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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행 55- 부산 감천문화마을, 광안리
2020년5월13일 부산 태종대에서 감천문화마을로 갔습니다.
부산 사하구 감천동에 있는 마을은 부산 원도시의 랜드마크입니다. 부산의 산복도로
(山腹道路)사전적 의미로는 문자 그대로 산(山)의 중턱(腹)을 지나는 도로를 뜻합니다.
영문 명칭은 Hillside Road.입니다.산복도로 르네상스 사업을 통하여 도시 재생 프로젝트에
큰 성과를 거둔 문화 마을입니다.
한국의 마추픽추 혹은 산토리니 라는 별명이 있습니다. 다만 그리스의 산토리니처럼 해안가에
붙어 있지 않으며 풍경 또한 산토리니와 유사하지도 않습니다.
가장 가까운 바닷가인 감천항 중앙부두에서 마을입구에 해당하는 감천2동 주민센타까지
약 1km떨어져 있으며 설상가상으로 감천함이 만(湾)의 형태라 탁 트인 곳도 아닙니다.
2019년 기준으론 실제로 해안절벽 앞의 마을인 영도구의 흰여울문화마을을 산토리니로
비유하는 경우가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방가방가 게스트 하우스가 보입니다. 외국인들도 이곳을 즐겨 찻습니다.
이곳은 한국관광공사 선정 2019년, 2020년 한국 관광 100선에 선정되었습니다.
한국 전쟁당시 부산으로 피란온 피난민들과 태극도의 성지와 함께 신도들이 이곳에 정착하여
맨땅에 주민 스스로 집을 짓고 정착하여 소규모의 마을이 형성 되었으며 피란민들이 몰려
들면서 부산의 평지들이 시가지로 가득 차 결국 어쩔 수 없이 사람들이 거주하지 않았던
산비탈까지 마을이 형성되었습니다.
오랜기간 동안 가가운 구평동 산업단지의 조선소와 공장의 노동인구 대부분을 공급했비만
마을이 생성된 배경의 태생적 한계로 교통과 일상생활이 불편한 위치에 인근 구평 산업단지의
몰락, 주거지 낙후 등으로 다대동, 하단동, 괴청동 등 신흥 주거 지구로 인구가 많이 빠져
나갔습니다. 대략 1970년대 초반을 기점으로 인구가 감소하기 시작했습니다.
1995년 기준으로 21,231명이 살고 있었지만 2016년 기준으로는 8,077명에 불과해 21년동안
무려 62%의 감소육을 보였습니다. 그나마 남아있는 인구의 많은 수가 독거노인을 비롯한
노년층으로 65세 이상 인구가 27%를 차지해 초고령사회에 진입하였습니다. 현재 남아있는
인구의 평균 연령은 이미 50대중반에 진입했으며, 상당수가 조인의 부양가족들 또는
저소득층이 살고 있습니다.
인구가 너무 가파르게 줄어든 탓에 2007년 즈음 텅 빈 마을을 살려보기 위해 재개발이 논의
되었고 실제 추진까지 되었으나, 거주민을 모두 수용할만 규모의 대규모 재개발 추진은 쉽지
않았고, 그 당시 불었던 뉴타운 사업에 대한 사업에 대한 반발 여론 보존형 재개발로 도시
재생사업을 추진했습니다. 감천문화마을 프로젝트 사업을 진행하게 되자, 이곳의 특이한
지형구조로 생긴 괜찮은 경치와 분위기가 여러 입소문을 타고 감천2동이 점차 관광지로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2019년, 연간 방문객 200만명 이상,이중 외국인 관광객 60% 이상일 정도로 유명 관광지로
성장했습니다. 방문객 숫자는 감천문화마을 입구에 설치된 계수기를 통해 측정된다고 합니다
울긋불긋한 색의 단독 주택이 언덕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특이한 풍경 인해 몇몇 뮤직비디오에
여러번 출연한 적이 있으며 2007년쯤부터 "한국의 산토리나"라고 불리며 사진가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돌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사진들이 인터넷에 돌면서 숨은 명소로 전국적으로 알려
지기 시작했습니다.
영화 "히어로", "마이 뉴 파트너" 등에서도 나왔고 특히 부산을 배경으로 한 영화 "사생결단"
에서는 아예 주인공 이상도(류승범)의 그 삼촌 이택조(김희라), 김지영(추자현) 같이 사는
집이 바로 이 동네입니다. 이후 전국적으로 관광명소로 알려졌지만, 사실 이곳은 6.25전쟁
파난민촌으로 시작된 부산의 대표적 낙후지역으로서, 실제 거주민들은 항상 벗어나고 싶어
하던 곳입니다. 그러나 여기를 찾아가 즐겁게 사진을 찍는 것은 정착 주민들 입장에서 어쩌면
상당히 쓸쓸하게 느껴지는 편, 처음 부산의 관광명소로 알려지고 프로와 아마추어 가릴것
없이 전국의 사진가들이 몰려들지 시작했을때 "우리가 동물원 원숭이냐?"면서 주민들
사이에서 반발이 심했었습니다.
그러나 부산시의 지원과 사하구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예술가들의 작품들이 설치되고 각종
환경 미화 사업을 통해서 2010년도부터는 부산 관광의 필수 코스처럼 되었으며, 연간 10만명
이상의 관광객이 찾는 관광지가 되었습니다. 2019년 통계 기준으로 방문객 추정치가 무려
250만명에 달한다고 합니다. 주민들 반응도 이젠 그냥 그러러니 하는 편이기 한데 정작
주민들에게 직접적인 혜택이 돌아가는 건 전무하고 주말만 되면 수많은 관광객들로 인해
주요 도로에는 사람들로 넘쳐나 주변 교통과의 접근성이 상당히 낮아 졌으며, 정작 주민
들에게 필요한 시설인 의원은 없고, 여전히 무개념 관광객들이 기웃거리면서 소란을 피우고
남의 집 옥상에 무단으로 들어가서 사진을 찍는 행동으로 인해 불만이 많다고 합니다.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은 아무래도 고도가 높아 전망이 좋은 감내2로입니다. 산야의
감내2로 구간은 주로 풍경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많고 그보다 북쪽으로 길 양 옆이 모두
주거지인 곳부터 본격적으로 관광객들을 위한 상점들이 나타나며, 여기부터 감천문화마을
공영 주차장 쪽으로 갈수록 점점 붐비는 편입니다.
6.25전쟁 당시 피난민들이 모여 이뤄졌고 그 사람들이 전쟁이후에도 그대로 정착해서 형성된
마을이다 보니 가장 큰 특징이 바로 말투입니다. 감천동 지역에서 찾을 수 있는 소소한
재밌는 점이 몇가지 있는데 일단 감천동 곳곳을 살펴보면 제일이라는 명칭이 붙은 건물이
참 많습니다. 제일연립, 제일아파트, 제일슈퍼마켓 등등 90년대까지만 했어도 제일오락실,
제일 PC방, 그 외 철물점, 비디오 재여점, 방앗간, 슈퍼마켓, 목욕탕, 이발소 등등 다양한
가게 이름에 '제일'이 들어갔습니다. 왜 이런지는 알수 없습니다.
여러 연예인들이 감천 출신이 있습니다. 잭스키스의 김재덕이 이재진을 만나서 춤을 배울
수 있었던 것도 둘이 감천 출신이며 본인이랑 중학교 동창이라고 밝혔습니다.
어린왕자 포토존이 등대포토존 바로 왼 편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관광객이
사진을 찍기 위해 어린왕자의 사막여우 사이에 앉으려고 올라가려다 발을 헛디뎌 바로 밑에
있는 지붕으로 떨어졌다고 합니다. 다치진 않았으나 지붕에 구멍이 난 채로 이틀 정도 방치
되있다가 판넬로 보수 작업수 일주일 뒤에 자리를 옮겼습니다. 옮겨지면서 어린왕자 포토존
있는 난간 부근 아래에는 떨어져도 다치지 않도록 그물 망이 설치해 놓았으며 사막여우는
철거되었습니다.
2014년 여름에 1박2일 시즌 3에서도 이곳을 방문하였다고 합니다.KBS 다큐3일에서도 방영
되었고 방송에서도 보이고, 외국인들도 꽤 방문하는 듯합니다. 방문객 250만명가운데 60%가
외국인이었다고 합니다.
옛날에는 빈민촌이었습니다.
이곳에서 내려오는데 친구 이종승한테 전화가 왔습니다. 부산에 왔다고 하니 이종선친구
만났냐고 하길래 이태원이한테 전화해서 이종선 전화번호를 알려달라고 하니 김유일
전화번호까지 알려주어 전화하니, 이종선친구가 마침 국제시장에 있다고 하여 자갈치
시장에서 만나 점심 먹기로 하였습니다.
이종선 친구를 만나려 자갈치시장에서 기다렸습니다. 국제시장하면 영화에도 나왔지만
625피난 시절 아버님이 큰누님만 데리고 피난을 갔습니다. 식구들은 서울 낙산에 사시는
큰 외삼촌댁에 머물게 하였습니다. 큰 외삼촌은 종로 4거리에서 "보금장"을 하실때였는데
집이 워낙 커서 어머님과 작은누님,형이 그 집으로 피신을 하였습니다. 아버님은 피난을
오셔서 국제시장에서 금은 장사를 하셨습니다.
자갈치 시장은 부산을 대표하는 국내 최대의 수산시장입니다. 캐치프레이즈는 "오이소,
보이소, 사이소" 간순한 나열로 생각할수 있지만 율리우스 카이사르 (CAIVS IVLIVS CAESAR)
의 명언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의 로컬라이징 패러디 버젼으로 추정됍니다. "Come,
See, Buy"라고 쓰는 경우도 보이는데 실소를 금할수 없습니다. 롯데 자이언츠 출신
프렌차이즈 선수인 김민호 코치의 선수시절 별명이 자갈치였는데, 마치 자갈치 시장에 온것
만큼 시끄러워서 이런 별명이 붙였다고 합니다.
자갈치시장에 오면 생선회를 안 먹고 가면 서럽습니다. ㅎㅎㅎ
김문국이는 625 피난을 부산으로 와서 국민학교때 아버님이 돌아가시는 바람에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이종선친구가 반갑게 맞이하여 자갈치 시장 회집으로 왔습니다. 늘 생각하는것이지만 친구를
본다는것은 설레임과 즐거움이 어우려져 옛생각을 나게 합니다. 전에 대마도 동문들과
여행했을때 귀한 이종선친구가 자갈치시장에서 붕장어(아나고)구이를 사주어서 맛있게
먹었던 생각이 나서 꼭 점심은 내가 사겠다니까 굳이 본인이 사야 한다고 해서 귀한 마음을
듬뿍 받았습니다.ㅎㅎㅎ 고마워 친구야!
갑오징어가 보입니다.
친구 김유일이가 조금 늦게 도착했습니다. 1974년 수색 훈련소에서 보고 지금 보는데 옛날
홍능에 살때 생각이 납니다. 같은 동네에 살아서 늘 오가며 만났는데 특유의 웃음을 지는
모습이 그대로 입니다.
광안리는 부산의 해운대와 함께 부산을 대표하는 해수욕장으로 한국인이 많이 찾는
해수욕장 3위를 차지했습니다. 부산광역시 수영구 광안2동 소재이며 해수욕장 좌우의
끝쪽은 남천동과 민락동에 속해 있습니다. 해변 맞은편에는 부산의 랜드마크 광안대교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해수욕장 이름은 옛 행정구역명인 동래군 남면 광안리(里)가 그대로 내려온 흔적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1914년에 행정구역 개편으로 광안리라는 이름이 탄생했습니다. 당시에는 이 지역이 해안과
모래펄을 가진 곳이라서 ‘넓을 광(廣)’ 자에 해안을 뜻하는 ‘안(岸)’ 자를 붙여서 광안이라 이름
붙였는데, 이후에 풍수상으로 ‘편안할 안(安)’ 자를 사용하는 것이 좋다 하여 광안(廣安)으로 표기하게
되었습니다.
이곳 할리커피에서 커피를 먹으며 해변을 바라보며 힐링시간을 가졌습니다.
모래사장의 총면적은 82,000㎡, 길이는 1.4km, 폭은 25m ~ 110m 이며 해마다 8월이면 부산 바다
축제 10월의 부산불꽃축제를 이곳에서 합니다. 이때의 광안리는 바가지 천국입니다.
스타크래프트 프로리그 대회도 2004년부터 2010년까지 매년 치러지는 장소였으며,
e스포츠인들에게는 인지도 있는 해변입니다. 이런 특징들 덕분에 장충체육관, 서울어린이대
공원, 올림픽 공원, 사직 실내체육관, 인천 삼산월드체육과 염주체육관 EXCO, BEXCO,
잠실실내체육관, 잠실학생체육관, 잠실학생체육관, KINTEX와 함께 야외 E스포츠 장소의
메카로 떠올랐습니다.
할리커피의 "커피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커피"라는 문구가 써있습니다.
온통 호텔과 식당, 유흥업소 일색인 해운대와 달리 해변 주변은 주로 주택가로 형성되어 있으며
1990년대까지만 해도 상권은 광안 회센터 근처에 많이 몰려있었다. 2000년 들어서 광안대교가
개통해 특유의 경치가 완성되면서 입소문이 퍼져 해변 전역에 카페가 늘어나고 상권이 바글바글
해졌고 해변 주위가 재개발되었다.
여름철에는 항상 해운대에 밀려 입장객수에서 콩라인을 유지하고 있다. 해수욕하는 인원이 그렇게
많지는 않은데 부산시가 해운대에 비해 그렇게 많은 지원을 하지 않는 인상을 줍니다. 모래 사장에도
자갈이나 딱딱한 돌들이 간혹 있는것으로 보아 모래사장 품질도 그렇게 좋지는 않습니다. 이쯤되면
부산시는 본래의 목적인 해수욕 대신 거의 행사용 해변으로 용도를 잡고 운영하는듯 합니다.
이는 해운대와 달리 광안리는 해수욕장으로서 기능을 먼저 잡고서 발전한 곳이 아니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입니다. 일제시대 때에 부산의 대표 해수욕장은 송도해수욕장이었고, 당시에 해운대는
듣보였으나 교통 문제만 해결되면 휴양지로 엄청 발전할 것으로 기대되는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광안리는 휴양지로서 기대받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광안리는 본래 멸치 등 고기잡이를 하던
어촌이었습니다. 그러다 일제 강점기 때에 이르러 여름 방학이 될 무렵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수영을
가르치고, 심신을 단련시키기 위한 공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즉 휴양지로서 시작된 곳이 아니라
동네 앞바다를 수영장으로 활용하기 시작하던 것에서 해수욕장으로 발전한 것입니다. 이후에 송도와
해운대에 몰리던 해수욕객들이 광안리에도 해수욕객이 모여들기 시작하였고, 이후 점차 다른
지역에서도 피서객이 모여들자 1950년대에 해수욕장으로 정식 개장헸습니다.
광안대교의 아름다운 자태
광안리 해수욕장의 전경
광안리는 애초부터 휴양지로 개발될 것을 목표로 해수욕장을 개장한 곳이 아닌 어촌에 해수욕장
기능 부가적으로 추가한 것입니다. 때문에 지금도 민락동에는 아직도 꽤 큰 수준에 어항(漁港)이
있고, 남천동에는 90년대까지 해수욕장과 바로 붙어있는 쪽에 어선 선착장이 있었습니다. 현재
해운대에 있는 어항(漁港)인 미포항과 광안리의 민락포구와 비교하면 그 규모 차이가 엄청 나는데,
일제시대 전까지는 광안리와 해운대가 같이 어촌이었으나, 광안리가 어촌으로서 성격을 더 오래
유지했기 때문입니다. 90년대 초반에는 민락포구에 어민들이 직접 좌판을 깔고, 그 날 잡아온
물고기를 팔기도 했습니다.
광안리가 휴양지로서 개발된 것이 아닌 것은 70년대 사진을 비교하면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70년대
해운대가 공터는 있어도 휴양지 시설이 들어서 있는 반면에 70년대 광안리는 생활시설이 들어서
있습니다. 아예 당면공장이 있을 정도로 광안리는 주거지역으로서 기능을 크게 하고 있었고, 지금도
여전합니다.
때문에 현재 광안리와 해운대의 숙소를 비교하면 광안리에는 고급 숙소는 극히 적고, 90년대까지는
그 차이가 더 심했습니다. 애초에 외지사람보다는 부산사람들이 자주 가다보니, 숙박보다는 식사를
중심으로 발달할 수 밖에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광안리가 외지 관광객들에게 본격적으로
알려지게 된 21세기 들어 광안대교가 생기면서 해변 뷰가 다른 해수욕장과 차별화되고 이런저런
행사를 하게 되면서, 광안리에도 외부 관광객이 몰리자 숙박업소가 증가하게 됩니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아직도 광안리는 고급숙소보다는 게스트 하우스 같은 중저가 숙소가 많습니다. 물론
해운대에도 중저가 게스트 하우스가 있지만, 바다가 보이는 위치는 고급 호텔들이 거의 독식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광안리의 게스트 하우스는 바다를 볼 수 있는 곳이 아주 많습니다. 원래 고급호텔이
많이 없다보니, 보통 고급호텔이 차지하고, 중저가 호텔은 꿈도 못꾸는 오션뷰(ocean view) 위치를
중저가 숙소가 차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광안리가 휴양지로서 개발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흔적이 또 있습니다. 해운대와 달리,
광안리는 주거지역이 바닷가와 바로 붙어있다는 점입니다. 해운대는 바닷가에 숙소가 있고, 그 뒤에
해운대 시장이나 쇼핑센터 같은 상업지구가 있고 그 뒤에 주거지구가 있습니다. 이에 반해 광안리는
바다 앞에 바로 보이는 바닷가에 주거시설이 숙박시설과 음식골목이 바로 붙어있고 해운대라면
쇼핑시설이 있을 위치에도 주거시설이 있습니다. 우선적으로 주거시설이 유지되어 있는 상태에서
상업시설이 들어오다보니 서로 섞여있게 된 것입니다.
젊은 청년들이 버스킹을 많이 하기도 하고 각 나라에서 온 관광객들, 그리고 주변이 주택가가 많다
보니 운동이나 산책을 하러나온 시민들이 많은 곳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부산 시민들은 '해수욕을 즐기기 위해서'라면 전국에서 피서객이 모여 바글바글하다못해
콩나물 시루같이 빽빽한 해운대보다 조금이나마 한산한 광안리를 더 많이 찾는 편입니다. 대신
해수욕이 목적이 아닌 헌팅/놀이/눈보신(?)등을 목적으로 한 젊은이들은 해운대로 갑니다. 사실
며칠 일정으로 관광을 왔다면 호텔이 많은 해운대가 좋겠지만, 그냥 당일치기로 놀러온 거라면
주변에 식당이나 놀 곳이 많은 광안리가 훨씬 낫습니다.
노무현전 대통령이 변호사 시절 광안동 옆동네의 남천동의 남천 삼익비치아파트에 거주하기도
했었습니다. 1980년대 당시 대연삼익비치, 남천 삼익비치 아파트는 부산의 최고의 부촌으로 통하던
아파트였습니다.
주변은 상당히 잘 개발되어 있어 해변가에 식당과 카페 등이 즐비합니다. 그리고 동쪽 해안으로
가면 횟집이 즐비하며 조금 더 걸어가면 민락수변공원과 회센터가 있습니다. 이곳에서 회를 사
와서 해변가에서 먹어도 좋습니다.
영화 "해운대"에서 이 다리가 쓰나미로 무너지는 것을 감명깊게 봤습니다.
이것이 광안리 대교의 불꽃놀이 야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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