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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www.dangdang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2627
로마서에 서술된 구원의 논리(5) “세 믿음 론”
7. “그런즉(운, 그러면)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그런즉(운, 그러면) 육신으로(카타 싸르카, 인간의 본성을 따라)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하리요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롬3:31-4:3)”
복음에 계시된 하나님의 의로 인해 그리스도의 신실함(피스티스/믿음, 충성, 신실함, 미쁘심 등으로 번역)을 받아 진정한 믿음(피스티스)을 받게 된 자는 비로소 율법을 준수할 수 있게 되고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게 됩니다(디카이오오). 한편 그리스도의 신실함을 받지 못해 여전히 인간의 본성(싸르크스)에 따라서 살았던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어 의롭다고 간주되었습니다(로기조마이 에이스 디카이오쉬넨).
(로마서에 서술된 사도 바울의 구원의 논리는 일관되게 믿음을 축으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은 사도 바울의 논리가 지향하는 목표가 아닙니다. 목표는 율법의 완성, 즉 사랑입니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13:8-10)”
피스티스가 믿음으로 번역되든 또는 신실함이나 충성으로 번역되든 간에 피스티스는 자기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며 살기 위한, 즉 의로운 삶을 살기 위한 필수적인 조건으로 사도 바울에 의해 제시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은 “내가 지금 내 이웃을 내 자신처럼 사랑하고 있는가”로 검증되어야 하는 것이 마땅하며 그에 따라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믿음을 세 가지로 구분하여 구원의 논리를 펼쳐나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에 의해 신실하게 변화된 자의 율법을 굳게 세우는 믿음”과 “육체를 따라 살았던 아브라함의 믿음”의 두 가지 믿음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의롭다고 인정받는 전자를 세 번째 믿음으로, 그리고 의롭다고 간주되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두 번째 믿음으로 이해합니다.
이 두 가지 믿음에 대한 사도 바울의 논리를 살펴보기에 앞서 첫 번째 믿음, 즉 우상 숭배의 믿음에 대한 사도 바울의 논리로부터 시작해 세 가지 믿음을 차례대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첫 번째 믿음(우상숭배의 믿음)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배운 교훈을 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거나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그들에게서 떠나라 이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들의 배(코일리아, 비어있는 곳)만 섬기나니 교활한 말과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롬16:17-18)”
사도 바울은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자기들의 배만 섬기는 우상숭배의 믿음을 가진 자들에게서 떠나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배로 번역된 코일리아는 “속이 비어있는 것”을 의미하는 명사로서 사람의 배, 가슴, 자궁 등을 가리키는 용도로 쓰입니다. 모두 사람들의 결핍이 자리하고 있는 곳들이지요. 먹고 마실 것을 찾고(배) 사랑이나 명예를 찾고(가슴) 번식욕으로 가득 찬(자궁) 사람들이 바로 자신의 코일리아, 즉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의 믿음은 그 믿음의 대상으로 조상신이든, 삼신할머니든, 부처든, 예수 그리스도든 가리지 않습니다. 오로지 자신의 빈 곳을 채워줄 수만 있다면 어떤 신이든 믿고 섬깁니다. 이들이 가진 신학은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잡신 신학입니다. 지극 정성으로 신을 믿고 섬김으로써 그 신의 보호와 인도를 받으며 복을 누리려는 욕망에 불타는 자들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이들의 믿음이 항상 이기적인 믿음일 것이라고 속단하면 안 됩니다. 때로는 자기 가족의 생존과 번영을, 때로는 자기 민족과 국가의 생존과 번영을, 때로는 인류의 생존과 번영을 현란하게 오가며 신에게 빌어마지 않습니다. 그 소원이 신기루에 불과하다는 것을 모르는 무지 속에서 말이지요(이전 글 예수님의 비유(1) “바람의 비유” 참조).
내세 구원에 대해서도 이들의 믿음은 엉뚱하기 그지없습니다. 그곳이 천당이 되었든 극락이 되었든, 자신들을 봉양해줄 것이라고 기대하는 존재가 천사가 되었든 선녀가 되었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다만 자신들이 상상하는 낙원에서 자신들이 원하는 삶을 영원히 살게 될 것이라고 굳게 믿으며 신에게 빌어마지 않습니다.
성경은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시고 예수님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이처럼 사도 바울이 복을 받기 위해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서 떠나라고 강력하게 권면하는 것은 구약과 복음서에 모두 명확한 근거가 있기 때문입니다. 에스겔 14장에서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족속과 이스라엘 가운데에 거류하는 외국인 중에 누구든지 나를 떠나고 자기 우상을 마음에 들이며 죄악의 걸림돌을 자기 앞에 두고 자기를 위하여 내게 묻고자 하여 선지자에게 가는 모든 자에게는 나 여호와가 친히 응답하여 그 사람을 대적하여 그들을 놀라움과 표징과 속담 거리가 되게 하여 내 백성 가운데에서 끊으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겔14:7-8)”
이 무시무시한 말씀에 비하면 자기를 위해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서 떠나라고 하는 사도 바울의 명령은 오히려 자비로운 명령이라 하겠습니다.
한편 요한복음 8장에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을 향하여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요8:44 일부)”라는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던 예수님은 누가복음 14장에서 다음과 같이 더욱 구체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수많은 무리가 함께 갈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14:25-27)”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고 있는 수많은 무리를 향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는 자만 따르라고 잔인할 정도로 냉정하게 선을 긋고 계십니다.
“자기를 위하여 하나님께 묻는 자들”과 “자기 목숨을 사랑하여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과 마찬가지 무리인 “자기 배를 섬기기 위하여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서 떠나라는 사도 바울의 명령은 이와 같이 하나님의 뜻에 근거한 추상과 같은 명령인 것입니다. 그들의 믿음은 우상숭배의 믿음이기 때문이지요.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본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1:10)”
2. 두 번째 믿음(육체에 속한 아브라함의 믿음)
자기 배만 섬기는 첫 번째 믿음을 가진 자들에게서 떠나라고 강력하게 명령하고 있는 사도 바울은 그러나 정작 자신과 함께 했던 자들에 대해서는 이중적인 모습을 나타냅니다. 빌립보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과 함께 하고 있는 자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 안에서 바람은 너희의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 이는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 그들이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버지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빌2:19-22)”
자신과 함께 한 자들 중 디모데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않는 자들이라는 설명입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왜 그들에게서 떠나지 않고 함께 있었던 것일까요?
이와 비슷한 의문은 로마서의 묘한 인사말을 볼 때에도 일어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 8절에서 로마 교인들의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어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말하지만 이어서 15절에서는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라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하고 있습니다. 복음의 내용도 제대로 모르는 그들의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었고 사도 바울은 그것을 두고 하나님께 감사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하나님께 감사드린 로마 교인들의 믿음이란 도대체 어떤 믿음이었던 것일까요?
이 믿음이 바로 두 번째 믿음인 아브라함의 믿음입니다.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이 여전히 육체를 따라(카타 싸르카) 살고 있는 자였기 때문에 의롭다고 인정받지는(디카이오오) 못했지만 이 두 번째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간주되었다(로기조마이 에이스 디카이오쉬넨)고 논술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두 번째 믿음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간주되는 두 번째 믿음의 특징은 아브라함의 행적을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부르심을 받았고 약속도 직접 받게 되면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약속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됩니다. 이 점이 바로 자기 자신을 위해 스스로 신을 믿는 첫 번째 믿음과 다른, 두 번째 믿음의 가장 중요한 특징입니다.
그러나 두 번째 믿음의 또 다른 특징은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알지 못하고 또 신실치 못하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여전히 육체를 따라 사는 존재였으므로 약속을 처음부터 온전히 깨달을 수 없었고 이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로 어느 정도 깨닫게 된 후에도 신실할 수 없었습니다. 후손에 대한 약속에 아내 사라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몰랐기에 사라를 애굽왕 바로에게 넘겨주었고(창12장) 그 후 약속에 사라가 포함된 것을 깨닫게 된(창17장) 후에도 사라를 아비멜렉에게 또 넘겨줍니다(창20장).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약속에 대한 믿음보다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더 컸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두 번째 믿음을 가진 자는 비록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부르심을 받았고 점차 하나님의 뜻에 대한 깨달음도 깊어지나 여전히 육체를 따라(카타 싸르카) 판단하고 행동하므로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번째 믿음이 하나님에 의해 의롭다고 간주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두 번째 믿음을 가진 자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며 회개하고 간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러한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 믿음장으로 불리는 11장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사라 등)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히11:13-14)”
이 사람들은 구약의 인물들이었으므로 새 언약에 약속된 세 번째 믿음을 약속으로 받지는 못하였으나 본향, 즉 세 번째 믿음을 갖게 된 자들이 모여 사는 하나님의 나라를 멀리서 보고 환영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의롭다고 인정되지는 못하나 의롭다고 간주되는 믿음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4장 안에서 모두 11번에 걸쳐 동사 로기조마이(간주하다, 여기다)를 정교하게 사용하여 아브라함의 믿음인 두 번째 믿음을 논술함으로써 5장 이후 논술하게 되는 세 번째 믿음과 차별화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여전히 자기의 일을 구하고 있는 자들과 함께 했던 이유, 그리고 복음을 제대로 깨닫지 못했던 로마 교인들의 믿음을 하나님께 감사했던 이유는 그들이 아브라함처럼 비록 육체를 따라(카타 싸르키) 살고는 있으나 두 번째 믿음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기 때문이고 또한 그들이 장차 세 번째 믿음도 갖게 되리라고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낸 서신에서 이러한 자들을 육에 속한 자(싸르키코스)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3. 세 번째 믿음(새로운 피조물의 믿음)
새 언약의 백성들에게는 본향을 그리며 나그네로 살다가 죽은 아브라함과는 달리 이 땅에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세 번째 믿음이 약속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첫 말씀이 하나님의 나라였으며(마4:17) 마지막 말씀도 하나님의 나라였고(행1:4) 사도 바울이 생을 마치는 순간까지 증언한 것도 하나님의 나라(행28:31)였던 이유입니다.
이 믿음이 바로 그리스도의 피스티스(믿음, 충성, 신실함 등으로 번역)를 받음으로써 갖게 되는 믿음((4)“하나님의 의론” 참조)인 바,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이 세 번째 믿음과 관련해 다음과 같이 논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8:1-4)”
사도 바울의 논술에 따르면 두 번째 믿음에서 세 번째 믿음으로의 변화의 핵심은 육체를 따르던(카타 싸르카) 존재가 성령을 따르는(카타 프뉴마) 존재로, 그리고 육체를 따르던 삶에서 성령을 따르는 삶으로 바뀌는 것이고 그 결과 세 번째 믿음을 갖게 된 자는 현실의 삶에서 율법의 요구대로 공의와 정의, 즉 사랑을 행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변화를 죄와 사망의 법, 즉 탐욕과 공포에 따라 움직이는 인간의 본성(싸르크스)을 장악하고 있던 법에서 해방되어 생명의 성령의 법, 즉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며 사는 법에 속하게 된 것으로도 논술하고 있는데 이 신비한 변화가 바로 성령의 역사로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옛사람이 죽고 예수님과 함께 새로운 피조물로 부활하게 되면서 일어나는 변화입니다.
이 과정에 대한 구체적인 사도 바울의 논술은 앞으로 이어질 “십자가론”과 “성령론”에서, 그리고 이 과정을 거친 의인의 존재와 삶에 대한 논술은 “의인론”과 “교회론”에서 상술할 예정이지만 여기서는 새로운 피조물, 즉 세 번째 믿음을 가지게 된 의인의 인격적 특징 한 가지를 두 번째 믿음을 가진 사람과 비교해 살펴보는 것으로 그치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카타 싸르카) 알지(에이도, 보다)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카타 싸르카) 알았으나(기노스코, 알다)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사도 바울은 과거의 자신과 같은 두 번째 믿음을 가진 사람을 이웃과 그리스도까지도 육신에 따라(카타 싸르카) 보고 또 아는 사람으로 규정하면서 세 번째 믿음을 가지게 되면서부터는 그같이 보거나 알지 아니한다고, 즉 성령을 따라(카타 프뉴마) 보고 또 알게 된다고 논술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육신을 따라(카타 싸르카) 보고 또 아는 것과 성령을 따라(카타 프뉴마) 보고 또 아는 것의 실제적인 차이는 무엇일까요?
육신을 따라(카타 싸르카) 이웃과 그리스도를 보고 또 아는 사람은 자신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 이웃은 물론 그리스도까지도 판단하고 이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갖게 된 이후 나날이 복음의 진리를 깨닫게 되나 실제로는 자신의 생존과 번영을 추구하는 본능을 극복할 수 없어(자기가 부인되지 않아) 일상생활도 신앙생활도 옛사람의 삶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 사람은 끊임없이 새로운 피조물로 재창조되기를 소망하고 하나님의 나라 공동체에서 예수님처럼 서로를 사랑하며 살기를 소망하며 회개하고 간구하게 됩니다. 아브라함처럼 본향을 그리며 나그네처럼 살다가 삶을 마칠 수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회개와 간구가 분량이 차게 되면 하나님의 은혜로 이 사람은 그리스도의 피스티스를 받게 되고 드디어 성령을 따라(카타 프뉴마) 이웃과 그리스도를 보고, 알고, 행하는 세 번째 믿음을 가진 사람으로 재창조됩니다. 이 사람은 자신의 유익을 구치 않고 어떠한 형편에든지 자족하며(빌4:11) 자신의 존재와 삶을 하나님께 산 제물로 드리게 됩니다(롬12:1). 자원하여 자기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게 됨으로써 율법이 완성된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롬13:8-10). 이 사람은 심지어 자신의 내세 구원까지도 포기할 용의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빚진 자(롬1:14)의 마음이며 사도 바울은 그러한 자신의 극단적인 심경을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거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9:1-3)”
나가며
구약에서 신약으로의 변화의 핵심은 바로 두 번째 믿음에서 세 번째 믿음으로의 변화입니다.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롬1:17)가 바로 그것을 계시하고 있다는 것이 로마서에 서술된 사도 바울의 구원론의 논지입니다. 이미 그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된 로마교인들(롬1:8)에게 새삼 복음을 전하고자 한(롬1:15) 이유도 두 번째 믿음을 가졌던 그들에게 세 번째 믿음을 설명해주고 새로운 소망으로 옮겨가도록 설득하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이는 비단 로마서에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이는 예수님의 말씀에서도, 그리고 사도 바울의 모든 서신들과 다른 사도들의 서신들에서도 일관되게 제시되고 있는 복음의 핵심입니다.
이 땅에 임하게 될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신 예수님은 밤에 찾아온 이스라엘의 선생 니고데모에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셨고,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육에 속한 자(싸르키코스)에서 영에 속한 자(프뉴마티코스)로 변화될 것을 촉구하고 있으며 야고보는 죽은 믿음에서 산 믿음으로 옮겨갈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고 베드로 사도는 신의 성품에 참여할 것을 강조하고 있고 요한 사도는 범죄하는 자에서 범죄하지 않는 자로 변화될 것을 간곡하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두 번째 믿음에서 세 번째 믿음으로의 변화는 복음의 핵심으로 일관되게 제시되고 있으며 그 중에서도 백미는 히브리서 6장 1절에서 3절 말씀이라 하겠습니다. 아직도 단단한 음식을 먹지 못하고 여전히 젖을 먹고 있는 어린 아이와 같은 자들을 안타까워하면서 히브리서 기자는 다음과 같이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히6:1-3)”
히브리서 기자는 완전한 데로 나가기를 촉구하면서 버려야할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로 회개, 신앙, 세례들, 안수, 부활,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을 꼽고 있습니다. 이 여섯 가지가 기독교 신앙의 모든 것인 양 알고 있는 대부분의 크리스찬들에게는 참으로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버리다로 번역된 헬라어 동사 압히에미는 leave, 즉 두고 떠나다의 의미로서 히브리서 기자는 어린 자들을 향해 언제까지 교리 학습만 하고 있을 것이냐고 질책하면서 깨달음을 넘어서 약속이 체화되어 완전한 데로 나아갈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바로 두 번째 믿음에서 세 번째 믿음으로의 변화입니다. 물론 이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 것은 하나님의 허락에 의해서입니다. 즉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지요.
사도 바울은 이처럼 사복음서와 다른 서신들과 동일한 논리로 믿음을 세 가지로 구분하면서 로마교인들에게 두 번째 믿음에서 세 번째 믿음으로 옮겨갈 것을 설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어서 서술되는 로마서의 논리는 세 번째 믿음으로 옮겨 가는 실제적인 과정과 옮겨 간 자들의 존재와 삶에 대한 논리가 됩니다.
그 변화 과정에 대한 논리가 바로 사도 바울의 “십자가론”과 “성령론”이며 변화된 존재에 대한 논리가 “의인론” 그리고 변화된 삶에 대한 논리가 “교회론”입니다. 계속하여 하나씩 사도 바울의 치밀한 논리를 살펴나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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