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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7월 9일(주일) 주일설교 마태복음 13:51~58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으로 살려면' 새찬송가 290장 우리는 주님을 늘 배반하나
오늘은 마태복음 13:51~58 본문을 중심으로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으로 살려면’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증거하기를 원합니다.
오늘 본문의 요절은 마 13:52 말씀입니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것과 옛 것을 그 곡간에서 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 오늘 본문을 간단히 요약해보면, 예수님은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새것과 옛 것을 곳간에서 내오는 집주인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후 예수님이 고향에서 가르치실 때에 고향사람들은 그 지혜와 능력을 보고 놀랍니다. 그러나 선입견과 편견으로 예수님은 배척을 당하셨습니다.
주님은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 책망받은 ‘서기관’이 아니라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으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저와 여러분들이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으로서의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러면 먼저 성경에 나타난 서기관이 무엇를 알아야 합니다. 옛 중동에서는 글을 배우는 데 특별한 교육이 필요했으므로 서기관은 학자이거나 관리였습니다. 구약 성경에서는 나라의 매우 높은 관리를 서기관이라고 했습니다(삼하8:17 등). 종교적인 율법이 유대인들의 생활에 점점 더 중요하게 된 포로기 이후 시대에는 전문 교육을 받고 임직한 유대교 학자들이 처음으로 등장했습니다. 이들의 임무는 율법을 연구하고 해석하는 것이었습니다. 모세 오경이 시민 생활을 위한 율법 모음집으로 통하기도 했으므로 이 학자들은 법률 전문가이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자기들의 지식을 제자들에게 전해 주었으며, 이런 율법학자들이 모범으로 삼던 훌륭한 인물은 '학사' 에스라였습니다(스7:6,10,25 참조). 신약 시대의 율법학자들을 <개역한글판> 성경에는 보통 '서기관'이라고 부르는데(어쩌다가 나오는 '율법사'란 칭호도 뜻은 비슷하지만 그 헬라 낱말은 다르다), (막2:23-3:6 참조). 신약성경 마태복음 13:52; 23:34에 따르면 신약의 교회에도 '서기관'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산상수훈(마5-7장)에 나타나 있는 바와 같은, 예수님의 율법 해석을 교회의 실제 상황에 적용하는 임무를 맡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서기관은 성경을 필사하는 사람들입니다. 헬라어나 히브리어는 점 하나만 잘못 찍어도 의미가 달라져버리기 때문에 공부를 많이 한 학자나 똑똑한 사람들이 서기관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에 대해서 예수님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새파 위선자들이여,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가 잔과 접시의 겉을 깨끗하게 하지만 그 안에는 탐욕과 방종이 가득 차 있다….. 율법학자와 바리새파 위선자들이여,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하얗게 칠한 무덤과 같다. 겉은 아름다워 보이지만 그 안은 시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다. 너희가 겉으로는 사람들에게 의롭게 보이지만, 속에는 위선과 악이 가득하다”(마23:23-28) 그들은 교만하고 자신들의 지위를 이용해서 권위만 내세우고 대접받기를 좋아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께 책망받은 교만하고 권위주의적인 서기관이 아니라, 오늘 본문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으로서의 영적직분을 잘 감당해야 할 줄 믿습니다.
1.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은 말씀의 곳간에서 새것과 옛것으로 풍성한 삶을 살뿐 아니라 나눠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51~52절).
구약의 전문가인 서기관들은 옛 전통에 갇혀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이 구약을 이루시고 신약을 주신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반면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들은 인생의 숱한 사건을 겪으면서 말씀으로 찾아오신 주님을 영접한 사람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삶에 다가온 힘든 사건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의심하지 않고 끝까지 믿는 자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과한 자가 구약과 신약을 일용할 양식과 약재료를 말씀의 곳간에서 꺼내어 나눠주어 가정과 공동체를 살리는 집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각자 고난 가운데 살아낸 삶과 깨달은 말씀이 곳간의 열쇠가 되어 어떤 사건에도 새것과 옛것을 내어오는 집주인으로서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곳간에 쌓아두는 것은 필요할 때 사용하기 위함입니다. 말씀을 평소에 차곡차곡 쌓는 중요한 이유는 필요할 때 내어오기 위함입니다. 그것을 말씀을 알지 못하고, 말씀 없이,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를 소개하고, 천국 백성의 삶이 있음을 소개하기 위함입니다.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뇨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마24:45) '천국의 제자 된 서기관'은 그리스도가 전해주신 천국 복음을 받아들일 뿐 아니라 그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을 내 가족과 이웃에게 가르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제가 말씀카드를 다운 받을 때 위의 구절이 늘 보였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에 은혜를 받아 힘들고 귀찮을 때도 순종하며 말씀을 보낼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큐티적용 할 때 보면 큐티하면서 깨달은 말씀을 자녀에게 말해주어야 겠다, 혹은 SNS로 전해주어야 겠다는 식의 적용들이 있습니다. 깨달은 내용들이나 은혜받은 구절이 있으면 나 혼자만 귀하게 장롱의 금고 속에 간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받은 은혜를 흘려보내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 은혜를 유통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옛날부터 전해지는 야사 중에 이러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이야기인가 하면 어느날 한 나라의 왕이 자기 아들을 위하여 며느릿감을 선택하기 위하여 나라 곳곳에 방을 써 붙이고는 아릿다운 처녀들을 다 모아 들였습니다. 그리고는 모여든 처녀들에게 쌀 한되씩을 주면서 이것으로 100일 동안을 먹고 지낸 후에 다시 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처녀는 얼마 되지 않는 쌀 한 되로 100일 동안을 먹느라고 한끼에 몇 알씩의 쌀 날로 끼니를 때우다 보니 들것에 들려 왔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는 그것으로 100일 동안을 먹고 지내왔노라”고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중의 어떤 처녀는 100일 전의 건강한 모습 그대로 일 뿐만 아니라 머리 위에 떡 한 시루를 이고 들어오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연유를 물어 보았더니 이 처녀는 생각하기를 쌀 한 되를 가지고 어떻게 100일을 먹을 수 있나하여 당장에 그것으로 떡을 만들어 돌아다니며 팔아서는 다시 쌀을 사고, 또 떡을 팔고 하여 100일 동안을 먹고 지내왔으며 이제 그 남은 것으로 떡 한 시루를 해 왔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임금님은 네가 내 며느리감이다 하고서 그 처녀를 며느리로 맞아들였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얼마나 지혜로우며 능동적이고 창의적인 아가씨입니까?
여러분,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할 일은 얼마든지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주인이 이것하라고 하면 이것하고 서 있고, 저것 하라면 저것하고 서 있는 정도라면 그런 종을 데리고 과연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으로서 충성된 종은 없는 일도 만들어 가면서, 전에 했던 일도 새롭게 고쳐가면서 능동적이고도 창의적으로 일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일에 있어서도 좀 능동적으로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 때마다 누군가가 말해주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말씀과 성령안에서 내 스스로 힘이 닿는데 까지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다해서 수고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에 거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으로서 주신 은혜를 나누는데 힘을 다해서 하되 창의적으로 자발적으로 이 일을 감당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적용) 나는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으로서 말씀의 유통자로, 은혜의 전달자로서의 삶을 살고 있습니까? 그렇지 못하다면 앞으로 이 영적사명을 어떻게 감당하시겠습니까? 성령의 지혜를 구하시고 이 일을 감당하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은 선입견과 편견을 버리고 베푸시는 주님의 은혜와 구원을 받아들여야 합니다(53~56절).
가버나움을 중심으로 갈릴리 해변에서 사역하신 예수님이 자신의 고향인 나사렛으로 돌아오십니다. 갈릴리에서는 많은 사람이 예수께 나아와 말씀도 듣고 많은 능력도 보았습니다. 고향인 나사렛에 와서도 갈릴리에서와 비슷했던 것 같았습니다. 나사렛 회당에서 가르치시는 예수님의 지혜와 능력에 고향 사람들도 놀라고 감탄합니다. 54절 “고향으로 돌아가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그들이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냐” 감탄하고 놀라며 주님의 은혜와 구원을 받아들이면 좋았을텐데~ 그들은 받은 은혜와 능력을 다 쏟아냅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을 배척합니다. 55,56절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어머니는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하지 않느냐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그런즉 이 사람의 이 모든 것이 어디서 났느냐 하고” 그들은 예수님의 그 지혜와 능력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목수의 아들이자 인간예수에게 그런 지혜와 능력이 나올 수 없다고 확신하며 주님을 배척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더 나아가 예수님의 부모와 형제들을 들먹이며 예수님을 배척합니다.
그들이 고향을 찾아온 예수님을 반기지 않았던 이유는 그들이 조상 때부터 가지고 있던 오래된 선입견과 편견 때문이었습니다. 선입견과 편견은, 한 사람을 자신이 알고 있는 사전 지식과 정보만으로 단정지어버리는 아주 나쁘고 고약한 생각입니다. 이는 진실이 거짓으로 둔갑할 요소를 다분히 내포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 선입견과 편견은, 에덴동산에서 간교한 사탄의 유혹으로부터 시작되어, 남자와 여자로서 편견과 자신의 우월감을 나타내려 상대방을 무시하는 처사입니다. 이는 오늘날에도 적용되어 나보다 못살거나 부자의 가난한 자에 대한 선입견과 편견이지요. 또한 지식이 없거나 이는 배운자들이 그렇지 못한 자들에게 대한 편견과 선입견입니다. 또한 어느 면에서든 나보다 못할 때 상대방을 인격적으로무시하고 깐보는 타락한 행위입니다. 성경에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고 하셨는데, 그러므로 이웃을 선입견과 편견으로 무시하는 죄는 결코 가볍다고 할 수 없습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 이런 일이 있다면 우리는 이 부분을 회개해야 합니다. 고향사람들의 선입견과 편견과 고정관념으로 바라본 예수님은, 이제 하나님 아들도, 다윗의 자손도, 메시아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무지랭이 목수의 아들이었고,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은 ‘너’, 아니 나보다 못한 ‘너’일 뿐이었습니다.
이렇게 내 선입견으로 삶의 해답을 내놓으면 내 생각과 다른 모든 것을 의심하고 받아들이지 않다가 결국 주님마저도 배척하고 믿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 조차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결국 믿음을 갖지 못하게 됩니다.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들으로 살려면 이러한 편견과 선입견을 깨뜨리고 액면 그대로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1:20 KRV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적용) 내 곁에 있는 이웃이나 성도를 학벌과 물질과 집안 배경에 대한 선입견과 고정관념으로 그를 배척하지는 않습니까? 내가 갖고 있는 이런 편견과 선입견에는 무엇이 있고, 이를 없애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지 서로 말해보십니다.
3.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은 선을 행하다가 고통과 배척을 당해도 실망하거나 낙심하지 않습니다(57~58절)
예수님께서는 고향 사람들에게 배척을 당하시면서 오늘 본문 57절에 당시 유행했던 속담을 인용하셨습니다. 57절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고”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했다”는 말씀의 핵심은, 장차 있게 될 제자들의 복음을 위한 파송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후에 제자들도 파송이 되었는데, 제자들은 직접 보고 들은 예수님의 경험을 통해, 장차 지신들이 복음을 전하다가 당할 고통과 배척을 받더라도 실망하거나 낙심하지 말 것을 교훈하는 내용입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58절에 “그들이 믿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아니하시니라” 선입견과 편견으로 예수님께 대해서, 그 지혜와 능력에 대해서도 마음의 문을 닫아걸었던 고향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은 이제 상황을 종료시키고자 그의 사역을 마무리하시며 속히 다른 곳으로 떠나고자 하십니다. 그래도 그 중에 믿는 몇몇 병자의 병을 고쳐 주시고는 조용히 고향을 떠나가십니다. 이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예수님이 찾아오신 것은 호박이 덩굴째 굴러들어온 복 아닙니까? 특히 자신들의 죄를 위해 스스로 고향을 찾아오신 복음의 축복을 비롯해 죽은 자를 살리시며 귀신을 쫓고 많은 병자들이 치유받을 수 있는 절호의 찬스인데 이를 스스로 걷어차고 말았던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일은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 뿐 아니라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은혜받을 수 있는 기회, 하나님의 치유와 회복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를 예수님과 그 말씀을 배척함으로 스스로 차버리는 그런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이지요. 인간 최초의 살인자인 가인 역시 동생 아벨을 미워하고 죽이며 인류 역사에 지금까지 나쁜 이름으로 안타깝게 기억되고 있습니다. 사울 왕 역시 다윗을 배척함으로 자신은 물론, 자녀들에게까지 비극을 초래한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 명분을 빼앗고 달아난 야곱은 에서를 배척함으로 도망자 신세가 되었지만, 나중에 철저한 회개로 장자의 복은 물론, 거부가 되어 개선 장군처럼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야곱의 인생은 역전이 되어 지금까지 위대한 예수님의 족보 반열에 오르는 사람으로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가장 잘 안다고 하는 고향사람들이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믿지 못합니다. 그 누구보다 쉽게 믿을 수 있었던 그들이 오히려 믿지 못하고 예수님을 배척합니다. 그 결과 그들은 예수님이 베푸시는 능력을 보지 못했습니다. 고향사람들로부터 기가 막힌 무시와 배척을 예수님이 먼저 당하셨기에 오늘날 신앙인으로서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으로서의 삶을 살려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내 주위 사람들에게서 이해할 수 없는 오해와 비난을 받을 때 그런 나를 주님이 너무 잘 아시고 나를 위로해주십니다. 나도 그런 무시와 배척을 당했다. 그러니 믿음으로 살다가, 복음을 전하다가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다가 그런 배척과 무시를 당해도 실망하거나 낙심하지 말라. 갈 6:9을 보면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찌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하고 있습니다. 선을 행하고 당장 열매가 맺히지 않는다고 낙심하지 말아야 합 니다 선을 행한다고 해서 꼭 모든 일에 형통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선을 심고 성령으로 싹을 트이게 해도 환난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될 때도 끝까지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요 16:33에서도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세상에서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라고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고향사람들에게 배척당하시고 무시당하신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오히려 그런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늘 의지하며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고 담대하게 나아갈 때 어떤 힘든 자리에서도 믿음으로 굳건히 설 수 있음을 믿습니다.
적용) 내가 선을 베풀고, 은혜를 나누는 데도 배척당한 경험이 있으십니까? 그로 인해 좌절과 낙심을 경험해본 일이 있으십니까? 앞으로 이런 일을 당할 때 어떻게 하실 작정이신지 함께 나누어 보십니다.
큐티인 간증 날마다 회개하는 새 것 ‘정유경’
저는 뉴욕에서 이혼 후 혼자 아들을 키우면서 비참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와 사랑만 누리려 할 뿐 내 죄를 돌이키는 진정한 회개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들이 초등학교 4학년 일 때 ADHD라는 고난이 찾아와 제가 소아청소년 정신과 의사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의사에게 데려가야 하는 수치의 사건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제야 비로서 제 입에서 “하나님, 제가 가정을 깨고 나 혼자서도 아이를 잘 키울 수 있다고 믿은 교만한 죄인입니다”라는 고백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들이 질병 고난으로 구속사의 말씀이 들려 날마다 큐티하니, 한국에 계신 부모님과 전 남편의 구원에 대한 애통한 마음이 생겨 미국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귀국했습니다. 이제는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으로 구원의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한국에 오니 뜻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습니다(52절). 아들은 여전히 ADHD로 숙제하기를 힘들어 했고, 외로움에 컴퓨터로 빠져들었습니다. 또한 부모님과 전남편과의 관계는 과거의 상처와 분노가 올라와 오히려 더 힘들어졌습니다. 저는 분명 저와 가족을 향한 예수님이 말씀을 깨달았다고 생각했는데, 왜 다시 후퇴해서 헤매고 있는지 이해되지 않아 혼란스러웠습니다(51절). 심한 자괴감은 우울과 무기력으로 이어졌고, 사람들 뿐 아니라 말씀과 예배도 점차 멀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저는 여름 방학을 맞은 아들과 함께 외국에 갔다가 코로나 19에 감염되었습니다. 호텔방에 격리되어 ‘이러다 아무도 모르게 죽는 거 아닐까’할 정도로 아프니 저절로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부르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큐티를 시작하면서 한국에 돌아와 잘 될 일이 없다고 원망하며 예수님을 배척한 사람이 바로 저임을 깨닫고 회개하게 되었습니다(57절). 이제는 날마다 새롭게 주시는 말씀으로 끊임없이 저의 죄를 보며 회개하는 새 것을 내놓을 수 있기를 간구합니다(52절).
적용하기) 1. 부모님이 저의 신앙생활을 비판하는 말을 하시더라도 회피하지 않고 안부전화를 꾸준히 드리겠습니다.
2. 말씀이 깨달아지지 않을 때 교회 공동체에 솔직히 나누며 중보기도를 요청하겠습니다.
결론
이처럼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은 삶 속에서 겨자씨처럼 작아지고 누룩처럼 낮아진 삶으로 주님의 경건의 능력을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선입견과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나를 구원하려고 찾아오신 예수님을 배척한 죄를 회개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불신 배우자와 자녀의 배척을 잘 참고 인내하며 잘 감당합니다. 그리고 늘 새것과 옛것을 천국 곳간에서 꺼내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역할을 감당합니다. 그리고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은 늘 기도생활을 하되 기도 응답이 늦어지고 늘 복음을 전하되 구원의 열매가 없을 때 조차도 낙심하지 않고 자신의 믿음 없음을 회개하며 하나님을 상급으로 받는 복을 누리게 됩니다. 바라기는 저의 모두가 예수님께 책망받은 서기관이 아니라, 예수님께 칭찬받는 천국의 제자로서의 서기관으로서의 사명을 잘 감당하기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문) 오늘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으로 살려면’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살펴보았는데, 이 말씀 속에서 우리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우리도 타인을 외모와 물질과 학별로 판단하고 배척한 인생입니다. 주님 불쌍히 여겨주세요. 주님, 이렇게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 줄 아는 어리석은 인생이라 저의 구원 때문에 수고하는 가족의 상처를 체휼하지 못했습니다. 가족을 배척한 죄를 제가 먼저 회개함으로 저를 배척하는 가족과 이웃을 섬길 수 있는 믿음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우리 수정교회가 말씀의 곳간에서 새것과 옛것이 풍성한 천국공동체가 되어 각자의 고난 가운데 살아낸 삶과 깨달은 말씀이 곳간의 열쇠가 되어 어떤 사건에도 줄 것만 있는 천국 서기관의 삶의 살아가는 성도들이 넘쳐나기를 기도합니다. 이 모든 말씀 예수님 거룩하신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