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드라마에서나 볼까 말까 한 낡은 병원, 원장실이라고 해 봐야 눈 씻고 찾아봐도 새 것이라고는 없다. 어디 하나 번드르르 하게 꾸민 것 없이 담박하고 정갈할 뿐이었다. 평생을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을 위해 살아온 ‘상계동 슈바이처’ 김경희 원장(85세)이 일하고 있는 서울 상계동 은명내과 원장실의 풍경이다. 6대를 이어 온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난 김 원장은 열여섯 살 때 깊은 신앙적 깨달음을 얻은 뒤 평생 이웃을 위해 헌신하며 살 것을 결심했다고 한다.
세브란스 의전 2학년 재학시절부터 답십리의 조선보육원에서 의료봉사를 시작한 그는 지금껏 그 초심을 지키며 살아왔다. 대학 졸업 후부터 만리동에서 영세민들을 위해 무료진료 활동을 했고 1972년부터 답십리, 청계천, 망원동 등 판자촌 골목골목 환자를 찾아다녔다. 1984년부터는 상계동에 터를 잡고 지금껏 ‘은명내과의원’을 꾸려오고 있다. 그가 상계동에 자리를 잡은 까닭도 ‘돈 없고 배경 없는 이웃들’ 때문이었다. 당시 망원동 한강 뚝방에서 무료진료를 하던 김 원장은 정부의 도시계획에 의해 주민들이 강제 철거를 당하자 그들을 따라 상계동으로 왔다. 의료보험 혜택이 없던 시절, 그는 가난한 이웃들에게 천 원짜리 한 장만 받고 진찰, 투약 그리고 주사에 검사까지 해결해 주었다.
“원래 무료로만 하려고 했는데 어려운 사람만 오는 것도 아니고, 무료라서 그런지 안 좋은 약을 쓰는 줄 알고 그냥 버리고 그러더라구. 그러던 차에 주변 약국을 보니까 돈 없는 사람들이 병이 나면 천 원짜리 하나 들고 약을 사 먹더라고요. 차라리 그 돈으로 진찰도 하고, 약도 주고, 주사도 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 그래야 그 사람들 자존심도 지켜 줄 것이고.” 이웃을 생각하는 마음은 의료 봉사로 그치지 않았다. 진료를 받던 환자 중 등록금을 내지 못해 힘들어 하던 학생의 수업료를 대신 내준 것을 계기로 설립한 ‘은명장학회’를 통해 그는 2천여 명이 넘는 학생에게 장학금을 주었다. 그저 장학금만 주고 마는 것이 아니라 무료 독서실을 만들어 손수 생일카드를 보내 주는 다정한 아버지가 되어 주었다.
1996년에는 모교에 53억원 상당의 전 재산을 내 놓았다. 뿐만 아니라 거동이 불편한 무의탁 노인과 장애인의 병원동행이나 심부름, 무료 차량 제공 등의 서비스를 실시해 왔고, 2001년 5월에는 노원구 중계동에 ‘은명마을‘을 설립해 100여 세대 주민의 대부가 되었다. 영세민을 위한 무료 급식, 위로 관광, 생활비 보조 등 그가 이웃을 위해 펼치는 선행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다. 지금도 그는 월 두 차례 직접 무료 진료소로 왕진을 나간다. 김 원장은 힘들게 살던 이들이 행복한 삶을 찾아가는 모습을 볼 때 가장 뿌듯하다고 했다. “경기도 화성에서 온 한 심장병 아이는, 아버지가 알콜중독자라서 이장이 데려 왔어요. 이 아이가 나중에 수술을 해서 다 나으니까 그 아버지가 기분이 좋아서 술을 끊었대요. 그러자 이번엔 부인이 집나간 지 3년 만에 돌아왔지요. 남편이 술 끊고 자식이 병 나으니까 한 가정이 다시 살아난 거지요. 정말 기쁜 일이지요?”
나이 여든다섯, 남들 같으면 여생을 즐기며 일부러 일손을 놓았을 텐데 김 원장은 잠시도 쉴 틈이 없다. 봉사활동에 필요한 재원을 충당하기 위해서는 유일한 수입원인 병원 진료를 그만둘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일만으로도 너무나 바빠 다른 일엔 관심도 없고 취미를 가질 겨를도 없다고 했다. 평생을 그래 왔다. 타인을 위해서 모든 것을 내어 주어면서도 자신에게는 한없이 인색한 김 원장은 40여 년 전에 마련한 왕진가방을 아직까지 쓸 정도로 검소하다. 그렇게 남에게 퍼 주고 나면 남는 게 뭐 있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 것이 어딨어. 난 관리자라고. 이건 죄다 하늘이 나한테 맡겨 놓은 거지, 내가 가질 것들이 아니에요. 관리자가 관리만 잘 하면 됐지, 본디 내 것도 아닌데 욕심 부릴 수가 있나?” 아직 웬만한 젊은이보다 귀도 밝고 잔글씨도 너무 잘 보인다는 김경희 원장은 “내일 죽더라도 이웃을 돌보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유일한 사명”이라고 몇 번을 다짐하듯 말했다.
◑꿈이 자라는 초장◐
| |
첫댓글 우리 사회엔 아직도 훌륭한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