생김도 생김인 데다가 자리잡고 앉은
위치까지 특별해서 생겨나는 신비로움일 것이었다.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첨산은 거대한 세모뿔이었다.
산은 으레 줄기가 있게 마련이고, 그 줄기를 따라 크고 작은 봉우리가 형성되는 것이다.
그런데 첨산은 그렇지가 않았다. 양쪽에 아무 줄기도 거느림이 없이 혼자 우뚝 솟아 있는 것이
다. 그리고 하늘과 경계를 짓고 있는 양쪽 능선은 흡사 자를 대고 그은 것처럼 직선으로 뻗어
올라 봉우리에서 만나고 있었다.
첨산이 그런 생김일 뿐이었다면 신비로움을 느끼지 못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조물주는 직선
의 단조로움을 파괴하여 조화를 이루고 싶었음일까, 직선으로 뻗어오르던 양쪽 능선이 거의
봉우리 가까이에 난해한 곡선으로 다시 정상까지는 직선으로 맞닿고 있었다.
바로 그 부분 때문에 첨산의 신비로움은 잉태되고 있었다. 그 모습은 흡사 삿갓을 쓰고 있는
형상이었다.
그런 단정하고도 기이한 모습의 첨산은 자리를 잡아도 하필이면 뱀골재 너머에 바로
자리를 잡은 것이다.
지형적으로 보아 뱀골재는 어찌할 수 없이 벌교와 고흥반도의 경계였다.
그러므로 첨산은 고흥의 문턱에 자리를 잡고 있는 셈이었다. 그래서 고흥 사람들은 첨산을 고흥
을 지키는 수문장이라고 믿고 있었고, 벌교 사람들은 어디서나 그 기이하게 우뚝 솟아 있는 산
을 바라보면서 고흥 사람들의 말을 수긍했다.
고흥 사람들은 그 산을 신성시해서 함부로 오르지 않는다 고 했다. 김범우는 자신도 첨산을 한
번도 올라본 일이 없음을 상기하며 엷게 웃음지었다. 주위에 둘러쳐진 제석산이며 징광산 같은
것은 이미 국민학교 때 오르내렸고, 멀리 있는 조계산이나 지리산까지도 다 올라봤던 것이다.
그런데 한나절 거리밖에 안되는 첨산은 왜 오르지 않았을까. 아마 '함부로 오르지 않는다' 는 금
기 때문이었으리다. 오르지 않고 바라보기만 하는 산, 그런 산을 하나쯤 가지고 있는 것도 아름
다운 일이리라 싶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바라보니 첨산이 더 신비스럽게 다가드는 것을 그는
느끼고 있었다.“
- 조정래 소설『태백산맥』중에서
두방산에서 바라본 고흥의 첨산 모습........
두방산(斗傍山)은 동강에서 四산이라 하여 봉두산,병풍산,첨산과 함께 명산으로 꼽고 있다.
높이 489m의 산 정상에 장군석과 신선대, 베틀굴이 있다.
“귀절암”이 있어 귀절산 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당시에 낙안군수 및 선무원종
이등공신 으로 봉하여진 송득운 장군(여산송씨)의 충절을 기려 “서산”
이라고도 하고, 향토사에는 “지내산”이라고도 하였다.
어찌보면 두방산보다 더 알려진 산이 첨산(313m)일 것이다. 비조암에서 동쪽으로 능선을 내려
섰다가 다시 오르면 첨산이다.
조정래의“태백산맥”에 인용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신비하고 신성한 산으로 각인 되어 왔으
며 1597년(선조30)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 이순신의막 하에서 활약하였 던 송대립(宋大立)長軍(여산송씨)이 의병을 모집하여 분전하다가 순절하였던 곳이 또한 첨산이다
첫댓글 첨산이 피라미드 모양이네. 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