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소 제조업체 사장인 A씨는 지난해 신입사원 중에 토익 성적이 980
점인 사원을 발견하고 매우 흐뭇했다. 인사 담당자는 “드디어 우리 회사
에도 영어 잘하는 사원이 들어왔다”며 자랑했다. 그래서 이 사원에게 팬
시용품 수출 업무를 맡겼지만 국제전화도 제대로 못하고 쩔쩔매는 것을
보고 안 되겠다 싶어서 3개월만에 다시 일반 영업부서에 배치했다. A씨는
“토익 성적이 좋다고 해서 큰 기대를 했는데 영어 구사능력이 신통치
않았다”며 “제대로 영어하는 사람을 고르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유
아에서부터 초중고생 대학생 직장인에 이르기까지 영어공부에 엄청난시간
과 돈을 들이고 있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의 영어실력은 노력에 비해서 크
게 낮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2년 전 한 명문대의 어학특기자전형에 토플 성적이 670점인 고3 수험생
이 지원했다가 논란 끝에 탈락됐다. 토플 성적은 상당한 수준인데 비해
영어 인터뷰 과정에서 말하기가 의외로 형편없다고 판단해 심사위원들이
낮은 점수를 줬기 때문이다. 대학 본부는 “탈락시키면 문제가 생긴다”
며 합격시키기를 원했지만 해당 단과대에서 반발해 결국 입학시키지 못했
다.
영어를 가르치는 초중고의 영어교사부터 영어 구사 능력을 갖추지 못해
회화보다는 읽고 해석하는 전통적인 교수법을 그대로 쓰고 있다.
또 회사 입사나 승진 등 각 분야에서 영어능력이 강조되면서 토익 토플
등 영어능력 공인성적을 요구해 영어공부가 ‘점수 따기’에 치우치면서
영어교육을 왜곡시켰다는 비판도 있다.
국가별 영어 수준을 비교할 때 토플이나 토익 성적이 인용되고 있지만
나라별로 응시자 수나 응시 형태가 매우 다르기 때문에 통계 자체만으로
단순 비교하기는 어렵다.
한국의 토플 평균 성적은 2000년 현재 677점 만점에 533점. 노르웨이(6
19점) 핀란드(591점) 독일(584점) 프랑스(557점) 등 유럽 국가들이 상대
적으로 높다. 아시아에서는 영어가 공용어인 인도(581점) 필리핀(566점)
이 높고 중국(559점) 파키스탄(541점)베트남(530점) 인도네시아(525점)
대만(515점) 북한(509점) 일본(504점) 등의 순이다.
신현옥 한미교육위원회 부단장은 “한국은 마구잡이로 시험을 보는데
비해 응시료(110달러)가 큰 부담이 되는 중국 등에서는 준비된 학생만 응
시해 성적이 높다”고 말했다.
그러나 토익 토플 성적이 높더라도 읽기 쓰기 듣기 등 영어 능력을 골
고루 갖추기 힘들어 성적 자체만으로 영어실력을 평가하는 것은 무리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특히 토익은 시험 형식 등이 비교적 간단해 요령을 익히고 시험을 반복
해서 보면 성적을올릴 수 있다고 알려지면서 학원가의 토익 특강반은 성
황을 이루고 있다. 대학생들은 영어 공부보다는 답을 골라내는 훈련에 더
열중하고 있다. 지난해 토익 응시자 98만여명의 평균 성적은 990점 만점
에 558.7점이고 이중 4회 이상 응시한 사람이 전체의 39.1%나 됐다. 초중
고생은 4만4000여명(4.5%), 대학생은 47만여명(48.5%)이나 된다. 1회 응
시자의 평균 성적은 481점, 2회 533점, 3회 563점, 4회 이상 응시자는 62
2점으로 시험을 치르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점수도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K대 3학년 L씨(23)는 “요즘 대학생들은 1학년 때부터 토익 공부에 매달
리기 때문에 문제만 보면 답을 찍을 정도”라고 말했다.
P어학원 강사는 “토익은 시간관리 요령, 문형 익히기 등을 연습하면 1
00점 이상은 쉽게 올릴 수 있다”며 “고득점자도 몇달 손을 놓으면 성적
이 떨어진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토익 성적이 높지만 영어 구사 능력이 떨어지는 경우가 허다
하다. 영어강사 이보영(李寶寧)씨는 “라디오 영어프로그램에서 토익 만
점을 받은 대학생과 영어인터뷰를 하자고 했더니 한사코 거부해 무산된
적이 있다”며 “요즘 젊은이들은 생활영어 구사 능력은 향상됐지만 영어
를 체계적으로 배우지 못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영어 능력이 부족하기는전문가들도 마찬가지다. 외교나 무역 분야 등
에서는 보다 정확하고 수준 높은 영어가 필요하지만 이런 능력을 갖춘 사
람을 찾기 어렵다. 한국은 영어로 생활할 수 있는 인프라가 제대로 갖춰
져 있지 않아 외국인 투자가들이 동남아로 발길을 돌리고 있다.
현 정부에서 외교부장관을 지낸 한 인사는 직업외교관인데도 영어 능력
때문에 구설수에 오른 적이 있다. 그는 말 한마디가 내용을 뒤바꿀 수
있는 민감한 외교 사안을 논의할 수준이 안돼 회담 때마다 통역을 대동해
야 했다. 이 때문에 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미국 국무장관은 “한국 외교
부장관은 영어가 안돼 도저히 협상을 못하겠다”고 불평하기도 했다는 후
문이다.
한 외교관은 “영어권 국가에서 근무해도 영어 실력을 향상시키기가 쉽
지 않다”며 “자유토론을 하는 다자간 국제회의 등에 가면 한국 외교관
들이 발언을 안하기로 유명하다는 조롱을 듣는다”고 말했다.
98년 1월 미국 뉴욕에서 열린 한국의 외채전환 협상 테이블에서 13개
세계 은행 대표들과 마주앉은 한국 재정경제원 실무협상팀은 초장부터 진
땀을 흘렸다. ‘탄환’을 뜻하는 ‘bullet’이란 단어가 월가(街)에서는
‘일시 상환’으로 사용되는데 구체적인 분야로 들어가자 이런 전문용어
들이 쏟아져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유능한 미국인
법률고문이 민감한 사안에 대한 답변을 도맡아줘 간신히 협상을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성신여대 최인철(崔仁哲·영어평가) 교수는 “최근 말하기 능력이 강조
되다보니 오히려 독해나 영작 능력을 소홀히 해 영어교육의 균형이 깨지
고 있다”며 “각 분야에서 영어를 제대로 구사하는 인력을 확보하는것
이 국가 경쟁력을 높이는 길”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