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의 인기 스포츠 ‘ 격구(擊毬)’와 서양의 ‘폴로(Polo)’
실크로드를 따라 동으로, 서로 전래되다. 16세기 페르시아 폴로경기
통일신라인들의 인기 스포츠는 무엇이었을까. 그 중의 하나는 폴로였다. 경주시 구정동 석실분(石室墳, 돌방무덤)의 모서리 기둥(9세기)에서 당시의 인기 스포츠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이 기둥은 현재 국립경주박물관 야외에 전시 중이다.
폴로 스틱을 든 서역인 조각상.
석조 기둥엔 방망이를 어깨에 걸쳐 맨 무인(武人) 한 명이 조각되어 있다. 무덤 침입자를 막아내기 위한 비상용 방망이일 것 같은데, 이를 잘 들여다보면 폴로 스틱이다. 방망이의 끝이 폴로 혹은 하키 스틱처럼 휘어진 점, 무인이 왼쪽 다리를 약간 들고 동적(動的)인 포즈를 취하고 있는 점 등이 이를 뒷받침해준다. 폴로가 통일신라시대 인기 스포츠의 하나였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폴로는 우리식으로 말하면 격구(擊毬 또는 타구 打毬)다.
그런데 폴로 스틱을 걸치고 있는 무인의 얼굴은 어딘가 낯이 설다. 전통적인 한반도 사람의 얼굴이 아니라 서아시아나 중앙아시아 사람, 즉 서역인(西域人)의 얼굴이다. 서역인이라는 사실은 복장에서도 잘 나타난다. 상의는 좌측 옷깃만을 바깥으로 접은 절금(折襟)을 하고 있다. 이같은 특징을 지닌 복장을 전통적으로 호복(胡服)이라고 불러왔다. 여기서 호복이라고 하면 오랑캐 복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북방 또는 서역 민족의 복장을 뜻한다. ![]() 그렇다면 왜 서역인이 폴로(혹은 하키) 스틱을 쥐고 있을까. 이는 폴로가 서역에서 전파되어 왔음을 암시한다. 사산조 페르시아에서 유행했던 폴로가 실크로드와 중국 당(唐)을 거쳐 통일신라 당시 한반도에 상륙했고 많은 신라인이 외국의 신종 스포츠에 열광했던 것 같다. 물론 그 향유층은 아무래도 상류층이었을 것이다. 폴로의 인기는 고려 초기까지 이어졌다. 통일신라말 고려초인 9-10세기 전후, 폴로의 인기는 한반도에 국한되지 않았다. 폴로의 동점(東漸) 이동 루트였던 실크로드의 전구간과 중국 일본에서 동시에 인기를 구가했다고 볼 수 있다. 서역 실크로드의 요충지였던 신강위구르(新疆維吾爾) 자치구의 투르판(吐魯番) 아스타나 고분에선 폴로를 즐기는 귀족 조각상(8-9세기)이 다수 발굴되었다. 중국 장안(長安, 지금의 西安)의 장회태자묘(章懷太子墓, 중국 당 고종의 둘째 아들 이현의 묘) 벽화에도 폴로 게임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15세기,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초판에도 인도에서 목격한 폴로게임이 기록되어있다.
중국 당의 장안에서는 여성들까지도 말을 타고 폴로를 즐겼다고 한다. 그리고 당나라왕족과 티베트 선수 사이에 국제 경기가 열리기도 했다고 한다. 실크로드의 종착점이라고 하는 일본에서도 폴로 장면을 그린 회화가 적잖이 발견되었다. 서아시아에서 출발해 실크로드와 중원을 거쳐 한반도를 지나 일본 열도까지, 당시 폴로의 위세는 이처럼 대단했다. 폴로? 당시 서아시아 중앙아시아 동아시아 최고의 인기 스포츠였던 셈이다. <이광표기자>kplee@donga.com
말 위에서 여러 무예를 보여주는 마상무예가 언제부터 시행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이미 부여에서는 명마(名馬)가 나왔으며, 활.화살.칼.창 등을 쓰는 병사가 있었다는 점으로 보아 활을 쓰는 기병(騎兵)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마상무예는 기원전 5~6세기경부터 말 사육과 더불어 시작되었으며, 특히 수렵용과 전시용으로 함께 사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폴로는 동방에서 유래된 왕족들의 마상무예를 견주는 놀이문화였다.
삼국시대에 들어와서 대륙의 기마민족과 싸우면서 기마전의 필요성이 제기되었으며, 따라서 마정(馬政)과 전마(戰馬)의 확보가 필요하게 되었다. 특히 고구려는북방민족과의 싸움을 통해 기병의 중요성을일찍 터득하였다. 따라서 기병 및 기마술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고구려에서 마상무예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것은 고분 벽화이다. 중국 길림성(吉林省) 집안현(集安縣)에 전하는 5~6세기의 고구려 고분에는 수렵도(狩獵圖)가 그려져 있다. 무용총(舞踊塚)에 있는 수렵도는, 산악지대에서 4명의 말을 탄 무사가 활을 쏘며 사냥을 하는 모습이다. 전방을 향해 쏘는 무사가 호랑이를 쫓아가면서 활시위를 당기고 있으며, 다른 장면은 상체를 뒤로 돌린 무사가 활시위를 당기면서 우후방에 있는 사슴을 향해 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고구려 고분 '무용총'의 수렵도.
고구려에는 해마다 봄과 가을에 사냥대회를 열었다. 왕은 말 타고 활 쏘는 재주가 뛰어났으며, 이 때짐승을 많이 잡은 사람에게 용사라는 칭호를 주었다.한편 수렵에 뛰어난 기사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 실제로 전시에기마병이 사용되었음을알 수 있다. 그리고 4세기의 안악 3호분에 그려진 마사도(馬舍圖)를 보면, 이미 말을 사육하는 마사가나타난다. 따라서 마정(馬政)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한편 백제와 신라의 수렵도는 현재 전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기마전에 대한 기록이 다수 나오는 것으로 보아, 말을 타고 행하는 수렵의 형태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옛 그림에 등장하는 마상무예.
그리고 통일 신라 시대에도 무사가 말을 달리며 수렵, 동물을 쫓는 장면을그린 벽돌(塼)이 남아 있다. 이 그림을 보면, 등에는 활을 메고, 오른손에는 칼을 세운 무사가 노루를 향해 쫓아가는 모습이다.당시에 수렵이 성행하였음을 엿보게 한다. <삼국사기>에는 기병에 대한 기록이 다수 나오는데, 고구려.신라.백제 모두 기병을 매우 중요시하였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신라,백제에 비해 고구려는 기병에 대한 기록의 횟수도 많고, 시기 또한 빠르다. 따라서 고구려의 기마술이 일찍이 발달하였으며, 그 규모도 훨씬 컸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발해에서도 말을 타고 공을 치는 격구라는 놀이가 성행했으며 이를 통해 무예를 연마하기도 했다. 발해의 격구도용.
고려는 신기군(神騎軍)이라는 기병이 있었다. 고려 숙종 9년(1104년)에 윤관의 건의로 여진을 정벌하기 위한 목적의 별무반을 두었다. 이 별무반에는 기병을 중심으로 한 신기군, 보병을 중심으로 한 신보군, 승려를 중심으로 한 항마군이 있었다. 신기군은 여진의 기병에 대항하기 위해 편성된 특수부대로 문무 양반, 이서, 상인,노예 및 양인중에서 말을 가진 자는 모두 편입시켰다. 무인 집권시에는 마별초라는 기병제도가 있었다. 최우(崔偶)는 날마다 마별초로 하여금 기사를 단련시몄으며 수렵을 즐겼다. 마별초는 최우가 몽고의 영향을 받아 편성한 것이다. 고려시대에 무인들은 마상무예를 기르기 위하여 격구를 즐겼다. 무예를 숭상하던 고려시대에 격구가 크게 성행하였다.
격구 경기방법에 관한 설명 부분. (조선시대)
기사는 조선 후기 까지 무예의 하나로 중요시 되고 수렵활동에도 기동성을 발휘하였다. 그러나 총의 발달로 그 위력을 점차 잃게 되었다. 세종대왕은 "격구를 잘하는 사람이라야 능히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할 수 있으며, 창과 검술도 능란하게 된다." 고 말해 군사적 목적에서 격구를 장려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격구를 중요한 무예의 하나로 여겨 정기적인 군대열병식에서 반드시 실시하였고 무과시험과목에까지 포함시켰다.
18세기에 일본에 사신으로 간 박경행(朴敬行)은 마상재(馬上才)를 보여주면서 적진에 침투할 수 있는 날랜 기마병사가 사오백명은 된다고 말하였다. 일본인들이 이 마상재를 받아들여 다이헤이본류(大坪本流)라는 승마기예의 한 유파를 만들기도 하였다.
http://www.chunghondang.com/eques_mar_history.htm
뉴욕의 폴로경기장. 실크로드를 따라 전해진 ‘마상격구’는 서양에서도 인기가 높았다.
격구(擊毬)는 말을 타고 장시(杖匙)라는 채를 이용해 공(木毬)을 쳐서 상대방 문에 넣는 경기이다. 예로부터 문관이나 민간사회에서 무예의 하나로 행해졌다.이것을 민간에서는 '공치기' 또는 '장치기'라고도 하며 한자어로는 '타구(打毬)'격구희(擊毬戱)'농장희'(弄杖戱)',격봉'(擊捧)'이라고도 한다. 중요한 무예의 하나로 크게 성행하였다. 중국에서는 북방민족인 요나라나 금나라 사람들이 이를 즐겼으며,최치원이 당나라에 머물렀을 때에도 크게 유행하였다고 한다.
마상격구의 격구동작.
격구의 종류에는 마상격구와 지상격구(보행격구)의 2가지가 있다. 즉 말을 타고 행하는 기마병의 훈련용 마상격구와 지상에서 도보로 행하는 귀족층의 지상격구로 나뉜다. 마상격구는 병사들이 모화관(慕華館) 또는 기타 넓은 광장에서 마상 궁술(騎射)과 함께 행한다. 우리나라에는 언제부터 시행하였는지 알 수 없다. 《해동역사》의 일본관련 내용과 《구당서》의 발해 관련 내용을 보면, 격구는 신라나 고구려 등에 주둔하고 있던 당나라 병사에 의해 전해졌으며, 고구려의 유민에 의해 발해에 전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말타기에 익숙했던 당나라 귀족 여인들. 이들은 스스럼없이 격구를 받아들여 즐겼다.
격구는 무예를 숭상하던 고려시대에 와서 크게 성행하였다. 특히 고려시대에 무인들은 마상무예를 기르기 위해 격구를 즐겼다. 특히 무신정권이 들어서면서, 격구는 군사적 목적에서 무관들의 훈련용으로 쓰였으며, 귀족들의 놀이로서 행해지기도 했다. 왕과 귀족들은 격구를 사열하고 즐겼으며, 상으로 비단, 포목, 돈 등을 내리기도 하였다. 고려 의종 이후에는 차차 국가적인 오락행사가 되었으며, 특히 궁중에서는 단오절에 이를 성대하게 벌였다. 격구가 성행하여 한때, 원래의 목적에서 벗어나 사치로 흐른적도 있어 예종이나 충혜왕은 격구를 금지시키기도 하였다.
1930년대 이여성이 그린 격구도. (마사박물관 소장) 홍철릭과 종립을 착용한 무관과 격구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한편 조선에 와서도 격구가 성행하였다.《용비어천가》에도 격구에 관한 기록이 있다.(용비어천가,제44장) 특히 세종대왕은 격구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격구를 잘하는 사람이라야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 할 수 있으며, 창과 검술도 능란하게 된다."고 말한 바 있다. 조선시대에는 중요한 무예의 하나로 여겨서 정기적인 군대열병식에는 반드시 이를 실시하였고, 또한 무과시험 과목에까지 포함시켰다.
현대에 다시 복원된 전통마상무예.
현대에 와서는 한민족 전통마상무예단에 의하여 최초로 복원 발표되었다. (1997. 문화유산의 해 조직위원회 전통마상무예,격구 공식 복원발표)
http://www.chunghondang.com/korean_polo.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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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My Lovely - PROJECT 원문보기 글쓴이: enom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