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1,토요만필漫筆/ 비강남노파들을 기리며 /김용원
전에 살았던 서울에서의 아파트 단지는 다른 곳보다 유난히 주차장과 정원이 넓고 나무가 많았다. 그래서 들르는 지인들마다 놀라워했다. 땅값 비싼 서울에서 그렇게 너른 공간을 갖고 있는 곳도 처음 보았고, 그렇게 숲이 좋은 곳도 처음 본다는 말이었다. 그런 감탄사를 듣고 나면 나는 꼭 이 말을 덧붙였었다.
“그뿐인 줄 아세요? 여기에 있는 3천 세대 넘는 아파트는 22평 아니면 25평 둘 중 하나라서 평수 때문에 스트레스 받을 일도 없어요.”
듣는 이는 어떨지 몰라도 나는 다른 것보다도 그 점을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가르치는 아이들이 거의 모두가 그 아파트 단지 내에 사는 녀석들이라서 그런지 아파트 평수 때문에 위화감 따위를 느끼는 것을 보지 못했었다.
가을에 접어들면 그 아파트에서 또 한 가지 자랑거리로 삼을 수 있는 것은 흐드러지는 단풍 폭죽이다. 다른 잡목도 많아 울긋불긋 그 아름다움도 빼놓을 수 없지만, 보다 더 화려한 것은 오래된 은행나무를 꼽을 수 있었다. 나무 그루 수의 반은 은행나무라서 노란 은행잎이 떨어질라 치면 그 쌓임의 깊이가 한 뼘은 실히 된다 싶어 눈이 호강함은 물론이고, 밟고 걸을 때는 그와 못지않게 육감적인 느낌이 유별났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큰 평수의 아파트 따라 다른 곳으로 이사갔다는 말을 들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눈에 띄어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이런 말이 곁들여지곤 했었다.
“서울 시내 다 돌아다녀 봐도 여기처럼 조용하고 숲길이 좋은 곳은 없더라구요.”
그런데 그 화려한 단풍 축제가 이루어지기 전에 의식 있는 주민들의 미간을 찌부러뜨리게 만드는 일이 한 가지 있었다. 그것은 열린 과일을 익기도 전에 따가는 일이었다. 대추는 물론 감도 있지만, 그것들은 나무 그루 수가 많지 않은데다 나무 높이가 낮기 때문에 익기도 전에 귀신같이 떨어가 아예 없는 것으로 취급하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그 대상이 은행나무에 연계되면 영 그 모양새가 껄적지근했다.
은행나무는 대체로 키가 크기 때문에 열매를 따려는 사람이 몸부림을 치지 않으면 쉽게 손에 넣을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목적 달성을 위해 온갖 지혜를 짜내며 안간힘을 썼다. 물병에 긴 끈을 묶어 빙빙 돌리다 던져 가지에 감기게 한 후 흔들어 땄다. 또 낚싯대 끝에 갈쿠리를 달아 잡아다니기도 하고, 나무에 기어올라가 마구 흔들거나 아파트 가까이 있는 나무는 아파트 복도에 올라가 나무를 밧줄로 묶고 흔들어대기도 했다.
그런 얄궂은 얌체짓을 하는 당사자의 거의 90%는 6,70대 노파들이었다. 그래도 젊은 여자나 할아버지는 바람이 불어 떨어지면 눈치 보며 줍기는 하되 할머니부대처럼 사람이 있거나 말거나 나뭇가지야 부러지든 말든, 아직 새파란 이파리며 열매가 신작로에 즐비하게 떨어지든 말든, 끈이 달린 돌멩이를 던지고 갈쿠리를 휘두르지는 않았다. 더욱 가관은, 그걸 보던 다른 할머니가 남이 하나라도 더 주울 세라 활처럼 휘어진 몸뻬다리에 커다랗게 얹혀진 볼품없는 엉덩이를 흔들며 재재바르게 끼어드는 일이었다. 그러면 안간힘을 다해 나뭇가지를 찢어내고 아직 덜 익은 열매를 떨어뜨린 공로자는 덤으로 덕을 보려는 할머니에게 비난을 퍼부었다.
“왜 남이 따논 은행을 줍고 지랄이야!”
그러면 덕 좀 보려는 제2의 한수 높은 얌체할멈은 지지 않고 맞섰다.
“이게 당신 나무야? 엄연히 우리 아파트 꺼니까 나도 줏어갈 권리가 있다구!”
그렇거나 해마다 벌어지는 풍경이려니 지나쳤었는데, 한번은 어떤 젊은 아주머니가 이런 말을 하여 나로 하여금 비참함을 맛보게 했다. 그녀는 말했다.
“강남하고 다른 점이 저거예요. 강남 할머니들은 절대로 저런 꼴 보이지 않아요. 매달린 열매를 보고 즐기느냐 그것을 따가느라 소란을 피우느냐 그 수준 차이죠.”
오죽하면 서울시장으로 당선된 사람이 ‘강남’과 ‘비강남’이라는 생소한 신조어를 만들었고, 그 이분법적 패러다임이 정착돼 강남은 제2의 다른 나라쯤으로 여겨지는 심상으로 자리잡히지 않았겠는가. 그 후 그곳을 떠난 지금 그때 힘을 다해 극성스럽게 은행나무를 괴롭히던, 힘차고 억척스럽던 노파들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는 소식을 들었다. ‘비강남노파’들이 건강하게 설쳐대던 그때 그 시절이 문득 그리워지는 새벽이다. 그분들이 어떤 분들인가! 왜구들의 피빨림과 육이오의 잿더미에서 가족의 생명을 유지시켰고, 한강의 기적을 이루어내는 데 앞장섰던 역사의 당사자들이며 영웅들이었다.
/어슬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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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