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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마, 카르마의 귀결
윤회
전생
깨달음
천화
영생의 길
신에 이르는 길
9.28
깨달음 = 윤회의 그침
아름다운 지구학교에서 장구한 세월을 거쳐 진화하는 인간은 교정을 마치고 나면
지상에서의 삶은 가치와 매력을 그치고 인간계로의 재탄생(윤회)를 그친다.
깨달음을 구하는 것은
'인간진화의 역사를 되풀이 하는 것'이다.
호모 스피리투스 15. 카르마
토론
선생님은 언젠가 카르마에 대해 설명해 주신 적 있습니다. 그것에 대해 좀더 자세히 설명해주실 수 있습니까?
전 우주와
우주에 담겨있는 전부는
그 속에 있는 각각의 모든 요소가
그 자체의 본질의 실현이자
표현이 된다는 점에서,
'나타난 신의 단일한 카르마적 펼쳐짐'으로
작용합니다.
그래서
삶의 경험은
이 모든 장의 상호작용하는 춤이고
이 춤은 신성하게 명령받은
존재할 수 있는 능력의 귀결입니다.
존재를 갖는 것은 또한
생명을 가질 수 있는 능력과 더불어 창조될 수 있고
이렇게 해서 하나의 존재가 됩니다.
있다는 것은
앎의 능력을 비추는 빛으로
생명의식 자체와 더불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전 우주와
그 속의 모든 것이
카르마의 단일체인 한,
'실상과 전부임은 깨달음의 각성'입니다.
'전부가 동일한 근원에서 비롯된 카르마적 단일체'라면
그 어떤 분리를 보는 것은
지각에서 빚어진 가공물이지요.
실상에서
하나와 여럿은
동일합니다.
근육테스트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카르마에 대한 모든 질문에
쉽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본질적으로
'개인의 카르마'는
'의식의 비물질적 영역내에 존재하는 정보 꾸러미'입니다.
'개별적 카르마'는
'저장된 정보의 암호를 담고 있는데'
이는 영체나 영혼에 내재해 있으며
그것의 일부이지요.
그 암호는
모든 과거 경험의 집적을 나타내는데
여기에는 관련된 생각과 느낌의 뉘앙스가
함께 들어 있습니다.
영체는
'선택의 자유를 보유하지만,
선택의 범위는 이미 정해져 있지요'.
경향성이 재발하는 경향이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와 동시에 변할수 있는 기회는
있습니다.
예를들면
그것은
대립쌍의 모순을 초월하는 것이지요.
영혼은
물질적 환생을 선택할 수도 있고
육체를 갖지 않을 수도 있으며
혹은 아스트럴계를 탐험하고
따라서
지옥과 연옥들에서 몸부림치거나
보다 희망적인 경우에는
사랑, 진실, 신, 그리고/혹은 구세주의 지지 및
이들에 대한 내맡김 덕분으로
하늘나라로 따라 들어가기도 합니다.
자부심과 겸손함 사이의 선택은
개인의 카르마에
상당한 영향을 미칩니다.
근육 테스트를 통해
붓다의 목적은
깨달음을 가르치는 것임이 명확해졌지요.
이와 대조적으로
그리스도는
자신의 영적 실상을 수용하지 않은
모든 영혼을 위해
구세주로 왔습니다.
붓다는 깨달음을 가르쳤고
그리스도는 구원을 가르쳤지요.
카르마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지상에서의 삶은
불공평하고 잔인해보입니다.
순진한 이에게는
무고한 사람이 살해당하고
악인은 대가를 치르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모순을 설명하기 위해 의지하는
목발과 같은 것이지요.
믿음은
현상너머에 신성한 실상이 있다는
확신입니다.
우리 자신의 연구와 경험을 통해서 보았을 때
근거는 충분합니다.
어떤 사람들이 전생을 기억하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입니까?
600이하의 의식수준에서는
육체/마음을,
나임의 실상으로 동일시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전생에 대한 기억상실이 있습니다.
이 기억상실은
변성의식상태, 유체이탈 경험, 꿈, 최면상태, 임사체험,
자연발생적 플래시백에서
넘어설 수 있지요.
플래시백은 외상후 스트레스장애 즉 PTSD 플래시백은 현실에서 어떠한 단서를 접했을 때 그것과 관련된 강렬한 기억에 몰입하는 현상이다. 이 현상은 단순히 과거를 떠올리는 회상과는 다른 의미이며 현실과 완전히 격리된다. 다시 말해, 다시 한번 그 상황으로 돌아가 끔찍한 상황을 겪는 것.
임상에서 전생퇴행 요법은 널리 알려져 있고, 이 생에서 질병이나 심리적 문제로 나타난 숨어있는 전생의 상처나 오류에 대해 매우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전생 퇴행요법은 정말로 눈부신 치료효과를 거둘 수 있지요.
게다가
어린아이들도
전생에 대해 자발적으로 이야기하는데,
어떤 아이들은 이전의 존재에 대해
검증가능한 세부를 기억해내기조차 합니다.
600이상의 의식수준에서는
전생을 기억할 수 있는데,
그것은 자기의 동일시가
'의식이라는 목격자/경험자/앎과의 동일시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회상을 통해
과거 생의 의미깊은 영적 사건들과
이번생의 사건, 태도, 심리적 특성이
일치하는 것을 볼 수 있지요.
성찰해보면
하나의 패턴이 떠오르는데,
그것은 영혼의 여정이라고 할만 한 것을
반영합니다.
붓다는
수많은 전생을 기억해냈지만
그런 앎이 전통적인
유대-기독교 전통의 일부는 아닙니다.
비록 고대부터 있어온
다른 세계 종교들은
전생을 잘 이해하고 있지만 말입니다.
영적 연구에 따르면
붓다는 수많은 환생을 거쳤지만
예수는 이전에 한번도 인간으로 살아 본적이 없이
하늘나라에서 곧장 내려왔습니다.
따라서
카르마에 대한
앎을 배제하는 길은
믿음에 크게 의지해야만 합니다.
그것 말고는
인생사를 설명해주는
영적으로 온전한 다른 방법은 없을테니까요.
카르마에 대한 앎을 배제하는 길의 약점은
믿음이나 신념을 상실할 경우
환상이 깨진 영은
절망에 빠지거나
신의 대용품에 매달리기 쉽다는 것입니다.
이는 서구세계에서는
아주 흔한 일이어서
이성/논리/과학으로 표현되는 지성이
이제 더 나은 삶을 향한
큰 희망이 된 사실을 증명해줍니다.
이런 일이 일어날 때
마음과 이성은 신격화되고,
마치 종교와도 같은 대접을 받습니다.
사람들은
사회적, 정치적 대의와 지적 위치성에
열정적으로 몸 바치고,
그 다음에 이런 것들은
인류의 새로운 구세주로 승격됩니다.
이러한 성향이
400대 의식수준의 특징인데
이 수준을 초월하는 일은
흔치 않습니다.
우리는
세계 인구의 96%가
499의 의식수준을 초월하지 못하는 것을 봅니다.
하지만
지성이 영성을 완전히 대체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래서
400대의 많은 사람들은
지성에 깊은 믿음을 가지면서도 동시에
종교적이거나 영적인 추구에 관여하고 있지요.
현명한 이들은
지성이 사람을 데려갈 수 있는 곳이
거기까지라는 것과
그 너머에서는 믿음과 신념이
지식을 대체해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육체의 죽음뒤에 의식의 다양한 카르마적 잠재성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음과 같이 측정됩니다.
200 이하의 의식 | 다양한 수준의 지옥과 낮은 아스트럴 영역 | |
200-240 의식수준 | 안쪽 아스트럴 평면들 | 하늘나라들 : 형상의 지속 |
240-500 의식수준 | 높은 아스트럴 평면들 | 하늘나라들 : 형상의 지속 |
500-600 의식수준 | 천상계 | 하늘나라들 : 형상의 지속 |
600 의식수준 이상 | 높은 하늘나라들(비형상) |
연구에 따르면
하늘나라는
200 수준이상으로 측정되는
영혼들만의 운명이며,
다양한 영적 집단과
신념체계를 반영하는
다수의 하늘나라가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다양한 종교들이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필요한 일정한 "요구사항"들을
구체적으로 밝혀놓았지요.
어느 집단이나
"자신만의" 하늘나라 구역에 가지만
순진하게도 그곳이 유일하다고
추측하는 것 같습니다.
영적 행선지가
다수라는 발견은
위로가 됩니다.
누구나
"나만의 곳으로 간다"는 것은
의식의 전반적 특성과 부합합니다.
믿음과 봉헌에는
그에 걸맞는 보상이 있지요.
하늘나라가 여럿이고
각각의 하늘나라는
그곳을 신봉하는 이들과 맞는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존중과 겸손을 가질 때
종교적 갈등과 경쟁없이 살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독점성을 갖고 있다는 순진한 주장은
종교 집단간의 불화를 낳습니다.
모든 위대한 스승은
죄를 짓지 말라고 역설하는데,
그것은 200이하로 측정되는 행동과 태도를 피하고
그러한 에너지 장과의 관련을 피하라는 의미입니다.
스승들은
그러한 것이 엄청난 괴로움이 있어서
지옥이라고 불리는 영계로 가는 길이라고
가르칩니다.
지옥은
영적 고뇌와 절망을 가리키며
대부분의 사람은
지상에서의 이번 삶에서
절망, 우울, 두려움, 공포, 상실, 불안이라는
지옥의 상층을 이미 적어도 어느만큼은 경험했습니다.
죄책감이
괴로운 참회계로 귀착되리라는 것은
분명해 보이는데,
사람들은
그곳에서 아주 깊은 곳까지
이를 수 있지요.
지옥의 여러수준을
정확히 묘사한 것은
단테였습니다.
보스와 같은 화가들은
일반적으로
형상이 지배하는 지옥의 상층을
묘사합니다.
훨씬 더 끔찍한 것은 지옥의 하층인데,
아래로 내려갈수록 그곳은
역설적으로 점점더 형상없는 것이 되어,
마침내는 무시간적이고 극복할 수 없으며
이름없는 공포와 절망속으로 가라앉습니다.
하층에서 시간이 멈추고
괴로움은 영원하며
결코 끝나지 않는 것으로 경험됩니다.
그리하여
지옥의 하층에 들어서면
"희망을 영원히 버려라"라는 표지판을
시각적으로 경험한 것과도 같은
인식이 나타납니다.
그곳에서 영혼은
신의 빛으로부터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차단된 듯한
무시간적 절망의 무한한 지옥으로
들어갑니다.
이번 생에서
그와 같은 경험이
실제로 있었습니다.
형상없고 무시간적인 지옥의 밑바닥에서
영의 어떤 면이 살아남아
"신이 있다면 도와주십시오"라고
기도했습니다.
자비롭게도
그 뒤에 망각이 찾아왔습니다.
알수 없는 시간뒤에 의식이 돌아왔지만
그것은 이제 완전히 다른
눈부신 장려함의 영역으로 들어갔고,
거기서
이전의 모든 자기감은
'무한하고 신성한 현존으로 대체'되었습니다.
마음은
존재하는 전부의 근원이자 본질로서의
신성의 드러남의 장려함에 대한
경외심에서 침묵했지요.
영적 진실이
대단히 명료하게 빛을 발했습니다.
분리된 사적인 자기에 대한 모든 감각은
이미 지워져 있었고,
남아있는 유일한 실상은
현존의 무한한 전부임이었습니다.
여러해가 지난뒤
"천국과 지옥은 종이 한장차이'라는
선의 가르침이 회상되었지요.
그 경험의 힘은
그에 대해 쓰거나 말하기라도 할 수 있기 위해 통합하는데
30년이라는 세월을 필요로 했습니다.
말할 것도 없었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없었지요.
그러다가
어떤 설명을 허락해준 작업이 일어났는데,
그것은 의식혁명의 저술로 귀결되었습니다.
변형 이전에는
에고가 행위의 원인으로 추정했던
중심적 자기가 있는 듯했습니다.
그것은
현존에 의해 완전히 씻겨 나갔지요.
그 다음에
원인이라는 환상이 사라졌고,
전부가 신성에 의해 창조된 대로
자신의 본질의 결과로서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나고 있다는 앎이
대신 들어섰습니다.
전부는
그 자체의 타고난 본성이
다른 모든 것의 타고난 본성과 상호작용하고 있는 까닭에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원인은 없습니다).
행위는
'생명의 반응성의 상호작용하는 춤'입니다.
설명
"그 무엇에 대해서도 원인은 없다"는 진술은
999로 측정된다.
붓다의 연기법은
965로 측정된다.
붓다는 연기법은
형상이나 존재,
즉 나타난 것의 진화와 관련된다.
그러나
붓다는 궁극적인 것(공)은
형상너머에 있으며
영원한 것은 없다고 말했다.
(즉 무상의 법칙, 혹은 아바타)
영혼은
에고의 비 물질적 잔재이며
그래서 에고가 해소될 때
개인의 영혼조차도 그 카르마적 경향과 더불어
궁극적 실상의 나타나지 않은 하나임속으로
녹아든다.
비선형적 실상 속에는
분리된 것들이 존재하지 않는 까닭에
인과율과 같은 설명은 불필요하다.
비유해서 말하자면
한방울의 물은
대양에 떨어져 대양과 하나가 된다.
토론
영적 스펙트럼의 양끝에 있는 그러한 극단적 상태들에 대해 왜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러한 것을 설명할 수 있을만한
맥락이 없었습니다.
타인에게
그런 일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무의미했을 것입니다.
한번은
뉴욕의 거리에서 어느 이방인과의 자연스러운 만남이 있었는데,
그때 참나의 진실에 대한 깨달은 앎을
말없이 교환하고 상호 인정한 적이 있었지요.
몇년뒤 스와미 묵타난다와 잠깐 마주쳤고, 그로부터 얼마뒤 라메쉬 발세카와 며칠간 긴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이 대화는 존재대 비존재의 대립쌍을 초월하는 것의 의미에 관한 토론을 동반했지요. 라메쉬 발세카는 니사르가다타 마하리지의 통역자이면서 그와 20년 이상 가깝게 지낸 결과 깨닫게 되었습니다.
현존으로 나타난 앎의 상태는 멈춰 있었습니까?
세상속에 존재하는 법을
다시 배우는 몇년동안
그것은 멈춰있었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이제 분리가 아닌 무집착이
있기 때문이었지요.
분리가 없다면
세상으로의 복귀는
없었을 것입니다.
집착이 없을 때
성격은 자유롭게 상호작용합니다.
성격은
앎의 상태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하지만 몇년 뒤
의식은 다시 진화하며
나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여러해 동안
보통의 세계를 떠나 있을 필요가 생겼지요.
앞선 영적 앎의
표면적으로 추상적인
이원성들이 나타났습니다.
의식발전을 가로막는
일체의 장애에는
끝없는 고뇌로 경험된
지독한, 타는 듯한 고통이 따랐습니다.
보다 높은 재맥락화를 통해
모순의 문을 초월하면
고뇌는 사라졌지요.
이런 것이
붓다를 공격했던
표면적 악마들임이 명백해졌습니다.
이들은
장구한 세월동안
의식속에 축적되어 온
하위 에고 상태의 집단 에너지를 나타냈습니다.
그것은 마치
에고의 기초자체가 강력하게 방어되고 있는 것과 같은데,
에고의 생존이 위협받을수록
방어의 강도는 점점 세집니다.
영적 진보에 대한 심령의 대항은
지독히 격렬해졌습니다.
영적으로 진보할때마다
보다 앞선 진실의 표면적 대립물에 의한
심령의 공격이라고 할 만한 것이
되풀이 되었지요.
그것은 마치
진실의 전진으로 인해
지배권이 위협받고 있는 것과 같았습니다.
한번은
세상적 현존은 없지만
의식수준상에서 보다 세련된
루시퍼적 현존과 맞닥뜨린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에게 동의하면 큰 힘을 주겠다고 약속했지요.
제안을 거부하자 그것은 물러났습니다.
비유해서 말하자면
그것은 붙느냐 떨어지느냐를 가르는
고난도 시험이라고 할 말한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역시
그러한 시험을 거쳤다는 것과
유혹을 거부했다는 것을 보고 알 수 있었지요.
붙느냐 떨어지느냐를 가르는
이 시험에 도달한 모든 실체가
유혹을 거부하진 않았다는 것 또한
분명했지요.
유혹은 말을 통하지 않고
하나의 이해로서
다음과 같이 교묘하게 제시되었습니다.
"이제 당신은
모든 카르마를 넘어섰음을 깨달았으므로
어떤 귀결도 없이
자유롭고 큰 힘을 행사할 수 있다.
왜냐하면
당신의 행위에는
어떠한 귀결도 없고
당신은 더이상 귀결을 겪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위대한 화신들이
이 유혹을 깨끗이 물리쳤다는 것은 명백했고,
그 고비에서 많은 수행자가
추락했음 또한 명백했습니다.
그래서
이 의식은,
이득을 얻기 위해 그러한 조건을 이용할 순 없다는
절대적 선언으로 받아들여졌지요.
그 수준이 갖는 힘을
신에의 봉사에 재봉헌하자,
유혹하는 에너지/실체/의식은 사라졌습니다.
(루시퍼적 오류는 하나의 영이 보통의 인간 카르마 너머로 진화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우주와 신의 카르마적 법칙에 지배된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입니다).
이 수준에서 일어나는 루시퍼적 유혹은
미묘하고도 세련되었습니다.
그것은 발전했지만
아직은 불완전한 영적 지식과 이해를 갖고 놀지요.
유혹은 이렇게 제시됩니다.
"이제 당신은
사랑에 대한 집착에서 풀려났고
모든 카르마가
오직 환상을 기초로 하고 있었다는 것과
심판하는 두려운 신이나
마주칠 그 어떤 타자도 없다는 것을 각성했다.
그리고
이제 형상을 넘어섰기 때문에
카르마를 넘어섰고
완전히 자유로우며
당신의 힘에는 한계가 없다.
그 힘을 소유하라"
그 제안은 힘 자체를 위한 힘에 가담하여 루시퍼의 영역에서 군림하라는 것입니다. 유혹은 영적 에고를 향한 것이고 신의 사랑을 거부하는 대신 신의 힘을 손에 넣으라는 것이지요.
역사적으로
예수는
루시퍼가 자신에게 고개를 숙이라고 요구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그러면
온 세상을 지배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되리라는 것이었지요.
예수의 묘사에서
일반적으로 유추되는 의미는
신이 아닌 루시퍼에게 항복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붓다 또한 비슷한 유혹에 대해 묘사했지요. 루시퍼의 영역에는 사랑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사랑의 부재는
또한 사탄의 영역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필수조건입니다.
그것은 2차 대전 당시 남경에서 일본군 병사들의 훈련에서 가시적으로 표면화했고, 폴포트 정권하의 캄보디아에서 다시 표면화되었습니다. 패배한 적이나 포로들에게 동정이나 연민을 보이면 욕설이 날아갔지요. 그것을 최고도로 시위한 것은 어머니 품에 안긴 갓난아이를 웃으며 대검으로 찔러죽인 병사였습니다. 그것은 고문으로 표면화된 사탄 에너지이요. 악의 무리로의 전향은 신입자가 타인들 특히 죄없는 무력한 이들의 고통, 몸부림, 괴로움에서 쾌락과 만족을 얻을때 완성됩니다.
전쟁은 또한
강간, 약탈, 방화, 대량파괴에 흘리는
사탄적 존재들을 불러모으는
궁극의 징병소입니다.
이른바 아스트럴계에 대해서는 어떤 설명이 가능하겠습니까?
아스트랄 투사는 하나 이상의 물리적이지 않은 비육체적인 차원과 이와 연관된 신체가 육체적인 것을 넘어서는 것으로 추정되는 유체이탈 경험의 초상현상적 해석이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차운을 아스트랄(astral), 에테르적(etheric), 영적(spiritual)이라고 부른다. 아스트랄 투사는 영혼이나 영체가 육체를 떠나 영의 세계나 아스트랄계(astral plane)로 여행을 떠나는 것 경험으로 이야기되기도 한다
무한한 수의 우주가
무한한 차원들 속에 존재합니다.
세계는
우리가 인간적 관점의 위치성에서
물질적이라고 부르는
창조의 가능한 한가지 표현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인간적 위치성으로부터 타고난
인간적 에고 중심성을 가지고 바라본 세계가
실재한다고 여겨지기 때문에
다른 우주는 공상이거나 실재하지 않는다고
여겨지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불확실한 영역들에 대해
조사할 믿을만한 방법을 갖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신성한 경전에서는
그러한 영역이 실재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았지만
그 대신 우리에게 초자연적인 다른 영역들을 피하라고 경고했지요.
아스트럴계는
다양한 이유로
인간에게 위험한 영역입니다.
그곳은
눈에 보이지 않고
합의적 검증이 가능하지 않으며
보통 사람은 알지 못하는 영역들이지요.
그곳을 점령하고 있는 것은
미지의 에너지와 의도를 가진 실체들입니다.
그들은
지극히 영리하고
무구한 인간들을 유혹하여
자신의 영향력 아래 굴복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또한 하위 아스트럴계는
그보다 약한 인간들의 의식을 접수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지극히 위험한 실체들을 포함하고 있지요.
하위 아스트럴계는
무수히 많은 에너지를 담고 있는데
이들은 경건하게 말하고
자신이 '마스터, 바바, 형제' 등과 같은 이름을 가진
영적 안내자라고 허위로 주장합니다.
인간은
비물질적이고 불가사의하고 신비적인 것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 영적임에 틀림없다고 생각으로 인해
속기 쉽지요.
영적으로
진짜임을 주장하는 아스트럴 면은
무수히 많습니다.
무수한 채널러가
그런 면과 접촉해왔고
그에 대해 많은 책을 썼습니다.
그런 영역은
어느것이나 전형적으로
영적 위계질서를 가지고 있는데,
그중 일부는
예수 그리스도를 포함하고 있다고
주장하기까지 합니다.
그곳은 또한
훈련과 입문절차를 포함하며,
독점성과 소유욕이라는 면에서 사교와 비슷하지요.
그런 계의 일부에서는
고대의 신비를 전해준다고 주장하거나
혹은 자신의 가르침이
고대 신비가, 예언자, 성서속의 인물,
이집트의 사제 등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다수가
신비적 상징과 의식에
크게 의존합니다.
순진한 이들에게
그 모든 주장은
인상적으로 들립니다.
여기서 유혹은
고대 신비유파의 입문자가 된다는 식의
매혹과 특별함이지요.
그것이 사실이라해도
사람은 그런 실체들이 인간과 다른 차원에 있다는 점에서
즉각 어려움에 봉착합니다.
그들의 주장이 유효하다고 하더라도
엄연한 사실은
인간으로서의 나는
그들 중 하나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러한 실체들은
모호한 아스트럴 면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 사실을 인정하며
그 대신 다소 괴상한 이름을 갖기 마련인
그들 영역의 신과 만나게 될거라는 약속과 함께
영혼의 여행에 초대할 수도 있습니다.
계속할 경우 입문자는
위대한 신 너머에
무한한 수의 더욱 광대한 다른 영역이 있고
하나하나의 영역을
신비스러운 이름을 가진
또 다른 실체가 다시 지배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요구사항은
흔히 비밀엄수의 맹세외에
상당한 액수의 수업료입니다.
(실상에서 지고는
이름과 형상 너머에 있음에 주목하십시오).
이 현상을 연구하던 도중에
상당히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낮은 아스트럴 면에서는
신을 거부하고 증오하는 실체들이
거주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신을 질투하며
인간 성격과 야심,
그리고 영적 스승들을
흉내내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들의 계략은
인간을 조종하여 신에
이르는 통로가 막혀있는
어떤 의도적인 길로
사람들을 돌려세우는 것입니다.
이 연구를 진행하는 동안
그들이 왜 신을 거부했는지에 대한 질문은 하지 않았고
더이상의 조사도 진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면의 많은 실체가 속임수에 전문가이며,
그들이 선호하는 대상은
진짜 구도자나 혹 심지어는 예수 그리스도보다
더 높다고 주장하는 아스트럴 실체에게 빠지는
상대적으로 진화한 수행자임이 밝혀졌습니다.
또한
극단적으로 부정적인 악마적 에너지들이
실제로 육체속에 일시적으로 거주한다는 것과
이는 흔히 기괴한 범죄나 연쇄 살인을 낳는다는 것은
대중매체를 통해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정신병에 걸렸거나 마약에 취한 이들,
혹은 최근에 뇌를 다친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나 신이
모든 검증 가능한 영적 가르침에
명백히 반하는 방식으로 행동하라고 말하는게 들린다고
공공연하게 선포하는 일이 드물지 않습니다.
그래서
인간으로 태어난 것은
큰 선물이자 기회로 보이는데,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구원, 하늘나라,
깨달음에 이르는 통로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진보는
다른 차원에 있는 실체들에게는
영적으로 가능하지 않은 듯합니다.
명백히 그들은
신에 대한 대안을 창조했는데,
그러한 대안은 악마, 사탄, 루시퍼와 마찬가지로
혹은 반신처럼 제한된 영역에서 군림하는
다종다양한 가짜 신들과 마찬가지로
영적 실상을 결하고 있습니다.
오컬트나 아스트럴계, 혹
은 초자연적 영역에 발을 담그는 것은
인간에게 결코 이롭지 않은듯 합니다.
오컬트(occultism
)는 물질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숨겨진 지식"을 탐구하는 학문이다. 라틴어 "오쿨투스(Occultus: 숨겨진 것, 비밀)"에서 유래하였다.
사실 그것은
심각한 손해를 끼칠 수 있지요.
보통의 인간세상에서도
인간정신은
단순한 문제들에 대해서조차
진실과 거짓을 구별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관찰하세요.
그렇다면
인간 정신이
은폐된 목표를 갖고 있는
미지의 실체들에 대해
진실과 거짓을 식별할 수 있는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요?
그러므로
이 문제를 조사해보고 내린 결론은
영적 전통의 결론과
동일했습니다.
그것은
어떤 이름을 자처하는 것이든 간에
초자연적인 것을 피하라는 것이지요.
(이것은 그런 영역에 발도 담그지 마라는 의미입니다).
정말이지 이 세상은
진정한 위대한 영적 스승들과 가르침으로 축복받았고,
그 모두가 완전하고 전체적이라는 것
그리고 아무리 인상적이고 경건하고 혹은
유혹적으로 제시된다고 해도
다른 영역에서 온 유사 가르침을
구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각성합시다.
무한한 지고는
전시대에 걸쳐
전 인류에게 동일합니다.
모든 인간 종교의 신은
하나이자 동일하며
예전의 모든 부족 신을 초월합니다.
신은
초월적인 동시에 내재적이며,
하늘나라에도 있고
우리들 안에도 있습니다.
각성된 참나는
내재하는 신에 대한 인식이지요.
이것은
하늘나라가 우리들 안에 있다는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부합합니다.
무한하고 무시간적인 실상은 또한
역사적으로 불성, 그리스도 의식,
크리슈나의 지고 등으로
일컬어져 왔습니다.
순진한 초보자는
거짓 길들이 있다는 것과
부주의한 이를 끌어들임으로써 이득을 보는
교활한 사기꾼들이 있다는 걸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양의 탈을 쓴 늑대를 조심하라고
경고했지요.
이제 구별은
확실하게 이루어질 수 있고,
함의적으로 검증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연구는 그러한 가르침에 바쳐집니다.
"의식혁명'을 출간할 당시 측정의 일부는 1994년에 이루어졌습니다. 그 뒤에 바뀐 것이 있습니까? 예를들면 당시에 700대로 측정되는 사람들이 지구상에는 12명뿐이었고, 세계인구의 85%는 200이하로 측정되었습니다.
인류의식이 진보한 결과 측정치는 변했습니다. 지금은 세계 인구의 78%만이 200이하입니다. 그것은 정말 심오한 의미를 내포한 거대한 진전이지요.
또 다른 변화는
600대로 측정되는
개인들의 숫자 또한
늘어났다는 것입니다.
얻어진 정보는
수학적 계산의 결과가 아니라
영적 앎의 의식연구의 결과지요.
의식이 진화함에 따라
모든 나라와 문화가
이행을 겪고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한 움직임은
전 인류의 의식에 영향을 미칩니다.
분리의 환상을 초월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전 인류는
하나라는 것과
600이상으로 측정되는 뛰어난 존재들은
우리 모두에게 속해 있다는 사실을
각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은
대양에 이는
파도의 물마루일 뿐입니다.
600대 이상으로 측정되는 이들은
자신이 전 인류임을 밝혀내는데,
그들은 인류를 사랑해 마지 않는
신성한 존재로 봅니다.
누구나
그들의 에너지를 이용할 수 있지요.
전부를 포괄하는
무조건적 연민속에서
전 인류의 치유가 일어납니다.
카르마가 영혼의 운명을 결정합니까?
영혼은
'자신의 행위로써 선택한 영역들'에
끌려갑니다.
영적 의지에서 나온
모든 행위가
강한 결정력을 갖지요.
비유해서 말하자면
영적 의지의 모든 행위는
컴퓨터 같은 의식속으로 들어가는데,
이는
'우주의식 안의 영혼체 내에 있는 영구적 트랙'입니다.
그것은 미소한 주파수 패턴이지요.
그 에너지 양은
세상의 기준으로는
극단적으로 미소하게 측정되었습니다.
이 수치는
근육테스트로 도출해낸 것이지
수학적 방법이나 물리 실험실에서의
실험으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와트라는 용어에 익숙한 것은 전기요금을 매달 소비되는 메가와트에 따라 지불하기 때문입니다. 숫자와 기준을 도입한 목적은 그저 비선형적 영역에 행위들을 등록되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표시하는 것에 비견할만 합니다.
뉴턴적 패러다임의 물리학과 수학은
비선형적 영역에는
적용되지 않습니다.
한 영역의 도구를
다른 영역에 부적절하게 적용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순진한 일이지요.
의식혁명에서 일부 방법이 두 영역에 걸쳐 있는 것으로 제시되었지만, 엄밀한 한 영역의 도구를 다른 영역에서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서로 다른 실상은
서로 다른 맥락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느 질문자가 "광자보다 더 작은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라고 했을때 그가 말하려고 했던 것은 측정가능성이 유의미한 개념인 물질적 영역에서 광자보다 더 작은 것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었지요.
영성의 비선형적, 비물질적 영역에서
그러한 진술은 어떠한 의의도 실상도 갖지 않는데,
왜냐하면 비선형적인 것은
정의상으로 비물질적이고,
형상 너머에 있고,
규정할 수 없고 측정할 수 없으며
뉴턴 수학너머에 있기 때문입니다.
미시적이고
뉴턴적이며
측정 가능한 세계와
극미의, 비가시적인 저변에 있는 실상을
이어주는 가교에 가장 가까운 것이
'양자 역학'입니다.
양자역학(量子力學, 영어: quantum mechanics, quantum physics, quantum theory)은 분자, 원자, 전자, 소립자와 미시적인 계의 현상을 다루는 즉, 작은 크기를 갖는 계의 현상을 연구하는 물리학의 분야이다.
또는, 입자 및 입자 집단을 다루는 현대 물리학의 기초 이론이다. '아무리 기이하고 터무니없는 사건이라 해도, 발생 확률이 0이 아닌 이상 반드시 일어난다'는 물리학적 아이디어에 기초한다.
현대 물리학의 기초인 양자역학은 컴퓨터의 주요 부품인 반도체의 원리를 설명해 주는 등 과학기술, 철학, 문학, 예술 등 다방면에 중요한 영향을 미쳐 20세기 과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이론으로 평가된다
양자역학에서는
관측가능량은
관찰이라는 단순한 행위에 의해
영향받고 변화됩니다.
무한한 양자 잠재성은
의식과 물질기층과의 상호작용,
즉 공간이나 위치속의 파동/입자 잠재성과
예측 불가능성을 편향시키지요.
관측가능량은
계측 가능한 것을 대체하고
따라서
관찰 가능량은
자립적이고 고정된
객관적 실상이라기 보다는
관찰자 직관의 선택으로 보입니다.
생각이
광자보다 작다면
그것은 뉴턴적 용어로는
측정할수 없는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영혼의 운명은
전적으로 이 보이지 않는 힘의 영역속에 있고,
지금 그속에 있거나 혹은
거기에 있었던 모든 것은
시간을 초월하여 추적가능합니다.
나타나지 않은 것은
나타난 것의 법칙에
영향받지 않습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나타난 것은
나타나지 않은 것의
무한한 잠재력에 따라 펼쳐지는데
이를 '창조의 법칙'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비록 근육테스트를 통해 도출해낸 측정치가
전통 과학으로는 측정가능하지 않다고 해도
그것은 임상적, 경험적으로 믿을만하고
내적 일관성이 있으며
수많은 연구자가 시간을 두고
재현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그것이
사람의 현재 삶과 영혼의 운명에 갖는 효과는
측정가능한 의식 에너지가 변함에 따라
현저히 달라지지요.
따라서
측정된 의식수준은
그 어떤 일시적이고 물질적인 조건보다
더욱 강력합니다.
세상적인 모든 것은
먼지로 돌아갑니다.
보통의 주지화나 이성으로는
비물질적인 영적 실상을 이해할 수 없음을
알아두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선형과 비선형은
서로 다른 패러다임과
맥락으로부터 일어납니다.
근육 테스트는
선형에서 비선형으로 건너가기 위한
지금까지 발견된 것으로는
유일한 식별수단이라는
보이지 않는 본유적 성질을 바탕으로
기록하고 반응합니다.
모든 과학적 도구, 장치, 개념은
생명의 본질 자체에 대해
어쩔수 없이 외래적입니다.
과학은
생명의 귀결과 생명현상을 바라보지요.
생명이 현존할 때
심장이 박동하고 뇌파가 발생합니다.
생명이 부재할 때
이런 현상은 정지됩니다.
심장박동과 뇌파는
생명현존의 귀결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 것이 생명자체는 아니지요.
생명은 감각으로 포착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이 육체를 떠날때도
우리는 생명의 현존을 추적할 수 있고,
생명에너지의 생명은
중단없이 계속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생명자체는 죽지 않습니다.
생명에너지가 육체를 떠날때
그것을 추적한다면
우리는 그것이 측정 가능한 자신의 수준에서
전과 동일하게 계속되는 것을 봅니다.
물론
인간의 상상력은
그것이 어딘가 다른 곳으로 간다고
추측합니다.
그러나
실상에는
어딘가 다른 곳이
없습니다.
시간, 소재, 일시성 바깥에는
여기도 저기도 없습니다.
지금이나 그때도 없지요.
에고가 계속 우위를 점한다면
영혼은 자신이 측정가능한
자신의 의식수준과 일치하는
특정영역에 자리잡는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따라서
영혼은
비물질적인 영역에서
실상에 대한
자신의 정의를 발견하고
경험할 것입니다.
영혼은
자체의 카르마적 부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영혼의 행선지를
안쪽(비물질적) 영역이라고 부르지요.
의식은
어떠한 수준에서도
주관적으로 실상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앞장에서 살펴보았듯이
물질성 너머에 있는 의식영역들도
여전히 형상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형상은 의식자체에 의해 설명될 수 있을 뿐인데,
의식은 본질적으로 형상 너머에 있습니다.
형상은
본래적으로 형상없는 그것에 의해
경험될 수 있을 뿐이지요.
그 다음에 형상은
육체적 죽음뒤의 한 실상으로서
계속 경험될 수 있습니다.
가능한 모든 의식수준을 둘러싸고 있는
그런 비물질적, 실상의 수는
무한합니다.
그것은
모든 시대에 걸친
인간의 집단적 지혜와도 일치합니다.
깨달았다는 것은
의식이 자신의 맨 안쪽에 있는
타고난 성질을
비선형적 주관성이자
자신의 앎의 능력으로
각성했음을 의미할 뿐입니다.
집단 카르마와 같은 것이 있습니까?
우리 연구는
그와 같은 것이
실재로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역사적으로 인류는
영적 의지의 동의하에
숱한 집단활동에 참여했고
그것과 동일시 해왔지요.
역사는
무수한 정복자 무리의 침략, 군대, 직업적 선택,
그밖의 집단 동일시로 가득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동일시하는
그것을 겪습니다.
선택과 동일시의
진동패턴은
의식 장 자체에 기록되지요.
어떤 집단 잠재성의 탓으로 돌리면
그 집단의 카르마를 겪게 됩니다.
그리하여
모든 집단은 시간속에서
나타났다 사라지며
나중에 다른 의상을 입고
다른 사회적 표현으로 재출현합니다.
의식이라는 맥락의 영향력은
일정한 부족, 국가, 계급, 성, 인종, 직업 등의 속으로
재탄생될 일정한 행동이나
성향을 끌어 당기거나 밀쳐냅니다.
우리는
시간속에서 숱한 재난이
동일한 카르마적 운명을 공유하는
개인들의 집단에 동시에 발생하는 것을 봅니다.
현인의 주관적 실상은 무엇입니까?
참나는
모든 형상 너머에 있지만
그러면서도 모든 형상속에 내재합니다.
참나는 무시간적이고
시작이나 끝이 없고
변치 않고 영원하며 불멸입니다.
그 속에서
앎, 의식, 고향에 있음의
무한한 조건이 솟아나지요.
참나는
만인의 나 감각이 솟아나는
궁극적 주관성입니다.
무한한 실상은
그 자체를 나로서 인식조차 않지만
그러한 진술을 할 수있는 능력의 기층을 이루지요.
참나는
보이지 않으며 오직 현존합니다.
보통의 용어로는
참나는 타고난 그 어떤 내용도 없지만
어떤 내용이라도 가질 수 있는 성질과도 같습니다.
경험함이나 목격함을 가능케 하는 성질이
바로 참나지요.
참나의 근원은
신성이라는 실상입니다.
비록 참나는
존재의 근원이지만
존재에 종속되지 않고
그런 용어를 적용할 수도 없습니다.
신의 은총이라는 용어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신의 은총은
영역과 가능성으로서의
그 모든 표현에서
전 우주의 카르마적 일관성이 갖는
절대적 확실성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은총은
구원과 절대적 자유를 향한
모든 수단을 다 사용할 수 있도록
의식의 영역 내에 예비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선택을 통해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지요.
셈에 넣어야 할 임의적인 낮은 힘은 없습니다.
사랑은
사랑을 선택하고
사랑에게 갑니다.
용서의 메카니즘이 바로
그런 용서를 낳지요.
전 우주는
연민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모두가 그것을 이용할수 있습니다.
기도는 효력을 발휘합니다.
신은 어떤 임의적 방식으로 결정하지 않습니다.
신성의 타고난 성질은
자비와 연민이지요.
호의를 구할 필요는 없습니다.
주어진 것으로서
이미 존재하는 그것을
수용할 필요가 있을 뿐이지요.
은총은
받아들여지거나
거부될 수 있을 뿐입니다.
개별영혼은
스스로가 자격없게 느껴져서
받아들임을 거부할 수도 있지만
주께서 이르시되 심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은 에고의 위치성에
좌우될 것입니다.
심판의 날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십니까?
인간은 에고의 성질을 근거로
신에 대해 추정하고
그 다음에 신을 두려워합니다.
심판의 날은
매일입니다.
심판의 날은
이미 여기 있고,
계속되며 끝나지 않습니다.
(이 진술의 측정수준은 999)
육체적 생명에서 카르마는 언제 시작됩니까?
사람들이 알아야 할
중요하고도 흥미로운 사실은
인간영혼이나 영은 임신 3개월 말까지는
태아의 몸속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의식연구에서
이 사실은 반복적으로 검증되었지요.
태아는
나중 입주자를 위해 세워지고 있는
집과도 같습니다.
3개월 말까지는
그와 같은 본질적으로
인간적인 거주자는 없습니다.
태아가 유산되거나 자궁안에서 죽으면
영혼은 환생하기 위해
생존능력이 있는
또 다른 태아를 찾아야 합니다.
최신 과학은 결국 이 우주에 종말이 오리라고 예측합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요?
이 물질 우주는
무한한 수의 차원들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에고는
육체성, 시간, 장소와 동일시하기 때문에
자신의 실상이
지각된 우주에 국한된다고 상상합니다.
영이 임신 3개월 말경에야 육체와 결합한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영은 육체적 생명이 끝날때 언제 육체를 떠납니까?
죽음이 갑작스러운 경우
영은 즉각 떠납니다.
하지만
서서히 죽을 경우
영은 육체가 실제로 죽기전에
떠나기 시작하지요.
치매, 알츠하이머병,
혹은 심한 진행성 장애인 경우,
영의 앎의 측면은
몸을 떠나서 영적 차원들 속에
자리잡기 시작합니다.
양로원에서 일하는 이들은
누구나 이런 현상을 흔하게 목격하지요.
가족들 또한 그 사람이 "더이상 거기 없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에테르 에너지체는 육체성이 끝날때까지 계속 몸에 남아있지만 정신적 의식은 더이상 지배적이지 않습니다.
의식이 육체를 떠나기 시작할때
기억, 지남력, 가족구성원을 알아보는 능력이
점차로 상실됩니다.
인지력과 이해력은
더이상 기능하지 않지요.
그 전부터나
그와 동시에
그 사람이 선잠에 빠지는 기간이 있을 수 있는데,
보고에 따르면
사람들은 이때
다양한 천상계를 방문한다고 합니다.
죽어가는 이들 대부분이
깊은 평화를 보여줍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죽음을 실제로 경험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나 감각은
육체에서 분리되고
육체의 죽음은
그저 목격될 수 있을 뿐이니까요.
육체는
과거의 기억에 불과하며
새로운 실상에 대한 앎이 그것을 대신합니다.
육체는 잊혀질 뿐
흥미로운 눈 앞의 실상이기를 멈춥니다.
죽을 때
새로운 실상은
압도적으로 흥미진진하지요.
이것은 또한
임사체험이나 유체이탈 경험을 통해서도
확증됩니다.
영적 전통에서는
영이 육체의 전적인 포기를 완료하는데
대략 사흘이 걸린다고 보고합니다.
이 사실은
근육테스트를 통해서도 확증되지요.
그러므로
전통적으로 시신을 매장하기 전에
영혼이 분리과정을 완성하여
갈망, 불만, 혹은 상실감이 남지 않도록
죽음뒤 사흘간 기다리도록 권유하는 것입니다.
나 감각이
더이상 육체를 포함하지 않을 때
생존의 두려움은 그칩니다.
숱한 취약성이 사라지며
무한히 안전하고 안녕한 느낌으로
대치되지요.
더이상 온갖 방어와 기제들이
필요하지 않으므로
깊은 안도감과 함께
그것들을 놓게 됩니다.
게다가
삶을 고역으로 만들었던
육체적 죽음에 대한 기본적인 저변에 깔려있는
무의식적인, 항상하는 두려움이
고맙게도 사라집니다.
취약한 육체성과의 에고 동일시가 사라지고
육체성이 존재의 근원이라는 환상이 사라지면서
평화가 나타나지요.
진짜 죽음이란 어떤 실상이 있습니까? 그런 것이 있기나 한 걸까요?
죽음이란
사람이 자신으로 동일시하는 것의
상실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가능한 죽음들의 위계가
실제로 존재하지요.
가장 기본적인 것은
육체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고,
그 다음에 오는 것이
감각, 기억, 자신의 인생 이야기의
상실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그 다음에는
감정체의 상실에 대한
두려움 등으로 이어지지요.
그러나
이 모든 것의 바탕에 있는
진짜 죽음,
에고가 정말로 두려워하는 것은
분리되어 있는 자율적 실체로서의
에고의 상실입니다.
나 감각이
육체라는 동일시를 초월하는 일과는 달리
에고가 나의 실상이라는
감각의 상실은 죽음으로 경험됩니다.
사실
그것이 일어날 수 있는
유일한 실제의 죽음이지요.
이 생에서
현세적 시간으로 이행에 걸린 시간은
1분도 채 안됐겠지만
실제로 그 일이 벌어졌을때
그것은 그토록 심원한 깊이에서 일어나는 듯했고
통제하거나 회상하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건물이 붕괴되거나
지진이 날때처럼
일단 과정이 시작되자
그것은 자체의 추진력으로 진행되었으며,
관련된 일시적 공포감을 불러일으켰지요.
그것은 마치
실상의 핵이었던
모든 것의 구조자체가 사라지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때
그 자리에서 참나의 무한한 나의
엄청난 경이로움이 빛을 발했지요.
바로 그 순간,
사라지고 있던 에고의 마지막 남은 잔재는
경외심에 말문이 막혔습니다.
일체가
현존의 무한하고 막강한 멎어있음 속에서 말을 잃었고
침묵했습니다.
전존재는
신성의 표현으로 빛을 발했고
신의 진실은 모든 환상을 지우고
생각이라는 허식을 지웠습니다.
그것은
완전하고 전체적이었지요.
그렇다면 죽음에 대한 모든 두려움은 사실상 에고가 나라는 감각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입니까?
그렇습니다.
마음은
죽음의 공포를
육체의 죽음에 대한 공포로 정리하지만
그것은 눈가림에 지나지 않습니다.
에고가 정말로 두려워하는 것은
나로서의 에고 자신의 생명과 정체를 상실하는 것이지요.
에고의 불안의 바탕에는
자신의 취약성에 대한 앎이 있습니다.
만일 에고가
절대적 실상을 기반으로 한다면
에고는 자신이 무시간적이며
또한 취약하지 않다는 걸 알터이므로
두려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진짜 나에 대한 인식에는
무한의 절대성에 대한
앎이 들어있습니다.
사적인 나는 내용인 반면
실상인 나는 맥락이지요.
비유해서 말하자면
구름은 변하고 소멸되지만
하늘 공간은 본질적으로 침해받지 않습니다.
날씨는 이랬다 저랬다 변하지만
하늘 자체는 변함없이 그대로지요.
깨달음이란 정체가
구름에서 하늘로 바뀐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현인은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모든 우주가 태어나기 이전에 있는 그것이고
모든 우주가 다 사라진 뒤에도
그와같이 머물 것이다.
절대인 나는 영원하며
더이상 죽거나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나는 모든 우주가 태어나기 이전에 있는 그것이고
모든 우주가 다 사라진 뒤에도 그와같이 머물 것이다.
절대인 나는 영원하며 더이상 죽거나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
죽음이란 사람이 자신으로 동일시하는 것의 상실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가능한 죽음들의 위계가 실제로 존재하지요. 가장 기본적인 것은 육체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고, 그 다음에 오는 것이 감각, 기억, 자신의 인생 이야기의 상실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그 다음에는 감정체의 상실에 대한 두려움등으로 이어지지요
단테 5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