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라.菩薩의 十種無碍用
佛子야 菩薩摩訶薩이有十種法無礙用하니 何等이爲十고所謂知一切法이 入一法하고 一法이 入一切法호대 而亦不違衆生心解無礙用과從般若波羅蜜로 出生一切法하야 爲他解說하야 悉令開悟無礙用과 知一切法離文字호대 而令衆生으로 皆得悟入無礙用과知一切法入一相호대 而能演說無量法相無礙用과 知一切法離言說호대 能爲他說無邊法門無礙用과於一切法에 善轉普門字輪無礙用과 以一切法으로 入一法門호대 而不相違하야 於不可說劫에 說不窮盡無礙用과 以一切法으로 悉入佛法하야 令諸衆生으로 皆得悟解無礙用과知一切法無有邊際無礙用과 知一切法無障礙際가 猶如幻網의 無量差別하야 於無量劫에 爲衆生說호대 不可窮盡無礙用이 是爲十이니라
“불자여, 보살마하살은 열 가지 법에 걸림 없는 작용이 있으니 무엇이 열인가. 이른바 모든 법이 한 법에 들어가고 한 법이 모든 법에 들어가되 중생의 마음과 지혜에 어기지 않는 걸림 없는 작용이니라.
반야바라밀다로부터 모든 법을 내어 다른 이에게 설명하여 모두 깨닫게 하는 걸림 없는 작용과, 모든 법이 글자를 여읜 줄을 알면서도 중생으로 하여금 다 깨달아 들어가게 하는 걸림 없는 작용이니라.
모든 법이 한 모양에 들어감을 알면서도 능히 한량없는 법의 모양을 연설하는 걸림 없는 작용과, 모든 법이 말을 여읜 줄을 알면서도 능히 다른 이에게 그지없는 법문을 연설하는 걸림 없는 작용이니라.
모든 법에 넓은 문의 글자바퀴[普門字輪]를 잘 굴리는 걸림 없는 작용과 모든 법을 한 법문에 넣어도 서로 어기지 않아서 말할 수 없는 겁 동안 말하여도 다할 수 없는 걸림 없는 작용과, 모든 법으로써 다 불법에 들어가서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다 알게 하는 걸림 없는 작용이니라.
모든 법이 가없음을 아는 걸림 없는 작용과, 모든 법이 장애가 없음이 마치 환술의 그물처럼 한량없이 차별함을 알아서 한량없는 겁 동안 중생들에게 말하여도 다할 수 없는 걸림 없는 작용이니, 이것이 열이니라.”
*
보살(菩薩)의 십종무애용(十種無碍用)
*
불자(佛子)야 :불자야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 :보살마하살이
유십종법무애용(有十種法無礙用)하니 : 열 가지 법의 무애용이 있으니
하등(何等)이 : 어떠한 것이
위십(爲十)고 : 열 가지 법이냐.
소위지일체법(所謂知一切法)이: 소위지일체법이 어른스님 말씀은 그렇다. ‘이해된다고 해서 설명이 되는 것도 아니지만 이해가 안 되는 걸 머리를 쥐어짜내서 화엄경을 보려고 해봤자 별 것 없다’ 그냥 넘어가자. 저도 모르고 여러분들은 각자 깜냥껏 하셔야 한다. 이른바 일체법이
입일법(入一法)하고: 한 법에 들어가고
일법(一法)이 :일법이
입일체법(入一切法)호대 : 또 일체법에 들어가되
이역불위중생심해무애용(而亦不違衆生心解無礙用)과 : 그러나 역(亦) 또한 중생의 마음과, 이해하는 폭을 어기지 않는 작용이라. 어기지 않는 무애용이라.
종반야바라밀(從般若波羅蜜)로 : 반야바라밀로부터
출생일체법(出生一切法)하야 : 모든 법을 내어서. 흔히 이런 것을 반야도태라고 한다. 반야바라밀로 모든 일체의 잡된 법을 도태시킨다.
쌀 일을 도(淘)자 쌀 일을 태(汰)자, 조리질하는 것을 도태라고 한다. 쌀을 다 건져내면 뒤에 남는 것은 돌밖에 없잖은가. 뒤에 남은 돌을 가지고 우리는 돌중이라고 한다.
앞에 건져진 쌀은 양식이 되고 뒤에 남은 것은 돌이다.
업장이 무거운 것은 뒤에 남는다. 그것을 반야도태라고 한다.
위타해설(爲他解說)하야 : 모든 법을 내어서 다른 사람에게 설명해야 된다. 다른 사람에게 왜 설명하는가? 반야바라밀로 번뇌를 도태시키려고 설명하는 것이다.
실영개오무애용(悉令開悟無礙用)과: 모두 깨닫게 하는 걸림 없는 작용과
지일체법이문자(知一切法離文字)호대 : 모든 법이 글자를 여읜 줄 알면서도.
제가 가끔씩 이렇게 이야기한다. 통도사 화엄산림법문 할 때도 ‘화엄경은 글자가 아닙니다’라고 이야기하는데, 그러면 사람들이 ‘법문도 할 줄 모른다’ 할 때가 많다.
또 어떤 때는 “제가 누굽니까?”“‘용학스님이요.”“저는 화엄경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할 때도 있다. 제가 잘났다는 소리가 아니고 거기에 부합되어야 한다는 소리다.
여러분들, 화두선(話頭禪)이 좋고, 화두를 열심히 하시기 바란다. 그런데 처음부터 화두선을 주창해서 화두에 매진했던 분이 서장을 만드신 대혜종고(大慧宗杲)스님이다. 화두로 법칙을 삼은 이분은 ‘앙굴리마라가 산모를 구출한다’ 그 화두를 평생 들고 있었다.
당신이 선문염송부터 토로해 놓은 것, 서장, 또 대혜어록에 고백해 놓은 것이 있다. 그 고백을 우리가 사집(四集) 때 행장에서 읽지 않았는가.
‘내가 그때 담당 문준선사 밑에서 그 화두를 받고 공부할 때는 그 뜻을 정말 몰랐다. 그런데 내가 호구사에서 십지품을 보다가 원행지라는 대목에서 뚫렸다’ 호구사에서 하안거를 지내면서 열화엄(閱華嚴)이라고 했다. 대선사들이, 선방의 스님들이 화엄경을 봤다는 것이다.
고봉 원묘(高峯原妙)스님도 선요의 신옹거사편을 보면 마찬가지다. 화엄경을 보는 수준이나 무게가 무지몽매한 우리하고는 다르다.
제일 좋은 것은 선방이겠지만, 거기서 안 되어서 대혜종고가 그 인연이 ‘화엄경의 칠지보살(七地菩薩)이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는다는 대목에서 내가 모든 의문이 뚫려버렸다’라고 하였다. 대혜스님은 그전에도 두서너 번은 깨쳤지만 마지막에 확철대오한 것은 ‘화엄경을 보다가 내가 정리했다’ 이렇게 고백을 해 놓았다.
우리가 그렇게까지 화엄경을 봐야지 글줄만 이렇게 지식으로 보면 화엄경을 못 보는 것이다.
제일 신기한 것은 이렇게 유튜브나 텔레비전에서 한참 화엄경 법문을 듣다 보면 ‘화엄경을 한 번도 안 읽고 화엄경 법문을 하다니 와 대단하시다. 존경스럽다’ 하는 법사들이 나온다.
우리는 계속 봐도 모르겠던데, 그렇게 됐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화엄경을 한 번도 안 봤는데도, 일단 문자적으로도 안 봤는데 명성이 있다보니 화엄경 하는 데 붙잡혀 와서 강의도 하고 법문도 하는 것이다.
신기한 것은 하는 사람도 모르고, 듣는 사람도 모르면서 ‘와 법문 좋다’하고 또 박수를 치는 것이다.
대혜스님처럼 그렇게 되어야 한다.
나중에 그 대목을 제가 여러분들이 다 아시는 대목이지만, 또 다른 우리의 신심을 위해서 선문염송하고 서장에서 뽑아서 알려드리겠다. 우리는 그 때문에 일평생 중노릇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 것을 보면 화엄경은 정말, 글자가 아닌 것 같다. 갈 길이 없어서 글자를 해 놓은 것이지 화엄경은 글자가 아니다. ‘이명자상(離名字相) 이심연상(離心緣相) 이문자상(離文字相) 이언설상(離言說相)’ 다 떠나는 것이다. 모든 법이 글자를 떠나 있는 줄 알지만.
육조스님도 분명히 그렇게 해놓았다.
육조스님도 금강경 서문에 ‘내가 쓰는 이 해설은 뜻을 아는 사람, 견성한 사람 입장에서는 아무 필요가 없다. 그러나 아직도 눈이 멀고 길이 익숙하지 못한 사람을 위해서 네비게이션을 켜놓는다. 자기 집 갈 길을 아는 사람은 굳이 내 네비게이션에 의지하지 않아도 된다’ 육조스님은 분명히 그렇게 해놓았다.
‘아이들을 위해서 준비한 잔돈 서푼어치다. 그러니까 안 봐도 된다’ 아무리 천 번 만 번 읽어도 육조스님이 그래놨다.
‘그렇게 금강경이 좋다고 금강경을 많이 읽지만 광명이 불생이라. 왜 선정이 안 돋아나고 지혜가 안 돋아나느냐? 단지 입으로만 외워서 그렇다. 그럼 어떻게 해야 광명이 정혜쌍수가 되느냐? 구송심행(口誦心行)이라’
글은 눈으로 읽는 것이 아니고, 마음으로 행하는 것이다. 구송심행이라. 구송심행(口誦心行)하야 광명제등(光明齊等)이라.
광명이 가지런하게 나타난다고 육조스님이 금강경 서문에 그렇게 간곡하게 해놨다.
금강경을 한참 읽다 보면 금강경이 그냥 화엄경이다.
여읜 줄 알면서도
이영중생(而令衆生)으로: 중생으로 하여금
개득오입무애용(皆得悟入無礙用)과 : 다 깨달아 들어가게 하는 걸림 없는 작용과
지일체법입일상(知一切法入一相)호대: 또 모든 법이 한 모양에 들어감을 알면서도
이능연설무량법상무애용(而能演說無量法相無礙用)과: 한량없는 법의 모양을 연설하는 걸림 없는 작용과
지일체법이언설(知一切法離言說)호대 :모든 법에서, 혓바닥을 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모든 법이 말을 여읜 줄 알면서도
능위타설무변법문무애용(能爲他說無邊法門無礙用)과 :능위타설이라. 말을 떠난 줄 알지만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그지없는 법문을 연설하는 걸림 없는 작용이라.
능위타설무변법문 말로 안 되는 줄 알지만 계속 그렇게 하는 것이다.
어일체법(於一切法)에 : 모든 법에, 일체법의
선전보문자륜무애용(善轉普門字輪無礙用)과 : 넓은 글자 바퀴를 잘 굴리는 걸림 없는 작용과.
잠시만 짚고 가겠다.
53선지식편을 보다 보면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마야부인이 환생이다. 환으로 부처님을 탄생시킨다. 그러면 환인 줄 알아버린 사람의 정신 상태는 어떠냐? 어떤 데도 집착이 없는 청정무애념(淸淨無礙念) 해탈을 얻는다. 누가? 천주광녀(天主光女)가, 사자왕의 딸 천주광녀가 청정한 무애념을 얻었다.
여기서는 모든 글자를 떠나고 뭘 떠나고 한참 이렇게 진행된다. 그러면 청정무애용이 된다.
그것을 짚다 보면 등각 부분이 있다.
등각 부분은 나중에 한번 자세하게 짚겠지만, 그런 걸 한번 깊이 생각해 보셔야 지금 이 대목이 이해가 간다.
조금 들어가다 보면 천주광녀 다음 선지식이 변우동자사다. 변우동자(遍友童子)가 아니고 변우동자사(遍友童子師), 변우동자사는 선재동자에게 어떤 법문을 하는가?
변우동자사는 법문을 하지 않는다. 무언이 진언이다. 말 없는 것이 진짜 말이다.
여기 나오는 언설상을 떠났다든지 문자상을 떠났다는 이야기가 쭉 나오잖는가. 절대 표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무명무상절일체(無名無相絶一切)가 됐다.
그러면 변우동자사가 어떻게 법문하는가? ‘나 말고 내 제자한테 가 봐라’ 누구인가? 선지(善知) 잘 안다 중예(衆藝) 모든 것에 대해서, 예술에 대해서 잘 아는 선지중예동자에게 가 봐라.
그 선지중예동자는 이 세상의 모든 말인 42자모를 다 안다.
한 사람은 말을 절대 한마디도 안 했고 진공이고, 한 사람은
모든 말을 다 할 수 있는 묘음을 안다. 묘유, 진공묘유다.
한 사람은 이(理)의 극치를 보여주고 한 사람은 사(事)의 극치를 보여준다. 이사명연무분별(理事冥然無分別)이다.
여기에 ‘하나다’하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장소로 볼 때는 무처소라 하고, 시간적으로 볼 때는 무념이 라 하고, 모양으로 볼 때는 무상이라고 한다. 행하는 원력으로 볼 때는 또 무주라고 한다.
백퍼센트 다 똑같은 말이다.
선지중예동자(善知衆藝童子)는 뭐라고 하는가? 42자모를 가지고 이 세상의 모든 말과 글자를 다 만들어 낸다.
그중에 앞의 다섯 글자를 80권 화엄경에는 ‘아(阿)다(多)파(波)자(者)나(那)’라고 나오는데 청량국사가 ‘다(多)자는 아무래도 라(囉)자를 잘 못 쓴 것 같다, 범어가 비슷해서 라자로 봐야된다’라고 하였다.
아라바자나 안 까먹을 것 같다.
몰라봤잖아? 알아봤잖아? 아라바자나. 안 까먹을 것 같다.
문수보살의 게송이다. 우리가 오대산에 가면 가이드가 이렇게 말한다.
‘아라바자나 디디디 아라바자나 디디디 아라바자나 디디디 아라바자나 디디디’ 이것이 문수보살의 게송이다.
아(阿)자가 없다는 뜻인데, 아라바자나와 같은 뜻으로 우리 화엄경이나 선가에서 많이 회자 되는 게송이 있다.
‘요지일체법(了知一切法) 자성무소유(自性無所有)’가 아라바자나다. ‘본래 없다’ 이 말이 바로 아라바자나 다섯 가지 글자다. 이 다섯 가지가 본래 없는데 뒤의 37가지는, 가지이고 잎사귀이고 꽃이고 이런 쪼잔한 것들이다.
아라바자나는 몸통이다. 그 외에 사지, 손톱 발톱 눈 코 입 귀는 뭔가? 뒤의 37자모에 해당한다는 말씀이다.
제일 마지막 글자가 타(陀)자다.
세상의 모든 자모는 처음에 아(阿)자로 시작해서 마지막에 타(陀)자로 끝난다. 아미타(阿彌陀)로 끝나게 되어 있다. 전체가 가득할 미(彌)자다.
아미타로 끝나게 되는데, 그래서 여기서 언설상(言說相)을 떠났다든지, 말을 여읜 줄 안다든지, 다 말을 여읜 줄 알지만, 변우동자사가 한 마디도 말씀을, 법문도 안 하시고 ‘저기 중예동자에게 가서 물어보라’고 한다.
중예동자가 말하는 것이 전부 누구 법문하고 똑같겠는가? 변우동자사하고 똑같다.
말 안 하는 것과 말하는 것이 불이(不二)라. 유언(有言) 무언(無言)이 불이(不二)라, 유무가 둘이 아니다, 왜 그러냐?
본래 없기 때문이다.
생멸에서는 유무(有無)가 갈라지지만, 불생불멸에서는 유무가 갈라질 리 없고, 정사(正邪)가 갈라질 리가 없다.
불생불멸에서는 앞뒤가 다를 수가 없다. 없기 때문이다.
생멸에서는 아래위가 있고 앞뒤가 있지만, 불생불멸에서는 아래위가 없다. 그 이야기가 지금 여기에 통째로 나와 있는 것이다.
오늘 분위기가 왜 그런가?
웃지도 않으시고 멍하니, 못 알아들어서 그러신가?
집에 빨리 가고 싶은 생각뿐이신가?
“날씨 탓입니다.”
“날씨요? 그렇지요.”
이런 날은 또 꾸리하게 앉아 계셔야 한다.
화창한 날은 또 화창하게 앉아 계셔야 한다.
지난 시간에 강의할 때는 제가 이렇게 했다.
‘강둑을 막아서, 저수지를 막아서 아무리 크게 해놨다 하더라도, 둑이 넘치지 않도록 하는 것은 자랑할 일도 아니다. 둑이 툭 터져 버리고 없는 상태에서, 바다 같이 둑이 없는 상태에서 안 넘쳐야 진짜 안 넘치는 사람이다’이렇게 이야기했다. 지금 그 이야기다.
둑이 없지만, 넘치지 않는다.
억지로 유위법으로 막아서 안 넘치는 것과는 다르다.
요지일체법(了知一切法) 자성무소유(自性無所有)가 계속 박혀 있기 때문에 그렇다. 그것을 진공(眞空)이라 한다.
저 위에 십행품 뒤쪽에 그렇게 해놨다.
미지진실법(未知眞實法)이면, 진실한 법, 진짜 법을 알지 못한다면, 불명위공양(不名爲供養)이라. 그것을 공양이라고 하지 않는다. 염념(念念)에 공양무량불(供養無量佛)이라.
생각생각, 매순간, 한순간도 쉬지 않고 매일초마다 한번씩 모든 부처님께 공양을 올린다고 하더라도 미지진실법이면, 진실한 법을 알지 못하면, 본래 없는 줄 알지 못한다면, 그것은 불명위공양이라. 공양이라고 이름할 수 없다.
그러니까 모든 말이 법을 여읜 줄 알면서도, 다른 이에게 그지없는 법문을 연설하는 걸림 없는 작용과, 또한 모든 법에 넓은 글자문에 글자바퀴를 잘 굴리는 걸림 없는 작용이다.
글자도 본래 없지만. 또
이일체법(以一切法)으로 :모든 법을
입일법문(入一法門)호대 :한 법문에 넣어도
이불상위(而不相違)하야 : 서로 어기지 않아서
어불가설법(於不可說劫)에 :말할 수 없는 겁 동안
설불궁진무애용(說不窮盡無礙用)과 : 말하여도 다하지 않는 걸림 없는 작용과
이일체법(以一切法)으로 :모든 법이
실입불법(悉入佛法)하야: 다 불법에 들어가서
영제중생(令諸衆生)으로 :일체 중생들로 하여금
개득오해무애용(皆得悟解無礙用)과 : 알게 하는 걸림 없는 작용과
지일체법무유변제무애용(知一切法無有邊際無礙用)과 :지일체법 ‘지일체법 지일체법’ 계속 나온다.
어떤 부분에 나오는가? 범행품 제일 마지막에 여러분께서 잘 아시는 초발심시변성정각(初發心時便成正覺), 초발심시즉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다음에 나오는 구절도 이 구절이다.
‘지일체법(知一切法) 즉심자성(卽心自性)’ 일체법이 곧 심자성으로 되어있다. ‘성취혜신(成就慧身)에’ 내가 지혜의 몸을 증득하는 데 스승의 힘도 부처님의 힘도 빌릴 필요가 없다. ‘불유타오(不由他悟)라’ 어떤 선지식도 내 눈을 뜨게 해줄 수가 없다. 내 꿈은 내가 깨는 것이지, 누가 내 꿈을 대신 깨 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
지일체법(知一切法) 즉심자성(卽心自性) 아까 요지일체법(了知一切法) 자성무소유(自性無所有)라 했잖은가.
이것이 쭉 발달되면 야마천궁게찬품에는 어떻게 나오는가? ‘약인욕요지(若人欲了知) 삼세일체불(三世一切佛) 응관법계성(應觀法界性)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고 나온다.
그런데 원효스님이나 의상스님이 일체유심조에 그렇게 많이 꼽혀서 살지는 못하셨을 것이다. 그건 80화엄경 이야기다.
60화엄경에는 일체유심조가 즉심조제여래(卽心造諸如來)라고 나온다. 마음이 제여래를 만든 것이다. 마음이 모든 부처님을 만든 것이다.
“부처님이 뭔데요?”
“불생불멸이다,무생이다,무멸이다,무상이다,무념이다,무주다.” 이렇게 된다.
부처님이 진공이다. 긍정적으로 이야기하면 진공이다, 진여다, 진실이다 이렇게 할 수 있지만 차전으로 이야기하면 무생이다, 무념이다.
그래서 제가 지금 굳이 말씀드리는 것은, 승혜보살의 ‘요지일체법(了知一切法) 자성무소유(自性無所有)’라든지, 야마천궁게찬품의 ‘약인욕요지(若人欲了知) 삼세일체불(三世一切佛)’이라든지, 부처님이나 법을 제대로 안다면, ‘본래 없는 줄 알 것이다’라는 말씀이다.
무유변제무애용(無有邊際無碍用)이라. 모든 법이 가없음을 아는 걸림 없는 작용과, 무변(無邊)이라고 하는 것도 어디서 나오는가? 무생(無生)이기 때문에 없어지지 않는 무멸(無滅)로 가는 것이고, 무멸이기 때문에 무진상(無盡相)이다.
아까 제가 등각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변우동자중예각(遍友童子衆藝覺) 현승견고해탈장(賢勝堅固解脫長) 묘월장자무승군(妙月長者無勝軍) 묘월장자는 묘한 광명이 말없이 자기 집에 환하게 묘월(妙月)이 떠서 비춘다고 하잖는가? 그럼 무승군장자의 법문이 어떤 것인가? 무진상법문이다. 여기 나오는 무진제법문이라는 것이다. 무진(無盡) 다함이 없다는 것 있잖은가. 아까 무애념 이런 것을 했잖은가. 무승군쯤 오면 무진상법문이다.
그러니까 입법계품도 그냥 훑어보지 마시고 ‘이 사람이 해탈을 어떻게 했지?’ 하면 순서대로 딱딱 되어있다. 한 세트로 되어있다. 십지보살까지는 꽃이 피고 줄기가 뻗어가듯이 자비가 자란다고 한다.
등각에서부터는, 견성해 버린 정도가 되면, 초견성해서 완전히 들어가 버리고 나면, 법운지로 넘어가면, 자비가 자라지 않고 그대로 성숙해서 익어간다고 한다.
그래서 다시 한번 뜸을 완전히 들여서 넘어가면 금강위중을 넘어가면 묘각이다. 완전성불이다.
그런 경지가 있다고 이론적으로는 해놓는다.
그래서 ‘요 부분에 요렇게 배대를 해놨을 때는 아, 무진상이라고 했을 때는 뜻이 있겠구나’ 그럼 묘월장자무승군(妙月長者無勝軍) 다음에 뭐가 오겠는가? 최적정(最寂靜)이 온다.
기신론 같은 데는 최극적정의 일곱 단계로 넘어가야 된다. 사마타 수행을 할 때 아홉 개 중에 전주일취(專住一趣)가 되어서 완전히 하나로 정신이 꼽혀서 최극적정(最極寂靜)으로 넘어갈 때 그것을 최극적정이라고 한다.
최적정바라문자(最寂靜婆羅聞者) 완전히 사람이 고요해지면 그다음에 돋아나는 것이 천진난만하고 순진무구한 덕생동자유덕동녀다. 그다음에는 남을 위해서 한량없는 자비심이 갖춰지니까 자비의 화신인, 이름도 자씨미륵(慈氏彌勒) 미륵보살을 만나게 된다.
덕생동자 유덕동녀쯤 되니까 누구를 만나겠는가?
미륵보살이 눈에 보이는 것이다.
악독한 눈에는 부처님도 안 보인다.
개 눈에는 똥밖에 안 보인다.
국회의원 눈에는 투표밖에 안 보이잖는가. 국민이 안 보이고 투표, 표밖에 안 보인다. 덕생동자 유덕동녀 그다음에 미륵보살을 다 만나고 자비심이 충만할 대로 충만해져 버리니까 지혜의 문수가 갑자기 쑥 돋아나온다. 저 앞에 반환점 돌 때도 그랬다.
관세음보살님을 만나서 자비로울 대로 자비로와져 버리니까 선재동자가 정취보살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고, 정취보살이 동방묘장세계에서 보타낙가산까지 찾아왔다. 정취보살, 선지식이 찾아오는 것이다. 선수가 되게 똑똑하면 구단주가 돈을 들고 온다.
선수가 삐리삐리하면 구단마다 다니면서 ‘나를 좀 써달라’고 이력서를 넣어야 된다.
식당 제일 잘하는 집은 간판이 없어도 계속 그 집에 누가 온다. 명인은 길을 끊어놔도 누가 길을 놔서 찾아오고, 식중독 걸린 집에는 오던 사람도 안 온다.
자 마지막 꼭지 들어가겠다.
*
지일체법무장애제(知一切法無障礙際)가 :일체법이 장애가 없음을 장애제가 없으니
유여환망(猶如幻網)의 : 마치 환술의 그물처럼, 거기에는 줄을 그어야겠다. 꿈속에서 환망에서
무량차별(無量差別)하야 : 무량차별하야, 이것이 제일 잘 나오는 것은 비로장누각이다.
미륵보살이 살았던 데는 비로장누각이고, 보현보살이 보현삼매품에서 들어간 삼매는 비로자나여래장신삼매다.
비로자나여래장삼매에 들어가야 비로장누각에 들어간다.
비로자나여래장누각에 들어가는 것은 전부 다 뭘로 이뤄져 있는가? 꿈, 몽환으로 이루어져 있다.
일체유위법 몽환이라.
우리가 지금 이세간품을 하고 있지만 입법계품이나 저 앞의 세주묘엄품이나 보현삼매품 같은 것을 훑어볼 때도 화엄경이 하나로 쫙 전부 관통되어 있다.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치밀하게 할 수 있을까? 화엄경을 보면 그 글이 마치 잠수함, 거대한 항공모함이 있는데 부품이 어디어디에 있는지를 다 아는 사람이 쓴 것 같다.
화엄경을 보면 항공모함 설계한 사람이 배선구조를 환하게 외우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앞에 읽다가도 감탄하고 뒤에 읽다가도 감탄한다.
모르는 사람은 내가 지금 항공모함을 탔는지 안 탔는지도 모른다. 어디쯤 가고 있는지도 모르고, 대포알을 가지고 소총이나 권총에 장전하고 쏘려고 달려든다. 그게 될 리가 없다.
대포알만한 화엄경을 가지고 자기의 조그마한 새총에 넣어서 쏘려고 한다. 고무줄 새총에 미사일을 넣어 쏘려고 달려들고 이것이 이해가 안 되잖는가. 급이 맞아야 이해가 된다.
어른스님이 저한테 항상 하시는 말씀이 ‘화엄경을 안다는 것은, 니가 화엄경을 안다는 것은 망발이다’ 저는 정말 망발이라고 생각한다. 한망발해보자. 한량없이 차별함을 알고
어무량겁(於無量劫)에 :한량없는 겁 동안에
위중생설(爲衆生說)호대 : 중생에게 말하여도
불가궁진무애용(不可窮盡無礙用)이 : 한량없는 겁 동안에 죽을 때까지 말하여도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해도 다 할 수 없는 걸림 없는 작용이 이것이다.
시위십(是爲十)이니라 : 시위십이다.
허공이 어떻게 유통기한이 있겠는가? 없다.
마. 菩薩의 十種無碍用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有十種身無礙用하니 何等이 爲十고 所謂以一切衆生身으로 入己身無礙用과 以己身으로 入一切衆生身無礙用과 一切佛身으로 入一佛身無礙用과 一佛身으로 入一切佛身無礙用과 一切刹로 入己身無礙用과以一身으로 充徧一切三世法하야 示現衆生無礙用과於一身에示現無邊身하야 入三昧無礙用과於一身에示現衆生數等身하야 成正覺無礙用과於一切衆生身에 現一衆生身하고 於一衆生身에 現一切衆生身無礙用과 於一切衆生身에 示現法身하고 於法身에 示現一切衆生身無礙用이 是爲十이니라
“불자여, 보살마하살은 열 가지 몸에 걸림이 없는 작용이 있으니 무엇이 열인가. 이른바 일체 중생의 몸을 자기의 몸에 넣는 걸림 없는 작용과, 자기의 몸을 모든 중생의 몸에 넣는 걸림 없는 작용과, 모든 부처님의 몸을 한 부처님의 몸에 넣는 걸림 없는 작용과, 한 부처님의 몸을 모든 부처님의 몸에 넣는 걸림 없는 작용이니라.
모든 세계를 자기의 몸에 넣는 걸림 없는 작용과, 한 몸이 모든 세 세상 법에 가득하게 하여 중생을 나타내는 걸림 없는 작용과, 한 몸에 그지없는 몸을 나타내어 삼매에 들어가는 걸림 없는 작용과, 한 몸에 중생의 수효와 같은 몸을 나타내어 바른 깨달음을 이루게 하는 걸림 없는 작용이니라.
모든 중생의 몸에 한 중생의 몸을 나타내고 한 중생의 몸에 모든 중생의 몸을 나타내는 걸림 없는 작용과, 모든 중생의 몸에 법의 몸을 나타내고 법의 몸에 모든 중생의 몸을 나타내는 걸림 없는 작용이니, 이것이 열이니라.”
*
보살(菩薩)의 십종무애용(十種無碍用)
*
불자(佛子)야 :불자야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 :보살마하살이
유십종신무애용(有十種身無礙用)하니: 열 가지 몸에 걸림이 없는 작용이 있으니
하등(何等)이: 무엇이
위십(爲十)고: 열인가.
소위이일체중생신(所謂以一切衆生身)으로 :소위 일체중생의 몸으로써
입이신무애용(入己身無礙用)과 :자기의 몸에 넣는 걸림 없는 작용과
이기신(以己身)으로 :자기의 몸을
입일체중생신무애용(入一切衆生身無礙用)과:일체 중생의 몸에 넣는 걸림 없는 작용과, 수준 낮은 해석으로도 옛날에 이 책이 쓰여질 당시에 각막이식 수술이라든지 신장이식 수술, 이런 것은 택도 없고 그냥 희망사항이었다.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여기서 미국 사람하고 전화통화 한다는 것도 있을 수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상상을 해도 이 정도까지 했다면 이것은, 화엄경은 우리가 진리라고 믿어야 한다.
과학이 발달할수록 보니까 화엄경은 비과학적인 것이 아니고 과학 이상의 초과학 같다. 과학의 논리를 초월해 있는 ‘아, 그게 마음이구나’ 싶다.
컴퓨터 같은 것을 다뤄보면 그렇다.
램바이오스를 다루다보면 ‘이것은 제 6식과 똑같네’ 롬바이오스를 만져보면 ‘이건 제 7식인데?’ 오퍼레이팅(operating) OS 돌아가는 것을 보면 ‘어떻게 이렇게 전부 내 의지와 아집이 돌리는 것과 똑같지?’하게 된다.
하드 디스크 같은 것, 메모리칩 같은 것을 보면 ‘이것은 제 8식에 저장된 것하고 똑같은데?’ 꺼내면 그대로 여지없이 다 나온다. 신기하게도 심리의 구조와 물리의 구조가 하나도 다름이 없다.
십현문에도 조그마한 손바닥 거울에 천리 만리가 다 들어간다고 했잖은가.
지금 심리적인 것을 제일 잘 만들어 놓은 것이, 제가 미국식 영어로 말하겠다. ‘컴퓨러(computer)’같다.
이 신체, 바디를 갖다가 제일 잘 만들어 놓은 것이 자동차 같다. 헤드라이터도 있고 배기통도 있다.
이수사변(理隨事變)이라고, 옛날에는 석탄 쓰다가 경유쓰다가휘발유 쓰다가 수소 쓰다가 전기 쓰다가 다 그렇게 하잖는가.
앞으로는 공기만 연료로 쓰는 차도 나올 것이다.
이수사변(理隨事變)이요 사득이융(事得理融)이라.
사물이라고 하는 것은 사(事)가 발전하는 만큼 이(理)가 크고,이가 따라간다.
또 이(理)가 발전하는 만큼 사(事)로 팽창하게 되어있다.
그런 것을 왕복서(往復序)에서 읽으면서 어릴 때 무슨 뜻인지도 몰랐지만, 하나하나 이렇게 보면 ‘어떻게 이렇게 되어있지?’한다.
아이패드 같은 것을 옛날에는 생각도 못했다. 지금 이 속엔 수천 권의 책이 있잖은가. 무게는 0그램이다.
우리도 전부 아뢰야식이 막 커져서, 뇌가 커져서 기억되고 이런 것이 아니고, 제로 섹터에다 기억되는 것 같다. 제로에 다 들어가는 것 같다. 진공에.
그러니까 ‘없어야 다 있지’ 이런 이야기가 화엄경을 보면 툭툭 튀어나온다.
‘없으니까 있지’ 이러면 남들이 ‘거 택도 아니다’ 생멸에 떨어진 사람들은 있어야 ‘있다’고 한다.
‘없어야 있지’ 이런 것은 화엄경을 본 사람들의 얘기다.
그러다 보면 어떤 현상이 우리에게 오느냐?
남을 이해하는 처신머리가 조금씩 바뀐다.
나이 들어서 바뀌는 것이 아니고, 좀 빼족하던 것이 많이 무뎌진다. 그러니까 바늘이 점점 단단해진다. 어설프게 이불꿰매다 툭 부러지는 바늘이 아니다.
자 또 보겠다.
일체불신(一切佛身)으로 :일체 부처님의 몸을
입일불신무애용(入一佛身無礙用)과: 한 부처님의 몸에 넣는 걸림 없는 작용과
일불신(一佛身)으로 :한 부처님의 몸을
입일체불신무애용(入一切佛身無礙用)과 : 모든 부처님의 몸에 넣는 걸림 없는 작용과, 지금 이것은 얼마든지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가 있다.
광협자재무애(廣狹自在無礙)라. 화엄경 십현문에 나온다. 광협이 자재하다.
일체찰(一切刹)로 : 모든 세계를
입기신무애용(入己身無礙用)과 : 자기 몸에 넣는 걸림 없는 작용과
이일신(以一身)으로 : 한 몸이
충변일체삼세법(充徧一切三世法)하야 : 모든 삼세법에 가득하게 하여
시현중생무애용(示現衆生無礙用)과 :중생을 나타내는 걸림 없는 작용과
어일신(於一身)에 : 한 몸에
시현무변신(示現無邊身)하야 : 그지없는 무변한 몸을 나타내어
입삼매무애용(入三昧無礙用)과 : 삼매에 들어가는 걸림 없는 작용과
어일신(於一身)에 :한 몸에
시현중생수등신(示現衆生數等身)하야 :중생의 수효와 같은 몸을 나타내어
성정각무애용(成正覺無礙用)과: 바른 깨달음을 이루게 하는 걸림 없는 작용과
어일체중생신(於一切衆生身)에 :모든 중생의 몸에
현일중생신(現一衆生身)하고 : 한 중생의 몸을 나타내고
어일중생신(於一衆生身)에 :한 중생의 몸에
현일체중생신무애용(現一切衆生身無礙用)과 :모든 중생의 몸을 나타내는 걸림 없는 작용과
어일체중생신(於一切衆生身)에 : 모든 중생의 몸에
시현법신(示現法身)하고: 법의 몸을 나타내고, 또
어법신(於法身)에 :법신에
시현일체중생신무애용(示現一切衆生身無礙用)이: 중생의 몸에 나타내는 걸림 없는 작용이니
시위십(是爲十)이니라 : 이것이 열 가지니라.
이것이 열 가지라는데 어쨌든지 아는 사람은 물을 마실 때 냉난(冷煖)을 자지(自知)라. 스스로 알 것이다.
소경이 눈을 못 뜨면 앞에 아무리 장엄한 경계가 펼쳐져도 못 보는 것이다.
제가 한 번씩 이야기하잖는가.
분명히 영화 보러 갔는데 영화관 간판만 보고 오는 사람도 있고, 영화 내용을 보는 사람도 있다.
지난 시간에 우리가 했던 것이 코끼리 몸 했잖은가?
어디를 만져도 다 코끼리 몸이라고 했잖은가.
진짜 코끼리 몸을 만진 사람은 꼬리나 어금니만 만져놓고 코끼리 몸이라고 우기지는 않는다.
|
첫댓글 一切唯心造...고맙습니다 _()()()_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_()()()_
고맙습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