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엿 본 다산의 가계(家系)
임병식 rbs1144@daum.net
문학에 빠져 지내다 보면 본의 아니게 다른 이의 가계를 엿보게 되는 때가 있다. 다산선생처럼 저술뿐 아니라 수상과 시문 등을 다수 남긴 경우는 그런 글들을 통해 인품뿐만 아니라 가계의 면면까지도 알게 되고 느끼게 된다.
선생의 저작물은 얼마나 압도적인 것인가. 240여권의 서책은 실로 놀랍다. 그러한 선생을 두고 나 같은 사람을 비교한다는 것은 가당치도 않거니와 족탈불급(足脫不及)이다. 그렇지만 수필의 특성상 수필가는 자신과 집안 이야기를 시시콜콜 미주알고주알 털어놓게 되어있어 알게 모르게 부끄러운 이야기도 발천(發闡)해 놓지 않았는가 한다.
내가 다산선생에 대해 관심을 갖은 건 선생의 목민심서나 흠흠신서 같이 학문에 바탕을 둔 것 뿐 만이 아니었다. 우연히 만난 글에서 선생이 적소(適所)에 머물 때, 끼니와 빨래를 챙겨준 여인이 있었으며 둘 사이에는 딸도 하나 두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흥미를 갖게 되었다.
그러던 중 여러 문적을 살핀 끝에 희미하게나마 선생을 위요한 하나의 그림을 그려보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단편적인 것으로 선생이 남긴 시문을 통해서 엿본 편린(片鱗)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충분히 객관성이 확보되었다고는 할 수 없다.
특히 부인 남양 홍씨(홍혜완)와 관련서는 보는 관점에 따라 평가가 달라지지 않을까 한다. 이유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선생이 해배(解配)되어 소실과 딸 홍임을 데리고 본가에 왔을 때 부인이 매정하게 내친 점과, 다른 하나는 오랜 애옥살이 중에서도 가계를 꾸려나가면서 식솔을 잘 건사한 점 때문이다.
선생은 성균관에 들어갔을 때만 해도 벼슬길이 보장된 듯 했다. 시험을 볼 때마다 늘 장원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웬일이지 대과에는 번번이 낙방하는 바람에 벼슬자리를 얻지 못해 형편이 여의치 못했다. 작은 밭뙈기를 겨우 얻어 근근히 일구면서 살아가는 형편에 자식은 무려 9남매(3남6녀)나 두었던 것이다.
나중 장성한 자식은 2남 1녀로, 다른 자식들은 유년기에 홍역이나 역병으로 떠나보냈다. 그런 이야기들을 선생은 빠짐없이 써서 남겨놓았다.
선생이 배수첩(配修妾)인 소실과 딸을 본가로 데려간 것은 미쳐 부인의 반발을 예상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니, 예상을 했지만 귀양지에서 수발을 들어준 은공을 차마 저버리지 못했을 수도 있다. 아니나 다를까, 현실에서 마주친 상황은 극심한 것이었고 선생은 깊은 속앓이를 하던 끝에 어찌어찌 딸을 서제(정양횡)에게 맡기고 소실은 거두지 못한 채로 다시 강진으로 돌아가는 발길을 지켜 볼 수 밖에 없었다.
1999년에 발견된 연작시 남당사(南塘詞)에 보면 선생이 적소에서 얻은 딸에 관한 시가 유독 심금을 울린다.
“어린 딸 총명함이 제 아비를 닮아서
애비 찾아 울면서 왜 안 오나 묻는구나“
소실은 내침을 당했지만 기개는 당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어디서 배운 것일까. 당초에 선생을 돌본 사람은 한동네에 사는 김 노인이었다. 그 노인 집에는 과부가 되어 돌아온 딸이 함께 살았다. 아버지를 따라 시중을 들게 된 것이 자식까지 낳게 된 인연이 맺어졌지 않았나 싶다.
선생은 평소 꿈에 나타난 미녀를 두고도 호통을 칠만큼 금욕을 했으나 살뜰한 잔정에는 어쩔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소실이 당당했다함은 다른 것을 두고 함 말이 아니다. 소실이 발길을 돌려 장성고을을 이르렀을 때였다. 이때 고을의 부호가 모녀의 길잡이와 모의를 하여 겁탈을 하려 들었다. 그러자 소실을 크게 노하여 이렇게 말했다,
“ 나는 조관을 지낸 분의 첩실이다.”
그러자 순순히 물러났다고 한다. 선생의 가계에는 풍파와 불행이 그치지 않았다. 바로 해배되던 해에는 둘째 며느리(학유의 처)가 요절하는 일이 일어났다. 겨우 일 년을 본가에서 함께 살고 그 후로는 한번도 보지 못한 며느리였다. 선생은 그런 며느리를 그리며 묘지명을 썼다.
“꽃다운 스물아홉 운명한 어린 자부
소생도 하나 없이 청산에 잠 들었네”
애틋한 마음을 가진 것은 평소에 겪은 부인의 이야기도 들었던 것 같다. 부인의 이야기는 시집올 때 지참한 치마를 강진에 보내 선생이 그림을 그리게 한 것 이외는 달리 전해진 것이 없는데 이 며느리와의 일화는 널리 퍼져있기 때문이다.
며느리는 착하고 유순했다. 시어머니는 성품이 좁아 마음에 드는 사람이 적었으나 이 자부하고는 한 이불을 덮고 잘 정도로 가까웠다. 홍씨 부인은 장이 좋지 않아 한밤중 설사가 나 변소 가는 일이 많았는데 그런 기척을 보이면 며느리는 따라 나서서 도와주고 내는 신음소리에 함께 근심을 하였다. 그 이야기를 들어 알기에 눈물로써 먹을 갈아 묘지명을 썼으리라.
선생은 벼슬길 18년, 유배생활 18년, 해배되어 18년을 살다가 생을 마감했다. 선생의 화양연화는 오직 정조임금과 함께 의기투합하여 보낸 기간이었다. 그러나 정조임금이 막상 1800년에 승하하자 선생의 영화도 중단되고 말았다.
유배생활이 시작된 때의 선생 나이는 38세. 한참 경륜이 물의 익어 경세를 펼칠 나이에 날개가 꺾여버린 것이다. 그렇지만 유배지에서 죽을힘을 다해 주옥같은 저서를 남겼으니 비록 개인사는 불행했을지라도 나라에는 크게 업적을 남겼다고나 할까.
선생은 유년생활도 그리 평탄하지 못했다. 생모가 선생나이 8세 때 돌아가셔서 4년 후 서모가 들어오기까지 형수의 보살핌을 받고 자랐다. 그 형수가 머리의 서캐를 잡아주고 부스럼치료를 해주며 옷가지를 빨아 주었다. 그 정을 잊지 못해 관(寬)이란 제(題)로 48 시를 쓴 것이 있는데 그 살가움이 마음을 적신다.
본래 시어머니 섬기기 쉽지 않는데(事姑未易)
계모 시어머니는 더욱 어렵고(姑而繼母則難)
시아버지 섬기기 쉽지 않는데(事舅未易)
아내 없는 시아버지 더욱 더 어려우며(舅而無妻則難)
시동생도 보살피기 쉽지 않은데(過叔未易)
더구나 에미 없는 시동생은 더 많이 어렵지요(叔而無母則難)
이 모든 일 탈없이 잘 하신 것 (能於是無憾)
이게 바로 형수님의 너그러움 때문이었습니다(是惟丘嫂之寬)
200여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 선생의 가계를 톺아해 보니 선생의 생애는 유독 풍파가 많았던 듯하다. 귀양지에서 늘 자식 걱정으로 날을 보내고 몰락해버린 가계를 걱정했다. 하나, 그러면서도 귀중한 문적을 남기고, 상처(喪妻)을 한 작은 아들 또한 문학사에 빛나는 작품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를 남겼으니 잘 못 살다간 생은 아니지 않는가 한다. 한 문학사에 빛나는 작품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을 남겼으니 잘 못 살다간 삶은 아니지 않는가 한다. 글은 사라지지 않고 어딘가에 남아서 누군가에게는 기억이 된다는 것을 선생이 남긴 글을 통해 새삼스레 느끼게 된다. (2024)
첫댓글 참으로 좀체 보기 좋은 글입니다. 모처럼 다산 선생의 내면을 發闡하였으니 그 재미가 아주 쏠쏠합니다.
미녀를 봐도 호통을 치고 금욕생활이 체질화 된 사람이 살뜰한 잔정에는 어쩔 수 없으니 사람의 本性이지 싶습니다.
낙수물이 바위를 뚫는다는 水滴穿石이 생각남니다. 그 아까운 인재가 화양연화는 정조와의 잠깐 이었으니 너무 안타깝습니다.
글은 사라지지 않고 어딘가에 남아서 누군가에게 기억이 된다는 금과옥조는 두고두고 새겨야 하겠습니다.
좋은 글 참 잘 읽었습니다.^^
새삼스럽게 다산선생의 가계를 들어다보면서 겪었을 고뇌와 고충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기인사로는 선생만큼 불우한 분도 없을듯 합니다. 어려서는 어머니를 여의고 뒤늦게 출사한
벼슬길은 길지 않았습니다.
정조임금이 승하하자 천주교도로 몰려 귀양살이 18년을 보내고, 돌아와서 2년후에 부인마져도
떠나보냈지요.
자식은 9남매 6남 3녀를 낳아 세명만을 거두고, 며느리도 앞세워 보냈지요.
가계는 피폐하여 입에 풀칠하기 여려웠습니다.
그런 저런 것을 떠올리며 한편의 글을 써보았습니다.
오랜 귀양살이로 지치고 외로운 남정네의 뒷바라지를 해준 여인과의 인연은 인지상정이지 싶습니다 당시 사대부가 첩을 두는 건 흉이 되지 않았지요 시앗을 용납하지 않은 본처의 처사 또한 나무랄 일이 아니고 보니 세상사가 무심하기만 하네요 첩실이 과수댁이었다지만 본디 뼈대 있는 가문 출신이었다 추측되는군요 다산의 세세한 일면이 흥미롭습니다
기록에 보면 부인 홍씨는 선생이 해배되어 집에 돌아온 2년 후에 사망했는데, 그때 내치지 않고
곁에서 살게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선생은 집에 돌아온 후로도 18년을 더 살았는데 홀아비로 16년을 사는 동안 얼마나 불편했을까를
생각하면 부인이 첩실을 내친 것이 아쉽게 생각됩니다.
그후로 기록이 없으니 해어진 것이 분명한데 그 첩실 또한 어떻게 살았는지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무책임한 사대부의 일면이 씁쓸하게 다가오네요 가정사정이야 잘 알 수 없지만 마음이 있다면 받아들일 수 있었을 터인데 문전박대하여 쫓아버렸다니 참담하네요
본처가 반대했더라도 남자 결정에 달린 문제였다는 관점에서 짚어보면 다산의 우유부단 내지는 무책임함이 못내 아쉽군요
소실이 구박받고 내려와 강진에서 산 이후, 다시 만나거나 합가를 했다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떠나올때 이미 마음을 정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저도 매몰차게 내쫒은 부인보다는 우유부단하게 행동한 다산의 태도가 아쉬움을 많이 줍니다.
떠나가는 발길을 그저 지켜만 보다니요.
그점은 좋게 봐주기가 힘들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