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0월 29일 자정을 넘겨 어둠이 내려앉은 서울 서대문구의 한 아파트. 키 180㎝가 넘는 건장한 체격의 아파트 주민 최모(당시 45세)씨가 비틀거리며 경비실로 뛰어들었다. 문을 벌컥 연 그의 시선은 휴식을 취하고 있던 경비원 A(당시 71세)씨를 향했다. A씨는 술에 취한 최씨를 경비실 밖으로 쫓아냈지만, 최씨는 다시 달려 들어와 A씨에게 무차별 폭행을 가하기 시작했다.
폐쇄회로(CC)TV 영상에 담긴 최씨의 폭행은 극악했다. A씨를 바닥에 넘어뜨리더니 머리 부위를 15회가량 체중을 실어 밟았다. 피해자의 얼굴과 머리에서 나온 피가 경비실 벽과 바닥에 튀었다. 자리를 뜨는 듯하던 최씨는 재차 경비실로 들어와 A씨를 가격했다. 몸을 숙여 A씨의 상태를 확인하기도 했던 그는 아무런 조치도 없이 현장을 빠져나갔고, A씨는 직접 경찰에 피해 사실을 알리다 의식을 잃었다. 최씨는 그로부터 4시간쯤 뒤인 오전 6시 경찰에 붙잡혔다.
잔혹한 폭력 사건의 발단은 층간소음이었다. 최씨는 2005년부터 윗집에서 발생하는 소음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윗집에 다른 가족이 이사를 와도 마찬가지였다. 최씨는 아파트 관리실과 경비원에게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요구하곤 했다. 특히 사건 발생 나흘 전엔 관리소장에게 층간소음 민원을 제기하면서 "경비원이 신경질을 낸다"고 했다고 한다. 최씨의 분노가 윗집 주민이 아니라 약자인 경비원 A씨에게 향하고 있던 것이다.
범행 직전 동네 식당에서 벌어진 소동은 사건의 결정적 도화선이 됐다. 술에 취한 최씨는 평소 원한이 있던 국밥집을 찾아갔다. 그는 두 달 전 이곳에서 행패를 부려 영업방해 혐의로 약식기소된 적이 있었다. 이를 억울하게 여기던 최씨는 이날 국밥집에서 "나를 신고하는 바람에 벌금 300만 원을 물었다"며 행패를 부렸다고 한다. 그러나 식당 손님들의 저지로 식당에서 내쫓긴 그는 아파트 경비실을 향해, 바지가 내려가는 줄도 모를 만큼 맹렬히 달려가 범행을 저질렀다.
경찰은 최씨를 당초 중상해 혐의로 구속했다가 살해 의도가 있었다는 판단 아래 살인미수 혐의를 적용, 같은 해 11월 23일 기소했다. 그러나 이날 뇌사 상태였던 A씨가 숨지면서 살인 혐의로 공소장이 변경됐다. 최씨는 법정에서 줄곧 살해할 의도가 없었다고 주장했다. 술에 취해 심신미약 상태였다는 것이다. 또 구조 지연이 A씨가 숨진 이유 중 하나라며 경찰을 탓하기도 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최씨의 심신미약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경비실을 목적지로 명확하게 인식하고 뛰어간 것으로 보이는 점 △책상을 손으로 짚고 발에 체중을 실어 가격한 점 △폭행 후 경비실을 나왔다 다시 들어가 때리는 일관된 공격 행동을 보인 점 등이 주요 이유였다.
2019년 5월 서울서부지법은 "피해자는 범행 도중 형언할 수 없는 공포심과 고통을 느꼈을 것"이라며 "사회적 약자라 할 수 있는 고령의 경비원을 범행 대상으로 삼은 점 등을 고려할 때 중형 선고가 불가피하다"며 최씨에게 징역 18년을 선고했다. 최씨는 항소심과 상고심에서도 심신미약 등을 들어 양형이 부당하다 주장했으나, 지난해 1월 16일 대법원이 상고를 기각하면서 형이 확정됐다.
폭행·폭언은 기본… 생마늘·인분 먹이기도
'갑질 공화국'이라는 수식어가 어색하지 않을 만큼 사회적 약자에 대한 억압과 모욕이 일상화된 한국 사회지만, 최씨의 사례처럼 극도의 가학성과 폭력성이 결합된 갑질 사건은 사회 구성원들을 새삼 충격에 빠뜨린다. 최근 대법원으로부터 징역 5년의 원심 확정 판결을 받은 양진호 한국미래기술 회장이 대표적 사례다.
폭행과 엽기행각으로 물의를 빚어 구속돼 경찰 조사를 받아온 양진호 한국미래기술 회장이 2018년 11월 16일 오전 검찰에 송치되기 위해 경기 수원시 영통구 수원남부경찰서에서 나오고 있다. 연합뉴스
양 회장의 갑질 행태는 단순한 폭행과 폭언을 넘어 그야말로 엽기적이었다. 전직 직원이 회사 인터넷 고객게시판에 자신을 비방하는 글을 남기자 불러서 모든 직원이 보는 앞에서 폭행했고, 우연히 마주친 퇴직자를 '왜 허락도 없이 그만뒀냐'며 때렸다. 직원들에게 정체불명의 약이나 음식을 먹였고, 건배사가 맘에 들지 않는다며 생마늘을 한 움큼 씹어 먹게 했다. 임원들을 미용실로 데려가 자신이 정한 색으로 머리 염색을 시켰고, 워크숍 중 비닐하우스에 닭을 풀어놓고 장검과 활로 공격하게 했다. 휴대폰 문자메시지 등을 몰래 들여다볼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직원들의 사생활을 감시하기도 했다.
1심을 맡은 수원지방법원 성남지원은 "직장 내 갑질 차원을 넘어 권력을 배경으로 한 폭력에 이르렀다고 보인다"며 징역 7년과 추징금 1,950만 원을 선고했다. 2심에서 특수강간 혐의가 공소기각 되면서 형량이 5년으로 줄었지만, 그가 자행한 갑질은 모두 인정됐다.
제자의 인권을 철저히 짓밟은 장모(58) 전 교수 역시 법의 철퇴를 맞았다. 그는 제자 B씨가 일을 못한다는 이유로 2013년 2월부터 2년여간 야구방망이 등으로 수십 차례 폭행했고, 인분을 먹이거나 얼굴에 비닐을 씌우고 최루가스를 뿌리는 가혹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1심 재판부인 수원지법 성남지원은 장씨의 범죄를 "업무 태도를 빌미로 인간 존엄성을 훼손하고 인격을 말살한 정신적 살인 행위"라고 규정하고 징역 12년을 선고했다. 2심에서 피해자가 장씨와 합의하고 일부 혐의가 공소장에서 제외되면서 징역 8년이 선고됐고, 2016년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됐다.
갑질의 씨앗은 비뚤어진 자만심
범죄 전문가들은 갑질이 '비뚤어진 자만심'에서 비롯한다고 분석한다. 스스로를 갑(甲)이라 여기면서 을(乙)에게 '알아서 기어야 한다'거나 '내 말이 곧 법이다'라는 우월 의식을 강요하는 심리가 깔려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위계질서의 아래에 위치한 부하 직원이나 제자, 서비스에 대한 값을 지불하는 경비원이나 배달원 등을 만만한 갑질 상대로 삼고, 이들의 행동에 성에 차지 않으면 곧장 화를 내거나 면박을 준다.
갑질에 공격성이 더해지면 가학적 형태로 발전한다. 공정식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갑질은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너에게 해를 가할 수 있다'는 식의 잘못된 자만심을 가진 이들의 행위"라며 "여기에 인간 존엄성에 대한 인식 부족과 공격성이 더해지면 상대에게 화풀이하듯이 가학적 갑질을 저지르게 된다"고 설명했다.
최씨도 A씨를 화풀이 상대로 삼았다. 오윤성 순천향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최씨는 동네 식당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다가 벌금형까지 받았다는 점에 화를 내며 다시 식당에 행패를 부리려 했다"며 "하지만 손님들 때문에 공격이 좌절되자 분노의 방향을 더 약한 상대인 경비원에게 돌렸다"고 했다. 오 교수는 "불만이 있던 윗집 등 입주민에게 분풀이를 하려니 자신과 같은 계급이라 생각돼 부담스러웠을 것"이라며 "그러다 보니 신체적, 계급적으로 낮은 위치에 있다고 여긴 A씨를 공격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갑의 권력이 강해 을의 저항이 어려울수록 갑의 자만심은 강해지고 그에 따라 가학적 갑질이 오래 지속되는 악순환이 이어진다. 양 회장 사건의 1심 재판부는 "피해 직원들은 피고인의 보복적·폭력적 성향과, 그의 지시를 따르지 않으면 해고되거나 보복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에 (부당한 요구를) 거절하지 못했다"고 판단했다.
"갑질 자성하는 분위기 조성돼야"
때로는 인간 본성에 대한 회의감을 일으킬 만큼 잔혹한 행태를 띠지만, 가학적 갑질도 결국 한국 사회에 만연한 갑질과 뿌리를 같이한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오윤성 교수는 "행동의 구체적 양상엔 차이가 있을지라도 갑질의 기저에 깔린 사고방식은 같다"면서 "스스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여겨지는 타인을 을로 규정해 위력을 가하고, 그런 행동에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런 심리적 토양 위에 갑질은 어디서든 싹을 틔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비대면 배달 시장이 커지는 와중에는 배달기사가 을의 수모를 겪고 있다. 지난 2월 한 어학원에서 고객이 배달기사에게 "공부를 못하니 할 줄 아는 게 없어 배달이나 하고 있다"고 하는 등 모욕적 언사를 쏟아낸 사실이 온라인상에 알려져 큰 파장을 일으켰다. 직후 배달종사자 노조 라이더유니온 등은 국가인권위원회에 갑질 개선을 촉구하는 진정을 냈다.
국무조정실이 지난 1월 발표한 '국민 갑질 인식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 1,500명 중 83.8%가 '우리 사회의 갑질이 심각하다'고 답했다. 또 '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이 도입된 지 2년이 다 돼가지만, 지난해 고용노동부에 접수된 괴롭힘 사건은 5,823건에 달했다. 그러나 이 역시 괴롭힘 방지법 적용 대상이 아닌 4인 이하 사업장이나 프리랜서·경비원·택배기사 등이 겪는 갑질 신고는 소극적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사태의 심각성은 더욱 커진다.
범죄학자들은 갑질 문화를 청산하려면 인식 전환이 우선돼야 한다고 주문한다. 갑질을 횡행하게 하는 '왜곡된 자만심'이 무엇인지, 갑질이 피해자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안기는지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를 키워야 한다는 것이다. 공정식 교수는 "갑질 문화의 해악을 알리는 캠페인 등을 통해 사회 전반의 공감능력을 끌어올릴 필요가 있다"며 "갑질이 잘못됐다는 인식이 보편화되면 행동 역시 변화할 것"이라고 했다. 오윤성 교수는 "인권 교육, 개인적 성찰과 더불어 언론 보도를 통해 '갑질하면 철퇴를 맞는다'는 메시지를 전달할 필요가 있다"며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사회가 더욱 성숙해져야 한다"고 말했다.
오지혜 기자
출처 : '비뚤어진 자만심'이 씨앗… 사람 목숨까지 뺏는 갑질 (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