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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다해 7월18일 연중 제15주간 목요일
[청주] 내 멍에는 편하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제1독서 : 탈출 3, 13 - 20
† 복음 : 마태 11, 28 - 30
★ 하느님께서 모세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려 하시지만,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오랫동안 파라오 아래서 노예 생활을
한 탓에 하느님을 잊어버렸을 것이라고 염려한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강한 확신으로 그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키실
당신의 계획을 밝히신다(제1독서).
★ 예수님께서 고생하며 지친 사람들을 초대하시며 안식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그러나 짐을 덜어 주시거나 그들 대신
짊어지시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방식으로 짐을 질 수 있게
하심으로써 안식을 주시겠다고 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이 말씀을 ‘예수님께 가기만 하면
내가 짊어지고 있는 짐들이 다 없어지게 된다.’는 식으로
알아들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그러한 뜻으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뒤이어 하신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당신의 멍에를 메라고 하시고, 당신에게서 짐을
지는 법을 배우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짐을 없애 주시겠다는
말씀은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짐을 지고 가기를 원하십니다.
그 대신 그 짐을 어떻게 지고 가야 하는지 가르쳐 주십니다.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는 말씀에서 우리는 그분 삶의
방식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실제로 그분께서는 당신의 짐을
기꺼이 지셨고, 그 안에서 기쁘게 사셨습니다. 이것이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배워야 할 점입니다.
그렇다면 같은 짐이 더 가볍게 느껴지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당신의 짐을 기쁘게 지실 수 있었던
것일까요?
그 비결은 ‘사랑’입니다. 어머니가 자식을 낳을 때 겪는 고통은
고통이기에 앞서 기쁨입니다. 몸으로 느끼는 아픔보다도 막
태어날 아이에 대한 기대와 사랑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고통을 이기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 하느님을 너무나
사랑하시기에 아버지의 뜻에 ‘자발적인 순종’을 하실 수가
있었습니다. 또한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셨기에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의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이셨던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예수님께 배워야 할 점은 진심 어린 사랑입니다.
- 매일 미사 -
◈ [청주] 내 멍에는 편하다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2013년 다해 7월18일 연중 제15주간 목요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
+ 마태오 11,28-30
내 멍에는 편하고
‘하던 일도 멍석 펴 놓으면 안 한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자기가 하던 일을 남이 권하면 오히려 안 한다는 뜻입니다.
무엇이든 자발적으로 하면 신이 나고 힘이 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억지로 하면 똑 같은 일을 하더라도 힘이 들고 능률도
떨어집니다. 따라서 기왕이면 무슨 일이든 스스로 찾아서
했으면 좋겠습니다. 하고 싶은 일이라면 신이 나게 하고,
하고 싶지 않은 일이라도 해야 할 일이라면 기꺼이 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11,28.30)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셨지만 비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고
더군다나 스스로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순명함으로써
우리에게 멍에와 짐을 지는 법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결국
그분의 멍에와 짐은 아버지 하느님의 영광과 당신 백성을
사랑하기 때문에 스스로 짊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육적으로는
고달프고 힘드셨겠지만 사랑의 극진한 표현이었기에 내적인
기쁨으로 충만하셨습니다.
율법학자들은 율법의 규정이라는 괴로운 멍에를 백성들에게
짊어 지게하고 내용보다는 형식에 매여 백성을 힘들게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율법의 의미와 내용을 자발적으로 지키고 또
가르침으로써 편한 멍에와 짐이 되게 하셨습니다. 유다교에는
계명이 상당히 많았는데 248조항이 명령이고 365개 조항은
금령으로 613개 조항의 계명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잡다한 조항의 계명을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의 계명으로
요약하였고 그 두 계명을 불가분의 관계로 결합시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요구하는 것이 더 힘든 요구로 받아들일 수
있을지언정 그 멍에는 인간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핵심은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바로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계명은 힘겹지 않습니다.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모두 세상을 이기기 때문입니다”(요한5,4).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자발적으로 일상을 봉헌하고 끊임없이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은 주님께서 주시는 내적인 기쁨과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결코 무거운 짐이나
멍에가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멍에는 주님과의
깊은 만남 안에서 오는 위로와 평화의 원천입니다. 기쁨을
위한 희생과 봉헌의 기초입니다. 혹 힘들고 지칠 때 주님께서
주시는 멍에와 짐을 귀찮아하는 것은 아닌지 살펴야겠습니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하신 주님을 꼭
붙잡기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이제는 주님과 함께
제가 처음 수영을 배울 때였습니다. 무엇이든 마찬가지겠지만
처음 배우는 수영이 그렇게 쉽지는 않았습니다. 그래도 운동
신경이 발달했다는 소리를 많이 듣는 저였기 때문에 금세
수영을 배울 줄 알았지요. 하지만 생각처럼 되지 않았습니다.
왜 앞으로는 잘 가지 않으면서 자꾸만 물속으로만 가라앉는지
도무지 이유를 몰랐습니다. 남들은 일주일이면 꽤 진도가 잘
나가는데 저는 일주일이 지나도 처음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수영에는 재능이 없나보다.’하면서 딱 한 달만 하고서
포기할 생각을 했지요. 실력이 쑥쑥 향상되는 사람들과
비교하니 부끄러웠거든요. 그런데 어느 날이었습니다. 어느
중년의 자매님이 쉬고 있는 제게 이런 말씀을 하세요.
“아저씨, 제가 아저씨한테 얼마나 고마워하는지 아세요?
실력이 늘지 않아서 포기하려고 했는데, 저만큼이나 실력이
늘지 않으면서도 열심히 나오는 아저씨 모습에 용기를 얻어서
빠지지 않고 나오는 거예요.”
수영을 못하는 것도 다른 사람에게는 희망이 될 수 있더군요.
사실 못하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못하는 것을
나쁜 것처럼 생각해서 쉽게 포기하는 것이 정말로 나쁜
것이지요.
많은 사람들이 어렵고 힘든 순간에 모든 것을 포기하려고만
합니다. 그러나 내가 겪고 있는 그 순간을 지켜보던 어떤
이가 희망을 간직하는 소중한 시간도 될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매 순간을 포기하는 삶이
아니라, 희망을 간직하는 삶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의 삶을 주님께서 함께 하시는 삶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도 주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시지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주님 안에서 위로와 평화를 얻을 수 있으며, 이로써 희망의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에 반해서 혼자서 모든 것을
하려는 사람은 늘 그 순간에만 머무르게 됩니다. 어렵고 힘든
순간에만 집착하게 되고, 고통과 시련의 아픔 속에서 헤어나기가
힘들어집니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 하는 사람은 그 너머에 있는
희망을 보면서 기쁨과 행복의 삶을 살게 됩니다.
이제는 주님과 함께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사실 고통과 시련에 처하면 어렵고 힘들다고 말하지만,
엄밀히 따져보면 그 자체가 힘들었던 것이 아니라 이를
피하려고 했던 내 마음이 더 힘들었던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그때 고통과 시련은 더 커다란 짐으로 내게 다가왔었습니다.
몸이 좋지 않은데도 검사를 받지 않으면 어떨까요?
내 안의 병이 점점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아프고 힘들 때 주님 앞에 나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더 힘들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는 어떻게든 주님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 안에서 진정한 안식을
얻습니다.
우리에게는 인생의 가장 어려운 순간에도 아름다움을 포착하는
능력이 있다. 그 덕에 상처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자신의
추스를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그렉 브레이든).
새벽묵상글 사진에 한번 올려달라고 찍은 사진. 제가 정말로
좋아하는 신부님들입니다.
총소리
사막을 여행하던 두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글쎄 사막
한가운데에서 길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특히 물이 떨어져서
갈증의 고통이 대단했지요. 결국 한 남자가 완전히 탈진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친구가 자신이 물을 찾아오겠다면서 이 자리에서
기다리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사막이라 또 길을 잃을 수 있으니
2시간에 한 번씩 하늘을 향해 총을 쏴 달라고 부탁하지요.
그러면 그 총소리를 듣고 찾아올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혹시 나를 버리고 간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과 함께 점점 불안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을 하면서
2시간에 한 번씩 하늘을 향해 총을 쏘던 이 남자에게 마침내 딱
한 발, 마지막 총알만이 남았습니다. 이 남자는 결국 자신의
머리를 향해서 총을 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친구가 자신을
버렸다고 확신을 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이 고통을 없애기
위해 마지막 한 발을 자기 자신의 머리를 향해 쏜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사막의 모래에 얼굴을 묻고 쓰러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두 개의 물통에 물을 가득 채워 힘겹게 끌고 오는 사람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친구였지요.
누군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성공한 사람은 마지막까지 기다린 사람이다.’
포기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는 우리와 늘 함께 하십니다.
- 인천 교구 성소 국장 조명연 마테오 신부 -
◈ [기타] 연중 제15주간 목요일
2013년 다해 7월18일
함께 일하는 직원은 매주 서울까지 모임을 나갑니다. 본인이
참가하는 생활성가 모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매주 월요일
새벽까지 연습을 하고, 다음날 새벽에 용문으로 옵니다.
일주일에 하루 쉬는 시간을 활용해서 음악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주일 오후에는 서울까지 가는 시간이 3시간 넘게
걸립니다. 그럼에도 힘든 내색 없이 즐겁게 다니고 있습니다.
수련장에서의 일은 직업이기 때문에 힘들어도 참아야 합니다.
다른 모든 사람들도 힘든 가운데 직장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몸은 힘들어도 음악연습을 통해서 마음이 편안해진 직원의
모습을 보면서 사람은 의미와 보람, 가치와 성취를 느낄 때가
행복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저는 용문 수련장의 책임을 맡고 있습니다. 시설물 관리,
직원들과의 만남, 프로그램 개발, 수련장 이용 고객 유치가
저의 주된 일입니다. 그 외에 제가 하는 일들이 몇 가지 더
있습니다. 지금은 방학이라서 여유가 있지만 학기가 시작되면
매주 신학교에 가서 강의를 합니다. 강의 준비, 오며 가는
시간들이 쉽지 않지만 그래도 후배들을 만나는 것은 즐거움입니다.
제가 배운 것들을 함께 나누는 것도 보람입니다.
한 달에 두 번은 명동으로 갑니다. 제가 담당하고 있는 ‘새천년
복음화 사도직 협회’ 가족들을 위한 미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한번은 후원회원을 위한 미사이고, 다른 한번은 기도회를 위한
미사입니다. 용문에서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지 않는데, 열심히
기도하는 사람들을 만나는 명동의 미사는 제게 새로운 충전의
시간입니다.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는 분들을 통해서 저는
힘을 얻습니다. 그렇습니다. 꽃을 담은 종이에서는 꽃향기가
나고, 생선을 담은 종이에서는 생선 비린내가 나기 마련입니다.
복음화 학교의 가족들과 함께 하는 시간에는 기도의 향기,
나눔의 향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이 또한 주님께서 제게 주신
큰 축복입니다.
가끔씩, 동창신부가 있는 호평동 성당으로 미사를 갑니다. 동창
신부가 피정을 가거나, 연수를 가는 경우 제게 미사를 부탁하기
때문입니다. 용문에서 호평동 가는 길은 참 아름답습니다.
한강을 사이에 두고 가기 때문입니다. 호평동 신자분들과 함께
미사를 하면 마치 제가 아직도 본당신부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본당 신부가 아닌데도, 본당신부인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도 주님의 은총입니다.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 기쁨이요 행복은 아닙니다. 아무런
책임이 없는 것이 즐거움은 아닙니다. 수련장에는 늘 줄에
매달려 주는 밥을 먹는 진돗개가 있습니다. 별로 할 일도 없고,
밥을 먹기 위해서 노력을 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그런 진돗개가 행복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예전에 하루 종일
밥 먹고, 설거지 하고, 또 밥을 준비하면서 며칠을 보낸 적이
있습니다. 학교에도 가지 않고, 친구들도 만나지 않고, 해야
할 일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들이 그렇게 즐겁거나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큰 짐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가는 일입니다. 파라오를
설득하는 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평과 원망을 들어주고,
만나는 문제들을 해결하는 일입니다. 그 일들이 모세에게는
커다란 짐이면서 하느님과 함께 하는 영광의 시간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짐을 없애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의
짐에 가치와 의미를 부여해 주십니다. 보람과 성취를 부여해
주십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흘리는 땀은 천국을 향한 디딤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들은 천국으로 오르는 계단이
되는 것입니다.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원]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 [기타] 선과 악은 언제나 내 안에 있습니다.
선택은 나의 몫입니다.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2013년 다해 7월18일 연중 제15주간 목요일 복음묵상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마태오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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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복음과는 상관없는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작년
12월12일에 같은 구절을 묵상해서 올렸기 때문입니다.
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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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7520000.1374061368.&type=3&thea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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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칭(天秤)
10년이 넘은 일로 기억한다. 어느 TV 프로그램에서 본 내용이
떠오른다. 잠시 기억을 토대로 각색을 해본다. 어느 병실에
손발을 제대로 쓸 수 없는 환자 둘이 각각의 침대에 누워있다.
침대 하나는 창가 쪽에 다른 하나는 병실 문 쪽에 놓여져 있다.
두 사람은 열심히 무엇인가를 이야기하고 있다. 창가 쪽에
누워있는 환자가 바깥세상을 또 다른 환자에게 열심히 설명하고
있다.
“아름답게 꽃이 피었어요. 정말 대단해요. 엄마가 유모차를 끌고
오네요. 아아, 정말 다정해 보이는 연인들이 이야기를 주고받네요.
눈이 소복하게 쌓여있어요. 강아지들이 신나게 뛰어 노네요.”
그 이야기를 병실 문 쪽의 환자는 열심히 듣고 있다. 마치
이야기를 통해서 바깥세상을 구경이라도 하듯이 얼굴에는
여러 가지 표정들이 순간순간 지나간다.
이야기를 전해 듣는 환자는 속으로 생각한다.
“저 사람은 참 좋은 사람이야. 저 사람이 없었다면 참 힘들었을
거야.”
두 사람은 닫힌 공간 안에서 둘 도 없는 친구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이다. 갑자기 창가 쪽에 누워있는 환자가
고통스러운 신음소리를 낸다. 그 소리에 문 쪽에 누워있던
환자가 눈을 뜬다. 너무 고통스러워 보이는 소리다. 불편한 손을
움직여 간호데스크에 연결이 되어있는 비상벨 줄을 당기려고
한다. 그런데 웬일인가? 당기려고 하던 손이 이내 머뭇거리고
있다.
“사람의 명줄은 하늘에 달려있는 것이 아닌가? 내가 이 줄을
당긴다고 해서 죽을 사람이 살 것도 아니고 당기지 않는다고
해서 살 사람이 죽을 것도 아니잖아. 혹시 저 사람이 죽을
운명이라면 내가 저 침대를 차지할 수 있고 창문 바깥세상을
모두 차지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아니다. 그럴 수는 없어.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나는 최선을 다해서 저
사람을 살려야 한다. 줄을 당겨야 한다. 아니야. 좀 더 나에게
솔직 하자. 별 일 없을 거야. 아니라도 할 수 없는 일이고.”
날이 밝았다. 물건을 옮기는 듯 한 소리에 병실 문 쪽 침대에
자던 이의 눈이 떠진다. 간호사들과 병원직원들이 무엇인가를
하고 있다. 하얀 시트에 덮인 무엇인가를 이동용 침대에 옮기고
있다. 창가의 환자가 이내 떠나가고 만 것이다.
하얀 시트에 덮인 체 문밖을 나서고 있는 주검을 바라본다.
“역시 갈 사람이었어. 운명인 것을 어쩌겠나?”
무의식적으로 죄의식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한다.
간호사가 비워진 침대 시트를 갈기 위해 들어온다.
“저~ 간호사님, 부탁이 하나 있는데요. 제가 그 침대를
사용하면 안 될까요? 바깥이 구경하고 싶어서요.”
간호사는 상큼하게 대답한다.
“그러세요. 알았습니다. 이 침대로 옮겨드릴게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사람들을 좀 불러와야겠네요.”
드디어 창가의 침대에 누워있다. 자신을 옮겨주고 뒷정리를
해주었던 사람들은 모두 나가고 없다. 텅 빈 병실에 홀로
누워서 천장을 바라본다. 고개를 창가로 돌리는 것이 갑자기
두려워진다. 크게 호흡을 한 번 해보고 고개를 돌려 창가로
향한다.
그런데……. 아무 것도 없었다.
피어있는 꽃들의 노래도, 하늘을 나는 뭉게구름도, 산보를
하며 깔깔대는 연인들도 없었다. 다만, 시커멓게 때로 얼룩진
빛 바랜 회색 담장과 바람에 굴러다니는 음료수 빈 깡통만이
바닥에서 소리를 내고 있었다.
“내가 그렇게도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 이것이었던가!”
거짓말을 한 것이다. 창가에 있었던 그 친구가 거짓말을 한
것이었다. 자신과 비슷한 처지로 희망 없이 누워있는 방안의
동료를 위해 거짓말을 해서라도 희망을 갖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 사실을 깨닫게 된 그이의 마음은 표현 불가능한 감정에
휘말린다. 이야기는 이것으로 끝난다.
물론 꾸며낸 이야기일 것이다. 그래도 여운이 남는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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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지나온 삶을 천칭(天秤) 위에 올려 놓아보자. 분명 창가
쪽의 사람과 병실 문 쪽의 두 사람 중 한 사람의 삶과 비슷한
모양의 삶으로 기울어져 있을 것이다. 희망을 주려 했고, 의미를
만들려 했고, 무엇인가를 줌으로써 스스로의 삶이 풍요로워진다는
것을 알고 지키려 했던 삶에 가까웠던 삶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병실 문 쪽의 사람처럼 늘 무엇인가를 부러워하며,
자신의 삶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 차 세상을 제대로 보지 못한
삶에 가까웠던 삶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진실을 이야기한다면, 우리 안에 두 가지의 삶이 함께
존재한다. 여기에 예외인 사람은 없다. 우리는 늘 자신 안에서
움직이고 있는 선과 악 중 하나를 선택하며 살아야 한다.
그리고 옳다고 여겨지는 창가 쪽의 환자의 삶을 닮으려는
자기싸움이 신앙인의 삶이다.
어쩌면 거짓을 사는 것은 창가 쪽의 사람이나 병실 문 쪽의
사람이나 마찬가지일 수 있다. 거짓을 섞어가며 살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한계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병실 문 쪽의 사람은 적극적으로 지은 죄는 아무 것도 없다.
창가 쪽의 사람의 목을 조른 것도 아니다.
하지만 본인만 아는 살인을 저지른 것이다.
평생 이러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불행한 이들이 많다. 해방될
일이다. 아름답게 살 일이다. 힘들더라도 그렇게 살려고 노력할
일이다. 누군가를 죽이거나 살리는 일은 아주 사소한 마음에서
갈려나감을 의식해야 한다. 선과 악을 재는 삶이라는 천칭 위에
옳음으로 기울어지는 우리이기를 희망한다.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수도회] 초대받은 사람들
2013년 다해 7월18일 연중 제15주간 목요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
마태 11,28-30
초대받은 사람들
지난 몇 십년간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의 경제 성장을 이뤄내 이젠 의식주 문제로 고민하게
되지 않았습니다. 참 고마운 일입니다. 그러나 고도의 압축
성장 이면에 짙게 드리운 그늘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물질만능주의로 인한 폐해가 만만치 않습니다. 부익부빈익빈
현상이 극에 달했습니다. 경제력이 떨어지는 이웃들이 느끼는
소외감이나 박탈감이 하늘을 찌릅니다. 경제력을 상실한
노인들이 감내해야할 남은 세월의 무게가 너무나 커 보입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덜컥 병이라도 걸린 분들의 앞날은 참으로
암담할 뿐입니다.
극도의 고통 속에서 외치던 시편작가의 울부짖음이 남의 말
같지 않습니다. “저를 돌보아 주는 이 아무도 없습니다.”
가족들도 있으나 마나입니다. 오라는 곳도 없습니다. 의지할
곳도 없습니다. 바라볼 대상, 희망할 대상, 기대할 대상도
없습니다.
그러나 천만다행으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갈 곳이
있습니다. 크게 환영하는 곳이 있습니다. 언제든지 의지할
대상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방을 아무리 둘러봐도
마땅히 갈 곳 없는 우리를 향해 예수님께서 활짝 팔을
벌리시고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너무나 다행스럽게도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초대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초대 가운데서도 가장 특별하고
행복한 초대인 예수님으로부터의 초대입니다. 바꾸어 말하며
구원에로의 초대, 하느님 나라에로의 초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향해 이 초대를 좀 더 확장시키라고
당부하십니다. 너무나도 은혜롭고 행복한 이 초대에 우리가
응하는 것도 좋지만, 예수님께서는 보다 많은 사람들이 초대에
응답하기를 간절히 바라십니다.
특히 모진 운명을 타고난 사람들, 기구한 운명을 겪는 사람들,
불치병 환자들, 말못할 고통에 신음하는 사람들, 심한 마음의
상처로 방황하는 사람들, 실패, 실직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 홀로 설수 없는 약한 사람들이 당신께
다가오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다양한 중독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사람들, 무거운
죄에 억눌려 사는 사람들, 악습의 굴레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들, 내면의 평화가 없는 사람들, 결국 우리 모두를
예수님께서는 적극적으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참으로 다양한 무거운 짐들을 이고 지고 힘겹게 걸어가는
우리들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제안하시는 방법은
특별하십니다. 내가 네 짐을 덜어 주겠다가 아니라 또 다른 짐,
즉 멍에를 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멍에는 바로 사랑의 멍에입니다. 온유와 겸손의 멍에입니다.
예수님의 멍에인 사랑의 멍에, 온유와 겸손의 멍에를 맬 때
특별한 현상이 한 가지 생깁니다.
그간 짐이라고 여겨왔던 것들이 더 이상 짐이 아니라 은총으로
변화됩니다. 그간 십자가라고 여겨왔던 것들이 더 이상 십자가가
아니라 사랑의 또 다른 얼굴임을 알게 됩니다.
사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도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초대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백성들의 어깨에 무겁디 무거운
율법조항들을 올려놓았습니다. 안 그래도 힘겹게 살아가는
백성들의 허리는 더욱 휘청거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초대는 그들의 초대와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짐을 덜어 당신 어깨에 올려놓으셨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 율법학자나
바리사이들과는 달리 우리와 함께 나란히 짐을 지고
걸어가십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 관구 부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신부 -
◈ [서울] 주님이 주시는 멍에이기에
2013년 다해 7월18일 연중 제15주간 목요일
힘들더라도 돌아서가는 지혜는 결국 수월하게 다다를 수
있습니다. 자연의 순리를 따르면 손해 보는 것 같고
힘들지만 그게 진수입니다. 그래서 고통스러워 술로
달래기보다 세월이 약이라는 것 인정합시다.
기분이나 생각대로 고통과 싸우다가 더 큰 화를 당할지
모릅니다. 온유하고 겸손히 주님이 주시는 멍에라 생각하며
받아들이는 겁니다. 즉 자연(주님)이 주시는 멍에이기에
순응하며 받으면 가벼워집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마태오 11,29)”
-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광주] 예수님이 주시는 멍에와 짐
“우주가 곧 나의 마음이고 나의 마음이 곧 우주다.”라고 주장한
중국 송나라 시대의 철학자 육구연은 하늘이 부여해 준 ‘본래의
마음本心’을 체득하는 것을 학문의 종지로 삼았다. 그는 우주의
모든 이치가 마음 안에 있고 그러기에 우주가 곧 나의 마음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수많은 사물에 다가가 그 사물 안에
내재한 이치를 파악하는 과정을 축적하다 보면 세계의 모든
이치를 꿰뚫어 보는 활연관통豁然貫通의 체험에 이른다고
주장한 주자의 학설을 육구연은 너무 번잡하다고 비판했다.
그리하여 육구연은 자신이 내세우는 공부는 ‘본래의 마음’만
자각하면 되기에 간단하고 쉬운 공부라고 주장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은 복잡하고 껍데기만 남아 있는
율법규정 대신에 간단하고 쉬운 계명을 제시하신다. 예수님
당시 유다교에는 613개의 율법규정이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많은 율법규정들을 지키려면 얼마나 복잡하고 힘들었겠는가?
오늘 복음에 나오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다름이
아니라 바로 613개 율법규정 아래 시달리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실제로 율법학자들은 이러한 율법규정들을 가지고 민중의 삶을
힘들게 하고 억압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와 유사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율법의
압제 아래 고생하며 힘들어하는 민중에게 예수님은 편한 멍에와
가벼운 짐을 부과하신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편한 멍에와 가벼운
짐이란 곧 예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사랑의 계명(마태 22,34-40)
이나 또는 황금률(7,12)을 가리킨다. 예수께서 강조하신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 또한 만만치 않은 일이다. 하지만 예수께서
나와 함께해 주신다고 한다. 그분께서 나의 도반이 되어주신다고
한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자비하신 하느님 사랑 안에 머물러 보자! 그리고 참 사랑을
배워보자!
- 김권일 신부(광주대교구 월곡동천주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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