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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인의 괴수에게 임한 은혜
디모데전서 1:12~17
321장(날 대속하신 )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인 디모데전서 1장 12절 이하 말씀은 사도 바울의 개인적 간증이 담긴 말씀입니다. 아마도 사도 바울이 이렇게 개인적인 과거에 받은 하나님의 은혜의 체험을 밝히는 것은 당시 이 편지를 받는 디모데가 사역하고 있는 에베소 교회의 거짓 교사들을 겨냥한 것이며, 디모데에게는 바른 사역자의 모습을 일깨워주고자 함일 것입니다. 우리도 사도 바울의 개인적 간증이 담긴 이 말씀을 함께 살펴보면서, 우리 자신의 삶에 일어났던 주님의 은혜의 만지신 경험들을 회상하고 주님께 대한 헌신을 새롭게 다짐하는 복된 시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먼저 하나님께 감사하는 그의 마음을 고백함으로 개인적인 간증을 시작합니다.
1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사도 바울은 앞절인 11절에서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맡기신 일을 잠깐 언급한 바 있습니다. 그 일을 생각하면서, 사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회상하자 그의 마음은 감사의 마음이 벅차올랐던 것이 분명합니다. 자기 같은 사람에게 영광의 복음을 맡겨주신 것을 생각하니 사도의 마음은 감사한 생각이 충만해졌던 것입니다.
그가 이어서 감사한 이유에 대하여 여기 12절에서 세 가지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먼저, 사도 바울은 주님께서 자기를 능하게 하신 것이 감사하고 있습니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사도는 수많은 이적을 행하였는데, 그 모든 능력이 바로 주님께서 자기에게 베푸신 성령의 은혜로 주어진 것임을 여기서 밝히면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에게 남다른 어떤 능력과 재주가 있다 한다면, 그것은 우리 자신의 남다름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능하게 하셔서 베푸신 선물임을 기억하고 그 일을 인하여 주님께 감사하기 바랍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자기를 주님께서 충성되이 여기심을 인하여 감사하고 있습니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사도는 주님께서 자기를 믿을 만한 사람으로 여기고 써 주시는 것을 생각할 때에 감사하기 그지 없습니다. 믿을 만하여 자기의 일꾼으로 삼아 일을 맡겨주신 것이 감격스러운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우리 자신도 얼마나 부족합니까? 변덕스럽고 줏대없고 능력도 없고 신실치도 못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우리를 일 맡겨주면 끝까지 자기를 지켜 행할 줄 믿고서 이렇게 우리를 불러 써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지금까지 우리를 믿어주시고 앞으로도 잘 해 나갈 것으로 믿어주신 주님의 신뢰를 기억하면서 부르심받은 자리에서 끝까지 더욱 충성합시다.
또한 사도 바울은 자기에게 직분을 맡겨주신 것을 인하여 감사하고 있습니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직분이라는 단어는 ‘디아코니아’인데, 그것은 섬김을 의미하는 의미입니다. 특별히 주님은 사도를 이방인의 사도로 불러서 이방 나라 백성들에게 가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여 그들로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는 직분을 맡겨주셨습니다. 사도는 그 이방인의 사도로 자기를 하나님께서 불러 직분을 감당하게 하신 것을 큰 영광으로 여기고 그 일에 온갖 열심을 다했습니다. 그는 안디옥 교회에서 교사로 섬길 때에 성령께서 그와 바나바를 불러 이방 선교 여행을 떠나게 하셨는데, 1차만이 아니라 2차, 3차 선교 여행을 떠났으며, 나중에 로마에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고 심지어 바다 건너편 당시 서쪽 끝이라 일컫는 서바나 지금의 스페인 지역까지 복음을 전하는 일에 헌신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사도 바울은 말할 수 없는 고난을 겪곤 했으니, 그가 고린도후서 11:23 이하에서 사도 스스로가 고백한 바를 잠시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린도후서 11:23~27)
이렇게 힘들고 거친 고생 속에서도 불평없이 자원하여 그 직분을 끝까지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주님께서 자기 같은 자에게 이렇게 주님과 주님의 백성들을 섬길 수 있도록 직분 주심이 너무 감사하고 감격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크건 작건 간에 다 직분을 맡은 자들입니다. 이 ‘직분’이라는 헬라어 단어가 ‘디아코니아’로서 봉사, 섬김, 집사직분, 사명, 구제와 부조하는 일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봉사의 일입니다. 그렇게 주님과 교회를 섬기는 봉사의 일에 우리가 부름받았다는 점에서 크건 작건 간에 모두가 다 직분을 부여받은 복스러운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교회에서나 가정에서나 학교에서나 직장에서나 다 섬김의 일, 봉사의 일로 부름받은 자로서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여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들이 됩시다. 그럴진대 주님께서 교회에서건 가정에서건 맡겨주신 직분을 고생스럽고 어려움이 많지만 불평 원망 없이 그 일을 최선을 다하여 잘 감당한다면, 주님께서 반드시 우리에게 귀하고 영광스러운 상급을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능력도 주시고 충성스럽게 여겨 주시고 또 직분까지 주셨으니, 날마다 충만하게 감사하고 또 감사하면서 매일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사도 바울은 과거에 그가 범했던 과거의 큰 죄를 여기서 끄집어내면서 고백합니다.
13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사도 바울은 거의 삼십 년 전에 있었던 일을 여기서 회상합니다. 그가 당시 열렬한 바리새인으로 있을 때인데, 예수님의 승천 후에 기독 교회가 예루살렘과 유다 그리고 갈릴리 지방 중심으로 뜨겁게 발전해가고 있었기 때문에 사도는 이것을 보고 견딜 수 없는 분노가 일어나 교회를 파괴하려고 덤벼들었습니다. 예수님을 나사렛 이단의 괴수로 보았으며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신자들을 이단에게 사로잡힌 어리석은 자들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스데반 집사님을 돌로 쳐 죽일 때에 그 일에 대하여 앞장서서 자기가 옷 맡은 자가 되었습니다. 그 후에 교회와 성도들의 집들을 수색하면서 성도들을 끌어내어 때리고 감옥에 넣고 예수님을 억지로 부인하도록 강요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여기서 세 가지 단어로 자신을 표현합니다. ‘비방자’라는 말은 예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한 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박해자’라는 말은 성도들을 끝까지 추적하여 잡아오는 끈질긴 그의 행동을 이른 말입니다. ‘폭행자’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휘브리스테스’라는 말은 난폭한 폭력배를 이르는 말입니다. 특별히 이 단어는 가학적인 심성을 가지고 괴롭히는 것을 말한다고 성경학자는 말합니다. 사도행전 9:1 말씀에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라고 할 때의 모습을 연상하면 이해가 될 것입니다. ‘폭행자’라는 단어에 담긴 뜻은 사도 바울이 초창기 기독교인들을 잡아서 감옥에 넣고 때릴 때에 그가 악마적이라고 볼 정도로 이정사정이 없었고 신자들이 괴로워하면 오히려 기뻐할 정도의 악랄함이 있었다는 뜻인 것입니다. 이럴 만큼 사도 바울은 믿기 이전에 주의 백성들을 잔혹하게 다루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가 예수님이 누군지 모르는 상태에서 범했기 때문에 그를 용서해주신 것입니다. 그가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자기의 일을 간증하는 것에도 이 일을 언급합니다. 사도행전 26:9 이하의 말씀에 이르기를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많은 일을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 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을 행하여 대제사장들에게서 권한을 받아 가지고 만흔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찬성 투표를 하였고 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고 그들에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까지 가서 박해하였고”(사도행전 26:9~11)
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렇게 열심히 교회를 박해하였던 것은 그렇게 해야 하나님을 잘 섬기는 줄 알고서 행한 것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긍휼을 입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렇게 그리스도의 이름과 주님의 교회를 박해한 큰 악을 행하였으나 우리 구주 예수님께서는 그를 심판하여 멸망에 밀어넣지 않으셨으니 이는 그를 긍휼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도리어 하나님은 그런 바울에게 넘치는 긍휼을 베풀어주셨습니다.
14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여기서 보면 사도 바울이 자기의 어리석고 악한 행동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베풀어주신 긍휼에 대하여 이렇게 첨부하여 설명하였습니다.
먼저 주님의 은혜가 그에게 넘치게 부어졌습니다. 원문에 보면, ‘휴페르플레오나죠’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넘치게 풍성하게 솟아올라 흐른다는 뜻입니다. 남아 돌 만큼 넘치게 부어진 은혜를 표현하기 위하여 사도는 이 단어를 썼습니다. 사도가 처음 믿기 이전에 행한 일에는 많은 죄악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그 모든 죄악보다 훨씬 더 많이 넘치는 은혜를 베풀어 주셨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쓴 로마서 5:20 말씀에 이르기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라는 말씀이 율법보다 더 넘치는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를 가져온 그리스도의 복음의 풍성함을 가리킨 것인데, 이것이 그 사도 자신에게서 성취된 것입니다. 사도의 죄악은 심히 크고 악하고 진하였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그에게 부어진 하나님의 은혜는 그 모든 죄악들을 덮고도 남고, 깨끗이 씻기고 남고, 그 모든 죄성을 철저히 깨뜨리고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새롭게 태어나기에 족할 만큼 풍족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은혜와 함께 사도에게 부어진 또 다른 은혜에 대하여 사도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가 그리스도 예수에 중심을 둔 믿음을 갖게 되었고 그리스도의 그 놀라운 사랑까지도 사도 바울의 심령에 차고 넘치도록 부어져 늘 새롭게 차고 넘치게 솟아나게 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여기서 감격에 넘쳐 큰 소리로 이렇게 선언합니다. 15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사도 바울은 여기서 자기에게서 눈을 돌려 모든 사람들을 향하여 이 놀라운 죄사함의 은혜의 복음을 자랑하며 그들로 이 복음을 받아들이기를 촉구하는 마음으로 이 말을 선언합니다.
자기가 지금 하는 이 말이 정말 신뢰할 말이기에 모든 사람이 다 받아들였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믿을 만하고 모든 사람이 받아들일 가치가 있는 말은 바로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라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죄인들은 이제 살 길이 열렸습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마침내 세상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이 말을 소리 높여 온 세상에 지금 외치고 싶은 것입니다. 그는 이 소식을 전하기 위하여 그 당시 유대인들이 세계 전체라고 여기고 세상의 거의 절반 정도를 다니면서 이 복음을 전파하려고 생명을 내걸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사도는 위대한 죄인 구원의 복음의 선언을 증거하는 중에 한 가지 개인적인 고백을 덧붙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사도는 놀랍게도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원문에는 죄인들, 하마르톨루스 복수)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는데, 그 구원받는 죄인들 중에 하나가 바로 자기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구원받은 죄인들 중에 자기는 사실상 가장 우두머리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죄인 중에 가장 흉악한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 “내가 죄인 중에 괴수다”라는 문장의 동사 시제는 현재 시제입니다. 그는 지금 사도요 수많은 영혼들을 주님께로 인도하고 수많은 교회를 세우고 깊은 영적 싸움을 싸우면서 마귀의 견도한 진들을 깨뜨려온 영적 거장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놀랍게도 지금 현재에도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는 놀라운 고백입니다. 의외의 고백입니다. 그는 우리가 알다시피 깊은 영적 세계를 오고 간 분입니다. 이 때의 그의 고백은 이미 그가 삼층천을 갔다 온 지 꽤 오래 지난 후이기도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도 영으로 올라가 뵈었고 가히 말할 수 없는 말을 주님께 들었던 분입니다. 그는 사탄과의 영적 싸움을 싸우면서 하나 하나 이방 나라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켜온 영적인 장수입니다. 그런데 그는 지금 갑작스럽게 현재에도 나는 죄인 중에 가장 악한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도의 이러한 태도를 따라 한다면, 우리가 과거 지었던 죄는 주님께 회개함으로 이미 다 깨끗이 용서받았음은 분명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그 죄를 범한 현재의 죄인이기도 합니다. 물론 용서받은 죄인으로서의 죄인인 것입니다.
이렇듯 사도처럼 우리가 범한 지난날의 깊고 깊은 죄를 회상하는 것은 어떤 영적 효력이 있을까요?
먼저, 죄의 회상은 우리의 자만을 깨뜨립니다. 아무리 현재 대단하고 성령의 역사가 강력하게 나타나고 많은 사람들이 추종하며 하나님의 은혜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합시다. 그런데 우리가 교만하고 자만할 마음의 시험을 당할 때에 그가 지난날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크나큰 넘어짐과 양심에 큰 상처를 준 도덕적 실패와 아무도 모르지만 자기와 하나님만 아는 쓰라린 자기의 범죄함을 깊게 회상할진대, 그는 더 이상 자만심에 빠져 있을 수 없게 됩니다. 그는 겸손해지게 됩니다.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바뀌게 됩니다. 더 이상 자기를 자랑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죄의 회상은 하나님의 십자가 은혜를 다시금 붙잡게 합니다. 죄를 회상할 때 우리는 그 무서운 죄를 씻을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 외에 다른 것으로는 불가능함을 상기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자기의 여러 경건의 모양들을 자랑하며 스스로 의롭게 여겼던 마음이 도망치듯 사라집니다. 그 대신 오직 우리 구주 예수님의 피의 복음만이 유일한 소망임을 자각하고 다시 마음을 다잡게 됩니다.
또한 죄를 회상할진대, 신앙 생활을 뜨뜻미지근하게 종교 생활하던 습관에서 정신을 차리게 되고 은혜를 사모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와 같은 큰 죄를 다 사함받은 내가 어찌 이렇게 게으르게 살 수 있는가, 내가 어찌 저 죽어가고 있는 과거의 나와 같은 자들을 그냥 두고 나 혼자만 이렇게 살 수 있는가 생각하면서, 뜨거운 마음을 가지고 복음을 가지고 열심을 내어 전도하며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열심을 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사도 바울의 이 고백,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고 한 이 고백이 항상 사도 바울을 살게 하고 새롭게 하고 주님의 은혜에 목말라 하는 자가 되어 수많은 영혼들을 살리는 축복의 통로가 된 계기가 되었다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죄 안 지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다윗도 범죄한 바 있으며, 히스기야도 넘어진 적이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도 크게 넘어진 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우리의 실패와 죄악의 큰 상처를 조용히 생각하면서, 그것을 기꺼이 감싸주시고 싸매어주신 우리 하나님의 그 넓고 따뜻하며 부드러운 사랑의 손길을 기억하면서, 사랑의 빚진 자로서 더욱 마음이 뜨거워져서 주님을 위하여 충성을 다합시다. 또한 항상 겸손하게 내가 죄인 중에 괴수라는 사실을 상기하면서 더욱 겸손하게 주님을 섬기며 영혼들을 섬기며 죄인들을 불쌍히 여겨 살려내는 우리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어서 사도 바울은 이어서 죄인 중에 괴수지만 그가 긍휼을 입은 까닭을 16절에서 이렇게 밝힙니다.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이 저렇게까지 악하게 행했단 말인가, 그런데 그런 사람까지도 주님께서 오래 참아주셨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하여 용기를 갖게 하기 위함이라고 사도는 밝히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돌아올 용기를 내도록 사도는 자신의 경험을 이렇게 본보기로 보여준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오래 참으십니다. 그러므로 그 누구에게조차 우리가 감히 저 사람은 안된다 단정하지 맙시다. 우리 모두 최선을 다하여 잃은 영혼을 우리 가정과 친척 이웃과 친구로부터 주님께 인도하는 데 끈질깁시다.
사도는 17절에서 기쁨에 벅차 하나님을 찬송하면서 마무리합니다. 함께 17절을 큰 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바울의 마음속에 가득 차오르는 이 감격이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는 찬송으로 승화되고 있습니다. 자기 같은 죄인의 괴수를 용서하시고 그뿐 아니라 택하시고 믿어주시고 충성되게 여기시고 능력 주시고 귀한 직분을 맡겨주시어 지금까지 함께하신 은혜를 생각할 때 벅차오르는 감격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 인생에 찾아오시고 우리를 품어주시고 가까이 하사 직분을 주시고 주님과 교회를 섬기게 하신 우리 구주 예수님을 찬양합시다. 수많은 죄를 다 덮어주시고 바울처럼 우리도 붙들어 쓰시고자 하는 주님께 우리도 남은 생애 온전히 내어드립시다. 그리하여 모든 영광을 이 땅에서 돌리다가 장차 천국에서 영원히 충만히 올려드리는 저와 여러분이 됩시다.
찬송가 547장, 나 같은 죄인까지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