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때 포아로가 받은 편지에 대한 그의 예감에 깊은 인상을 받은 건 사실이지만, 그 일은 내 머리에서 아주 사라져 버렸다고 해도 좋다.
실제로 21일이 되어 런던 경찰국의 재프 경감이 포아로를 찾아왔을 때 나는 겨우 그 일을 생각해 냈다. 이 사법 경찰관과는 이미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나를 보자 진심으로 환영해 주었다.
그는 큰소리로 말했다.
“여, 내가 헤이스팅즈 대위를 몰라볼 리 있겠습니까. 드디어 당신의 야만 지대에서 돌아오셨군요! 포아로 씨와 함께 계신 당신을 뵈니 정말 예전 그대로입니다 그려. 게다가 건강하신 듯 하군요. 머리가 좀 벗겨졌는가요? 그렇습니다, 누구나 그렇게 되지요. 나도 그렇습니다.”
나는 좀 놀랐다. 머리 꼭대기에 머리칼이 덮이도록 빗어 두었기 때문에 벗겨진 곳이 눈에 띄지 않으리라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재프 경감은 그런 점에 그리 머리가 잘 도는 편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좋은 얼굴로 아무도 젊어지는 사람은 없다는 데 동의했다.
재프 경감은 말했다.
“그러나 이 포아로 씨만은 다릅니다. 헤어토닉의 좋은 광고가 되지요. 얼굴 구석구석이 한층 더 싱싱해졌습니다. 늘그막에 이르러 점점 더 각광받게 되셨으니 말입니다. 요즘의 유명한 사건에는 모조리 관계되어 계시지요. 열차 사건, 공중에서의 사건, 사교계 살인 사건……. 정말이지 여기서기에 이분은 등장합니다. 은퇴하고 나서 훨씬 더 유명해지셨답니다.”
포아로가 웃으며 말했다,
“요전에도 헤이스팅즈에게 말했었지요. 나는 언제나 또다시 등장하는 프리마돈나 같다고“
“마지막에는 자신의 죽음을 탐정한다 해도 우스운 일이 아닐겁니다. 이건 기발한 생각인데, 정말. 책에 써둬야겠어.”
재프 경감은 커다랗게 웃었다.
포아로는 내게 눈짓을 해보였다.
“그것을 해야 할 사람은 우선 헤이스팅즈지요.”
재프 경감은 웃었다.
“하하하! 농담입니다, 농담입니다.”
나는 그 생각이 어째서 악취미로 여겨졌다. 가엾게도 포아로는 점점 나이를 먹어 가고 있다. 죽음이 가까이 오는 것과 관계된 그 농담이 그에게 유쾌할 리 없을 것이다.
내 태도에 속마음이 나타나 있었던 모양이다. 재프 경감은 화재를 바꾸었다.
“포아로 씨의 익명 편지에 대해 들으셨습니까?”
포아로가 말했다.
“저번에 보여 줬지요.”
나는 소리쳤다.
“아, 그렇지. 완전히 잊고 있었어. 문제의 날짜가 언제였지?”
재프 경감이 말했다.
“21일입니다. 그래서 내가 조사해 보았지요. 어제가 21일이었기 때문에, 어젯밤 혹시나 싶어 앤도버를 불러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역시 장난이었지요. 아무 일도 없었으니까요. 어린아이가 돌을 던져 쇼윈도가 하나 깨진 일과 술주정꾼의 규칙 위반이 두 건. 그래서 우리 벨기에인 친구분(포아로)이 처음으로 헛짚으신 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포아로는 인정했다.
“확실히 한시름 놓았습니다.”
재프 경감이 동정하듯 말했다.
“많이 염려하고 계신 것 같았습니다만? 가엾게도, 우리는 그런 것을 날마다 몇십 통씩 받는답니다. 달리 아무 하릴없는 머리가 좀 이상한 사람들이 그런 것을 쓰지요. 그리 악의가 있는 건 아닙니다. 뭐, 일종의 흥분에서지요.”
포아로가 말했다.
“그걸 그토록 진지하게 생각했던 건 정말 어리석은 짓이었습니다. 내가 코를 들이민 것은 새의 보금자리였던 셈이군요.”
재프 경감이 말했다.
“말과 벌을 혼동했던 겁니다.”
“뭐라고요?”
“아니, 속담입니다. 자, 이제 가봐야겠군요. 이 가까이에 볼일이 있어서요. 도난품인 보석을 인수하러 왔지요. 그곳에 가는 길에 마음 놓으시도록 잠시 들렀던 겁니다. 회색 뇌세포를 뜻없이 써버리는 건 낭비니가요.”
재프 경감은 기분좋게 웃으며 돌아갔다.
포아로가 말했다.
“사람좋은 재프 경감은 그리 달라지지 않았지?”
나는 보복하듯 말했다.
“아주 늙었군. 오소리같이 잿빛이 되었어.”
포아로는 헛기침을 하고 나서 말했다.
“헤이스팅즈, 아주 하찮은 장치가 있는데, 내 단골 이발사는 재간있는 사나이지. 머리에 그 장치를 붙이고 그 위에 자신의 머리칼을 벗어 놓는다네. 그건 가발이 아닐세, 잘 알겠지만.”
나는 으르렁댔다.
“포아로, 분통 치미는 자네 이발사의 더러운 발견 따윈 아무래도 좋네. 대체 내 머리가 어떻다고 그런 소리를 하는 건가?”
“아니, 아무렇지도 않아, 아무렇지도.”
“내가 대머리가 되어가고 있다는 건 아니겠지?”
“물론 그런 건 아닐세! 그런 건…….”
“그 나라의 뜨거운 여름은 절로 얼마쯤 머리를 벗겨지게 하지만 말이야. 그냥 질좋은 헤어토닉이나 가져가지.”
“그게 좋겠군.”
“그렇다 해도 재프 경감 따위가 관여할 일은 아니야. 녀석은 언제나 기분좋지 않았지. 게다가 유머 센스도 없어. 사람이 앉으려고 할 때 의자를 잡아당겨지면 웃는 그런 사나이거든.”
“그러면 사람들은 대개 웃지.”
“모름지기 센스가 없단 말일세.”
“앉으려던 사람의 입장에서 본다면 확실히 그렇지.”
“그렇네.”
나는 얼마쯤 기분을 돌리며 다시 말했다―머리칼이 적어졌다는 말에 내가 아주 민감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익명 편지가 아무 일 없었다니 유감이군.‘
“그것은 완전히 내 잘못 생각이었네. 그 편지에 어쩐지 피비린내나는 것 같은 느낌이 있었는데, 그러나 단순한 장난이었어. 아, 나도 나이 먹어 아무것도 아닌 일에 짖어대는 눈먼 개처럼 의심이 많아져 버렸나 보네.”
나는 웃으며 말했다.
“내가 도우려면, 우리는 다른 데서 온갖 진수가 모아진 멋진 범죄를 찾아내야만 되겠군.”
“자네는 요전에 내가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나? 만일 요리를 주문하듯 범죄를 주문할 수 있다면 어떤 것을 고르겠나?”
나는 좋아진 그의 기분에 휩쓸려 말했다.
“그렇지, 메뉴를 잘 봐야 하지 않겠나. 강도? 위조지폐? 아니, 이런 건 안 돼? 이건 식물성 요리 같지? 역시 살인이 좋겠군. 피비린내나는 살인사건, 물론 여러 가지가 딸린 것으로.”
“옳지, 오르되브르(식사 전 또는 술안주로 먹는 가벼운 요리)로군.”
“피해자는 남자로 할까, 여자로 할까? 역시 남자가 좋겠어. 누군가 유명한 사람, 미국의 백만장자나 국무장관이나 신문사 사장쯤 되는 인물. 범행 현장은……그렇지, 훌륭한 낡은 도서관 같은 데가 어떨까? 분위기로서 이 이상의 것은 없네. 흉기는 기묘한 형태로 구부러진 단도 아니면, 뭔가 둔기 같은 것, 예를 들면 조각된 돌상이라든지…….”
포아로는 한숨을 쉬었다.
“그렇잖으면 물론 독약. 하지만 이것은 아무래도 너무 전문적인 것 같네. 그렇다면 깊은 밤에 메아리치는 권총 소리……이런 것으로 할까. 그리고 아름다운 여자 하나, 둘.”
친구는 중얼거렸다.
“그녀는 빨강머리겠지.”
“신통치 못한 농담이군. 물론 아름다운 여자 한 사람에게 잘못된 혐의가 씌워져야만 되겠지. 그리고 그녀와 젊은이 사이에 오해가 생기고. 물론 그 밖에도 몇 사람에게 혐의가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네. 이를테면 피해자의 친구거나 경쟁 상대인 피부빛이 검고 위험한 타입의 중년 여자, 얌전한 비서. 이들이 유력한 혐의자인데, 거기에 행동거지가 무뚝뚝하고 성실한 사나이인 해고된 하인이라든지 사냥터 관리인 등이 두어 사람쯤 그리고 재프 경감 같은 얼치기 형사. 그래, 이쯤이면 되겠지.”
“그것이 자네가 말한 온갖 진수가 모아진 범죄인가?”
“찬성하지 않는구먼?”
포아로는 한심스러운 듯 나를 보았다.
“자네는 지금까지 씌어진 거의 모든 미스터리 소설의 아주 멋있는 줄거리를 만들어 주었네.”
“그럼, 자네라면 어떤 주문을 할 건가?”
포아로는 눈을 감고 의자에 기댔다. 그의 목소리는 입술 사이로 조용히 흘러나왔다.
“아주 단순한 범죄, 복잡한 데가 조금도 없는 범죄. 조용한 가정 생활의 범죄……열광적이 아니고 아주 내밀스러운.”
“범죄에 내밀스러운 게 있을 수 있는가?”
포아로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네 사람이 앉아서 브리지를 하고 있네. 그리고 한 사람이 그 게임에 끼지 않고 벽난로 옆 의자에 앉아 있지. 밤이 깊어졌을 즈음 난롯불 옆에 앉아 있던 사나이가 죽은 것을 알게 되네. 네 사람 가운데 누군가가 손이 비게 되었을 때 죽인 것인데, 모두들 게임에 정신이 팔려 모르고 있었지. 자, 이것이 사건이네. 범인은 네 사람 가운데 누구일까?”
(나, 아시겠죠? 다들....<테이블위의카드>네요...)
“도무지 자극적인 데가 조금도 없는걸.”
포아로는 비난하듯 눈길로 나를 보았다.
“없지. 이상한 모양으로 구부러진 단도도, 협박도, 신상의 눈에서 훔쳐 낸 에메랄드도, 흔적을 알 수 없는 동양의 독약 같은 것도 없네. 헤이스팅즈, 자네는 아무래도 멜러 드라마 애호가로군. 자네는 하나의 살인이 아니라 연쇄적인 살인 쪽이 좋은 거지?”
“그렇네, 책 속의 두 번째 살인은 경기가 좋아 보이던걸. 제1장에서 살인이 일어나 마지막 페이지 바로 앞까지 모두들의 알리바이가 성립되어 있다는 건……그래, 좀 따분하지.‘
전화가 울려 포아로가 일어나 받으러 갔다.
“여보세요, 에르큘 포아로입니다.‘
잠시 말없이 듣고 있던 그의 얼굴빛이 달라졌다. 그의 대답은 짧게 토막토막 끊어졌다,
“그랬군요……물론, 그렇지요……아, 가겠습니다……당연합니다……그야 당신 말대로겠지요. 그렇지요, 갖고 가겠습니다. 그럼, 곧.”
그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방을 가로질러 내 곁으로 돌아왔다.
“재프 경감에게서 온 걸세, 헤이스팅즈.”
“그래서?”
“경찰국으로 돌아가자마자 마침 앤도버에서 연락이 있었다는 거야.”
나는 흥분하여 소리쳤다.
“앤도버?”
포아로가 천천히 말했다.
“노파가 하나 살해되었다는군. 애셔(Ascher)라는 이름으로, 담배와 신문을 파는 조그만 가게의 노파일세.”
나는 얼마쯤 맥이 풀렸다. 앤도버라는 이름으로 부채질되었던 내 흥미는 어리둥절해졌다. 나는 뭔가 환상적인, 아주 색다른 것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조그만 담배 가게 노파가 살해된 일 따위는 아무래도 그리 신통찮다.
포아로는 여전히 느릿느릿한 무게있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앤도버 경찰에서는 범인을 체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야.”
나는 다시 한 번 맥이 풀렸다.
“노파는 그 남편과 사이가 나빴던 것 같네. 남편은 술꾼이며 질나쁜 녀석으로 종종 노파를 죽이겠다고 협박했었다는군. 그러나 그곳 경찰에서는 다른 점도 고려하여 내가 받은 익명의 편지를 보고 싶다는 거야. 나는 곧 자네와 함께 앤도버로 가겟다고 말해 두었네.”
나는 얼마쯤 기운을 되찾았다. 시시하게 보일지라도 아무튼 범죄임에 틀림없다.
내가 범죄니 범인이니 하는 것에 관계하고부터 벌써 많은 세월이 흘렀다.
나는 포아로의 다음 말을 거의 듣지 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나중에 중요한 뜻을 지니고 내 기억 속에 되살아났다.
에르큘 포아로가 이렇게 말했다.
“이것이 시작이다.”
< 철도 안내서 >
우리는 앤도버에서 글렌 형사의 마중을 받았다. 그는 키가 크고 머리칼이 아름다운 남자로 기분 좋은 미소를 떠올리고 있었다.
이야기를 간결이 하기 위해 사건의 사실만 간단히 밝혀 두는 게 좋으리라.
범죄는 22일 오전 1시에 그곳 순경에 의해 발견되었다. 순찰을 돌면서 가게 문을 밀어 보니 잠겨 있지 않았다. 안으로 들어가자 처음에는 아무도 없는 듯했으나, 계산대 쪽으로 회중전등을 돌리니 노파의 웅크린 시체가 눈에 들어왔다.
경찰의가 현장에 와 닿아 노파가 뒷머리를 강하게 얻어맞았음을 알아냈는데, 아마도 계산대 뒤의 선반에서 담배 봉지를 꺼내는 도중에 얻어맞은 듯했다. 범행은 일곱 시간 내지 아홉 시간 전에 행해진 것 같았다.
형사는 설명했다.
“그러나 더 정확한 시간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5시 30분에 담배를 사러 들어갔던 사나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6시 5분 좀 지나서 가게에 들어갔다가 아무도 없는 줄 알고 그냥 나온 다른 남자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범행 시간을 5시 30분에서 6시 5분 사이로 추정할 수 있지요. 이웃에서 애셔를 보았다고 말해 온 사람은 아직 없습니다. 그러나 물론 이제부터입니다. 그는 9시쯤 <스리크라운즈>에서 꽤 취해 있었습니다. 체포하는 대로 곧 용의자로 잡아 둘 겁니다.”
포아로가 물었다.
“그리 호감주는 타입의 사나이가 아닌 모양이군요?”
“싫은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 아내와 함께 살고 있지 않았던가요?”
“그렇습니다. 몇 해 전에 헤어졌지요. 애셔는 독일 사람으로 한때 급사일을 한 적도 있었습니다만, 술을 너무 마셔서 차츰 그를 고용하는 곳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부인이 일을 나가게 되었지요. 마지막으로 한 일은 미스 로즈라는 노부인의 요리사 겸 가정부였습니다. 급료를 받아 남편에게 꽤 많은 돈을 주었던 듯한데, 그는 몽땅 마셔 버리고는 자기 마누라가 일하는 곳으로 가서 소동을 벌이곤 했답니다. 그래서 애셔 부인은 미스 로즈네 농장으로 가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거기는 앤도버에서 3마일 떨어진 완전한 시골이어서 그도 그리 자주 찾아가지 못했지요. 미스 로즈가 세상을 떠나자 애셔 부인은 유산을 조금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 돈으로 담배와 신문을 파는 이 조그만 가게를 시작했습니다. 싸구려 담배와 얼마 안 되는 신문뿐이어서 겨우 먹고 사는 정도였지요. 애셔가 자주 찾아와 그녀에게 욕을 하곤 했는데, 그녀 쪽에서는 귀찮고 하니까 잔돈푼이나 줘서 쫓아 버리곤 했지요. 1주일에 15실링은 줬던 것 같습니다.”
포아로가 물었다.
“아이들은 있었소?”
“없습니다. 조카딸이 하나 오버튼 가까이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아주 고집이 센 똑똑한 아가씨지요.”
“그 애셔라는 사나이가 아내를 자주 협박했었다는 거지요?”
“그렇습니다. 그는 술에 취하면 무섭게 변해서 아내의 머리를 박살내겠다는 둥 소리를 질러대곤 했답니다. 애셔 부인은 정말 끔찍한 일을 당한 거지요.”
“그녀는 몇 살이었소?”
“60살이 다 되었지요. 아마. 훌륭하고 부지런한 사람이었습니다.”
포아로는 신중하게 말했다.
“그러면 그 애셔라는 사나이가 범인이라는 게 당신 의견이오?”
형사는 조심스럽게 헛기침을 했다.
“그렇게 말하는 건 좀 성급한 판단입니다만, 프란츠 애셔가 지난밤에 어떻게 지냈는지 그 자신의 설명을 듣고 싶은 겁니다, 포아로 씨. 만일 만족할 만한 설명을 들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그는 꽤 의미심장하게 말을 끊었다.
“가게에서는 아무것도 없어지지 않았소?”
“네, 아무것도. 돈도 그대로 다 있고, 훔쳐 간 흔적이 전혀 없습니다.”
“그 애셔라는 사나이가 술에 취해 가게로 들어와 아내를 욕하다가 끝내 때려 죽였다는 거로군요?”
“네, 그것이 가장 타당한 해석이겠지요. 그러나 당신이 받으셨다는 그 이상한 편지도 고려해 보고 싶습니다, 포아로 씨. 그것이 이 애셔라는 사나이로부터 보내진 것인지 어떤지 알 수 없으니까요.”
포아로가 편지를 건네주자 형사는 이마를 찌푸리고 그것을 읽었다.
형사는 마침내 말했다.
“아무래도 애셔가 쓴 것 같지는 않군요. 도대체 이 <우리> 영국 경찰이라는 말을 애셔가 쓸 턱이 없지요. 그야말로 각별히 교묘하게 행동하려는 게 아니었다면 말입니다. 게다가 그에겐 그만한 머리가 없습니다. 그는 이제 산송장입니다. 다 망가져 버렸지요. 이런 글을 쓰기에는 그의 손이 너무 떨릴걸요. 편지지도 잉크도 고급품이고. 그러나 편지에는 21일이라고 한 것은 이상하군요. 물론 우연의 일치겠지만요.”
“그렇겠지요.”
“하지만 이런 일치는 좋지 않습니다, 포아로 씨. 너무 딱 들어맞으니 말입니다.”
그는 잠시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의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ABC. 대체 ABC란 어떤 녀석일까요? 메리 드로워―조카딸입니다만―가 좀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군요. 뭐 수고하시는 김에 말입니다. 이 편지만 없다면 나느 프란츠 애셔에게 내기를 걸어도 좋은데요.”
“애셔 부인의 경력은 알고 있소?”
“그녀는 햄프셔 태생으로 처녀 때 런던에 나가 직장 생활을 했지요. 거기서 애셔를 만나 결혼했습니다. 헤어진 것은 1922년으로, 그즈음 두 사람은 아직 런던에 있었지요. 그녀는 남자에게서 달아나 여기로 왔으나, 남자가 곧 알아차리고 따라와 귀찮게 굴었던 겁니다.”
마침 거기에 순경이 들어왔다.
“무슨 일인가, 브릭스?”
“애셔를 연행해 왔습니다.”
“좋아. 이리로 데려오게. 어디 있던가?”
“인입선의 화차 안에 숨어 있었습니다.”
“숨어 있었다고? 데려오게.”
프란츠 애셔는 정말 보기 싫은, 초라한 인간의 표본이었다. 그는 엉엉 울고, 꾸벅꾸벅 절하고, 서슬이 시퍼래지기도 했다. 그 짓무른 눈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모두들의 얼굴을 살폈다
“나를 어쩌자는 거야. 나는 아무 짓도 안 했어. 날 이런 데 데려오다니 너무하잖아. 네 놈들은 돼지야. 어쩌자는 거야?”
그의 태도가 갑자기 바뀌었다.
“아니, 아니, 그게 아냐. 선생님들은 이 가엾은 늙은이에게 몹쓸 짓을 하고 있소. 심하게 대하고 있소. 누구나 이 가엾은 프란츠에게 심하게 군단 말야, 이 가엾은 프란츠에게.”
애셔는 울기 시작했다.
형사가 말했다.
“그만해 두오, 애셔. 정신차려요. 당신에게 무슨 죄를 뒤집어씌우려는 건 아니오. 지금으로서는. 당신이 싫으면 아무 말 않아도 좋소. 만일 당신이 당신 아내 살해에 관계가 없다면 말이오.”
애셔는 그 말을 가로막았다. 그 목소리는 비명 같았다.
“나는 죽이지 않았어! 죽이지 않았어! 모두 엉터리야! 네 놈들은 거지같은 영국 돼지야. 모두들 내게 죄를 덮어씌우고 있어. 나는 죽이지 않았어, 죽이지 않았어.”
“당신은 늘 아내를 협박하고 있었잖소, 애셔?”
“아니, 아니, 네 놈들은 알 리 없어. 그건 농담이었어. 나와 앨리스만이 알고 있는 농담이야. 앨리스는 그걸 알고 있었어.”
“우스운 농담이로군! 어젯밤 어디 있었는지 말할 수 있소, 애셔?”
“말할 수 있고말고, 있고말고. 모두 이야기하지. 난 앨리스한테 가지 않았어. 친구들하고 있었어. 멋있는 친구들하고. <세븐 스타즈>에 있다가……그리고 나서 <레드 독>에 갔어.”
그는 기침이 나와 말이 막혔다.
“딕 윌러즈, 그도 함께 있었지. 커디 녀석도 그리고 조지도……플랫도, 그 밖의 놈들도 많이 있었어. 나는 앨리스에게 가지 않았어. 하느님께 맹세코 나는 사실을 말하고 있어.”
그 소리는 비명이었다. 형사는 부하에게 눈짓을 했다.
“데려가. 용의자를 구금시켜.”
떨며 욕지거리를 퍼부어대는 그 불쾌한 노인이 나가 버리자 형사는 말했다.
“아무래도 알 수 없군요. 그 편지만 없다면 저 늙은이의 짓이 분명한데요.”
“저 사람이 말하는 다른 남자들은 어떻소?”
“나쁜 놈들입니다. 모두 위증쯤은 손쉽게 할 녀석들이지요. 나도 저 늙은이가 그날 밤 어느 시간까지는 그들과 함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6시 사이에 가게 언저리에서 저 늙은이를 본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에 달렸다고 봐야겠지요.“
포아로는 신중하게 머리를 저었다.
“가게에서 아무것도 없어지지 않은 건 분명하지요?”
형사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야 경우에 따라 다르겠지요. 담배 한두 갑이 없어졌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런 일 때문에 사람을 죽이지는 않지요.”
“게다가 아무것도, 뭐라면 좋을까. 가지고 온 것이 없었다는, 그러니까 이상한, 그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 그런 아무것도 거기에는 없었다는 거지요?”
“철도 안내서가 있었습니다.”
“철도 안내서?”
“그렇습니다. 계산대 위에 펼쳐진 채 뒤집혀 있었습니다. 꼭 누군가가 앤도버에서 떠나는 기차 편을 알아보고 있었던 것처럼. 그 할머니나 아니면 손님이 보고 있었다는 것이겠지요.”
“그런 것도 팔고 있었소?”
형사는 머리를 저었다.
“1페니짜리 시간표를 팔고 있었습니다만, 그것은 큰 것이었으니까 스미스네 가게나 커다란 문방구점 같은 데서 다룰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