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02월 17일(주일) 낮 설교 - 사순절 제1주 -
나의 피난처가 되시는 주님
{ 시편 91 : 1~16 }
Ⅰ. Story. 「 장두노미(藏頭露尾) 」
장두노미(藏頭露尾)라는 사자성어가 있습니다. 직역하면 ‘머리는 감추고 꼬리는 드러낸다’는 뜻입니다. 원래 타조가 주인공인데, 우리나라로 치면 꿩이 제격입니다. 매의 눈을 보면 꿩은 혼비백산하여 머리를 땅에 박습니다. 그러면 꿩의 입장에서는 매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매는 그 때문에 훨씬 더 쉽게 목적을 달성합니다. 매는 꿩을 단 한 번에 낚아채버립니다. 꿩이 머리를 감추었다고 안전해질까요? 사실 많은 사람들의 모습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나름대로 큰 어려움을 당하면 그저 그 상황만 모면해보려고 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도 이 배만은 침몰시킬 수 없다고 호언장담하던 거대한 호화여객선이 있었습니다. 1911년 영국의 화이트스타 회사가 건조한 ‘타이타닉 호’입니다. 이 배의 제원을 보면, 총 46,328톤, 길이 259.08m, 폭 28.19m, 높이 19.66m나 되는 것으로 시속 26노트로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크고 빠른 배였습니다. 일반인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배로써 선체 또한 이중으로 건조되어 있어 튼튼한 선박이었습니다. 따라서 설혹 어뢰를 맞는다고 할지라도 끄떡하지 않도록 설계되어 있었습니다. 이 타이타닉 호가 영국의 사우샘프턴 항에서 뉴욕을 향하여 처녀항해를 했습니다.
1912년 4월 14일 밤 11시40분경이었습니다. 배는 뉴턴들랜드 해역에 와있었고, 곧 한 덩어리 얼음(유빙)이 배로 다가와 박치기를 했습니다. 그렇게 크고 안전할 것이라고 자랑했던 배는 2시간 40분 만에 허무하게 침몰하고 말았습니다. 그 배에 승선했던 2,208명 중 남자 1,513명이 배와 함께 수장되었고, 어린이와 여인 그리고 노약자들 703명만 살아남았습니다. 한 마디로 사상 유례가 없는 해난사고였습니다. 타이타닉호의 탑승자들과 관련된 사람들은 이 엄청난 비보를 접하자 사랑하는 이들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하여 구름 떼처럼 뉴욕 항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이때 그들 앞에는 두 개의 명단이 걸려있었습니다. 하나는 죽은 사람의 명단이요, 다른 하나는 산 사람의 이름이었습니다. 이 명단들을 살펴보던 사람들은 말 그대로 ‘희비쌍곡선’을 그리는 난장판을 이루었습니다. ‘도대체 내 사랑하는 사람은 어느 명단에 들어있는가?’ 실로 심각한 문제입니다. 언젠가 우리들도 하나님 앞에서 심문을 받을 것입니다. 과연 나는 어느 쪽일까요?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잠 29:25) 사람(세상)을 의지하거나 두려워하는 것은 전혀 도움이 되질 않습니다. 주님을 의지해야 가장 안전합니다.
Ⅱ.
자동차는 현재 우리생활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만약 자동차가 없다면 엄청나게 불편할 것입니다. 요즘 자동차는 예전과 달리 ‘안전성’을 중시합니다. 그래서 웬만한 자동차에는 여러 가지 안전장치가 필수적으로 장착되어 있습니다. 안전하면 떠오르는 것이 ‘안전벨트’입니다. 안전벨트는 기본적인 안전장치입니다. 그 외에도 브레이크를 밟을 때 미끄러지지 않도록 하는 ABS(Anti-lock braking system)장치가 있는데, 일반 제동 장치를 단 자동차는 급제동할 경우, 바퀴의 잠김 현상 때문에 바퀴가 미끄러지는 현상이 발생합니다. 또 자동차 차제가 옆으로 쏠리는 현상이 나타나는데, ABS를 장착하면 1초에 7-8회 바퀴를 잠갔다가 풀었다가를 반복해서, 이를 통해 빙판길을 운전할 시 짧은 거리에서 멈출 수 있고, 또 차체가 한쪽으로 쏠리지 않게 하므로 ‘급제동의 위험성’을 줄여줍니다.
그 외에도 에어백이 있습니다. 다른 차나 장애물과 갑자기 추돌했을 때, 에어백이 튀어나와서 추돌로 인한 부상을 줄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안전장치는 더욱 발전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100% 안전한 것은 아닙니다. 엊그제 러시아 우랄산맥 인근에는 ‘운석우’가 내렸습니다. 어린이 200여 명을 포함해 모두 1,200여명이 다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40여명은 아직도 입원 중인데, 그중에 2명은 부상정도가 심각하다고 합니다. 부상자 대다수는 ‘운석우’에 건물유리가 깨지면서 다쳤는데, 운석우는 큰 운석이 지구로 낙하하면서 대기 상층부에서 작은 조각으로 부서져 불타는 상태로 비 오듯 떨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사실 이 세상은 그 어디도 안전한 곳이 없습니다. 우리가 피할 곳은 ‘전능자의 그늘’ 밖에 없습니다(1).
Α. 하나님은 우리가 피할 유일한 도피성(피난처)입니다(2, 9).
구약성경에 보면, 이스라엘에는 ‘도피성’제도가 있었습니다. 도피성의 목적은 고의성이 없는 살인자에게 살 길을 열어주는 것입니다. 고의적으로 살인한 사람은 설령 도피성에 숨어들어도 죄 값을 치러야했습니다. 그러나 고의성 없이 실수로 살인한 사람은 정당한 재판절차를 통해 고의성이 없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죽지 않고 도피성에서 살 수 있었습니다. 당시 대제사장이 죽을 때까지 도피성에 살다가 대제사장이 죽으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만약 도피성에서 무단으로 나온다면 그는 ‘피의 보복’으로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니 도피성도 진정한 피난처가 될 수는 없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피할 진정한 도피성은 하나님입니다. “나는 여호와를 향하여 말하기를 그는 나의 피난처요 요새라…”(2) 이 세상 어디에도 우리의 영원한 안전지대는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도피성입니다.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으면, 화와 재앙이 가까이 하지 못합니다(10). 주께서 천사를 통해 지켜주십니다(11).
Β. 모든 질병을 온전하게 치료하시는 이는 하나님입니다(3, 6).
질병문제는 옛날 사람이나 요즘 사람에게나 심각한 문제입니다. 질병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나라는 이미 장수시대로 접어들었지만, 온갖 질병으로 병원신세를 지는 사람은 훨씬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병원에 갈 때마다 느끼는 일이지만 항상 환자가 많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전염병에서 건져주신다”(3)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심한 전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3) 그렇습니다. 모든 질병을 온전하게 치료하시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여호와라파, “치료하시는 하나님”(출 15:26)이라고 한 것입니다.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예수님께서 행하신 주요사역이 ‘치유사역’입니다. 예수님은 각색 병든 자를 치료하셨습니다.
Γ. 위험과 환난을 이기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입니다(13, 15).
이 세상에는 위험한 일들이 참 많습니다. 예상치 못한 위험과 환난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런 위험과 환난은 아무 예고 없이 졸지에 찾아옵니다. 아무리 안전하게 지키려 해도 맘대로 잘 되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영원한 피난처이신 하나님을 의지하면, 하나님이 위험과 환난을 이기게 하십니다. “네가 사자와 독사를 밟으며 젊은 사자와 뱀을 발로 누르리로다”(13)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 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15) 사자, 독사, 젊은 사자, 뱀, 환난 등은 우리 앞에 놓일 수 있는 ‘인생살이의 어려움’입니다. 독사는 매우 위험합니다. 젊은 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 어려운 일을 만나면 좌절하고 넘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고 사는 성도들에게는 위험도 환난도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같은 돌이라도 걸려 넘어지는 사람이 있고, 딛고 올라서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위험과 환난을 디딤돌로 만들어 주셔서 영화롭게 하십니다.
Ⅲ.
매일 정오면 교회에 들어가는 ‘짐’이라는 노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행동이 좀 이상했습니다. 그는 교회로 들어가서 채 2, 3분 만에 나왔던 것입니다. 하루는 교회관리인이 교회 문을 나서는 노인에게 물었습니다. “무슨 일로 매일 교회에 들어갔다 나오세요?” “그야 기도하고 나오지요.” “기도라니요? 그 짧은 시간에 무슨 기도를?” 그러자 노인이 대답했습니다. “나는 길게 기도할 줄 몰라요. 그래서 늘 이렇게 기도하지요. ‘예수님! 저 왔습니다. 저 짐입니다.’라고요” 얼마 후 노인은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노인이 입원한 후로 병실은 늘 웃음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상하게 여긴 간호사가 물었습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께서 이 병실의 환자들에게 웃음을 주고 계신다면서요?” “음, 내가 이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고 있지. 이건 모두 나를 찾아오는 그 방문객 덕분이야. 그분이 내게 늘 기쁨을 주고 가거든.” 간호사는 평소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노인에게 방문객이 있다는 말에, 다시 물었습니다. “방문객이라뇨? 대체 언제 찾아오나요?” “날마다 정오가 되면 나를 찾아오지. 그리고 그분은 나에게 이렇게 말한 다우. ‘짐, 잘 있었나? 나 예수야!!’라고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