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를 치며 노동하며 숨어서 포교하다.
아도 스님은 신라의 서울로 들어가 왕성의 서쪽 마을에 머물렀다. 어느 때 그는 대궐로 찾아가 불교를 전파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청원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지배자들은 “전에 못 보던 것”이라 하여 의심을 하였고, 심지어 그를 잡아 죽이려는자까지 있었다. 잡아 죽이려고 까지 한 것을 보면, 아마 그를 고구려의 첩자로 의심했던 모양이다. 어쟀던 그의 포교 노력은 첫 출발부터 난관에 부딪쳤다.
아도 스님은 할 수 없이 지금의 경북 선산 지방에 있던 모례라는 사람의 집으로 도망가서 그 집에서 3년 동안 숨어 살았다. <아도화상 사적비>에 따르면 이때 아도 스님은 그 집에서 일도 해 주고 소도 돌봐 주며 살았다고 한다. 고승전이나 《삼국유사 》에는 이 3년동안의 행적에 대하여 구체적인 설명이 없다. 다만 “숨어 있었다.”고만 한다.
그러나 민중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온 민담이나 그것을 채록한 것으로 보이는 후세의 기록을 보면, 이 시기에 아도 스님은 그저 밀실이나 골방에 숨어서 모례의 공양만 받고 있었던게 아니라 모례의 집에서 머슴 일이나 다름없는 일을 해 주며 낮에는 소를 치고 밤에는 포교를 했다. (<아도화상 사적비>, <죽림사기>).
아도가 소를 쳤던 곳을 지금도 ‘쇠골’이라고 부르며 그 마을 이름도 ‘도가 열린 곳’이란 뜻인 ‘도개’이다.(선산군 도개면). 1975년에는모례의 집터로 짐작되는 곳에 있는 ‘털레샘(모례정)’이 신라 때의 우물임이 밝혀지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이 모례의 집에서 일을 하며 포교한 아도 스님의 행적을 증명해 주고 있다. 여건이 어렵다 하여 포교하기를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민중 속에 파고들어 그들과 함께 일하면서 척박한 땅에 불법의 씨를 뿌린 아도 스님이야말로 우리 불교인의 영원한 귀감이라 하겠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독실한 신자 모례가 떠받들고 공양하련만, 아도 스님은 몸소 팔을 걷어붙이고 굳은 일을 하며 일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였다. 이것이야말로 중생을 깨우치기 위해 먼저 중생과 일을 함께하는 불보살의 ‘동사섭’이 아니고 무엇이랴? 또 천 마리나 되는 소를 쳤다는 이야기에서 우리는 소를 치며 마음을 다스리는 진지한 수행자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게다가 아도 스님은 침묵이 강요된 시기에 결코 침묵을 지키지 않았다. 온종일 일에 시달린 고단한 몸을 이끌고 밤마다 사람들에게 진리를 가르쳤다. 어떠한 고난과 억압에 굽히지 않고 진실을 말하며,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과 고통을 함께하는 보살의 길을 가야 할 오늘 우리 불교도의 모범이라 하겠다.
아도 스님이 모례의 집에 살며 이렇게 은밀하게 포교활동을 하고 있는데, 어느 때 공주가 중병이 들어 사방으로 의원을 구하자 아도 스님은 그에 응하여 공주의 병을 고쳤다고 한다. 왕이 매우 기뻐하며 보답하고자 그의 소원을 묻자, 스님은 “아무것도 바라는 게 없고 다만 천경림에 절을 짓고 불교를 크게 일으켜 나라의 복락에 이바지하고자 할 뿐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왕이 허락하자 스님은 드디어 천경림에 초가집 절을 짓고 살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강연하였다. 이 절이 바로 흥륜사였다.
법륜을 처음 일으킨 절 흥륜사는 이렇게 소박하게 시작하였다. 꼭 웅장하고 화려하게 절을 짓고 동양 최대, 세계 최대로 불상을 지어야만 포교가 되는 게 아님을 여기서도 알 수 있다. 문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진실로 바르게 전하느냐이다. 올바른 가르침이 없이 그저 불상에 매달려 기도하면 된다는 식의 신앙은 진정한 불교가 아니다. 올바른 가르침과 실천이 있다면 절이 초가집이면 어떻고 포교당이 다락방이면 어떠랴. 아도 스님의 첫 포교는 바로 그러한 교훈을 주고 있다.
포교와 실천의 현장에서 영원히 살아 있는 법신
그러나 아도 스님의 포교활동의 자유를 묵인해주던 왕이 죽고 나자, 다시 사람들은 아도 스님을 죽이려고 하는 등 탄압을 했다. 물론 그분을 탄압한 사람들은 일반 민중이 아니라 불교를 용납할 수 없었던 귀족 지배 세력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죽이려 들자 스님은 또 다시 모례의 집으로 돌아가 손수 무덤을 만든 뒤 문을 닫고 스스로 목숨을 마쳤다. (<아도본비>, <수이전>).
그러나 <아도화상 사적비>가 전하고 있는 전설에 따르면, 아도 스님은 이때 전에 모례가 냉산(지금의 선산군 태조산) 중턱에 지어 주었던 도리사로 돌아가 그 절 뒤의 금수굴이라는 굴에 들어가 열반에 들었는데 불생불멸의 경지에 있다고 전한다. 그래서 지금도 재를 올리는 날이면 굴 속에서 빛이 환하게 뻗쳐 나온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에는 아도 스님의 열반을 아쉬워하는 민중의 염원이 담겨 있다. 지배자들의 계속되는 탄압으로 그 몸은 비록 굴 속에서 열반에 들었지만 불생불멸의 법신이 되어 오늘날까지도 굴 밖의 세상에 환한 빛을 던지고 있는 것은 진정 사실이 아닌가.
도리사 창건설화에 보이듯 눈 덮인 산하에 때아닌 복사꽃, 오얏꽃을 피워 신라 불교의 새봄을 열어젖힌 이 위대한 선지식은 포교와 실천의 현장에서 영원한 귀감으로 살아 계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