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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천안 UBF 오요한 목자의 성경 66권 강해서 원문보기 글쓴이: 말씀 선생
마가복음 2장 삼부 새포도주는 새부대에
말씀 마가복음 2:21-28(22)
예수님은 계속해서 생베 조각과 새 포도주 비유를 통해서 복음의 성격이 어떠함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21,22절을 보십시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것이 낡은 그 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 이 비유에서 생베 조각과 새 포도주는 예수님과 예수님의 교훈, 즉 복음을 가리키고, 낡은 옷과 낡은 가죽 부대는 장로들의 유전과 같은 유대교의 전통을 가리킵니다. 이는 복음은 유대주의와 근본적으로 합할 수 없음을 말해 줍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생베 조각과 새 포도주로 비유하신 것은 복음은 질적으로 새롭고 힘이 있고 신선하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복음은 유대주의와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복음은 인간이 만든 철학이나 사상이나 종교와도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복음은 그 자체에 생명력이 있고 늘 신선합니다. 어떤 점에서 그렇습니까?
첫째로, 복음은 어떤 몹쓸 죄인도 변하여 새 사람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인간이 만든 철학이나 사상은 사람의 인격 형성이나 가치관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지만 인간을 근본적으로 변하여 새 사람되게 하지는 못합니다. 불교나 유교와 같은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철학이나 사상이나 종교가 인간의 근본 문제인 죄와 죽음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죄와 죽음 문제를 해결해 주기 때문에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하여 새 사람되게 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16절에서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능력은 다이나마이트와 같은 폭발적인 능력입니다. 복음에는 어떤 몹쓸 죄인도 새 사람되게 하는 폭발적인 능력이 있습니다. 복음은 무기력한 중풍병자를 일어나 걷게 하여 자립적이고 개척적인 인생을 살게 하는 폭발적인 능력입니다. 복음은 이기적인 세리를 희생적이고 헌신적인 자로 변화시키는 폭발적인 능력입니다. 복음은 끼가 있는 사마리아 여인을 형제들을 낳고 키우는 믿음의 어미로 변화시키는 폭발적인 능력입니다. “하나님이 고치지 못할 사람이 없다”라는 책을 읽어보면 도저히 변화될 것 같지 않은 흉악한 죄인들이 변화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한 때 끔찍한 살인행각으로 세상을 놀라게 했던 지존파 중에서도 가장 악독했던 김현양은 이재명 집사님을 통해 복음을 영접하고 완전히 변화되어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감옥에서 30명 이상에게 전도를 하고, 사형집행 때는 4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찿았고 광명을 얻었네” 찬송을 눈물을 흘리며 끝까지 부른 후 “하나님 감사합니다. 할렐루야”를 외치며 사형집행을 받았습니다. 그가 벗어 놓은 흰 운동화에는 성구 두 구절이 적혀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23:43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말씀과 야고보서 4:14절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우리 가운데도 도저히 변화될 것 같지 않은 사람들이 복음을 영접하고 변화되어 새 인생을 사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저 사람은 도저히 변화될 것 같지 않아”라고 생각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면 틀림없이 변화됩니다.
둘째로, 복음은 낡은 전통과 가치관을 파괴시키고 새 역사를 창조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생베 조각이 낡은 옷을 당기고 새 포도주가 낡은 가죽부대를 터뜨린다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복음은 낡은 전통과 가치관을 파괴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영적 질서가 서고 진리에 기초한 올바른 인생관과 가치관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기존의 그릇된 질서와 가치관이 파괴되어야 합니다. 이는 새 건물을 짓기 위해서는 기존의 낡은 건물을 파괴시켜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노라.”(마 10:34)는 역설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전통과 기존 제도와 질서를 고수하고 그곳에 안주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이에 도전하여 개혁을 일으킵니다. 이 때문에 충돌이 불가피하게 일어나게 됩니다. 한 개인에게 복음이 전파될 때 반발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오히려 반발이 없는 것이 이상한 것입니다. 또 가정에 복음이 전파될 때 충돌이 일어나고 핍박이 있는 것은 매우 당연한 것입니다. 이런 충돌을 통하여 기존의 그릇된 질서와 가치관이 타파되고 진리에 기초한 새로운 영적 질서와 가치관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보이지 않는 가운데서 일어나는 혁명입니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런 영적 혁명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런 영적 혁명을 통해서 개인이 변화되고 가정이 변화되고 캠퍼스가 변화되고 사회가 변화됩니다.
한국 교회사를 보면 복음이 처음에 이 땅에 들어왔을 때 미신이 타파되고 생활이 개혁되는 혁명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 때 샤마니즘과 유불교의 낡은 전통과 가치관에 매여 있던 백성들은 심하게 반발했습니다. 이로 인해 예수 믿는 자들은 문중에서 축출되기도 하고 순교를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이런 반발을 뚫고 놀라운 개혁의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다니엘 기포드 선교사는 지금부터 113년 전 1888년 미 북장로교 소속으로 한국에 입국하여 새문안 교회, 언더우드 학당, 육영공원 등에서 목회와 교육에 전념하다가 1900년 이질에 걸려 조선에서 아깝게 짧은 생애를 마감한 선교사입니다. 그는 조선선교 초창기부터 보고 느끼고 체험한 사실들을 세밀하게 기록하여 “조선의 풍속과 선교”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는 이 책에서 조선인들은 유순하고 예의바른 민족이지만 특이하게도 아편을 피는 것을 제외하고는 가능한 한 모든 악습을 다 갖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백성들은 거짓말에 뛰어났는데 수세기 동안 지속된 조선의 관습이 백성들을 뛰어난 거짓말쟁이로 만들었다고 하였습니다. 또 노름이 성행하여 심지어는 자기 아내를 노비로 팔아서까지 노름에 미친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술마시기도 널리 유행하여 길거리에는 술 주정꾼들이 서로 상투를 잡아당기며 싸우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또 조선인은 수많은 종류의 귀신들을 섬기는데 조선의 거의 모든 남자들과 여자들의 4분의 3이 귀신들이 주는 무시무시한 공포 속에서 살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여행이나 이사를 했을 때 병이 나거나 혹은 문제가 생기면 그들은 굿을 하여 이 귀신들을 달랬습니다. 유교의 근간이 되는 조상숭배가 성행하였는데 이는 조상숭배의 충실성 여부에 따라 살아있는 그 후손들은 복을 받기도 하고 벌을 받기도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시대 분위기 가운데서 예수님을 믿고 개종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자신의 구세주로 영접하는 순간부터 그 인생의 진로에 커다란 혁명이 시작되었습니다. 개종을 하게 되면 그 동안 우상숭배에 사용했던 주물을 모두 태워버려야 하는데 그렇게 하면 마을 사람들로부터 미움과 조롱을 받은 것은 물론이고 그 가족과 친척들로부터 저주를 받고 축출을 당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영접하고 변하여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과거에 첩을 여러명 거느리던 사람은 조강지처와 그 자녀들만 제외하고 모든 첩들과 헤어졌으며, 술과 노름으로 일삼던 사람은 과거 습관에서 탈피하여 새 생활을 하였습니다. 상인이 개종을 하면 어떤 손해가 있더라도 거짓말을 하지 않고 정직하게 했으며, 주일을 지키기 위해 주일에는 장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하루 벌어 먹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또 죄를 짓는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이나 도덕적으로 양심에 어긋나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 개종을 하게 되면 그 직업을 버렸습니다.
최치량이라는 사람의 이야기는 마펫 선교사가 기포드 선교사에게 들려 준 것인데 이는 구원의 능력이 한 인간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를 확실하게 보여주는 좋은 예입니다. 마펫 선교사의 조사인 한석진 씨가 평양에 선교회 지부를 설립하기 위한 준비관계로 한 보따리의 전도책자를 들고 최치량이라는 사람이 경영하는 한 여관에 묵게 되었습니다. 최씨는 술과 노름 그리고 방탕한 생활을 즐기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농담과 시비를 일삼아 왔습니다. 사교성이 많은 최씨는 가끔 만나는 한씨를 따르게 되었습니다. 최씨는 한씨가 들려주는 이상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아주 싼 값에 팔리는 근사하게 생긴 전도책자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마펫 선교사와 한 씨가 선교활동에 필요한 대지를 구입하는데 최씨가 토지 중개인으로서 깊은 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 최씨는 사업상 마펫 선교사와 한씨의 요청을 거절할 수 없어서 주일예배에도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설교 말씀을 듣고 조금씩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성경말씀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는 열심히 성경말씀을 배우고 예배에 참석하더니 나중에는 완전히 변화되어 모범교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술과 노름을 끊고 다른 여자와 놀아나지도 않았으며 집안에서나 길거리에서 싸움질도 하지 않았습니다. 전에는 가장인 최씨가 집안에 들어서면 집안이 온통 두려움으로 가득했으나 지금은 행복과 웃음이 넘쳐나게 되었습니다. 최씨의 부인은 남편의 이같은 변화에 매우 즐거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두려운 마음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남편이 제사에 참여하지 않을뿐더러 집안에 모셔 둔 각종 신주 단지를 없애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최씨는 부인에게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습니다. “부인은 내가 어떤 남편이 되기를 원하오? 예수 믿고 술과 노름을 하지 않고 부인을 진정 사랑하는 남편이 되기를 원하오? 아니면 미신을 믿고 술과 노름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하며 부인과 아이들에게 무서운 가장이 되기를 원하오?” 그러자 부인은 최씨에게 제발 과거의 나쁜 버릇으로 돌아가지 말아달라고 간청하면서 또 제발 제사에는 참여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최씨는 분명했습니다. 두가지를 함께 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최씨는 처음 몇 달 동안 갖가지 유혹에 시달리며 어떤 때는 예수 믿는 것을 포기할까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러나 날마다 성경을 배우며 믿음을 강하게 키우게 되자 최씨는 놀랍게도 마음속에서 그렇게 자주 일어나는 갖가지 유혹을 기도로써 물리칠 수 있었으며, 자신의 신앙에 반대하는 가족들을 위해서도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한번은 그의 친구들이 그에게 강제로 술을 먹이고자 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은 건강이 좋지 않아 술을 마실 수가 없다고 하였으나 친구들이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최씨는 술을 먹으면 복통이 일어난다고 하였으나 역시 믿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수단으로 그는 자신은 예수 믿고 기독교인이 되었기 때문에 술을 마실 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친구들은 최씨의 상투를 잡고 서양 오랑캐의 교리를 믿는다고 조롱을 하며 이제 옛 친구가 되어버린 자신들과 마지막으로 한잔 하자고 했습니다. 최씨는 어쩔 수 없어서 그러겠다고 한 후 잠시 집을 빠져 나와 마펫 선교사에게로 달려 왔다고 합니다. 최씨는 처음으로 평양교회의 교인이 된 7명 중의 한 사람입니다. 후에 그는 기독교 박해 사건으로 투옥이 되었습니다. 친분이 있는 한 관리가 최씨를 조용히 불러서 만약 죽고 싶지 않으면 기독교 신앙을 버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최씨는 죽으면 죽었지 이 신앙만큼은 절대로 버릴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영원히 살고 싶어서 잠간 죽는 길을 택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의 이런 모습을 보고 그의 가족이 다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의 믿음은 평양에 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어 선교 활동에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이렇게 복음은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켜 새사람되게 할 뿐만 아니라 낡은 전통과 가치관을 파괴시키고 새 역사를 창조하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새 포도주가 되십니다. 새 포도주는 신선하여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며, 또 팽창하는 힘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새술에 비유하셨습니다. 새포도주는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은 죄인들에게 죄사함의 기쁨을 주고 새 인생을 살게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활기 차고 생명력이 넘치며 새 역사를 창조하는 인생을 살게 하십니다. 우리를 강하고 담대하게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복음은 새포도주와 같이 언제나 생명력이 넘치지만 이를 영접하는 우리 자신이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고 하심으로써 우리 자신이 항상 새 부대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늘 새 부대가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새 부대가 될 수 있습니까?
첫째로, 끊임없이 배우고자 하는 겸손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위험한 것은 낡은 가죽부대와 같이 굳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굳어 버리는 가장 큰 원인은 교만과 안일입니다. 교만은 다 안다고 생각하고 더 이상 배우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이 겸손하게 배우지 않을 때 자연히 성장하지 못하게 되고 성장하지 못하면 낡은 가죽 부대와 같이 쓸모 없게 되어 버립니다. 사도 바울은 인간적으로나 영적으로 완숙한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자신은 아직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끊임없이 좇아간다고 하였습니다(빌 3:12-14). 우리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성장해야 됩니다(엡 4:13). 성장하기 위해서는 겸손하게 허리를 동이고 끊임없이 연구하고 배워야 합니다.
또 안일을 사랑하는 마음도 낡은 가죽 부대가 되게 하는 큰 요인입니다. 안일이란 개척을 싫어하고 안주하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또한 십자가를 지기 싫어하고 편하게 지내고 싶은 마음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고생하고 싶지 않고 편히 지내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개척 정신을 잃고 안일해 질 때 쓸모 없게 되어 버립니다. 우리는 학생 때는 선교비전이 충만하다가도 졸업을 하고 취직을 하면 현실적이 되어 선교비전을 잃기 쉽습니다. 또 처녀 총각 때는 선교비전이 충만하다가도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게 되면 더욱 현실적이 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선교비전을 잃게 되면 현실에 안주하고자 하는 마음 때문에 안일해져서 낡은 가죽 부대와 같이 되어버리게 됩니다. 우리는 좀 고생스럽지만 선교비전을 가지고 끊임없이 개척하는 삶을 살아야 됩니다. 그래야 낡은 가죽 부대가 되지 않고 늘 스피릿이 충만한 새 부대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육신의 나이가 문제가 아니라 스피릿의 문제입니다. 사도 바울은 늘 선교비전에 충만했기 때문에 “겉 사람은 후패하나 속은 날로 새롭도다”라고 하였습니다(고후 4:16).
이슬람 선교의 아버지 레이몬드 럴(Raymond Lull, 1232-1315)은 30세에 회심을 한 후 40세에 선교사의 삶을 살고자 결단했습니다. 그는 십자군 전쟁으로 인해 기독교에 대한 적대 감정으로 충만해 있는 이슬람권에 가서 사랑으로 복음을 전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는 40세부터 선교비전 가운데 아라비아어를 공부하는데 투자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튀니스에 가서 선교활동을 하다가 돌에 맞아 국외로 추방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정말하지 않고 75세 때 다시 도전했다가 다시 쫓겨났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슬람 선교사로서의 삶을 포기치 않았습니다. 그의 나이 80세에 다시 도전하여 결국 그는 81세에 자신이 간절히 원하는대로 순교의 반열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끊임없이 선교비전에 충만하였기 때문에 늘 새부대로서 인생을 살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까지 못할지라도 선교비전을 잃지 않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야 스피릿이 충만한 새부대의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둘째로, 회개함으로 복음 중심으로 끊임없이 개혁되어져야 합니다. 처음 신앙생활을 할 때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양들을 사랑하고 말씀을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을 해 나갈수록 점점 진리에 대한 열정이 사라지고 매너리즘에 빠져 형식적이 되어 버리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낡은 가죽부대가 되지 않고 새 부대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나 모임이 하나님 앞에서 회개함으로 복음 중심으로 끊임없이 개혁되어져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외적인 개혁에 앞서 먼저 심령이 개혁되어야 합니다. 개혁하는 데는 아픔이 있고 희생이 따릅니다. 그러나 아픔과 희생을 통해서 껍질을 벗고 새로워질 수 있고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23,24절을 보십시오.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그의 제자들이 길을 열며 이삭을 자르니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저들이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안식일 문제로 예수님과 바리새인들 사이에 충돌이 있게 되었습니다. 어느 안식일에 예수님 일행이 밀밭 사이로 지나갈 때 훈련받느라 늘 배가 고픈 제자들은 반사적으로 밀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런데 몰래 지켜보고 있던 바리새인들이 현장범을 잡았다는 듯이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나타나 날카롭게 비난했습니다. “보시오. 저희가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율법은 가난하고 배고픈 사람을 생각하여 이삭에 낫을 대어서는 안되지만 이삭을 손으로 잘라먹는 것은 허용하였습니다(신 23:25). 그런데 문제는 안식일에 이 일을 한 데 있습니다. 유대 랍비들은 안식일을 잘 지키기 위해 1261개조라는 까다롭고 복잡한 세부 규칙을 만들었습니다. 안식일에는 병고치는 것을 금지하였는데 이로 인해 피가 나면 싸매기는 해도 약은 못 발랐습니다. 또 안식일에는 추수, 타작, 키질은 물론 음식 준비를 해서도 안되었습니다. 이러한 규례들은 사람의 행동을 규제하고 얽어매어 본래의 정신에서 멀어지게 했습니다. 그들은 배고픈 제자들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했고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율법의 정신을 상실하고 율법적이고 비판적이 되었습니다.
25,2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 한 자들이 먹을 것이 없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예수님은 제자들을 지극히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들의 배고픈 심정을 이해하시고 다윗의 예를 들어 변호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다윗과 같이 귀히 여기시고 그들의 편이 되사 적극적으로 변호해 주심으로 그들의 기를 살려 주셨습니다.
27,28절을 보십시오.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예수님은 놀라운 선포를 하셨습니다.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이 안식일을 창설하시고 주관하시는 창조주이심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므로 안식일은 예수님을 중심으로 지켜져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중심에 모시고 예수님을 사랑할 때 자연히 안식일을 잘 지킬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심으로 법보다도 사람의 생명을 더 중히 여기셨습니다. 하나님은 엿새 동안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후 제 7일에 안식하시고 그날을 복주사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쉬고자 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복을 위해 창설하신 것입니다. 인간에게 안식일이 없다면 쉼이 없는 피곤의 연속일 것입니다. 안식일은 육체와 정신의 안정과 영혼의 영적 원기를 회복하는 날로서 인간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신랑이 되시고 새 포도주가 되십니다. 복음은 어떤 사람도 변화시켜 새 사람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힘써 복음을 전함으로써 개인이 변화되고 가정이 변화되고 캠퍼스가 변화되고 사회가 변화되는 변화의 역사가 충만하게 일어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