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문학적 성향
임병식rbs1144@daum.net
내가 등단을 하고 나서 설정한 것이 있었다. 나의 문학의 좌표를 어디에 둘 것인가. 그것을 염두에 둔 것은 내가 생각할 적에 그동안 수천, 수 만 명이 글을 써왔고 지금도 쓰고 있는데 중첩된 것을 쓰면 그게 무슨 효용가치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던 것이다.
이전에 누군가가 이미 발표한 글보다 나은 것이라면 모르지만 그와 비슷하거나 못하다면 쓰레기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좌표선정을 확실히 하고 임하게 되었다. 그런데는 앞서 등단한 어떤이가 꽃에 대해서만 일관되게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이 참고가 되었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 내가 겪고 살아온 ‘5,60년대, 그것도 농촌의 풍속과 풍물을 집중적으로 조명하겠다’ 는 목표를 세우게 되었다. 내가 자신을 돌아 볼 적에 다른 곳을 기웃거리기는 너무나 힘이 부칠 것 같은 예감을 감지한 측면도 있다.
수석에 대해서만큼은 어느 정도 지신이 있으나 그것 하나만을 붙들고 있기에는 폭이 한정되고 남 앞에 ‘이게 명석이다’라고 내세울 것도 없었다.
그렇지만 농촌생활만은 내가 10대와 20대를 보내며 온전히 체험한 곳이어서 거부감이나 두려움이 없는 것이다. 일꾼처럼 맨날 일만하고 보낸 세월은 아니지만 이것 저것을 두루두루 체험을 하면서 보냈던 것이다. 소 꼴 베기, 지게질 하며 산에 올라 나무하기, 쟁기질까지 해보았다.
거기다가 마을 공동체행사에 참가하여 울력하기와 마을안길 넓히기, 모내기와 타작하기 새끼 꼬기와 이엉얹기도 도왔다.
그 밑바닥의 체험으로 가난한 살림의 음식문화, 허술한 옷가지를 걸치고 살았다. 그러면서도 계절마다 펼쳐지던 봄에는 찔레 꺾어 먹고 삘기 뽑아먹으며 보내고 여름에는 보리서리, 가을에는 냇가에 나가 물고기잡기, 겨울에는 보리밟기를 하며 연을 날리며 보냈다.
거기다가 시장구경, 농악놀이 참여 씨름경기도 참여하고 화전놀이도 구경했다. 송아지를 팔려가는 우시장에 따라나서기도 하고 귀여운 토끼를 사서 품에 안고 돌아오기도 했다. 해마다 열리는 학교운동회의 추억도 간직하고 시집 장가가는 것도 보며 사람이 죽어 상여 나가는 때에 상여꾼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니 글감을 택하는데 있어 소재거리만은 고갈될 염려도 없었다.
그렇게 중심을 잡고 글을 써온지도 어언 30여년이다. 그간 꽤나 썼는데 아직도 써야할 것은 무궁무진하다. 그러니 이만한 글 광맥이 이곳 말고 또 어디에 있겠는가.
내가 추구하는 글쓰기는 디테일한데 있다. 보다 정밀하게 들여다보고 용어하나 그것들이 펼쳐지는 핵심 포인트를 놓치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나는 어렸을적 누나나 고모들이 시집을 갈 때 대성통곡을 한 모습을 보고 이해를 하지 못하였다. ‘이제 어엿한 어른이 되어서 떠나는데 왜 슬피울까?’ 궁금했다.
그러나 그것은 차츰 나이가 들어가면서 깨닫게 되었다. 시집살이 하는 데는 눈감고 십년, 귀 막고 십년이라는 말의 뜻은 모르겠고, 적어도 정이 붙은 부모슬하에서 귀여움을 받고 살다가 이질적인 환경에 놓이게 되니 두려움이 앞섰을 것이고, 현실적으로도 닥쳐온 고난을 예감했을 것이다. 그렇게 서럽게 울면서 떠나는 것을 보면 지켜보는 마음도 울적해졌다.
부모님이 가난한 살림에 목돈이 필요한데 준비를 못하고 애면글면하는 모습을 보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마음은 웅크러들고, 한 마을의 친척이라도 돌아가시면 스치는 모습들이 무성영화를 방불케 해서 절로 주늑이 들기도 했다.
농촌생활의 재현은 어떤 행위의 묘사만으로 구현되지 않는다. 입고 살던 입성과 일상으로 먹고사는 음식문화와 이웃과의 관계, 언어태도까지도 망라되어야 실감을 자아낸다.
나는 첫째로 언어태도에 주목했다. 농촌에서는 일상으로 쓰는 언어를 거꾸로 표현한다. “잘났어, 장말”처럼 반어적 표현 말고도 식을 내다 팔면서 ‘샀다’라고 하고, 그것을 사오면서는 ‘팔았다’고 한다. 처음에는 도무지 이해가 안되어서 고개를 가윳했다.
그런 표현은 곡물에 관해서 만큼은 곧대로 말하는 걸 금기시하는 풍속이 남아있지 않나 싶어서, 이냥 넘기고 있지만 확실한 해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그런 중에도 예전에 흔히 문지방에 걸어두던 곡식꾸러미의 용어를 모르다가 그것을 일컽는 이름이 ‘올개심니’라는 것을 뒤늦게 알았고, 우리나라 국화인 무궁화꽃을 ‘눈에피’라고 비하한 것은 일제가 되도록 보는 걸 기피하게 만들려고 했다는 것을 나중 알아냈다.
시골의 풍속을 구현하려면 언어를 제대로 파악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그 에편네는 무담시 사람을 욕하고 다녀?”
“암시랑안케 냅둔께 그라제. 혼구명을 내제 그랴”
“따지니께 됩데 대들드만”
향토어를 살려야 실감이 되살아 난다.
나는 대체적으로 처음에 마음먹은 글쓰기를 실천해오고 있다고 생각한다. 맨날 한주제로 글을 쓸 수는 없어서 다른 소재도 택하고 있지만 주류를 형성한 것은 농촌의 이야기, 그중에서도 5,60년대의 우리고장에서 펼쳐지던 모습들을 그려놓고 있다.
세월이 흐르다보니 그 주인공들은 대대수가 이미 고인이 되었다. 그렇지만 작품을 일별해 보면 그분들의 살아생전 모습들이 스쳐간다.
나는 최근들어 궁금한 점이 생겼다. 지금은 AI시대가 되어 인공지능이 모든 자료를 다 들여다보고 있는데 내가 쓰고 있는 글쓰기가 궁금해진다. 그래서 지인을 통해서 한번 여쭈어달라고 부탁해두고 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나의 이런 글쓰기에 대하여 문학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고 싶은 것이다. 적어도 누구나 같은 소재로 글을 많이 쓰고 있는 현실에서 중첩은 피해야 하고, 그렇게 하고 있다는 확신과 함께 정당한 평가를 받아보고자 함이다. 받아든 결론은 부디 부정적으로 보는 답변이 아니길 바란다.(2025)
첫댓글 우리 옛 농경사회를 오늘에 조명함은 체험을 통한 산 역사라는 점에서 큰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아가 이를 문학적으로 재구성함으로써 급속한 산업화로 인해 시대의 단절에 놓인 젊은이들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자 부조의 삶을 천착하고 이해하는 데 더욱 큰 의의가 있다고 봅니다
좋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수많은 작가가 수많은 작품을 양산하고 있는데 그들의 작품과 차별화하고
농경사회의 체험을 전수시키고자 함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여 나만의 글쓰기를 꾸준해 해오고 있습니다.
한시대의 농촌의 삶을 채록하는 의미로 한분야를 꾸준히 천착하여 작품으로 남기는 것도 필요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1950년대에서 ,1960년대 농경문화의 이모저모를 청석님같이 세세하게 재현하고 엮어 놓은 작가는 없다고 봅니다.
농촌의 풍속과 풍물은 무궁무진한 보물과 같습니다. 소꼴, 지게질, 쟁기질, 울력, 길 넓히기, 모내기, 타작,
새끼꼬기, 이엉 얹기 당시의 농촌 사회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집니다.
시골 풍속을 구현한 사투리는 어찌 그리 情이 드는지요!
잘났어, 팔았다, 올개심니, 눈에 피 작품을 통해서 당시의 농촌 상황을 알 수 있었으니 문학의 洪福입니다.
문학적 성향을 잘 살려 청석님만의 문학좌표가 앞으로 계속되기를 바랍니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입니다.
좋은 작품 잘 읽었습니다^^
다른 작가와 소재와 재제의 중복을 피하기 위해 글감을 고향 농촌의 이야기로 한정을 지었습니다.
50년대와 60대를 시골에서 살았는데 그때가 농촌 고유의 풍속이 잘 유지되던 시기라 많은 것을
경험했고, 많이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작품을 특화시킨다는 뜻에서 그리테마를 잡고 글을 쓰고 있는데 잘 생각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