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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보산 산행 <☞ http://cafe.daum.net/phanmaum/FXy6/539>후 바삐 찾아간 부소산성.
2시간은 걸리겠지만 30분을 뚝딱 잘라버리고 1시간 30분으로 탐방시간을 제한할 수밖에 없었다.
부소산성(扶蘇山城)은 사적 제5호로서 둘레 2,200m, 면적 약 74만㎡.
금남기맥이 맥을 다하는 백마강(금강) 부소산을 반달모양으로 휘어감으며 산성이 축조되어 있다.
1차는 테뫼식이지만 다시 주위에 포곡식 산성을 축조한 복합식 산성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사비성(泗沘城)·소부리성(所夫里城)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곳은 538년(성왕 16) 웅진(熊津:지금의 공주)에서 사비(지금의 부여)로 천도하여 멸망할 때까지 123년 동안 국도를 수호한 중심산성이었다.
대개 성왕의 천도를 전후해 쌓은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영일루(迎日樓)와 반월루(半月樓)가 있지만 유인원기공비(劉仁願紀功碑)도 이곳에 있다가 부여박물관으로 옮겨졌다.
부소산(106m) 사자루(泗ㅇ樓) 부근에 약 700m 둘레의 테뫼식 산성이 있는데, 여기에는 사자루와 망루지(望樓址)가 남아 있다.
<사비(泗沘)의 '물이름 비(沘)'와 사자루(泗泚樓)의 '물맑을 자(泚)'는 서로 닮아 많이 헷갈리지만 사비루와 사자루를 병용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성내에는 동·서·남문지와 북쪽 골짜기에 북문과 수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밖에 고란사, 낙화암(落花巖), 서복사(西復寺) 터, 궁녀사(宮女祠) 등이 있다.
주위의 보조산성과 함께 도성을 방어하는 구실을 했지만 평시에는 왕과 귀족들이 아름다운 경관을 즐기는 비원으로 활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부소산성은 2002년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22세기를 위해 보전해야 할 아름다운 숲”으로 선정되었다.
부여10경 중 하나인 부소산성과 인근의 국립부여박물관,정림사지박물관,정림사지 오층석탑(국보 제9호),궁남지와 함께 부여의 대표적 관광지이다.
궤적
4.66km를 1시간 30분.
안내판
주차장에 차를 대고 바쁜 걸음으로 부소산성으로 입문을 한다.
안내판엔...
부소산성(낙화암) 가는 길과 안내판이 있고...
정문으로 향하는 중앙에...
백제의 왕도 부여 부소산성 안내석이 자리한다.
2층 누각 형태의 팔작지붕 정문과 그 옆에 매표소가 있다.
정문의 현판엔...
부소산문(扶蘇山門)으로 무림(霧林) 김영기의 글씨
입장료는 어른 2,000원(단체1,800원),
정해진 시간안에 답사를 마칠려면 바쁘게 움직여야 한다.
부소산성 안내문과..
좌우로 날개를 펼친 이정표
바삐 이파리 떨쿠는 가을나무 사이로 여행객 마음은 덩달아 바쁘다.
주위의 가을분위기도 놓칠새라 연신 셔터를 눌러가며...
삼충사 의열문(三忠祠 義烈門) 앞에 섰다.
의열문 현판
삼충사엔 백제의 세 충신 성충(成忠, ?~656)과 흥수(興首, ?~?), 계백(階伯, ?~660)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사당이다.
외삼문을 들어서 내삼문을 들어가면...
정면 3칸의 팔작지붕인 삼충사가 중앙에 자리한다.
현판.
묵례하고 셔터를 눌렀지만 세 분 백제의 충신들의 모습은 촛점이 흐려졌다.
사당 앞엔 1981년에 세워진 '삼충사중건사적비'가 있다.
하늘을 가리는 늦가을 단풍과 길에 떨어져 뒹구는 낙엽의 황량한 분위기는 만추(晩秋)의 풍경 그대로.
떨어지는 순간은
길어야 십여초
그 다음은 스스로의 일조차 아닌 것을
무엇이 두려워
매달린 채 밤낮 떨었을까
애착을 놓으면서부터 물드는 노을빛 아름다움
마침내 그 아름다움의 절정에서
죽음에 눈을 맞추는
저 찬란한
투신
-복효근님의 시 낙엽-
낙엽을 밟으며 가을을 읊조린다.
'어디 우산 놓고 오듯
어디 나를 놓고 오지도 못하고
이 고생이구나
나를 떠나면
두루 하늘이고
사랑이고
자유인 것을.
<정현종>
언제 또 다시 올 수 있으랴~ 지금 내가 걷는 이 길이 내 생의 마지막 길이 될지도 모르니~
포장로 좌측으로 테뫼식 산성길이 안내되어 있지만... * 테뫼식 산성은 산 정상부를 둘러가며 산성을 축조한 형태를 말한다.
안내판
.
영일루(迎日樓)는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01호.
부소산(扶蘇山)에 있는 조선시대의 누각으로 홍산현(鴻山縣) 관아 입구에 있던 것을 1964년 옛 영일대(迎日臺)가 있던 현재의 위치로 옮겨 복원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사비도성(泗沘都城)의 비원이던 부소산 동쪽 산정에는 임금이 매일 올라가서 동편 멀리 계룡산 위로 떠오르는 해를 맞이 하며
국태민안을 기원하던 영일대가 있었으며, 서쪽 산정에는 임금이 달맞이를 즐기던 송월대(送月臺, 일명 迎月臺)가 있었다고 한다.
영일루에 오르면 동쪽으로 정동리 일대의 광활한 평야와 청산성이 한눈에 굽어보인다고 하였지만....
2충 누각인 영일루엔 현판이 두 개 걸려있다.
누마루 안에 걸린 인빈출일(寅賓出日) 현판은 '삼가 공경하면서 떠는 해를 맞이한다.'라는 서경의 요전에 나오는 말.
서체가 주는 느낌이 역동적인데, 청양 사람 정향(靜香) 조병호(趙柄鎬)의 글씨
해를 맞이 한다는 영일루(迎日樓) 현판은 부여군 홍산면 출신의 원곡(原谷) 김기승(1909~2000)선생이 썼다
안내판엔 계룡산의 연천봉이 아득히 바라 보인다고 한다.
넓은 터에 보호휀스가 쳐져 있다.
충남 문화재자료 제109호인 부소산성 군창지(扶蘇山城 軍倉址) 안내판
부소산성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이 곳 땅 속에는 불에 탄 곡식이 발견됨으로 백제시대 군량을 비축해 두었던 창고터로 알려지게 되었다.
1981,1982년 두 차례에 걸쳐 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건물의 배치는 'ㅁ'자 모양으로 가운데 공간을 두고 동서남북에 창고를 지은 것으로 밝혀졌다.
조선시대초기에는 이곳에 건물을 세워 백제시대부터 자리 잡은 군창지를 다시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자료>
군창지 표석과 안내판
부소산성 표석과 안내판에 닿기 전 우측 능선으로 키높이의 부소산 정상을 어깨에 걸머지고 좋은길을 따라 걸었다.
그리고 반월루를 향한다.
반월루(半月樓)
백마강(白馬江)이 반달모양으로 끼고 도는 부소산(扶蘇山) 남쪽 마루에 있으며 부여 시가지(市街地) 전경(全景)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망대이다.
반월루 현판은 임자년(壬子年)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썼다. 임자년이면 1972년이다.
잘 가꿔진 부소산성.
부소산성은 테뫼식 산성에다 이를 둘러싸고 있는 포곡식(包谷式) 산성으로 이루어져 있어 여러 형태의 산성이 합쳐져 있는 복합식 산성이다.
또한 대부분 흙으로 다진 토성(土城)이다.
이 숲길의 이름이 '태자(太子)골 숲길'이라니 옛 백제의 왕자라도 된 듯한 기분.
고란약수는 ‘어용수(御用水)’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백제의 왕들이 궁녀가 떠다준 고란약수를 매일 마셨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하지만 궁녀들에게도 매일 아침 험한 산길을 올라 약수를 떠오는 것은 그리 쉬운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궁녀들은 간혹 고란약수 대신 근방에서 물을 길러 왕에게 바쳤다고 전해지고 있는데...
고란약수터 주변에서만 자라는 기이한 풀이 있어 이름을 '고란초'라 부른다.
약수를 떠오는 궁녀들이 고란초의 잎을 하나씩 물동이에 띄워 옴으로써 그것이 고란약수라는 것을 증명하였던 것이다.
어린이가 된 할아버지의 전설이 있다.
늙도록 자식이 없는 할머니는 자식을 갖고 싶어 할아버지에게 고란약수를 마시게 하여 회춘을 시도하였다.
한 잔 마시면 3년이 젊어진다고 하였는데,할아버지는 그만 여러 잔을 마셔서 어린이가 되고 말았다는 이야기.
백제신민루만건(百濟臣民淚滿巾) 백제 신민의 눈물 수건을 흠뻑 적셨지만
당당충의유하인(堂堂忠義有何人) 당당하고 충성스런 이 몇이나 될까?
약무당세낙화암(若無當世落花巖) 만약 당시에 낙화암이 없었더라면
고국강산적막춘(古國江山寂寞春) 옛 나라 강산은 쓸쓸한 봄이겠지
-부 여-
따뜻한 봄날에 동무들과/ 백제의 옛 서울 찾았더니
무심한 구름은 오락가락/ 바람은 예대로 부는구나
부소산 얼굴은 아름답고/ 우는 새 소리도 즐겁도다
성지(城址)는 지금도 / 반월(半月)이란/ 이름과 한 가지 남아있다
백마강 맑은 물 흐르는 곳/ 낙화암 절벽이 솟았는데
꽃처럼 떨어진 궁녀들의/ 길고 긴 원한을 멈췄으리
<작자미상>
사비루(泗庇樓), 또는 사자루는 사방이 트여있어 부여주변의 풍경을 즐길 수 있는 누각이다.
이곳은 부소산성에서 제일 높은 자리로, 원래 달구경을 했다는 송월대가 있었던 곳으로 예전에는 망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19년 임천면의 문루였던 개산루를 이곳에 옮겨 지으면서 사비루(사자루)라 이름하였다.
건물을 세울 때 이곳에서 정지원이라는 이름이 새겨진 백제시대의 금동석가여래입상이 발견되었다.
사자의 산하는 나라 이미 텅 비었어라
삼한의 지난 일에 탄식이 거듭 나오네.
맑디맑은 백마강엔 갈매기가 조용히 졸고
푸르른 계룡산엔 기러기 그림자 듬성해라.
차가운 달빛 높은 누대는 용을 낚은 뒤요
쓸쓸한 바람 높은 바위는 낙화의 나머지로다.
고금천지에 영웅의 한을 애달파하면서
석양의 외로운 배를 가는 대로 맡겨두노라.
— 서거정-〈부여(夫餘)에서 옛일을 생각하다〉
사비루의 현판 글씨는 조선말 의친왕(義親王 1877~1955) 이강(李堈)공이 쓴 것이며 당시에는 사자루라 현판하였지만 사자루와 사비루는 병용되어 쓰이고 있다.
사자루의 강쪽에도 또다른 편액인 해강 김규진의 '백마장강(白馬長江)'이 걸려있는데,나는 그만 놓치고 말았다.
안내판
부여회고 (扶餘懷古)
백제도성총고 (百濟都城摠古)
구상전벽해사 (丘桑田碧海使)
인수천정무형 (人愁天政無形)
산역역군창여 (山歷曆軍倉如)
몽수유유화락 (夢水悠悠花落)
고암천재루용 (高巖千載淚龍)
탄백마일조추 (呑白馬一朝秋)
삼충의백금래 (三忠義魄今來)
조홀억라강경 (吊忽憶羅江競)
도주 (渡舟)
전라남도 나주군 반남거인(潘南居人) 금운 정순규(錦雲 鄭淳圭)
백제 도성이 모두 옛 언덕이 되었구나.
상전이 벽해가 되었으니 시름 겨워라.
천정은 형체도 없으나 산 모양은 역력하고
군창터는 꿈같지만 강물은 유유히 흐르네
꽃이 높은 바위에서 떨어지니 천년 눈물이요
용이 백마를 삼키니 하루아침에 스러졌구나
성충(成忠), 흥수(興首), 계백(階伯)의 넋을 오늘 와서 조문하니
문득 라강을 다투어 건너던 배 생각나는구나.
부여회고 외에도 사자루 누정엔 또다른 시판(詩板)과...
1990년도의 사자루 중수기와...
半千基業作荒丘 5백 년 터전이 황량한 언덕이 되니
滿木山河摠是愁 눈에 가득한 산하가 모두 근심이네.
落花孤巖春寂寂 낙화암 외로운 바위는 봄날에도 적적하니
龍亡大洋水悠悠 용은 죽고 큰물만 유유히 흐르네.
管絃當日繁華地 그때는 풍류가 번화하던 땅이었으나
漁逐斜陽慘憺秋 해 질 무렵 어부가 고기 잡는 참담한 가을날
白髮那堪今古淚 백발이 된 지금 눈물 견디기 어려워
滄浪一曲更回舟 창랑가 한 곡조 부르며 배를 다시 돌리네.
— 송용재 〈사자루〉 판상시
낙화암 백화정과 고란사 유람선 선착장 갈림길의 이정목
낙화암엔 1929년 세운 정자 백화정(百花亭)이 앉아 있고,표석 뒷면엔 이광수의 낙화암 시가 적혀있다.
정자 우측에는 푸르른 천년송(千年松)이 천년의 세월을 견디고 있다.
사자수 내린 물에 석양이 빗길 제
버들꽃 날리는데 낙화암이란다
모르는 아이들은 피리만 불건만
맘 있는 나그네의 창자를 끊노라
낙화암 낙화암 왜 말이 없느냐
낙화암 빗돌의 전면엔 백제의 여인들이 적군에게 잡혀 치욕의 삶을 이어가느니 충절을 지키기 위하여 스스로 백마강에 몸을 던졌다는 기록이 적혀있다.
나라가 망하니 산하도 옛 모습을 잃었고나
홀로 강에 머문 달은 몇 번이나 차고 이즈러졌을꼬
낙화암 언덕엔 아직 꽃이 피거니
비바람도 그 해에 불어 다하지 못했구나
-조선 중기의 문신 홍춘경(洪春卿)-
백화정엔 두 개의 현판이 걸려있는데,앞면 현판의 글씨는 석정(石丁) 안종원(安鍾元)
낙화암 절벽위에 비바람 눈서리 다 머금고 천년을 보냈구나.
세월도 잊은 그 빛깔 늘 푸르름은 님 향한 일편단심 궁녀들의 혼이런가.
안내판
옆면에 걸린 백화정 현판은 우하(又荷) 민형식(閔衡植, 1875~1947)의 글씨
조선 초 문신, 김흔의 시 '낙화암'에는
'삼천의 가무 모래에 몸을 맡겨 꽃 지고 옥 부서지듯 물 따라 가버렸도다(三千歌舞委沙塵 紅殘玉碎隨水逝)'라는 구절이 나온다.
낙화암의 궁녀들은 가파른 절벽이 무서워 치마를 들춰 눈을 가리고 백마강에 몸을 던졌다. 오색빛깔의 치마는 꽃(花)으로 묘사됐다.
꽃잎이란 비유는 막다른 목숨을 승화한 가혹한 아름다움이다.
낙화암
백화정 전망대에서 당겨본 고란사의 모습
그리고 아픈 역사를 애써 감춘 백마강.
이 시는 나당연합군에 의해 패망한 백제의 역사를 회고하며 다시는 외세가 이 땅을 침략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쓴 것이리라.
당시 당나라 배는 금강을 거슬러 이곳으로 올라왔을 터이니...
백제 왕업 어디 가고 부소산만 남았는가
백마강 찾은 길손 문득 시름이 이네그려.
반월성은 텅텅 비어 봄마저 적적하고
고색창연 낙화암은 아득한 꿈이어라.
사람들은 생각 있어 옛일 두고 상심하지만
무정한 저 강물은 몇 년 세월 보냈던가.
이 역사를 전철 삼아 다시 밟지 않는다면
금강 따라 중국 배가 다시 오지 않으련만.
- 김집 〈백마강>-
유람선을 타면 절벽에 새겨진 송시열의 글씨인 낙화암을 볼 수 있다고...
강 쪽으로 더 내려가면 고란사다. 백제 말기의 사찰로 앞에 백마강이 흐르고 절 뒤 돌틈에 고란정(井)과 고란초가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麻谷寺)의 말사이다.
일설에는 부소산은 백제 왕궁의 동산에 속한 것이므로 그 때에는 절이 없었고, 낙화암 3천궁녀의 혼을 위로하기 위해서 1028년(고려 현종19) 지었다고도 한다.
절 일원이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98호로 지정되어 있다
회고루(懷古樓)와 진공묘유(眞空妙有) 현판
`眞空妙有(진공묘유)`라는 편액은18세의 승려 신동호(申東浩)가 쓴 것이란다.
진공묘유란 반야심경의 '色不異空空不異色 色卽是空空卽是色(색불이공공불이색 색즉시공공즉시색)`의 오묘한 이치를 표현한 말.
색(色)은 물질적 현상, 공(空)은 실체가 없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구절은 곧 물질적 세계와 평등 무차별한 공(空)의 세계가 다르지 않음을 뜻하는 것이다.
이것이 가유(假有)의 존재인 색에서 우주의 실상을 발견하는 원리인 것이다.
그렇다면 색의 당체(當體)를 직관하여 그것이 곧 공임을 깨달을 때만이 완전한 해탈에 이르러 진정한 대자유인이 될 수 있다.
진공묘유란 그래서 깨달음에 이르는 핵심인 것이다.
회고루 편액은 만송(晩松)이 썼다.
고란사(皐蘭寺)의 이름은 고사리목에 속하는 양치식물인 고란초에서 따왔다. 현판은 해강 김규진(海岡 金圭鎭, 1868∼1933)의 필체
글씨 양쪽의 운치있는 난초는 죽농 안순환(竹濃 安淳煥)이 쳤다.
극락보전 현판
고란사 종각인 영종각(靈鐘閣) 현판.
고란사 밑 선착장에서 유람선(황포돛대,일반유람선)을 타고 구드래선착장으로 나와도 된다. 이 날은 탐방객이 없어 이용하는 사람이 없다.
백마강변에 간신히 터를 잡은 고란사. 영종각의 고란사 종소리가 은은히 들리는 것 같다.
-----상 략----
고란사의 종소리가 들리어 오면
구곡간장 찢어지는 백제 꿈이 그립구나
아~아 달빛어린 낙화암의 그늘 속에서
불러보자 삼천 궁녀를
-손로원 작사-
고란사 종소리 사무치는데
구곡간장 올올이 찢어지는 듯
누구라 알리요 백마강 탄식을
깨어진 달빛만 옛날 같으리
- 조명암 작사-
법당 뒤 절벽 밑에 백제 임금이 고란초를 띄워 마셨다는 고란약수가 있다.
고란초는 고사리목에 속하는 양치식물이다.
샘이 깊어 손잡이가 긴 스테인리스 국자로 물을 떠 마셔야 하는데, 한번 약수를 마시면 3년 젊어진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고란사 안내판. 이제 차로 귀환을 서둘러야 한다.
들어간 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나오니...
여기에서도 매표를 하고 있고,낙화암은 불과 1.2km밖에 안된다.
광활한 빈 터가 나온다. 관북리 유적지인 옛 백제의 왕궁터다.
의자왕은 무왕의 장자로 641년 권좌에 오른 의자왕은 대내외적으로 강력한 왕권을 휘둘렀다.
각지를 돌아다니며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는 사람을 풀어줬고, 신라를 공격해 40여 개의 성을 일거에 장악했다.
그러나 치세 15년 즈음이 되자 변화가 일어났다.
정확한 원인은 알 수 없으나 사치와 주색에 관심을 기울였다.
현대에 알려진 의자왕의 모습이 이때 나타났으며 충신들이 간언했으나 듣지 않았다.
결국 의자왕 20년인 660년 7월 당나라군 13만 명과 신라군 5만 명이 합세해 들어오자 제대로 응전하지 못하고 투항했다.
그는 부여에서 공주로 피신했다가 당의 도읍으로 압송됐고, 끝내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흩어진 기왓장을 모아둔 곳.
폐망한 백제의 왕궁터엔 황량하고 쓸쓸한 분위기만 묻어난다.
부여 관북리 유적 안내판
둘러보다...
당겨 확인하니 객사(客舍)인 부풍관(扶風館)이다.
연꽃 연못인 연지(蓮池)는 백제시대의 조경을 위한 시설물로서 백제시대의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부소산성 주차장에선 뒷풀이를 할 수가 없다.
하는 수 없이 가게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는데, 가게주인은 아무것도 사지 않아도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부여의 특주인 밤막걸리는 우리들의 입맛을 당겨 생탁을 물리치고 여러병을 자청(自請)하였다.
눈
펄펄 날리는
부소산을 올라보니
오르는 길 구비 구비
백제인의 숨결 가파오는데
고란사
서늘한 풍경소리
날 선 백마강을 울리고
그날의 설운 눈물은
바위틈 가녀린 고란초로 자라는가
문득
바라보니 낙화암에
물새 한 마리 창공을 가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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