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은 대선을 앞두고 각당마다 예비 후보자들의 경쟁이 치열합니다. 대선 주자들은 유명인들을 줄 세우기도 하고,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유명주자들의 캠프에 들어가 줄서기를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도 참 많았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고, 병든 자를 치유하시고,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면서 죽은 자를 살리기까지 하셨습니다. 백성들은 열광했습니다. 멀지 않는 날에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 올 것으로 믿었습니다.
로마의 식민지로부터 해방되고, 가난과 질병에서 벗어나고, 다윗과 같은 왕이 통치하므로 침략과 전쟁을 당하지 않는 평화로운 나라를 꿈꾸었습니다. 많은 백성들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이적들을 보면서 백성들은 예수님께서 자기의 나라를 선포하고 다윗과 같은 메시야로서 통치하게 될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저희는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 생각했다”(11)고 합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따르기를 얼마나 열정적으로 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예수님이 대권을 잡게 되면 자기에게도 정권의 한 자리를 주시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따라다녔을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서도 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장에 보면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기 직전에도 제자들이 묻습니다. “주께서 이스라엘을 회복하심이 이때이니이까”라고 했습니다(6). 얼마나 끈질긴 인간의 욕망입니까?
예수님은 메시야 왕국,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그릇된 갈망을 가진 자들에게 열 므나 비유의 말씀을 해 주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어떤 귀인이 떠나가면서 종 열을 불러서 은 열 므나를 주며 말했습니다. “내가 올 때까지 장사하라”(13). 그리고 그는 떠나갔습니다. 그런데 떠나간 귀인에 대하여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런데 그 백성이 저를 미워하여 사자를 뒤로 보내어 가로되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 됨을 원치 아니 하나이다 하였더라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돌아와서 은 준 종들의 각각 어떻게 장사한 것을 알고자 하여 저희를 부르니”(14-15)
귀인은 왕이 되어 돌아와서 보고를 받습니다. 첫 번째 사람이 나와서 보고합니다.
“주여, 저는 주께서 주신 한 므나로 열심히 장사해서 열 므나를 남겼습니다”
그러자 왕은 그에게 말했습니다.
“잘하였다. 착한 종아, 네가 아주 작은 일에 충실하였으니 네게 열 도시를 다스리는 권한을 주겠다.”
두 번째 사람이 나와서 말합니다.
“주여 주의 한 므나로 저는 다섯 므나를 만들었습니다.”
이때에 왕은 대답을 하셨습니다.
“잘했다 착한 종이여, 네가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너에게는 다섯 고을을 주마”라고 했습니다.
20절에 보면 또 다른 한 사람이 와서 보고를 합니다.
“주여 보소서 주의 한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수건으로 싸서 이 한 므나를 땅 속에 잘 숨겨 두었다가 고스란히 주인께 바치나이다”
이 종에게 왕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크게 화를 내었습니다.
“이 악한 종아, 내가 네 말로 너를 판단한다. 너는 내가 남의 것이나 빼앗고 심지도 않은 것을 거둬들이는 지독한 사람인 줄로 알았느냐? 그렇다면 왜 내 돈을 은행에 맡기지 않았느냐? 그랬더라면 내가 돌아왔을 때 이자와 원금을 함께 받을 수 있지 않았겠느냐?”
예수님께서 열 므나 비유를 할 때에 이 비유를 듣던 청중들은 아주 쉽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이 비유의 말씀은 30년 전에 있었던 일어났던 역사적인 사건을 떠올리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팔레스틴은 로마의 식민지였습니다. 이 지역을 다스리는 유대의 왕이 되려면 로마황제 카이사르의 허락을 받아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날 때에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던 헤롯대왕이 죽었습니다. 그 후에 헤롯의 아들이었던 아켈라오가 왕위를 계승할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렇게 되려면 카이사르의 허락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로마로 황제의 허락을 받기 위해 떠나갔습니다.
이때에 유대사람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아켈라오는 왕이 될 자격이 없다’라고 반대하면서 봉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대표자 50명을 로마에 보내어 반대운동을 전개했습니다. 그렇지만 아켈라오는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하고서 황제의 허락을 받아내는데 성공하여 팔레스틴에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아켈라오가 돌아와서 제일 먼저 한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자기를 반대했던 사람들을 색출해 내어 처형하고, 자기를 지지했던 사람들에게는 보상을 베풀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역사적인 사례를 익히 아시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가진 백성들에게 열 므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왕이 돌아와서 종들의 보고를 받을 때에 칭찬을 받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책망을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기서 책망을 받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주인으로 부터 받은 바 한 므나를 땅에 묻어두었던 사람입니다. 그는 왜 한 므나를 땅 속에 묻어두었을까요? 왜 다른 사람처럼 이윤을 남기지 못했을까요? 왜 주인으로부터 칭찬이 아니라 책망을 받아야 했을까요?
1. 주인에 대한 잘못된 이해
20-21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또 한 사람이 와서 가로되 주여 보소서 주의 한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수건으로 싸 두었나이다 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
종은 주인에게 무슨 말을 합니까?
“나는 주인을 엄한 사람으로 두려워했습니다. 당신은 심지 않고서도 거두는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주인께서 주신 이 한 므나를 가지고 장사한다고 하다가 자칫 잘못해서 잃어버리면 주인께 받을 책망을 두려워서 저는 이것을 땅 속에 잘 간직했다가 그대로 가지고 왔습니다”
종은 주인에 대해서 중대한 오해입니다. 주인은 자기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종에게 말했습니다.
“악한 종아 내가 네 말로 너를 판단하노니 너는 내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엄한 사람인 줄을 알았느냐”
주인은 종들에게 열 므나를 주면서 장사를 하라고 분명히 했습니다. 분명한 미션을 주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책망 받는 종은 주인의 뜻과는 전혀 다르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인에게 대하여 스스로 곡해를 하고서 한 므나를 수건에 싸서 땅에 묻어두었습니다.
열 므나는 그 당시의 화폐 가치로 노동자의 3달치 월급에 해당된다고 합니다. 그러면 한 므나는 한 주 정도의 수입입니다. 우리의 기본 식으로 하자면 천불이 될까말까 한 돈입니다. 많다면 많은 돈이요, 적다면 적은 돈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운용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의 삶을 돌아보십시다. 우리의 주인이 되신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우리의 한 므나를 생각해 보십시다. 내가 받은 므나는 무엇입니까?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공평하게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은사요, 직분이요, 어떤 역할일 수 있습니다. 이것을 주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운용을 하셨습니까? 주님께서 알고자 하셔서 보고를 받으신다면 여러분은 과연 얼마의 므나를 가지고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제가 서울에서 부목사로 교회를 섬길 때에 담임목사님께서 몸이 불편하여 주일예배 설교 외에는 다른 일은 제가 다했습니다. 그때에 심방을 담임목사님의 사모님과 함께 다녔습니다. 참, 어머니 같으신 분이었습니다.
그 사모님께서 함께 심방을 하면서 이런저런 말씀을 하시면서 종종 저에게 하셨던 말씀 가운데 하나가 “내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에 ‘뭐 하다가 왔니?’라고 하시면 무슨 대답을 할 수 있을까요?”였습니다. 사모님은 늘 이 물음을 가지고서 가정과 교회 그리고 성도들을 섬기시는 것을 옆에서 보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 무엇하다가 왔니?’물으신다면 무슨 대답을 하시겠습니까? “내가 네에게 맡겨던 한 므나로 무엇을 했니?”라고 물을 때에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받은 것을 잘 활용하는 것이 우리의 본분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가지지 않은 것에 연연하고 애 태우며 사는 것은 불충성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편지하면서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고후9:6]고 했습니다.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전 4:2)고 했습니다.
2. 자기희생의 결여
왕으로부터 책망을 받은 종을 보면, 주인이 맡기고 간 므나로 굳이 밖에 나가서 장사를 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장사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한 므나를 가지고 가서 어떤 물건을 구입해서 그것을 시장에 가서 이윤을 붙여서 팔아야 합니다. 책망 받는 하인은 굳이 장사를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마인드였습니다.
“굳이 귀찮게 도매상에 가고, 사람들을 상대하며 장사를 하고… 아휴 귀찮아, 번거러워, 주인도 없는데, 주인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적당하게 내가 좋아하는 일이나 하며 시간을 때우면 되는거야”
종은 수고하는 것이 귀찮습니다. 장사하는 모험이 싫습니다. 그냥 편한대로, 내가 좋은대로 그날 그날을 살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일이나 하면서, 내 있는 것으로 누리며 살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찾아왔던 어떤 부자 청년 관원을 아십니까? 그는 영생을 얻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선생님이여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고상한 질문을 던집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길을 그냥 갔습니다.
이 청년은 세상적으로 보면 어떤 사람에게 어떠한 해로운 일도 행하지 않았습니다. 살인도 안했습니다. 간음도 안했습니다. 손가락질 받을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에게 부족한 것이 있다면 자기의 것을 희생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주님 앞에 설 때에 내가 준 므나로 무엇을 했는지를 대답해야 할 때가 올 것입니다.
3. 주인에 대한 불신앙
하인이 받은 바 므나를 가지고 장사를 하지 않았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14절에 보면 백성들은 귀인이 왕이 되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대표자를 보내어서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 됨을 원치 않습니다”라고 시위하도록 했습니다.
백성들의 마음에는 왕이 될 귀인에 대한 신뢰가 없습니다. 그런 분위기에 편승하여 책망 받은 종은 먼 여행길에 사고를 당해서 돌아오지 않기를 바랬을 것입니다. 왕으로 제발 돌아오지 않기를 소원했을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 “당신은 주인이 돌아올 것 같습니까?”라고 묻는다면 그의 대답은 분명히 ‘예스’는 아닐 것입니다. ‘모르겠는데요’ 아니면 ‘노’일 것입니다. 그렇기에 굳이 받은 므나를 가지고 나가서 장사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만약에 주인이 온다면 안전 빵으로 그냥 숨겨두었다가 원금만 돌려주면 되지 하는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돌아올 주인에 대한 신뢰가 없습니다.
이와 똑같이 여러분에게 질문을 던져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것을 믿습니까?” 예수님께서 만왕의 왕, 만주의 주로 오셔서 우리의 삶을 결산할 날이 있을 것을 믿습니까? 이 믿음이 있다면 오늘 우리의 삶은 달라질 것입니다. 오실 주님을 바라며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고민하며 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전도를 하다보면 “저는 바로 죽기 직전에 믿으렵니다”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을 아는 척하면서 ‘예수님의 십자가 한편 강도처럼 죽기 직전에 회개하고 믿으면 안됩니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참으로 가상해 보입니다.
제가 천국에 가서 꼭 만나보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십자가상에서 회개하고 구원을 받았던 강도입니다. 그에게 하나를 여쭈어 볼랍니다.
“당신이 천국에 오기 전에 세상에서 가장 후회가 되는 일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이 사람이 무엇이라 할 것 같습니까? 내가 세상에서 강도짓을 많이 한 것을 후회한다고 말할까요? 분명히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이 사람에게는 더 큰 후회거리가 있다면 아마도 저에게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마지막 순간에 내가 주님을 불렀더니 나를 구원하신 그 주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감사한지요. 마지막 순간에 그분이 나의 구주이신 것을 알고 내 생명을 부탁했을 때 나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만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고, 그분께 끊임없이 감사와 찬양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런데 형제여, 나에게 후회가 하나 있다면 주님을 섬길 시간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나는 주님 앞에서 자랑할 게 없소. 해놓은 것이 없소. 그분의 은혜로 구원받기는 했지만 아무 것도 내놓을 것이 없단 말이요”
성도 여러분, 그는 분명 구원을 받았지만 주님을 위해서 땀을 흘린 삶의 기록이 없습니다. 나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했다는 보고서 한 장이 그에게는 없습니다. 주님을 위하여 산 삶이 없었고, 봉사가 없었던 것이 십자가 상에서 마지막 순간에 구원받은 강도의 후회라는 사실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서울대학교의 김난도 교수가 쓴 베스트셀러인 “아프니깐 청춘이다”라는 책에 ‘인생시계’이라는 파트가 있습니다.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를 하루 24시간(1440분)에 비유하면서 묻습니다. ‘그대는 지금 몇 시쯤 살고 있는 것 같은가’라고 묻고 있습니다.
사람이 80년을 산다면 1년은 18분, 10년은 3시간쯤 시계바늘이 가는 것으로 이해하고 자기 나이는 몇시쯤 되는지 계산하게 합니다. 20세면 오전 6시, 30세면 오전 9시, 40세면 낮 12시입니다. 50이면 오후 3시 , 60대는 오후 6시에 해당됩니다. 꼭 이 시계대로 우리의 삶이 살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 시간은 알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받은 바 므나를 가지고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주님 앞에 설 때에 칭찬을 받을 수 있는 장사를 하고 있습니까? 지금 어떤 인생 장사를 하고 있습니까?
내가 올 때까지 장사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